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챕터24. 쉬어가다 (3)
“과거시험도 보고, 세상 참 많이 좋아졌네? 자네. 의술을 배우기 싫다고 난리 피우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거. 옛날이야기를 왜 꺼내고 있나?”
“크크.”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차림새는 전부 비슷했다.
죄다 지게에 짐을 가득 싣고 있고, 몇몇은 노새나 말을 데리고 왔으니까.
“경원사寺에서도 또 사람들이 가나보군?”
“그런가 본데?”
일행은 냉큼 걸음을 옮겨, 머리가 파르라니 빛나는 이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승.”
“아미타불. 오랜만입니다.”
승려는 미소를 품고서 합장으로 둘의 인사를 받았다.
이 고을은 작은 곳이라서 사찰과 지주가문의 사이가 크게 나쁘지 않았고, 이들은 심지어 유생이면서도 불교도인터라 거부감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사찰을 다녔는데, 유학공부를 했다고 그 기억이 깡그리 바뀔 리가 있나.
더군다나 조정에서 밀어붙이던 억불정책이 멈춘 탓에, 불교에 적대적으로 굴던 사대부집안이 더욱 줄었다.
말 안 듣고 사찰에 가서 깽판을 피웠던 이들이, 죄다 두들겨 맞고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는 소문이 퍼진 후에는 더욱 그러했고.
이게 불교계를 옹호하려고 한 건지, 아니면 까부는 양반사대부 집안의 기강을 잡으려고 한 건지는... 아직도 설왕설래 말이 많았지만 말이다.
“주지승은 아직도 안 돌아왔습니까?”
“예. 소승도 자세히는 모르나, 논의가 길어지는 모양입니다.”
“음...”
“흠...”
청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풍문으로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작년 초에 전국의 사찰에는 광풍이 불어 닥쳤다.
조정에선 사찰의 주지승들을 소집했고, 몇몇 신심 깊은 마을과 고을에선 “승려들을 모아서 다 죽이는 거 아니냐?”라고 오해하고서 난리가 난 곳도 있었지.
하지만 헛소문이었고, 용연현이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곳에 모여서 다들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안부를 묻는 서찰이 이따금씩 날아왔으니까.
거기서 대체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뭔가 세상이 바뀌긴 바뀌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승려들과 대놓고 이야기 했다가는, 관아에서 눈치를 줬으니까.
나아가 이들과 함께 떠날 사람들조차, 경원사에 속해 있던 사원노비들 아닌가.
이미 1기 착호군에 끌려간 사원노비가 있는 터라, 2기 착호군에 다시금 끌려가는 게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었지.
“별 일 없을 겁니다. 용연현엔 효령대군께서 함께 계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셋은 어려서부터 주지승을 봐왔기에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지만, 어째 더 걱정해야할 승려가 셋을 다독여줬다.
“승도 함께 갑니까?”
“저는 사찰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석시주가 인솔하기로 했습니다.”
“음...”
“다행이군요.”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려를 배웅한 후.
저쪽에 홀로 어색하게 서 있는 이를 바라봤다.
“원 박수도 가는 모양이군?”
“소문을 들었으면 가야지. 별 수 있겠나.”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사내는 몇몇 하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이들의 행색은 더욱 볼만했다. 어디 이사라도 가는 모양인지, 짐마의 등 위엔 보따리가 한가득 쌓여 있었으니까.
“조정에서 박수무당을 왜 긁어모았을까? 자네. 아는 거 있나?”
“나도 모르지. 뭐... 승려들을 모았던 것과 비슷한 계획이 있는 것 아니겠나?”
청년관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얼렁뚱땅 답을 했다. 비록 관리지만, 청년관리도 이유는 모르니까.
“용연현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안갈 수도 없겠군?”
“일전에 용연군 대감께서 박수무당의 배를 갈라놨다고 하는데, 까불 수나 있겠어?”
“크크. 하긴.”
이곳은 착호군이 지나간 곳인 만큼, 연오랑의 정신 나간 짓이 소문나는 건 당연한 말씀.
이곳에 살던 박수무당은 감히 입도 빵긋하지 못하고, 없는 척 숨죽여 지냈었다. 그러니 조정의 부름에 군말 없이, 냉큼 짐 싸서 갈 준비를 했지.
더불어 행선지가 용연현인데, 거긴 이미 전국의 승려가 다 모여 있지 않나. 머리가 돌아가는 이들은 박수무당 또한 그곳에 모여서 뭔가 할 거라고 예측했다.
셋은 이리저리 사람들과 인사를 끝마치고선, 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원석을 바라봤다.
“다 왔소?”
“거거. 돌아다니지 마쇼. 인원 파악 좀 하게!”
저 앞에서 사람들을 확인하는 원석의 목소리가 연신 들어왔고, 이윽고 오십에 가까운 인원이 모두 모이자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셋은 냉큼 발을 놀려, 앞장서서 길 안내를 하는 원석에게 달라붙었다.
