138. 챕터23. 정리하다 (6)
허나 혼자 열심히 생각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봐야하는 법.
그는 거두절미하고, 정선공주에게 직격타를 날렸다.
“음... 너도 왕실의 분위기는 알고 있을 터, 용연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
어째 대답은 하지도 않았는데, 답을 알 것 같다.
정선공주는 괜히 민망해서 발을 꼬면서, 얼굴이 살짝 붉어졌으니까.
사실 정선공주는 자신이 연오랑과 혼사를 할 번한 사실을, 몇해가 지나 연오랑을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녀가 연오랑을 처음 봤을 때.
큰 덩치를 보며 한번 놀랐고, 이 사람이 자신의 남편감이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고, 온갖 소문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상적이라서 세 번 놀랐고.
소문으로만 들은 정신 나간 칼솜씨에 어울리지 않게 똑똑해서 네 번 놀랐고, 자신이 하는 일에 크게 동조하며 장려하는 걸 보며 다섯 번 놀랐다.
그녀 입장에선 충격과 더한 충격. 그 자체인 만남이었지.
그러니 당연히 콩깍지가 쓰일 수밖에 없었고, 미래의 남편이 될 지도 모르는 인물에 대해서 열심히 정보를 수집해봤지.
그래서 나온 결론은 세종과 같았다.
이거 생각 외로 괜찮은 남편감 아닌가.
원경왕후가 세상을 떠난 이상, 공주의 혼사는 태종이 쥐고 있는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제대로 된 남편감을 잡아챌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싫진 않은 모양이구나.”
“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쑥스럽게 답을 하자, 세종은 “다행이다.” 싶으면서 뭔가 찹찹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용연군이 이 나라 조선에 큰 획을 그을 인물인 건 분명하지만, 지아비로서도 괜찮은 인물인지는 잘 모르겠구나.”
“...”
“하지만... 그렇다고 어리석거나 패악스런 인물도 아니니, 큰 문제는 없겠지.”
“예. 제가 잘 보필하겠습니다.”
“벌써부터?”
“헤헤.”
세종은 실실 웃는 정선공주를 보며 살짝 타박했고, 공주는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를 가볍게 떨었다.
“원정군이 돌아오면 혼사를 논의하게 될 텐데... 나라에 일이 많아 거창하게 하긴 힘들 거다.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그리고...”
“...?”
“조정신료들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게 자중하고 있겠습니다.”
“...”
‘녀석...’
세종은 괜히 부끄러워하는 정선공주의 대답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실에서 연오랑과의 혼사 이야기가 흐르자, 조정신료들도 은근슬쩍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오랑이 태종의 여식 중에서 누굴 마음에 들어 하는지, 태종과 세종이 누굴 점찍어 놨는지는 꽤나 오랜 시간 비밀로 감춰뒀었다.
원정군이 출정할 때쯤에야 슬그머니 소문이 흘러나왔고, 그 당사자가 정선공주라는 사실에 다들 의아해 했다.
물론 원경왕후의 하나 남은 딸이니 그럴 법도 하지만, 사실 정선공주는 거의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지 않았나.
뜬금없는 소식에, 요사이엔 조정신료들의 시선이 은근슬쩍 정선공주에게 쏠릴 수밖에.
그러니... 정선공주의 행실이 크게 문제 될 건 없지만, 그래도 괜히 꼬투리 잡혀서 피곤해질 이유는 없지 않나.
지금껏 알아서 잘 처신해온 정선공주라면, 혼사 전까지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을 거다.
‘잘하겠지.’
세종은 공주에게 자신감을 가지라는 듯, 히죽 시원한 미소를 지어줬다.
*****
북방으로 밀러든 전운은 어느새 강철비를 쏟아낼, 새카만 먹구름으로 변해 있었다.
봄에 출정한 원정군은 가을이 되어서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거의 반년에 걸친 길고긴 원정이 끝이 난 거지.
북평군은 연오랑의 예상을 반만 맞췄다.
거용관 함락 후 십일이 지나자 북평군 지원군이 등장했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건 평지와 잿더미가 된 거용관.
성벽마저 죄다 뜯어내어 땅에 파묻어버렸으니, 앞으로 관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조선군은 말 그대로 거용관의 모든 걸 뜯어갔다. 오죽했으면 서로가 쏴댄 철환마저 찾아서 주워갔을까. 뜯어갈 수 없는 나머지는 죄다 불태워버렸지.
복수심에 불타는 북평군은 거용관 너머까지 쫓아가, 유유자적 손을 흔들며 떠나는 조선군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평지와 초원이 즐비한 곳에서 기병군단과 싸우는 건 무리 아니냐.
설령 승리한다고 한들 피투성이가 될 텐데, 그땐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 북원잔당이 가만있지 않을 거다.
아직도 북직례를 약탈 중인 북원 만호장을 넘어서, 진짜 알짜배기 북원 잔당이 밀려와 북평을 박살내버릴지도 모르지.
