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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드 마스터-140화 (140/538)

140. 챕터23. 정리하다 (8)

헌데... 상대는 무려 북원잔당과 북평군과 싸워온 원정군이다.

더불어 지난 삼개월 동안. 특전대가 적진을 싸돌아다니면서, 지형을 조사하고 작전계획을 세워놨지 않나.

제대로 된 갑옷과 무기도 없고, 집단 전술이나 전략도 부족하고, 하나로 제대로 뭉치지도 못한 여진부락이 상대나 될 수 있을까.

특전대가 열심히 고생한 게 무색할 정도였다.

그저 머릿수와 수준 높은 무장을 앞세워, 기병대로 들이치기만 해도 죄다 박살나며 무너져 내렸으니까.

여진 부락은 조선, 요동군의 보복공격을 숫하게 경험했고, 이들은 적이 등장하면 죄다 던져놓고 집기만 챙겨 산으로 숨어들어갔다.

어차피 저들이 이 땅을 정복하고 눌러앉지 않는 걸 알고 있으니, 소나기는 피한다는 심산으로 잠시 몸을 피했다가 적군이 떠나면 되돌아오는 식이었지.

하지만 지금의 조선군은 미친놈처럼 굴고 있었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불태우는 건 예전과 똑같지만, 하나라도 더 잡으려고 사냥꾼으로 빙의해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여진부락의 선택지는 사로잡히거나, 터전을 버리고 완전히 도망가는 것 뿐.

고작 보름도 지나지 않아, 파저강 일대의 여진부락은 전부 지워졌고.

북정원정군은 이만주 일당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우라산성을 포위했고, 반대편인 동쪽에서 진군한 북진토군과 합류했다.

“저기가 바로 우라산성이군요. 과연 소문만큼 난공불락처럼 보입니다. 어르신.”

“...”

연오랑은 연전위와 함께,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언덕을 바라봤다.

괜히 고구려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게 아니고, 괜히 이만주 일파가 여길 근거지로 잡은 게 아니다.

주변의 터가 평야지대만큼 넓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여진족들이 충분히 모여 살만한 곳.

더불어 저 산성 그 자체로서, 이 땅의 가치가 충분하다.

암석산으로 이뤄진 산성은 올라가는 길이 정말 지랄 맞았으니까.

돌을 칼로 푹 쪼개놓은 것 마냥, 사람 서너명이 어깨를 마주하고 서기도 힘들 정도로 좁은 통로가 산성으로 올라가는 유일한 출입구였다.

저긴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일당백이 아니라, 일당천을 감당할 만한 그런 요새이자 성이지.

하지만, 시대가 변하지 않았나. 이젠 성을 무너뜨리는 무기. 화포가 등장한 시대란 말씀.

이만주 일당은 죽을 자리로 제발로 걸어들어간 꼴이다.

공성포와 야전화포가 방열을 준비하고 있고, 포위를 끝마친 조선군은 벌목꾼으로 변해 이 일대를 완전히 무인지대로 만들어 갔다.

“사로잡은 포로가 몇이지?”

“대략 삼천정도 되는 걸로 압니다.”

“계획대로 진행되었으니, 파저강은 물론이고, 태자하 인근에 있던 여진부락도 모두 정리되었습니다.”

“북진토군이 사로잡은 포로도 대략 천명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허면... 이 땅은 한동안은 공백지가 되겠지요? 옛 건주위 소속 여진족을 저곳에 다 밀어 넣었으니까 말입니다.”

연오랑의 말에, 연전위 삼총사가 재깍 말을 이어받았다.

다들 훈련대에 속해서 움직였지만, 이젠 훈련대가 딱히 할 일이 없지 않나.

외국인 포로를 매만져 주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어서, 예전처럼 연오랑의 손발이 되어 함께하고 있었다.

“몇이나 저기로 기어들어갔냐?”

“정확히 추산하긴 힘들지만, 대략 이만호 정도 되는 걸로 추산됩니다.”

“음...”

연오랑은 재깍 머리를 굴려, 저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추산해봤다.

원래 역사보다 훨씬 큰 규모로 진행된 토벌작전이니, 적의 수가 많아진 건 당연한 일. 그래도 이만호라? 꽤 많다.

여진가호가 조선가호와 다르고, 두서없이 도망친 이들이니 또 제각각이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3,4만명은 넘는다는 뜻 아닌가.

물론 이 거대한 땅덩어리에 고작 저 정도밖에 살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지만, 여진족이니까 뭐 그러려니 해야지.

‘흠... 지금까지 끌러온 이들이 대략 십이만 정도. 이번에 또 끌고 가게 되면 십오,육만이라...’

조선의 기세에 다들 눌려 있으니 불상사가 생기진 않겠지만, 저들을 제대로 적응시킬 수 있을지가 문제다.

‘빨리 교육시켜서 조선 내지로 내려 보내고, 삼남에서 이주민을 끌어 올려야 하는 데 말이지.’