“자네는 바로 착호군으로 가는 건가? 어떻게 갈 건가?”
“착호군이 원주에 머물고 있지 않나. 청평마을 수참水站에 도착하면, 강을 타고 내려가서 여주를 거쳐 원주로 갈 걸세.”
“그럼 우린 광주에서 찢어지겠군.”
“그래야겠지.”
이 시대엔 당연히 팔당댐과 팔당호도 없으니, 북한강과 남한강은 광주목. 미래의 하남시에서 만나고 쪼개진다.
한성으로 가는 이들은 한강을 타고 서쪽으로 가면 되고, 원주로 가는 이들은 남한강을 타고 내려가는 거지.
“아...! 그때 망설이지 않고 착호군에 들어갔으면, 나도 개선식에 참여할 수 있었을 텐데.”
“정신 나간 소리하지 말게. 전쟁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그래도 남아로 태어나! 사서에 길이 남을 대업에 동참하는 것도 가치 있지 않나.”
원석은 괜히 안타깝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들어갈 착호군이면 그냥 일찍 들어갈 걸, 괜히 늦장부리다가 대대손손 이어 내려갈 가문의 자랑거리를 잃어버렸다.
“그럼 개선식도 구경을 못하겠군?”
“복귀 날에 늦으면 내 복무일수만 곱절로 늘어나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게다가 사원노비도 함께 데려가야 하는데, 나 좋다고 개선식을 구경 갈 수는 없지 않나. 으... 차라리 휴가를 더 늦게 나올 걸.”
아쉬워서 다시금 땅을 치고 후회해 보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다.
이런저런 푸념을 하며 이윽고 청평마을에 도착하자, 북적거림이 눈과 귀를 간지럽혔고.
“오...” “와...” 몇 번 구경을 왔음에도 다시금 놀라서 감탄을 내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촌구석 지방에선 보기 드문, 엄청나게 거대한 고을. 항구도시가 눈에 들어왔으니까.
중앙집권을 위해 힘쓰는 조선은 당연히 역참을 정비했다.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업무가 중앙의 명령을 지방에 빠르게 전달하는 역할이었으니까. 공무서 전달이 최우선 목표지.
여기에 관수물자官需物資를 운송하고, 사신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업무도 하고, 역마驛馬를 준비하고, 이따금씩 죄인 체포까지 했다.
암행어사들이 괜히 역참에서 사람들 모아서 출동하고 그랬던 게 아니지.
더불어 조선은 각 부처에서 알아서 재원을 마련한다고 하지 않았나.
역참도 마찬가지라서 유지비용을 충당할 전답이 따라붙었고, 이걸 경작하고 관리할 사람이 또 따라붙었다.
이렇듯. 역참은 그냥 단순히 건물 몇 채에, 관리들 몇 명만 주둔하는 게 아니라, 역참마을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수참水站은 이런 역참이 강이나 바다에 맞닿아 위치한 경우를 말했지.
청평마을은 가평현 남쪽 북한강 지류에 위치했다.
조선의 조운로는 바닷길만 있는 게 아니고, 내륙의 강을 따라서 이어진 곳이 부지기수.
이곳이 대표적인 곳으로, 춘천의 조창漕倉인 소양강창昭陽江倉에서 강원도의 조세를 한성으로 옮길 때 들리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원래 역사에선 이러한 역참이 변질되고, 역리나 역노비들도 세습되어 이어지자... 조선중후기에 가면 중인계층의 일종인 역리계층이 튀어나오게 된다.
허나. 원래 역사에서의 이러한 흐름은, 지금 역사에선 시작조차 못했다.
연오랑은 미리 예행연습을 하지 않았나.
고령 뉴타운을 건설했던 경험을 그대로 녹여냈고, 착호군이 지나가면서 들린 역참을 죄다 개발하고 개조해 버렸으니... 역참에 딸려 있던 관원과 관노들의 처지도 완전히 뒤집힐 수밖에.
청평마을은 원래도 나름 꽤 큰 나루터였는데, 착호군이 머문 후에는 몇 배로 불어났다.
그 시절 착호군은 병사만 만여명에, 이를 시종하는 인원만 이만에 가까웠다.
이런 엄청난 머릿수가 좁아터진 청평마을에 머물 수나 있을까.
한성과 강원도에서 물산을 옮겨와, 부지런히 착호군을 먹여 살렸지.
그 뿐일까. 착호군은 명칭처럼 가평 인근의 산을 전부 뒤지고 다니면서, 온갖 맹수와 들짐승을 때려잡았다.
그리곤 그 병력이 그대로 일꾼으로 변신해서 산을 개간해, 온갖 것을 다 만들었다.