결국 북평군은 거용관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고, 조선군은 마음 편하게 왔던 길을 그대로 밟아가며 되돌아가는 건 물론.
곳곳에 만들어 놓은 주둔지를 박살내고 불태웠다.
하나같이 나름의 요충지이니, 나중에 몽골부락이 써먹을 게 뻔하지 않나. 걔들 좋은 일을 해줄 순 없지.
이 파괴의 행각은 파림좌기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랐다.
이미 옛 명나라 군대가 박살냈던 곳이지만, 조선군은 더욱 악착스러웠다.
파림좌기의 흔적을 아예 지워버리려는 듯, 모든 걸 다 뜯어가고 불태웠고, 보와 수로마저 망가뜨려 농지를 늪지로 만들어버렸다.
이곳 또한 누군가 써먹으려면 수십년은 걸릴 게 될 거다.
그렇게 왔던 흔적을 모조리 지워가며, 원정군은 처음 출발했던 연산관에 도착했다.
“사오 이십. 사육 이십사. 사칠 이십팔.”
“...”
자박자박.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발굽소리에 맞춰, 누군가 가락을 맞춰 흥얼거렸다.
그 꼴이 퍽이나 이상했던 걸까? 옆에서 함께 걷던 이진이 입을 열었다.
“뭐하나?”
“보면 모르나? 구구단 외우고 있지.”
“거. 애들 장난 같은 걸...”
“쯧쯧.”
이진이 피식 웃으며 무시하자, 홍사석은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시세를 알아야 준걸이라 했네. 시세를 알아야지. 시세를.”
“...?”
오히려 홍사석이 그를 비웃어서일까? 함께 뭉쳐 있던 열대여섯의 중대장들이 모두 귀를 쫑긋 새웠다.
계속 말을 타고 걷고만 있어서 심심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뭔가 가슴을 찌르는 말을 내뱉어서 일지도 모르지.
“무슨 말인가?”
“자. 우리를 보게. 생각해 본적 있나? 우린 뭐지? 앞으로 어떻게 될까?”
홍사석은 고삐를 놓고 손을 활짝 펴며, 검갈빛의 곰가죽으로 만든 두정갑을 흔들어댔다.
“이런 거 본 적 있나? 아니면 이런 거 입어볼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임시로 중대장으로 뽑힌 이들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몸으로 겪고 있는 일이지만, 지금 상황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만만치 않았으니까.
“지금껏 조선엔 갑사, 토관, 기선군, 영진군이 있었지만, 진짜 군대라 부를 만한 건 갑사와 토관 아니겠나.”
“그럼.”
“그렇지.”
갑사와 토관은 무과는 아니지만, 나름 시험을 봐서 뽑는 직업군인 아니냐.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 했다.
이들 모두가 갑사니 더욱 그러했고.
“헌데 이젠 착호군이 생겼단 말이지... 그리고 다들 훈련을 받아봐서 알지 않나? 착호군은 결코 만만치 않단 말이지?”
“음...”
“하긴.”
이 또한 몸으로 겪은 일 아닌가.
나름 칼질을 한다고 자부한다는 이들이었지만, 집체훈련과 제대단위 전술훈련은 결코 쉽지 않았다.
냉정히 말해서, 이렇게 제대로 장기간 훈련을 받아본 경험이 적기도 했지.
더불어 이들은 갑사,토관들 중에서도 가려 뽑힌 중대장들 아닌가.
낮에는 말타고 칼질하고, 밤에는 붓을 잡고 씨름을 해야 했다.
착호군 방식은 연오랑이 대마도에서 특전대를 기르던 방식을 업그레이드 한 것이니, 당연히 배울 것도 익혀야 할 것도 훨씬 많았지.
그것도 무관 출신인 이들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온갖 것을 배워야 했다. 당장 홍사석이 중얼거리던 구구단조차, 지금껏 없던 것 아닌가.
“이걸 왜 배워야 하나?”라는 의문이 당연히 들었지만, 빠르게 적진을 읽고 인원파악을 하는 데 필요하다나?
딱히 그게 정답은 아닌 것 같지만, 훈련대 교관들의 몽둥이찜질을 피하려면 열심히 배울 수밖에.
더불어 북진토군北晉討軍이라 명명된 부대 자체가 임시조직이고, 중대장들 또한 정식 품계나 직급도 아니지 않나.
말을 안 들으면 사정없이 잘라버리고 다른 이를 임명하곤 했으니, 다들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몸부림쳐야 했다.
“문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착호군이 했단 말이지. 아쉬워도 너무 아쉬워. 우리가 원정을 갔어야 했는데!”
홍사석이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자, 모두가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착호군은 근본도 없는 임시군대 아닌가.
헌데 그들이 사서에 남을 대업을 이룩하고 되돌아 왔으니, 기존의 무관들이 질투를 하는 건 당연한 일.
북진토군에 끌려온 이들이 불만을 표출하기 보단, 반대로 전의를 끌어올려 열심히 훈련했던 건 이런 이유가 있었다.
