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챕터24. 쉬어가다 (1)
지금 조정의 재정지출은 모든 소출을 하나로 싹 묶어서 긁어온 후, 용처에 맡게 지출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관리 녹봉을 위한 광흥창위전廣興倉位田, 왕실의 공상貢上을 위한 풍저창위전豊儲倉位田, 각 관청에 배정한 각사위전各司位田, 군량으로 쓰인 군자위전등은 물론이고.
역전, 원전, 도승늠급전渡丞廩給田, 진척위전津尺位田, 수부위전水夫位田등.
각 중앙, 지방관청에 땅을 나눠주고, “여기서 나오는 걸로 너희 부서의 재정을 해결해라.”라는 식으로 운용되고 있던 거지.
문제와 불만이 생기기 시작한 건, 의주에서 무역이 시작되고서 부터다.
땅에서 미친 듯이 긁어서 재정을 만들어 내봐야, 의주의 무역으로 충당되는 재정에는 비교조차 할 수 없던 것.
공돈이나 다름없는 무역수입을 뜯어내어, 자기 쪽으로 긁어오길 바랐으나... 이게 쉽게 될 리가 있나.
조정에선 “우리부서에 돈 더 내놔!”이러면서, 맨날 싸워댔다.
이 상황이 변함없이 지속되자, 조정관리들의 생각도 바뀌게 됐다.
자기들이 봐도 지금처럼 따로국밥으로 노는 것보단, 그냥 하나로 싹 묶어서 배분하는 게 더 효율적으로 보였던 거지.
예전에는 이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지만 관리가 계속 늘어나고, 나아가 지방 관리마저 통제할 수 있게 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그런 식으로 재정이 일원화되면... 일대혁신이 일어나겠군요?”
“그래. 아마 한동안 몸살을 앓게 될 거다.”
갑자기 튀어나온 거대한 일거리지옥을 담당할 관리야, 어떻게든 충원해서 해결 한다 쳐도... 정작 위전을 일구던 이들은 어떻게 될까?
저 수많은 땅을 일구던 건 양민도 있지만 대다수가 관노이고, 지금 세종,태종의 의지로 봐선 전부 풀려나 양민으로 속량될 가능성이 높지 않나.
거의 노비대해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엄청난 폭풍이 조선을 강타하게 될 거다.
여기에 기업까지 튀어나와 직업 선택의 폭이 대폭 늘어났으니, 정말 정신없이 돌아가겠지.
“위전도 그렇지만... 어르신 말씀대로 만약 조정에서 지방향리를 대체할 지방관리를 직접 뽑기 시작하면, 그 또한 엄청난 일이 되겠군요?”
“맞다. 아마 북변의 여진족들도 그 여파를 맞게 되겠지. 그래서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거고.”
“음...”
“하긴...”
세 떡대들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썹을 찌푸리며 골머리를 싸매고 생각을 이어나갔다.
관리를 채용하고, 시험을 어떻게 치를지, 등의 세부적인 문제는 넘어가고... 큰 관점에서 보아, 관리가 미친 듯이 많아진다는 게 뭘 의미하겠는가.
그간 조선을 지탱해 왔던 양반관료제라는 체제 자체가 위엄을 잃고 내려온다는 뜻.
지금의 지방향리들은 공역을 대신해 나라의 행정업무를 하는 것과 다름없는데.. 앞으로 똑같이 시험 봐서 뽑기 시작하면, 지금처럼 지방관리의 품계를 조정품계보다 낮게 취급하고 차별할 수 있을까?
머릿수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니, 그랬다간 분명 난리가 날거다.
그렇다면 지방호족이라 할 수 있는 향리들이 이 조치를 반대할까? 그럴 리가 있나.
그들은 예전부터 조정관리가 되고 싶어 했으나, 조정은 이들이 중앙에 진출하지 못하게 조금 치사한 방법으로 그들의 과거시험을 견제해 왔다.
제한이 풀리면, 비록 기존의 향리로서의 특권을 잃어버리더라도 양반관료가 될 생각에 기뻐하겠지.
더불어 지금은 조선중후기마냥 호적과 신분제가 문란해, 양반사대부의 수가 엄청나게 많은 게 아니다.
고작해야 전체 인구의 몇퍼센트도 못될 수준인데, 관리가 늘어나면 양반사대부의 수가 수십배는 불어날 게 분명.
아직 양반관료제가 양반신분제로 변화하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양반관료층이 많아져버리면... 원래 역사에서의 양반신분이라는 특권과 위엄이 생성될 수가 없다.
막말로 개나소나 죄다 관리가 되어 양반이 되는 판국이니, 양반이라고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다니는 건 꼴사납지 않을까.
‘그렇게 양반사대부와 지방호족이 서로 한방씩 주고받으면... 제 살 깎아먹는 꼴이 되어, 둘 다 쪼그라들겠지.’
관노의 대대적인 해방과 양반관료의 확장은, 안 그래도 흔들리고 있는 지금의 신분제에 한번 더 충격을 가하게 될 거다.
