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챕터24. 쉬어가다 (4)
“오...”
“와.”
청년들뿐만 아니라, 눈인사를 나눴던 다른 이들도 하나같이 감탄을 내질렀다.
십여척의 배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는데, 흔히 봐왔던 나룻배와는 차원이 다르다.
바다에서나 볼법한 중맹선과 대맹선이 강을 거슬러 오고 있고, 역시나 생선비린내가 잔뜩 밀려온다.
대다수가 절인생선을 싣고 있는 게 분명한데... 몇몇 배에는 무장을 한 군졸이 타고 있는 게 아닌가.
허술한 무장을 보아 착호군은 아닌 듯 보이는 게, 아마 기선군이 아닐까 싶다.
“저 배는 뭔데, 저렇게 지키고 있나?”
“소금.”
“아...”
청년관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름 집현전에서 일을 하고 있는 만큼, 저 소금을 놓고 조정이 한바탕 시끄러웠던 걸 몸으로 경험했으니까.
“강원도로 가는 건가?”
“일단 춘천으로 가게 되겠지. 거기서 또 알아서 찢어질 거고.”
“오...! 저기 보게. 또 오는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서쪽에서 온 배를 지나쳐 동쪽에서도 우르르 배가 내려왔다.
북한강을 타고 온 배는 대부분 비어 있었고, 몇몇 배는 ‘가라앉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목재가 잔뜩 적재되어 있었다.
심지어 몇몇은 배 뒤편에 땟목을 연결하고, 그 위에 산더미처럼 목재를 쌓아놓은 경우도 있었다.
“정말 엄청나게 쓸어가는군.”
“아마 저건 서해안까지 가서, 조선기업으로 들어갈 걸세.”
“하긴...”
고슴도치마냥 배 앞뒤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걸로 보아, 딱 봐도 대들보로 삼아도 부족하지 않을 거목자재들이니... 확실히 배를 만들 때 필요한 목재 같아 보였다.
이윽고 빈 함선이 부두에 닿았고, 일행은 혹여나 놓칠까 싶어서 헐레벌떡 배에 올라탔다.
다들 일단 광주에 도착해서 다시금 배를 갈아타야 하니, 두서없이 자리를 잡았지만... 그래도 나름 구분이 지어진 걸까? 과거응시생들만 모여, 배 하나를 가득 채우며 자리 잡았다.
“으... 냄새.”
“퉤퉤. 짜군.”
“소금운반선인가 본데?”
몇몇 사내는 바닥에 흩날려 있는 하얀 가루를 찍어 먹어보고선, 사례가 걸려 기침을 내뱉었다.
“다들 도와주시지요! 지붕을 열겠습니다!”
선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짠냄새에 코가 찌릿하던 모든 이들이 황급히 몸을 놀려 나무판을 치웠다.
이 시기 맹선은 갑판이라는 개념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아서, 무식하게 비유하면 그냥 물에 뜨는 거대한 바구니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위에 갑판 역할을 하는 지붕을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사용했지.
“후...”
“하. 조금 살 것 같군.”
지붕을 전부 떼어내어 상쾌한 강바람이 불어오자, 다들 숨을 크게 내쉬며 코를 벌렁거렸다.
“출발하겠습니다.”
“...”
과거응시생들은 할 말이 없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바라봤고, 이런 반응이 익숙한 선장은 '이들도 마찬가지군.'이라며 속으로 피식 웃고선 선원들을 이끌었다.
지금껏 조선의 배는 거의 전부가 조정소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룻배처럼 작은 경우라면 모를까. 소맹선 정도만 해도 죄다 조운선이나 군선으로 사용됐으니까.
이걸 운용하는 이들은 당연히 관노와 기선군이었지.
헌데 조선, 수산, 염전기업이 우후죽순 생겨나자 문제가 터졌다.
이들은 군선과 다름없는 맹선을 운용하는데, 이걸 어떤 식으로 통제, 관리해야할지 명확한 기준이 정립되지 않은 것.
해서 지금은 과도기로. 선박의 소유권은 개별기업이 가지고 있고, 내륙수로의 운영권과 선박사용권을 조정이 가지고 있는 형태였다.
그래서 기업의 함선을, 이들이 공짜로 사용할 수 있었던 거지.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잠시 침묵이 맴돌았으나, 이내 곧 시장바닥마냥 시끌시끌해졌다.
가는 길에 할 일도 없으니 입이나 놀려야지 않겠나.
비록 모두가 초면이지만, 이들 모두가 끼어들 수 있는 공통주제가 있단 말씀.
다들 과거시험을 놓고 한마디씩 꺼내기 시작했다.
“역시나 책문이 중요할 듯한데... 어떤 시제가 나올지 감을 못 잡겠군. 자네는 어떤가?”
“아무래도 바뀐 대여진정책에 관해서 묻지 않겠나?”
“그보다 더 큰 개념을 물을지도 모르지. 북방정책은 어떤가?”
“에이. 지금 상황에서 그게 가능하겠나? 그보단 내지의 일이 중요하니 착호군 활동은 어떤가?”