자존심이 상한 건 당연하고, 혹시나 자기 자리를 잃어버릴까봐 걱정된 거지.
“그래서?”
“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조정이나 민간에서 어떻게 생각하겠나? 생경하지만 착호군은 어쨌든 엄청난 성과를 거뒀고, 우리 또한 단기간에 성장하지 않았나? 군병을 조련하는데 있어서는 착호군 방식이 지금 방식보다 더 효과가 좋은 거지. 내 확신할 순 없지만... 분명히 변화가 있을 걸세.”
“...”
다들 내심 불안한 마음을 품곤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는데... 홍사석은 냉혹한 현실을 꼬집고 말았다.
“하지만... 쉽게 되진 않을 텐데?”
잠자코 듣고 있던 또 다른 중대장. 김한생은 곰곰이 자신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그 자신도 표피두정갑을 입곤 있다지만, 표범을 직접 때려잡지 않았다면 이런 갑옷을 입을 수나 있었을까?
북원에서 흘러온 전마나, 이 엄청난 무장들. 이걸 조선내지에서 구하려 했으면 과연 감당이나 할 수 있었을까?
또한 시도 때도 없이 퍼먹는 바람에, 북진토군이 소모하는 군량은 가늠할 수도 없다. 의주에서 군량을 실은 수송선이 매일 같이 오가고 있지 않나.
“이 상황이 유지되는 것 자체가 놀라울 지경인데, 여기서 더 바뀔 수 있단 말인가?”
“못할 건 뭔가. 몇해전만 하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멋들어지게 무장할 줄 상상이나 해봤나?”
“...”
홍사석의 자신만만한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상상도 안 해봤다.
이렇게 모든 무장을 교체하는 것도, 한자리에 모두 모여서 오랫동안 훈련하는 것도 말이다.
“세상 변하는 건 한순간이니,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 그러니까!”
“...?”
“훈련대 교관들이 시키는 걸, 열심히 배우는 게 결코 손해는 아니란 말일세. 뭐... 익숙하지도 않은 붓질을 하는 게 고역이지만, 앞으론 글을 모르면 보고서를 쓰는 것도 힘들어 질 거야.”
“...”
“그러니 애들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구구단도 열심히 외우게. 애들 장난도 못하면서 무슨 지휘를 하겠나.”
이진은 괜히 얼굴이 화끈해져서 눈을 부라렸고.
“끄응...”
“하긴...”
다른 몇몇 중대장들도 얼굴이 찌그러졌다.
지휘관이니 당연히 보고해야 했고, 이 생경하고 낯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 자체가 골머리를 앓게 했으니까.
그래도 이들은 갑사다보니 나름 살만한 집안 출신 아닌가. 호구지책으로 지원한 양민 출신은 진짜 죽을 맛이다. 남들보다 두 배는 더 고생해야, 뒤처지지 않고 함께 갈 수 있을 테니까.
문제라면... 아무리 봐도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 같다는 거다.
확신할 순 없지만, 분명 변화가 시작될 거라고 모두가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린 나은 편 아닌가? 치중대로 간 친구이야기를 들어보니, 살이 쪽쪽 빠지고 있다던데?”
“흐흐. 나도 봤네. 전술훈련 빠진다고 좋아하더니, 지금은 잠도 제대로 못자는 것 같던데?”
“하하.”
복잡한 현실을 잊고 싶은 걸까? 다들 뒷담화를 한바탕 풀어놓으며 웃음을 날려댔다.
사실 전투부대원인 이들은 그나마 나은 편 아니냐.
그나마 글줄을 쓸 줄 안다고 군수보급대로 끌려간 이들은, 진짜 서류와 먹물의 바다에 파묻혀 허우적거리고 있으니까.
북진토군이라 명명된 조선군은 여전히 압록강 이북을 들쑤시며 동진하고 있었고, 중대장 이상의 지휘관들만 따로 동팔참을 넘어 연산관으로 향했다.
북정원정군이 되돌아왔으니, 이제 드디어 북진토군도 진짜 목적을 향해 움직일 시간이 됐으니까.
“허...!?”
“과연!”
이진, 홍사석, 김한생 등의 중대장들. 원래 역사에서도 파저강전투와 4군6진개척, 그 후 4군을 지켜낸 장군들.
하지만 지금은 파릇파릇한 신입무관이었고, 이들은 거대한 원정군 주둔지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둘러댔다.
원정군과 함께 온 포로들은 전부 호주로 넘어갔고, 요동에 남아 있던 고려인들도 거의 다 넘어갔다.
그럼에도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복색도, 생김새도 죄다 제각각이라서 “이게 진짜 조선군이 맞나?” 싶을 정도 아닌가.
“저기 보게. 저치들은 북평군 아닌가?”
“그러게. 저거 중국갑옷 아니야?”
“맞을 걸.”
중대장들은 저쪽 한편에서 어눌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음을 들어보니, 이들도 북진토군에 속해서 배운 군가를 부르고 있는 것 같은데... 중국인인 걸 티내듯 어색한 억양이 잔뜩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