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45화 (145/538)

145. 챕터24. 쉬어가다 (5)

“그보다 당장 힘든 일은... 아무래도 형조도관刑曹都官 아니겠나?”

“아...! 도관을 잊고 있었군.”

“맞네.”

누군가의 말에 다들 박수를 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형조도관은 세조 때에 장례원으로 개칭되는 곳으로, 노비부적과 송사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이미 태종때부터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고, 세종이 등극하고 나서부턴 노비속량이 엄청나게 늘어나지 않았나.

도관 또한 덩달아 커져서, 형조관원의 과반수를 넘을 정도로 엄청난 인원을 자랑했다.

“아무리 봐도 이러한 추세가 바뀌진 않을 것 같은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말일세.”

“음...”

“그건 그렇지.”

이들은 이미 눈으로, 몸으로 경험하지 않았나.

조정에선 온갖 트집과 명분을 들이밀며 사노비를 뜯어가려고 했고, 관노로 전환시킨 사노비를 또 다시 속량시켜 양민으로 만들고 있었다.

앞으로도 도관의 업무는 늘어나면 늘어났지, 절대 줄어들지 않을 거다.

어쩌면 이 행정낭비를 줄이기 위해서, 노비에 관한 법이 또 다시 간소화되고 변화될지도 모르고.

“이거 그냥 꿈만 꾸는 건데도, 적잖게 머리가 뜨거워지는 군.”

“흠...”

누군가 헛웃음을 내뱉자, 다들 쓴웃음이 전염됐다.

나라가 바쁘고 어지러우니, 가벼운 공상조차도 가볍게 여길 수가 없다.

“아직은 시기상조일 수 있으나... 어쩌면 조정이 완전히 변혁할 수도 있네. 뭐... 지금 당장 그렇게 되긴 힘들진 않겠지만 말일세.”

“...?”

“무슨 뜻인가?”

“그게... 한번 들어보게.”

뜬금없는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시선을 받은 이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전례 없는 과거시험이 이번 한번으로 끝날 것 같진 않은데, 앞으로 한번이라도 더 대규모 임용이 이뤄지면 어떻게 되겠나? 지금의 육조체제로 감당할 수 있겠나?”

“...!?”

모두는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는 말에, 살짝 눈을 치켜떴다.

관리가 계속해서 많아지고, 육조사이에서 힘의 불균형이 심해지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겠는가.

나아가 육조 내에서도 하위부서에 속하는 속아문이 상위부서보다 인원이 많아져 힘의 균형이 역전되면 어떻게 될까. 지금처럼 앞으로도 육조 내에서 관할영역을 구분하기 어려운 사안이 계속 등장하면?

조선은 물론이고, 고려 때부터 유지되어 왔던 육조체제가 대변혁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허나! 육조가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접근할 문제가 아니지.”

“음...”

“흐음...”

누군가는 심각한 표정을, 누군가는 살짝 들뜬 표정을 지으며, 뭐랄까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지난날. 동아시아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황제국은 당나라였고, 모든 나라가 당나라 밑에 모여 제후국을 자처했다.

당연히 당나라의 선진문물은 모든 나라로 퍼져갔고, 당의 정치체제였던 삼성육부제 또한 이식됐다. 오죽했으면 바다 건너의 일본조차 당나라를 본받으려 애를 썼을까.

고려도 마찬가지이나 감히 황제국을 똑같이 모방할 수 없어서, 귀족주의적인 체제를 섞어 삼성육부제의 변형을 만들어냈고.

시간이 흘러 명이 등장하자, 제후국으로서 열화판인 조선의 육조체제가 자리 잡게 된다.

이렇듯, 육조체제에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중화사상과 사대주의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

“헌데 명분 싸움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에 가로막혀 육조체제가 한계에 부딪치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가.”

“...”

조정에서 힘을 잃어버린 근본유학자들, 안 그래도 지방에서 힘겹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ver4.0계열의 유학자들은 다시금 짓밟히게 될 거다.

누가 강력하게 주장하지도 않았는데도, 시대와 변화에 휩쓸려 육조체제를 버리고 새로운 정치체제로 넘어간다는 건.

“중국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겠다!”라는 자주화의 재선언이자, 제후국의 굴레를 한번 더 벗게 될 강력한 명분이 될 테니까.

“앞길이 불투명해서 내 팔자를 걱정해야 하지만, 한편으론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지 참으로 흥미진진하군. 안 그런가?”

누군가 피식 웃으며 자조 섞인 말을 내뱉자, 다들 대꾸는 하지 않았어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아닐세. 우린 그야말로 변혁의 시대에 살고 있고, 과거를 준비하는 우리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첨병 아니겠나? 나는 걱정보다 기대가 되는군!”

이번엔 누군가 자신만만한 기대를 늘어놓자, 이번에도 역시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마음이 갈대마냥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로 봐선, 다들 정말 고민이 많은 모양새다.

가평에서 출발한 이들은 유유히 배를 타고 내려가, 착호군이 머물렀던 분원마을에 다다랐다.

이곳은 미래엔 팔당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되는 지역이지만, 지금은 한강과 경안천이 만나는 비옥한 삼각주 지역이라서 농사로 유명한 곳이었다.