“만약 상왕전하와 주상전하의 뜻대로 계획이 진행되면, 북변의 토관들 또한 중앙으로 편입되기 시작할 거다. 그럼 북변의 수많은 여진인 토관과 토병들은 어떻게 되겠냐? 너희 같으면 어떻게 할래?”
연오랑은 살짝 기대감 섞인 눈으로 질문을 던졌고.
“그들을 여진인이라고 차별했다가는... 문제가 커지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여진인 중에서는 이미 중앙군 갑사로 특별 임용된 이들이 꽤 있지 않습니까? 조정관리들도 별말 못할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몇해전부터 조선에 제대로 귀화한 이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테니... 그들을 위무하는 정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셋 모두 이 문제에 대해서 나름 고민을 했는지, 이어지는 물음에 재깍 답을 풀어놨다.
중앙군의 뿌리는 태조의 가별초에 두고 있고, 가별초는 여진,몽골,중국,고려인이 다 섞인 혼성군이지 않나.
당연히 중앙군 12사에는 여러 출신이 다 섞여 있었고, 지금은 그 후손들이 각지에 퍼져서 일가를 이뤘다.
또한 원래 역사에서도 조선은 여진족을 끌어들이기 위해, 친조선파 여진족장의 자제를 조정에 입조시켜 내금위, 겸사복등의 무관으로 특별채용하지 않았나.
지금 역사에선 그 수가 훨씬 많았다. 태종이 갑사의 수를 대폭 확장한 것도 영향을 줬고.
더불어 동북면 여진족이 이탈하지 않고 눌러앉으면서, 자연스레 함경도의 토관으로 임명된 여진인이 적지 않다.
이 모든 이들이 특별채용이 아닌 정식 조정관리로 합류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또한 한바탕 폭풍을 일으키지 않을까?
여진인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인정받았으니 환호를 내지를 텐데, 만약 출신성분으로 구별하고 차별하다가는 함경도 지방이 쪼개져버릴지도 모른다.
“서로 주고받은 셈이니, 대놓고 차별하긴 힘들 거다. 더불어 앞으로 만들어나갈 조선은, 조선땅에 살면 출신성분에 상관없이 조선인이 되는 나라가 아니냐. 굳이 여진이라고 차별하는 건 불필요한 일이지.”
“물론 그렇지만... 쉽게 바뀔지 모르겠습니다.”
연손찬은 말을 하면서도, 못 믿겠다는 듯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녀석은 화척 출신 아니냐. 같은 조선인임에도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아왔으니, 연오랑의 말이 뭔가 뜬구름처럼 들려왔다.
“수십, 수백년을 쌓아온 인식인데,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있나. 허나 조정의 시책이 정해지면 관리나 백성들이나 모두 따라오기 마련이다. 따라오지 않으면 매를 들면 되겠지.”
“예...”
“어려울지도 모르나, 앞으론 여진을 아예 지워버리고, 그 위에 조선을 덮어씌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봐야지. 조선에 복속하면 여진계 조선인이 아니라, 그냥 조선인으로 만들어야지 않겠냐.”
“옛!”
“그렇습니다.”
연오랑도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연손찬의 우려대로, 이게 말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지금은 15세기이니, 조정의 힘으로 찍어 누르면 금방 바뀌지 않을까. 큰 문제없이 정책을 유지할 수만 있으면,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을 거다.
이건 백년, 이백년 후를 내다보며, 조선의 정체성과 특성을 확립하기 위한 계획의 초석이니까.
포위를 끝마치기 무섭게, 화기대는 불의 벼락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여진족이 진짜 제대로 된 포격전을 언제 겪어봤겠나.
화살의 사거리에서 살짝 벗어나 근접거리에서 화포를 쏴대기 시작하니, 여진인들의 동요를 모든 조선군이 느낄 수 있었다.
우라산성 위에서 난장판이 벌어진 게, 두 눈으로 보일 정도니까.
흡사 짐승우리마냥 만들어 놓은 임시수용소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여진포로들도 반응은 매한가지다.
화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비명과 탄성이 터지는 걸로 보아, 적잖게 놀라고 두려운 모습이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조선군 기병도 기가 질릴 지경인데, 여진족 사이에서도 유명한 천혜의 요새가 피를 흘리는 걸 보며... 완전히 겁에 질릴 수밖에.
기를 죽이려고 일부러 저렇게 해뒀는데,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저들이 항복하겠습니까?”
“하겠지. 설마 미쳤다고 버티겠어?”
연오랑은 피식 웃으며 황보인의 물음을 받아 흘렸다.
언제나처럼 뒤처리가 어려운 법.
황보인은 먹물냄새에 파묻혀 서류만 붙잡고 있다가, 오랜만에 뻥뻥 쏴대는 화포를 보며 기분전환을 하고 있었다.
“포로들은? 제대로 겁 먹었나?”
“물론입니다. 따로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다들 온순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옛 건주위 내에서, 생각만큼 이만주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흐음.”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
원래 역사와 사정이 너무 많이 바뀌었으니, 처지가 바뀐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만주가 힘을 키울 수 있었던 건... 어찌됐건 영락제의 후광 덕분이고, 세조때까지 살아남아 끈질기게 조선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았나.
