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챕터24. 쉬어가다 (2)
지난날 꽤 많은 서생들은 생원시, 진사시에 합격하고도 성균관에 자리가 없어, 하릴없이 집에 머물며 조정의 부름만 기다렸다.
허나 이년전부터 상황이 완전히 뒤바꿨다.
신입들뿐만 아니라, 그간 이런저런 이유로 퇴직했던 이들마저도 모조리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니까.
더불어 이는 부름인 동시에 경고였다.
그 시절엔, 이미 착호군이 창설되어 활동할 때 아니냐.
조정에선 “올 거면 오고, 말 거면 말아라.”라고 선택지를 줬지만, 한성으로 오지 않으면 착호군으로 보내버릴 거라는 협박과 다름없었지.
더불어 과전을 받지 않는 임시관리로 임용된다고 했는데, 만약 차별받는다고 생각하고 가지 않으면? 앞으로 관직에 오르는 건 이제 끝 아니냐.
자기 대에만 이게 끝나면 다행이지, 재수 없게 찍혀서 대대손손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집안 말아먹는 꼴.
이게 무슨 선택지냐. 그냥 “좋은 말할 때 와라.”라는 뜻이지.
청년은 그렇게 임시관리가 되었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잘한 결정이었다.
과전을 못 받아서 속이 쓰렸는데, 이젠 대신들마저 과전을 못 받고 녹봉을 따로 받고 있었으니까.
물론 이건 기분이 좋지만... 매일같이 과로에 시달리는 건 정말 죽을 맛이고, 죽을 자리를 알아서 찾아가는 친우들을 보면 속으로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지.
“거. 요새 관리는 예전 관리가 아니라니까? 콩고물이 떨어질 걸 기대한다면 오산일세. 콩고물이 묻지 않도록 잔뜩 조심해야한다고.”
“안다니까. 그러네.”
좋은 말을 해줘도 귓등으로 흘려듣는 친우를 보며, 관리청년는 다시금 답답해서 가슴을 때렸다.
여수구죄법與受俱罪法이 실시된 이후. 관리들의 뒷주머니는 완전히 갈려나가지 않았나.
이건 원래 역사와 달리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여러 이유 중에서 꽤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바로 사헌부의 활동이었다.
지금 조정에서 사헌부는 “해결책은 내지도 않고 불평, 불만, 반대만 늘어놓는 놈들.”이라고 찍혀 있는 상황 아니냐.
이들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찾기 위해서라도 뭔가 해야 했고, 요근래에 그들이 열중하는 게 바로 비리관리의 처단이었다.
이건 복잡한 유학적 명분논리가 필요하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답이 나오는 문제였으니까.
나름 잘나가는 의주목사조차 썩둑썩둑 목이 날아가는 판국에, 자잘한 현감이나 하급관리를 봐줄 리가 있나.
더불어 예전에는 그냥 삭탈관직만 하고 끝났겠지만, 세종이 등극한 이후부터 삭탈관직에는 무조건 재산환수가 따라붙었다.
비리로 축적한 재산을 환수한다는데, 무슨 명분이 더 필요할까.
“집안을 뿌리 채로 뽑아내서, 적몰시키지 않은 걸 다행인줄 알아.”라고 외치며, 부정을 저지른 집안의 땅과 노비를 미친 듯이 뜯어갔으니... 관리들 입장에선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 전혀 다른 거지.
이젠 한번 찍히면, 권토중래를 노릴 기반이 날아가니까.
나아가 이런 뇌물비리는 보통 높은 자리에 위치한, 잘나가는 집안 출신이 저지르는 경우가 많지 않나.
세종 입장에선 그놈들 없어도,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하급관리를 끌어올리면 그만.
오히려 잘나가는 집안을 두들겨 패서, 양반사대부들의 기세를 죽여 놓고, 재산을 적출해 조정재정에 보태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몇 년 되지도 않았지만.
지금 관리와 예전 관리가 천양지차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매일같이 일해서 밤낮이 없어요. 밤낮이.”
“아. 안다니까 그러네. 설령 그렇다 한들, 지금처럼 어중간하게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맞네. 우리라고 뭐 관리가 못될 게 뭔가?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의과에 합격한 경력이 있는 것과 아닌 것엔 분명히 차이가 있는 법이지.”
“암암.”
두 청년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댔고, 이건 관리청년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기업의 공인이 이뤄진 후. 조선은 빠르고 광범위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변화는 다름 아닌 행상들.
그간 보따리장수처럼 이따금씩 마을과 고을을 드나들던 이들이, 이젠 마차와 말을 끌고 떼를 지어 몰려다니기 시작했으니까.
이건 그 어떤 것보다도, 몸으로 체감할 수 있는 변화였지.
행상이 대규모로 움직인다는 건. 조정의 농본주의 정책이 깨졌다는 걸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서, 실제로 행상이 내다팔 물건이 그만큼 많이 생겼다는 걸 뜻하지 않나.