연오랑은 팔짱을 낀 손가락을 계속 튕기며, 생각을 이어갔다.

이 시대에는 21세기에 말하는 민족성, 민족이라는 개념이 흐릿했다.

이게 출신이나, 혈통에 근거한 분류이지, 뭐랄까 명확하게 정의되는 정체성은 아직 미숙하달까?

물론 서로가 다름을 인지하고 있으니 없는 건 아니다. 그게 아니고서야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을 서로 구별 짓겠는가.

허나 여진족의 경우는 애매하다.

금나라가 있긴 했지만, 그 맥을 이은 이들은 아무도 없잖아? 만주에 남아 있는 이들은 국가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성하지 못했고, 혈족 혹은 부락이 중심이 되어 유지되어 왔으니까.

저 고리를 깨부수고, 혈족이 아닌 가족단위로만 쪼개놔도, 이들은 쉽게 조선에 동화될 게 분명.

조선인 백명이 사는 마을에, 여진인 한둘 데려다 놓는다고 여진 문화와 정체성을 가지고 살 수나 있겠나.

피곤해서라도 그냥 조선인처럼 사는 게 낫지.

연오랑이 귀화교육당의 신설에 관여해, 새로운 기조로 왜인과 여진인을 끌어들여 확인하자. 이 가설은 맞는 게 증명됐다.

문제라면... 조선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에 맞춰, 여진인을 비롯해 외국인을 밀어 넣는 것.

‘많이 잡아서 십육만정도면... 감당할 만하잖아?’

저들을 잘하지도 못하는 농사일을 시켜서 천민으로 부려먹으면 문제가 터지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니... 어떻게든 굴러가게 만들 수 있을 거다.

“내가 했지만, 참 많이 바꿨단 말이지.”

“...?”

연오랑은 자화자찬의 속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밖으로 튀어나왔고, 다들 무슨 뜻인가 싶어서 얼굴에 물음표를 그렸다.

사실 고작 2년전만 해도, 일만오천정도 되는 왜인포로를 놓고 조선이 시끌시끌하지 않았나.

헌데 지금은 그 몇 배나 되는 포로를 놓고도 “음. 이 정도면 버틸 수 있겠는데?”라고, 하고 있으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지.

‘앞으로도 계속 쑤셔 넣을 테니까... 조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

연오랑은 앞으로도 여진인을 비롯해서 외국인을 계속 끌어올 생각인데, 과연 조선의 정체성. 조선의 민족성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변화될지 사뭇 기대됐다.

원래 역사와는 이미 한참 어긋났고, 과연 그 끝은 어디일까.

“헌데... 조공을 바치겠다고 찾아오는 여진부락 족장들을 어째서 되돌려 보내셨습니까?”

“너희도 고민을 해봤을 텐데, 이유가 뭔 것 같냐?”

“음...”

연오랑이 되묻자, 다들 눈을 맞추며 생각을 정리하는 게 보였다.

조선군이 거용관을 무너뜨렸다는 소식은 날개달린 말처럼 온 사방으로 퍼져갔다.

중국 강남은 물론이고, 몽골, 여진마저 다 알 정도지. 어쩌면 일본영주들조차 소식을 들었을지도 모르고.

아무튼. 사정이 이러니 조선군이 건주위를 쓸어버리는 걸 보며, 저 멀리 있는 해서위 지역의 여진족들마저 고개를 바짝 숙이고 달려왔다.

물론 조선군은 아예 받아주지도 않고 쫓아냈지.

“새로운 대여진정책의 연장선 아니겠습니까? 굳이 저들을 받아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미래를 생각하면, 골칫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동북면 여진족이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오호?’

연오랑은 녀석들의 답을 들으며, 살짝 반달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던 시골촌민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고, 근묵자흑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엮이는 이들이 다들 한가닥하는 이들이고, 조선을 떠나 세상을 보는 눈이 뜨이자, 미래를 보는 시야도 넓어진 것 같다.

“어떤 면에서?”

“신정책이 시행되면서 동북면 여진족들은 기존의 특권을 내려놓고 조선에 완전히 복속되지 않았습니까. 헌데 해서위 지역의 여진부락을 조선땅에 살지 않는다고 해서 인정해주면, 차별당한다고 느끼지 않겠습니까?”

“손찬의 말이 맞습니다. 더불어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언제가 됐든 북방을 조선의 강역으로 만들 건데... 저들을 인정하면 나중에 분란거리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모두 맞는 말이다.”

연오랑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너희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

“이제 앞으로 북변의 토관은 물론이고, 내지의 향리도 정리에 들어갈 거다. 그러니 미래의 향리나 토관이 될 여진부락 족장들을 인정하면, 모순이지 않겠냐.”

“예.”

셋은 자기 생각이 맞아서 기쁜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훗날 조선이 북방까지 진출하면 “아니! 전에는 우리를 인정해 놓고, 왜 갑자기 우리 특권을 다 빼앗아가는 거냐. 그럴 바엔 그냥 싸우겠다!”라고, 나중에 딴소리 하는 여진부락이 분명 튀어나올 거다.