수십년이나 이른 지금 시점에선, 이만주의 위세는 원래 역사보다 미욱할 수밖에.
‘오히려 지금 역사에서도 이름을 알린 걸 보면, 나름 인물이라면 인물인 건가?’
연오랑은 문뜩 이런 생각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요동 사정은?”
“저희가 먼저 뜻을 알렸으니, 아니꼽긴 하겠지만 어쩌겠습니까. 더군다나 그쪽도 사정이 복잡해져서 별다른 탈 없이 넘어갔습니다.”
“하긴...”
황보인의 연오랑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옮겨 담아, 시원하게 웃으며 답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요양파는 상도 공격을 실패하고 병력을 손실했지만, 심양파는 무려 거용관을 함락시키고 다수의 장군급 북평군 포로를 손에 넣었다.
기울어졌던 힘의 균형이 팽팽하게 맞춰졌으니, 한동안 요동은 자기들끼리 다투느라 정신이 없을 거다.
“허면... 얼마나 오래 포위하실 생각이십니까?”
“군량과 화약은 얼마나 남았지?”
“거용관에서 가져온 화약이 있으니 화기대 전체가 사용하면 한달 정도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군량은 대략 보름치 정도 남았는데, 지금 사람을 보내면 의주에서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음...”
그간 북진토군은 압록강을 통해서 보급 받았으니, 그 보급로를 그대로 이용하면 이곳까지 운송하는 게 크게 어렵지 않을 지도 모른다.
물론 엄청난 수의 마차와 보급병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가능은 한 일이지.
“하지만 너무 오래 끄는 것도 좋지 않겠지? 적어도 추수가 시작되기 전에 돌아가는 게 최선일 테니까. 화약도 아깝고.”
“예...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황보인도 나름 후속 계획을 알고 있는 터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원정군이 회군하고 난 뒤에도 할 일이 첩첩산중이니, 여기서 하염없이 머물고 있을 수가 없다. 조정이 준비하는 일과 발을 맞춰야 하니까.
‘여기서 뒤처리를 하고, 한성까지 되돌아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3만에 가까운 인원이 이동하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이건 그냥 움직이는 것 자체가 군사작전이고, 그만큼 오래 걸리기 마련.
“일주일만 버텨보지. 화기대의 목표는 출입로다. 그곳만 노리고 쏴보자고. 그래도 항복하지 않으면 화포를 총동원해서 출입로를 확실히 무너뜨리고 떠난다.”
“알겠습니다.”
조선군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명확해서, 포로들이나 성 위의 여진족이나 모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느긋하지만 끊임없이.
화기대의 3개 포대는 순번을 돌아가며 화포를 쏴댔고, 목표는 항상 우라산성의 출입로였다.
저건 인위적인 성벽이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낸 통짜 암벽 아니냐.
절대 쉽게 부서지지 않지만, 비슷한 곳에 계속 쏴대면 언젠간 부서질 거다.
그렇게 출입로가 막히면? 산성으로 올라간 여진족은 내려오지도 못하고 다 굶어죽는다는 뜻이지.
“어떻게 할래? 거기서 가만히 있다가 굶어 죽을래? 아니면 내려와서 싸우다 죽을래? 그것도 아니면 항복할래?”
이 뜻을 화포를 통해 알리고 있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이 뜻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아마 이만주 일당은 죽을 맛이겠지.
그렇게 삼일 후.
조선군의 끊임없는 불꽃과 재, 회색연기가 섞인 제안에, 결국 여진족이 먼저 손을 들고 말았다.
흰 깃발을 앞세워 수십의 여진인이 산성을 내려왔고, 그들 모두는 아직 마르지도 않은 피가 잔뜩 묻은 옷을 입고 있었다.
사정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저들끼리 한바탕 내분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그들 손에는 조선군이 그토록 바라던 선물이 담겨 있었으니까.
“조선의 대역적. 이만주와 그의 아들. 이고납합, 이타비랄, 나머지 일당의 수급입니다.”
누군지도 모를 여진인 대표로 보이는 이는, 비통함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머리통 수십개를 들이밀며 조선군에게 항복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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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들어진 갓을 쓴 두 청년은,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집안 어른들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음!”
“후하!”
말 네필에 짐이 가득하고, 지게를 진 하인들도 여럿.
차림새를 보아하니 먼 길을 떠나는 것처럼 보이는데, 꽤나 긴장하면서도 신난 표정이었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기회가 왔군.”
“그러게 말일세. 세상 참. 오래 살고 볼일이란 말이지.”
“음... 하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을 걸세.”
청년들은 산통을 깬, 다른 청년을 슬쩍 노려봤다.
나름 관복을 입고 있는 걸로 보아 관리로 보였는데, 셋은 불알친구 아닌가. 관리라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왜 그렇게 보나?”
“이제 우리도 조정에 입조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할 말인가?”
“거참. 내가 그렇게 개고생을 하는 걸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오나?”
괜한 푸대접에 오히려 관복을 입은 이가 게거품을 물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