“착호군이라면... 기업에 관해서 묻지 않겠나? 요샌 이름도 부르기 어려운 특이한 기업들이 생겨난다고 들었는데 말일세.”
“오히려 삼남지방에서 시행될 양전사업이 주가 되지 않겠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며, 다들 하나가 되어 토의를 이어갔다.
작금의 과거시험이 책문 중심인 걸, 모르는 이가 없지 않나.
책문은 현시점에서 나라의 문제점이나 나아갈 방향을 논하는 논술시험이나 마찬가지니, 딱히 모범답안이나 기출문제의 반복이 없었다.
이 때문에 과거시험은 쉬우면서도 어려워졌다. 이젠 유학서적을 달달 외운다고 합격하는 게 아니니까.
촌구석 지방에 살고 있더라도, 적어도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선 외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뭐라도 적을 것 아닌가.
정보의 교류가 미비한 시대적 상황상. 자세한 사항을 알지 못하더라도 장님 코끼리 코 더듬듯, 대충이라도 뭔가 그럴싸하게 적어내야 했지.
서로가 나름의 경쟁자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열심히 머리를 굴려 생각을 정립했고... 이내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무의미한 공상이라 할지라도,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게 확실히 재밌지 않나.
다들 자신이 과거에 합격해서, 어느 부서로 가면 좋을지 입방아를 찧기 시작.
“호조는 어떨까?”
자고로 돈이 최고 아니냐.
예전엔 이조, 병조에 밀리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호조가 조정에서 가장 세력도 크고 힘도 강력한 곳이었다.
“거긴 새로 배워야 할 게 많고, 만약 호주로 가게 되면 정말 고생할 거라고 들었는데 말이지.”
“맞네. 요즘 호주와 의주에선 재정학이 유행한다고 하던데, 자네들은 읽어봤나?”
“나는 읽어봤네.”
어느 청년이 입을 열자, 다들 반색하며 혹시 서적을 가져왔냐고 들볶았다.
지금 당장 읽어본다고 뭐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나.
“그런 걸 떠나서, 호조에 가면 아마 일거리에 치여 죽지 않을까?”
“하긴...”
누군가 살짝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자, 다들 금세 얼굴이 어두워졌다.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과거응시생들 아니냐. 분위기는 읽을 줄 알아야지.
“특히나... 보게. 북정원정군이 승리하고 돌아오지 않았나. 북방은 앞으로 요동, 올량합 3위, 북원잔당이 각축전을 벌일 텐데, 그쪽과의 무역이 간단하겠나?”
“하긴 북직례가 제대로 한방 얻어맞았으니, 산동과의 관계도 재정립에 들어갈 텐데... 그럼 요동과 조선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여진도 마찬가지일세. 옛 건주위 지역을 정리했다고 하니, 여진부락의 동요도 적지 않을 텐데, 그게 무역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법이지.”
이들은 어설프게 들은 소문을 가지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댔다.
정보가 부족하니 헛짓거리일 수도 있지만, 뭐든 머리에 담아 놓으면, 과거시험에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아? 일단 입을 놀리고 보는 거지.
“이조는 어떨까?”
“음... 거기도 바쁘지 않나? 그래도 나쁘진 않지.”
“요새 호조가 기를 편다고 해도, 역시 이조가 좋지.”
“글쎄... 거긴 호조보다 더 바쁘지 않겠나? 당장 우리처럼 과거를 보러 가는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관원이 너무 늘어나지 않았나. 관리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을 걸세.”
역시나 누군가 비관적인 이야기를 던지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조는 간단히 말해, 조정의 모든 인사를 담당하는 곳 아니냐.
관리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할 일이 늘어나고, 지금은 전쟁통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임시관리와 착호군 소속 행정관리까지 이조에서 담당하지 않나.”
“아... 그걸 잊고 있었군.”
“허. 그럼 정말로 일 지옥이겠군.”
다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예전처럼 단순하면 좋겠지만, 지금은 여러 형태의 관리가 공존하는 터라... 저걸 분류하는 것만으로도 코피를 쏟을 거다.
“그럼 병조는 어떻겠나?”
“음...”
다들 병조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해서 입을 다물었지만, 누군가 자랑하듯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날렸다.
“내 친척이 병조에 있는데...”
“...?”
“병조도 요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하더군. 문과출신에서 무과출신으로 전환되고 있는 모양일세.”
“음.”
조선은 문무과를 따로 뽑지만, 직책은 가리지 않고 둘 다 혼용됐다. 헌데 착호군 출범이후, 병조에선 그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문과출신을 무과로 전환해버리던가, 아니면 아예 무과출신을 끌어오는 등의 번잡한 인사이동이 벌어졌지.
“더군다나 병조판서인 조말생 영감조차 착호군에 끌려갔다가 오지 않았나. 병조 소속 하급관원들 모두 순번을 나눠 착호군에서 훈련받고 왔다고 하더군.”
“허...”
“허헙.”