한성과 연줄이 있는 집안은 뭔가 바뀌고 있다는 걸 느꼈고... 누군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인근의 집안 또한 죄다 따라 움직이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
이들의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해서 두 집안은 소문만 무성하던 배봉마을과 접촉해 기업을 설립하려 했고, 선택한 건 다름 아닌 축산기업과 약초기업.
아무래도 이게 익숙하기도 했고... 그들이 보기에 농사일에 필요한 우마와, 아플 때 먹는 약재는 절대 망하지 않을 사업으로 보였으니까.
헌데 문제가 생겼다.
양반이든 향리든 가리지 않고, 축산기업과 약초기업을 만들려면 가문의 직계혈족이 의술과 수의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 아닌가.
어쩌겠나. 목이 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는 법이지.
결국 두 청년은 유학공부를 때려 치고, 의술과 수의술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 이제 이 일도 슬슬 손에 익어,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 일?
조정에서 거창한 별시를 치르는데, 여기에 잡과 인원을 엄청나게 뽑는다고 하지 않나.
“옳다구나!”라고 외치며, 두 청년은 재깍 과거시험을 보기로 했다.
이래나 저래나 조정의 인정을 받으면, 누가 봐도 좋아 보잖아? 천한 의술과 수의술을 배웠다고, 눈을 흘기는 답답한 작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고.
요새 온갖 신학문이 튀어나오면서, 기존 잡과의 학문 또한 대두되고 있지만... 그래도 예전의 인식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으니까.
“별시에 몇 명이나 뽑는다고 했지?”
“원래는 일천정도였는데, 수가 더 늘어서 이천오백정도 될 걸세. 무과는 뽑지도 않고, 문과는 칠백, 잡과가 천팔백쯤 되지.”
“허허...”
“그렇게 많이 뽑아도 될지 모르겠군.”
이건 전례가 없는 걸 넘어서, 아예 상식 밖의 일 아니냐.
합격 가능성이 높아져서 좋긴 해도, 당황스러움은 가시질 않았다.
허나 관리청년은 친우들을 보며 피식 비웃어줬다.
사정 모르는 이들은 저런 태평한 말을 할 수 있어도, 알면 절대 그런 말 못한다.
조정에선 신입관리를 한명이라도 더 받으려고, 삿대질을 멈추지 않고 있다. 오죽했으면 유서 깊은 신입관리 신고식인, 면신례조차 하지 않을까.
괜히 그거 했다가 쪼개진 계열끼리 싸움이 벌어져, 애들싸움이 어른싸움이 되기 십상.
나아가 “더러워서 여기서 일 안해!”라고 청원을 넣으면, 다른 부서에서 “왜 거기서 고생하고 있어? 여기로 와.”라고 꼬드겨 냉큼 데려가기 일 수.
결국 코피를 보는 건, 하급관리가 아니라 윗사람들이었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말게, 조정에서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줄 아나? 호주에선 지금도 사람을 보내달라고 아우성일세.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거기 가면 진짜 일에 치여 죽을 걸? 어쩌면 그렇게 뽑아도 부족할지도 몰라.”
“정말 그렇게나 일이 많나?”
“많네. 아주 많아. 이곳 현청에서 일하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를 걸세. 한성조정은 이것저것 새로운 것이 많으니까.”
“그건 그렇겠지.”
당장 그들조차 기업을 설립하면서 온갖 생경한 학문을 배웠는데, 조선의 중심인 조정이라면 당연히 그렇지 않겠나.
유행은 위에서부터 흘러오기 마련.
조정에서 쓰던 새로운 숫자체계, 표와 도식, 가로쓰기 등은 어느덧 지방관아에도 이식되고 있는 상황이니, 이들이 모르던 온갖 것이 다 있을 거다.
“그나저나 한성에 머물 곳이 있을지나 모르겠군. 우리도 이런데, 다른 이들은 어떻겠나?”
“조선팔도에서 사람이 엄청나게 몰려들 텐데... 정 잘곳이 없으면, 자네 집에서 머물러도 되겠지? 자네가 자랑하지 않았나. 새로운 관사에서 산다고 말일세.”
“끄응...”
관리청년은 자기 발목을 찍은 것 같아, 할 말이 없어서 끙끙 앓았다.
관리가 늘어나면, 당연히 관리가 거주할 집도 늘어나기 마련.
성저십리에는 배봉마을이 짓기 시작한 조선판 원룸이 여럿 지어졌고, 죄다 관리가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 마을이 한둘이 아니니 한성을 둘러싸고 온 사방에 새로운 건물이 가득한 신마을이 건설되고 있었고... 이는 건축연구소에 또 다른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뭐... 가면 구경할 건 많을 걸세. 여긴 없는 특이한 건물이 적지 않으니까. 방이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군. 없으면 민가에 유숙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유숙도 불가능할지도 모르니 이런 말 하는 거 아니겠나. 개선식을 한다고 하지 않나. 개선식을! 과거에 관심이 없어도, 그거 보려고 오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나도 모르는데, 왜 나한테 그러나!?”