“하오나...”

“...?”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연전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방행정조직을 정비하면서, 지방관리를 더 충원한다는 말씀이시겠지요?”

“어. 맞아.”

“조정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힘들지도 모르지만... 뭐. 못 할 것도 없지.”

“음...”

연오랑의 단호한 답에, 셋은 다시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조선의 관리는 엄밀히 말하면 과거에 합격해, 조정에 입조한 중앙소속관리를 말하는 거다.

지방소속관리인 향리들은 중앙에서 내려온 수령의 명을 받지만,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뽑거나 대를 물려서 이어 내려왔다.

굳이 현대와 비교하면, 국가직과 지방직 공무원이 나눠져 있는 형태지. 이 지방직 공무원은 체계적이고 명확한 시험이 아니라, 세습으로 이어진 경우가 다반사고.

하지만 세종,태종은 이것마저도 국가직으로 전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래야 진정한 중앙집권을 이룩할 수 있으니까.

어쩌면. 이 시대가 품고 있는 중앙집권의 개념을 넘어서서, 근대 유럽의 절대왕정과 유사한 수준을 꿈꾸고 있었다.

“지방향리를 조정관리로 취급하고 시험을 봐서 뽑게 되면...”

“상상도 못할 만큼 관리가 많아지겠군요?”

“그보다 재정이 감당될까요? 아닌가? 어차피 지금 향리도 인리위전人吏位田을 통해 녹봉을 받고 있으니까, 그걸 다시 흡수하면 될지도 모르겠군요.”

“오...! 니들 정말 공부 많이 했구나?”

“헤헤. 어르신 곁에 있다보니, 보고 들은 게 많이 있지 않습니까.”

연전위는 어울리지 않게 아양을 떨었고, 다들 자기가 생각해도 머쓱한지 머리만 긁어댔다.

딱 지금 시대는 향리들에게 적게나마 녹봉을 주고 있었다.

과전의 일종인 인리위전을 줘서, “여기서 나는 소출을 녹봉으로 삼아라.”라는 거지. 물론 이것도 모든 향리한테 다 주는 건 아니고, 품계에 맞춰 분배했다.

더불어 이 시절 향리는 먹고살만한 지방호족들 아닌가. 굳이 이거 없어도, 자기 집안 땅이 어느 정도 있었다.

이걸 싹 다시 회수하면, 얼추 녹봉은 맞출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경기도의 과전도 다 회수된 마당에, 자경무세自耕無稅의 토지를 남겨둘 필요가 없잖아? 삼남에서 양전사업과 이앙법이 전파되면 전부 흡수할 수 있겠지.”

“음...”

“그건 그렇겠네요.”

다들 한성과 경기도에서 벌어진 일을 아는 터라,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애초에 과전이 실시된 이유가 뭔가.

조정이 감당할 수 없어서, 관리 개인에게 수조권을 맡긴 것 아닌가.

허나 이앙법의 전파와 양전사업이 끝났고 임시관리가 대거 충용되면서, 조정의 행정력을 과전에 투사할 수 있게 됐다.

더불어 이앙법을 통해 소출이 배로 증가하자, 과전에서 나오는 수입만으로도 임시관리의 녹봉을 해결했지 않나.

이젠 과전법은 해체된 거나 마찬가지고, 수백년을 뛰어넘어 모든 관리에게 직접 녹봉을 주는 관수관급제로의 진입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향리들을 족치기 시작하면, 조정관리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지.’

연오랑은 일전의 추태를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조정관리들이 이러한 변화를 좋아했을 리가 있나.

과전이라 하지만 자신의 땅처럼 써먹었는데, 이걸 다 빼앗긴 꼴 아닌가. 허나 결과적으로 자신의 손에 들어오는 수입은 같았으니, 뭐라 따지기도 민망했고...

괜히 불씨를 지피려다가,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일하기 싫으면 꺼져!”라는 소리만 듣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더불어 원래 역사에서 문제가 됐던, 퇴직관리가 과전을 소유하는 일도 같이 해결된 상황이다.

지금 조선은 관리가 없어 죽겠는데, 퇴직관리가 웬 말인가.

병에 걸려 골골거리는 상황 아니면 죄다 복귀해서 일하고 있다. 오기 싫다고 버티는 이들은, 괘씸해서라도 그냥 날려버리고 과전을 회수해버렸지.

이 판국에 저 밑에 깔린 향리들이 감히 과전을 소유해?

분명 “쟤들도 우리랑 똑같이 취급합시다!”이러면서, 인리위전을 다 빼앗아 버릴 거다.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면, 지방에 산재해 있는 온갖 위전位田까지 싹 처리할 수 있겠지. 안 그래도 다들 불만을 표시하고 있으니까.’

연오랑은 앞으로 벌어질 평지풍파를 은근히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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