“오... 저건 뭔가?”

“뭐가 말인가.”

누군가 입을 열자, 모두는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피다가 강변에 성벽처럼 늘어져 있는 흙더미를 바라봤다.

반대편엔 모래사장이 넓게 깔려 있는데, 그 반대편은 흡사 성벽마냥 흙더미가 곱게 이어졌고 나무와 이름 모를 잡풀로 수북하게 뒤덮여 있었다.

얼핏 흘겨보면, 꼭 작은 동산이 길게 늘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다.

“홍수만 오면 범람하던 곳 아닌가. 그걸 방지하려고 만든 수벽일세.”

“오...”

다들 이런 건 처음 보는 터라, 감탄이 절로 나왔다.

수벽을 한참 지나자 한강으로 들어서자, 수군진으로 사용되던 포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착호군이 수만명을 끌고 다닌다고 한들, 모든 마을과 포구를 신도시로 만들 수 없는 노릇.

요충지와 핵심지역만 집어서 개발할 수밖에 없으니, 사람들에게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더불어 왕래가 많은 곳을 개발함으로서 일반 백성들을 보다 빠르게 적응시키려는 의도도 있었고.

아무튼. 이곳 분원마을은 고려 때부터 이미 도자기로 유명했던 곳 아닌가.

원래 역사에서는 조정의 관요 중에서도 손꼽히던 곳인 만큼, 당연히 온갖 자기기업이 만들어져서 상가의 대부분은 자기기업이 차지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쪽 한편에선 인부들이 짚으로 꽁꽁 싸맨 도자기들을 배에 옮겨 싣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든 자기상품이 뱃길을 타고 무려 의주까지 가고 있으니... 앞으로도 얼마나 더 번성하게 될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가평을 비롯해 인근의 모든 현에서 몰려온 과거응시생들과 착호군으로 떠나는 이들은 둘로 갈라졌고, 한성으로 가는 이들은 다시 배에 올라타 강에 몸을 실었다.

헌데 이들 눈에는 비슷한 광경이 계속해서 목격됐다.

강줄기가 굽이칠 때마다 한쪽은 모래사장이, 반대편엔 흙더미가 잔뜩 솟아 있었던 것.

“허... 여기도 수벽을 만들고 있는 건가?”

과거응시생 사이에서 유일하게 관복을 입고 있는 탓일까?

모두의 눈은 가평마을에서 온 청년관리에게 향했다. 혹시나 뭐라도 아나 싶어서 물어본 것.

“한강이 범람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지 않나? 하류에서부터 보와 수벽을 만들면 답도 없으니, 상류에서부터 차근차근 만들고 있다고 들었네.”

“음...”

“허... 인력이 충분한가? 노역으로 충당할 작업이 아닐 것 같은데?”

“내 담당업무가 아니라서 확신할 순 없지만, 한 번에 다하는 게 아닐세. 당장 급하진 않으니까.”

청년관리는 집현전을 오가며 들었던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줬다.

한강의 범람은 조선후기까지 줄곧 한성을 괴롭혔던 문제고, 수량이 불어나는 하류에선 실시조차하기 힘들지 않나.

상류라 할 수 있는 미래의 하남시, 구리시 인근부터 야금야금 보와 수벽을 쌓아서 물줄기를 정리할 계획이었다.

다만 범람을 막는 건 좋은데, 당장 이거 한다고 해서 쌀이 나오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러니 모든 인력은 일단은 삼남의 양전사업에 투입하고, 한성 인근의 인력만 이용해서 야금야금 진행 중이다.

“한성의 빈민은 아직도 많고, 성저십리와 경기도엔 건설기업이 여럿 만들어지지 않았나. 그 인력을 이용해 만들고 있는 중이지.”

“음...”

“추수가 끝나게 되면, 아마 성저십리의 백성들도 동원될 걸세.”

“노역을 대신하는 건가?”

“맞네.”

건설기업에 근무하는 백성들은 여전히 노역과 공역의 의무가 있다.

다만 조정이 주도해서 부리는 게 아니라, 하도급 마냥 건설기업이 시행하고 조정의 노역을 대신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보수를 따로 주는 건가?”

“주긴 하지만 많이는 못 주네. 건설기업은 국방세를 대신해서 수벽을 쌓고 있는 거니 말일세.”

“허허...”

기업은 국방세라는 근본도 없는 세금을 자발적으로 내고 있었지만, 지금와선 자발적이지도 않았다. 기업의 공인이 이뤄지면서, 국방세를 거부하면 기업설립의 허가가 안 나니까.

다만 조정에 직접 세금을 내는 게 아니라 여전히 사회간접자본으로 투입하는 형태였고, 경기도 인근의 건설기업은 수벽을 쌓는 걸로 국방세를 대신했다.

관리들은 이들이 일을 잘하는지 감시하고, 나아가 수벽건설의 청사진을 만들어 지도했지.