산을 깎아서 계단식 밭을 만드는 건 기본이고, 목장을 만들고, 과실수를 따로 모아 과수원을 만들고, 가마터를 만들고, 나루터를 정비해 진짜 포구로 만들고, 수로를 정비해 전답까지 정리했다.
이 개발과정이 반복되다보니, 청평마을은 가평,미원,양근현의 사람들이 모이는 가평 최대의 고을이 됐고, 착호군이 떠난 이후에도 그 성세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호.”
빙글빙글 도는 거대한 수차 여러개를 지나쳐, 일행은 대로를 따라 걸으면서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도시 외곽까진 도로가 정비되지 않았지만, 도시로 들어오자 곱게 다져진 자갈도로가 둘을 반겼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자갈 갈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지만, 이 또한 나름 신기하고 재밌게 느껴진다.
“전보다 더 커진 것 같은데?”
“이젠 빈 건물도 몇 채 없어 보이는 군.”
“그러게.”
착호군이 전부 청평마을에 머물진 않았지만, 어찌됐건 무려 태종이 한동안 머물렀던 곳 아닌가.
저 멀리. 마을 중심에 서 있는 새로 지은 큼지막한 누각과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으론 관아 마냥. 객사客舍, 아사衙舍, 훈련청訓鍊廳. 창고로서 사창司倉, 영창營倉, 대동고大同庫, 진휼고賑恤庫, 관청고官廳庫, 군기고軍器庫등이 보이고.
외곽에는 향교鄕校, 산창山城, 북창北倉 등이 배치되어 있으니... 이미 수참 수준을 넘어서 관아라 불러도 무방하지.
그 관용건물 양옆으로 자갈대로를 따라 상가가 위치해 있었는데, 이젠 그 상가도 하나둘씩 주인을 찾아가고 있었다.
“저기가 복광마을의 훈성네 집안이 한다는 자기기업이지?”
“그럴 걸세.”
둘은 벽이 훤하게 뚫려서, 기와처마 밑에 현판만 달려 있는 상가를 가리켰다.
손님은 없어 보이는데, 상가 안쪽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기와들이 줄줄이 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거참... 기와를 저렇게 팔게 될 줄이야.”
“나름 돈이 되니까, 저렇게 번듯하게 상가도 빌리지 않았겠나.”
“음...”
둘은 뭔가 묘한 감정이 들어, 말을 흐렸다.
예전과 달라진 건 분명하지만... 달리 보면 크게 달라진 것도 없다.
이전이라고 기와를 만드는 사람이 없고, 기와를 파는 사람이 없었겠는가.
기와는 가내수공업으로 만들 수가 없는 물건이니, 관아의 관요를 빌려 만들거나 사요를 가진 장인을 통해 만들었지.
알음알음 찾아와서 주문하고 받아가는 방식에서, 저렇게 상가를 임대해 매대 위에 놓고 파는 방식으로 바뀐 거니... 낯설면서도 익숙하달까?
다만 그 주인이 향리집안이라는 건, 확실히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아마 온 고을에서 사람이 모이는 청평마을이니까, 이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기와를 파는 상가를 지나자, 이번엔 자기식기를 파는 상가가 있었고, 그 옆으로 줄줄이 생필품을 파는 상가가 위치했다.
그 반대편에는 이젠 가평 사람들에게도 익숙해진 생선비린내가 밀려와 코를 찔렀다.
서해 앞바다에서 가져온 온갖 절인생선과 생물생선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저것도 돈이 되니까 하는 거겠지?”
“물론일세. 자네도 봐서 알지 않나.”
“음...”
착호군이 등장하자 당연히 인근 백성들은 줄줄이 몰려와 구경했고, 착호군의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물건이 수산물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포구에선 생선비린내가 가시는 날이 없었고, 착호군에게 풀린 생선이 알음알음 가평,미원,양근현으로 퍼져나갔으니까.
이들의 집안에서도 “이게 한성에서 유행한다는 그 절인생선이란 말이지?”라면서 구해서 먹어봤으니까.
의외로 생각보다 맛있어서 놀랐다.
이윽고 포구에 다다르자, 이들처럼 짐을 잔뜩 짊어 맨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조정의 명령은 조선팔도의 모든 곳에 내려왔고, 대부분이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를 외치며 한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들은 미원, 양근에서 온 과거응시생들이 아닐까 싶다.
옷차림으로 보아 유생도 더러 보이지만, 아무리 봐도 유생처럼 안 보이는 이들도 있는 걸로 보아... 잡과 응시생이 아닐까?
저들 중에서도 휴가를 나온 착호군이 있었던 모양인지, 원석은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포구 옆에 줄줄이 늘어서 있는, 창고 겸 관사에 들어가 쉬기를 잠시.
이윽고 웅성거리기 소음이 밀려오더니, 포구가 분주해졌다.
드디어 기다리던 배가 도착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