“자세히는 모르지만, 듣기론 문과출신이 칼질을 익히든가, 아니면 무과출신이 붓질을 익히든가 둘 중 하나는 해야 할 걸로 예상하고 있는데... 자네들 중에서 병법을 익히고, 칼질을 익힌 이가 있나?”
누군가의 물음에 다들 고개를 내저었다.
평생을 붓만 붙들고 살았는데 칼이 웬 말일까. 차라리 활이라면 모를까, 칼은 제대로 잡아 본 적도 없다.
“더 큰 문제라면, 착호군이지.”
“음...”
“그건 그렇지.”
이들은 착호군을 직접 본 이들 아닌가.
착호군은 기존 조선군과 분명히 다르고, 그게 효과가 있음을 증명했다.
앞으로 병조든, 영진군, 기선군이든 하여간 뭔가 변화가 일어날 게 분명했다.
“특히나 중앙군이 이미 변모하고 있지 않나.”
“나도 들었네. 가복네 집안에서 오래 전에 북방으로 갔다고 했지.”
“맞네. 가복네 뿐인가. 공씨 집안에서도 떠났지.”
하번 중인 갑사들은 전국에 퍼져 있었고, 그들이 뜬금없이 소집되어 죄다 북방으로 가지 않았나.
한동안 소식이 없어 뭐하는지도 몰랐는데, 여진족을 박살내고 개선식을 하러 내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튼. 병조에 간다 한들, 아마 다른 부서로 가지 않을까? 내 생각은 그렇네.”
“일 리가 있네.”
“맞는 말이군.”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 다시 주제를 바꿔 물었다.
“허면... 예조는 어떤가?”
“예조라...”
“거긴...”
생각만 해도 다들 골치가 아파서, 말을 제대로 못하고 흐렸다.
운석핵꿀밤 이후로, 조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명분론의 힘이 줄어들고 현실론이 고개를 들고 있지 않나.
사방이 난장판인데... 답도 안 나오는 말싸움은 그만하고, 그냥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이나 찾자는 거지.
예조는 의식, 교육, 외교, 제도를 담당하는 곳이니 만큼, 당연히 운석핵꿀밤의 후폭풍을 정통으로 맞았고... 지금까지도 폭풍의 핵인 곳.
여긴 몸은 그나마 편할지 몰라도, 머리와 마음은 바짝바짝 마르는 살벌한 곳이다. 사실 지금에 이르러선, 몸도 그리 편하지 않고.
“허나. 귀화교육당과 직업교육당은 예조에서 관할하지 않나. 이쪽은 앞으로도 계속 커질 것 같은데 말이지.”
“맞는 말일세. 이번에 잡과관원을 엄청나게 뽑는데, 대부분 예조에 속하게 되지 않겠나.”
“음...”
“게다가 이번엔 의과 인원을 엄청나게 뽑지 않나. 전의감을 비롯한 의과관련 속아문은 예조에 속해 있으니... 분명 뭔가 변화가 있을 걸세.”
“하긴...”
“옳은 말일세.”
“그럼 예조도 나쁘지 않은 건가...”
누군가의 말에 다들 중구난방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놨지만, 딱 떨어지는 해답은 없었다.
분명한 건 예조 또한 큰 변화가 있을 거라는 점?
“그런 식이라면 공조도 마찬가지겠군?”
“맞네. 공조도 바뀌기도 했지만, 양적으로 부쩍 팽창하지 않았나. 공조도 나쁜 선택은 아니지.”
“허나... 공조도 쉽겠는가? 요즘은 뭐라도 내세울 게 있어야, 하급관리라도 되는 판국인데... 공조는 그런 경향이 더 크지 않나.”
“음...”
누군가의 말에 다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기업이 탄생한 후, 가장 변화하고 바뀐 곳을 뽑으라면 역시 공조 아닌가.
거의 모든 기업과 연관이 있으니 이곳의 관리가 된다는 건, 결국 먹고 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민간 기업과의 머리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
예전 관리처럼, 철밥통으로 생활할 수 없는 부서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형조인데...”
“끄응...”
“거기도 정신없지 않나?”
이번에도 말을 흐리며, 다들 골머리를 싸맸다.
형조는 현대의 사법부와 경찰의 역할을 하는 곳인데, 예조와 사헌부와도 밀접한 곳인 만큼 운석핵꿀밤의 여파를 세게 받은 곳이다.
“옛 대명률을 대체할 조선형법을 만드는 일은 여전히 난항이고...”
“거기에 기업이 생겨나면서, 온갖 생경한 문제가 다 튀어나오고 있지 않나. 예조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보통 각오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닐 걸세.”
“그리고... 착호군 소식을 듣지 않았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판군사대가 내세우는 신군율에 대해서, 조정에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음...”
첩첩산중으로 이어지는 골칫거리에 다들 신음을 흘렸다.
조선법은 군법과 민간형법의 구분이 흐릿하니, 만약 착호군의 신군율이 조정에 이식되어 경제육전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 한바탕 폭풍을 불러일으킬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