“하지만 건설기업도 돈을 벌어야 유지될 것 아닌가? 수벽만 쌓는다고 돈을 벌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한성과 경기도에 얼마나 많은 양반, 호족집안이 있는지 모르나? 그들 가옥을 신가옥으로 바꾸고, 마을의 진입로를 자갈도로로 만들고, 산을 대신 개간해 주는 걸로 먹고 살고 있네.”

“오호?”

“사실 건설기업은 원래 그러려고 만든 것 아닌가. 수벽을 만드는 건, 어디까지나 세금을 대신할 보조적인 작업이지. 노역일수를 초과하는 부분에 대해선, 조정에서 약간의 보수를 주는 걸로 알고 있네.”

“허허. 이것 참... 엮여 있는 문제가 한두개가 아니군?”

“꽤나 복잡하네. 그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거지. 여유가 생기면 이 또한 바뀌게 될 걸세.”

청년관리의 대답에 살짝 씁쓸한 맛이 느껴지자, 모두의 눈이 상념으로 가득 찼다.

노역, 국방세, 기업, 조정의 하도급. 이건 어찌 보면 이해가 상충되는 제도였고, 지금은 초창기니 어떻게든 굴리고 있지만... 나중에는 변화가 일어날 게 분명.

다들 관리가 되면 앞으로 저런 일을 자기가 하게 될 텐데... 과연 자신이 잘 할 수 있을지, 이런 변화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떠올려 봤다.

일행은 설명을 들으면서 계속 남하했고, 이따금씩 특이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벽들 중간 중간에, 살짝 움푹 파인 곳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니까.

“저건 뭔가?”

“수로 일걸세. 수벽 뒤엔 작지만 저수지가 있으니까.”

“오... 그렇군? 어차피 범람이 심상치 않게 일어나는 곳이니, 물길을 틀어서 하류로 향하는 수량을 줄이려는 건가?”

“더불어 이앙법엔 물이 많이 필요하니, 농수를 저장할 수도 있겠군?”

“수벽을 쌓기 위한 흙은 농지에서 퍼왔을 테고...”

다들 과거응시생이라서 그런지, 하나를 말하면 둘을 알아듣고 이런저런 말을 내뱉었다.

저수지를 만들든, 이앙법을 위한 수전을 만들든, 어쨌든 엄청난 양의 흙을 파낼 수밖에 없는 노릇.

바위를 올려 쌓은 축대 위에, 그렇게 남은 흙을 사용해서 수벽을 쌓아 올렸다.

더불어 한성과 경기도 일대의 늪지, 갈대밭, 습지 또한 죄다 개간되는 중이다. 어차피 작업과정은 엇비슷하니까.

습지를 파내고, 밖에서 가져온 흙을 왕창 쑤셔 넣어 섞고, 물이 빠질 수 있게 미리미리 농수로를 만들어 놨으니... 한두해만 지나면, 못쓰던 땅이 전부 비옥한 농지로 변하게 될 거다.

“하루이틀 사이에 될 일이 아니겠군?”

“치수 아닌가. 치수. 물을 다스리는 일이니, 아무리 농한기에 백성들을 끌어 모아 노역한다고 해도 앞으로 얼마나 오래 걸릴지 기약할 수 없지.”

“허허...”

한강이 보통 큰 강이냐. 상습적인 범람지역부터 치수사업을 진행한다고 해도, 다 끝내려면 수십년은 걸릴지도 모를 대사업이지.

“허나 만약 치수사업이 성공만 한다면...?”

“앞으로 한강 남쪽은 전부 옥토로 변하게 될 걸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차근차근 하다보면 되지 않겠나.”

청년관리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성에 가까워질수록 수벽은 드물어졌고, 대신해서 황금빛 들녘이 모두의 눈을 사로잡았다.

“과연... 과전을 전부 정리했다고는 들었는데, 정말이군!”

한성에 드나들었던 이들조차 놀라서 흥분했는데, 바뀐 성저십리를 처음 본 이들은 어떻겠는가.

산으로 막힌 지평선 끝까지 누렇게 깔려 있는 전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이앙법이 정말 효과가 있긴 있군.”

“더 말할 필요가 있나.”

누군가의 말에 또 다른 누군가가 피식 웃음 섞인 말을 내뱉었다.

작은 농지에서 이앙법을 시행했을 때는 사실 별 차이가 없어서 그냥 그러려니 했었다.

헌데 이렇게 대규모로 네모반듯하게 농지정리를 해놓은 땅을 보고나니... 혹시나 했던 불안감이 완전히 깨져나갔다.

“과전만으로 엄청나게 불어난 관리의 녹봉을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은 햇살에 눈 녹듯이 사그라졌다.

성저십리에 위치한 포구에 도착하자, 일행들 모두 사람의 파도에 휩쓸렸다. 과거응시생만 수천명인데, 따라온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이 사람들이 다 한성에 들어가서 머물 수 있을지,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불안감과 기대감을 품고, 곱게 깔린 자갈도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길 한참.

누런 들녘 너머로 특이한 광경이 다시금 목격됐다.

저기 벌판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각과 사찰을 닮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

누가 봐도 새로 지은 건물처럼 보였고, 그 옆에는 길고 높은 석탑이 위치해 있었다.

다만... 궁궐에나 있어야할 건축물이, 왜 이런 허허벌판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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