관리라고 조정의 모든 걸 다 아는 게 아니고, 청년처럼 하급관리는 아는 거 더 없는데... 뭘 어쩌라는 건가.
관리청년은 괜히 자기가 욕을 먹은 것 같아, 버럭 성질을 냈다.
“흐흐. 농일세. 성질하고는.”
“쯧쯧. 관리가 되더니 성질머리가 더 괴팍해졌어.”
발작하는 관리청년을 보며, 청년들은 더욱 약올려댔다.
지금껏 조선은 제장들을 위무하고,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치르는 출정식 비슷한 건 있었지만. 명확히 제정된 개선식은 없었다.
애초에 그럴만한 큰 싸움도 없었고, 대마도정벌이 있긴 했지만... 그건 후폭풍을 감당하기도 벅차서, 아예 거제도에서 해산하지 않았나.
사람들은 개선식이 어떻게 진행될지 꽤나 기대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개선식을 진짜 하는 걸 보면, 북정원정군이 정말로 소문처럼 거용관을 무너뜨리고 온 게 맞는 거지?”
“거용관이 뭔가. 북방의 건주위 여진마저 다 쓸어버렸다고 하니, 대승도 그런 대승이 없을 걸세.”
“오...”
“하긴 전에 봤던 착호군이 범상치 않긴 했지.”
“아무렴.”
착호군은 청년들이 사는 고을을 지나쳐 갔기에, 정확히 알 순 없어도 착호군이 뭔가 특이하다는 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중국의 지붕인 거용관이 무너진 건 대사건이고, 당연히 조선에도 소문이 파다하게 나서 다들 뭣도 모르고 신나했다.
뭐가 됐든 일단 중국놈들을 한방 먹여준 것 아닌가.
자신에게 피해가 없으니, 신나는 건 신나는 거지.
분위기가 이렇게 무조건적인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간 건, 일반 백성들 사이에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걸 피부로 느낄 수가 없기 때문.
당장 대마도 정벌 때만해도, 군량을 비축한다, 병사들을 모은다 등등. 한바탕 난리가 났었지만... 이번엔 어떤가.
착호군이 다 알아서, 의주의 지원을 받아 해결하지 않았나.
무려 요동과 몽골초원을 뚫고 반년 가까이 원정을 갔다 왔는데도, 조선이 전쟁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오히려 조선내지에선,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는 착호군이 더 관심사항이었지.
사정이 이렇다보니 개선식은 뜬금없는 상황으로 여겨졌고, 오히려 더 궁금해져서 조선 백성들의 온 신경이 집중된 상황이었다.
청년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음을 옮겼고, 마을 어귀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이가 시원하게 손을 흔들었다.
“덥지도 않나?”
“자랑하고 싶은가 보지.”
청년들은 회색빛의 낭피갑옷을 입고 있는 청년을 보며, 피식 미소를 날려줬다.
고향에 와서 하도 자랑을 한 탓에, 귀에서 피가 날 지경 아니냐. 물론 늑대가죽으로 만든 두정갑이니 멋지긴 하다.
“왔나? 어라. 자네는 왜 그렇게 뿔이 났나?”
“원석. 자넨 다시 개고생하러 돌아가는데도 신나는 모양이군?”
관리청년은 슬쩍 눈을 흘기며, 괜히 핀잔을 날렸다.
이 녀석은 근 육개월 만에 가족을 다시 봤는데, 어째 서운하거나 아쉬움도 없는 모양이다.
착호군은 일 년에 한 번씩 휴가를 줬고, 2기가 출범한지 반년이 훌쩍 넘은 터라 당연히 휴가 나온 이들이 적지 않았다.
원석 또한 마찬가지인데... 착호군에 꿀단지라도 남겨 놓은 걸까? 다시 되돌아가는 판국에, 뭐 저렇게 표정이 좋은 건지 모르겠다.
“흐흐. 혹시 아나? 또 잡을 수 있을지?”
사내는 입고 있는 갑옷을 만지작거리며 자랑하듯 으스댔다. 청년들은 지겹다는 듯이, 다시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고.
원석이라 불린 사내는 비록 양반은 아니지만, 네 사람은 동네에서 어릴 적부터 함께 커오지 않았나. 집안끼리도 다 알고 지내는 사이고.
오히려 요샌 은근슬쩍 원석네 집안이 더 잘나가고 있었다.
몇해 전에 사노비를 전부 풀어주고 뭔 장사를 한다고 하니, 다들 기겁하고 말렸는데... 그게 정답인 줄 상상이나 했을까.
소문만 들었던 배봉마을에서 사람이 오더니, 원석집안은 그들과 함께 기업이라는 요상한 걸 시작했다.
집안사람들이 총동원되어 산을 개간해서 버섯농사를 시작했는데, 이게 이렇게나 돈이 될 줄이야?
녀석의 짐말들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게 전부 말린 버섯이니, 저걸 면포나 쌀로 계산하면 창고를 가득 채울 거다.
저렇게 원석네 집안이 성공한 걸 보고서, 두 청년의 집안 또한 기업에 뛰어든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