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챕터24. 쉬어가다 (7)
조선 역사에서 처음으로 하는 행사이니만큼 당연히 이리쿵, 저리쿵 부딪치며 꾸역꾸역 진행되는 게 당연하지 않나.
허나 미숙하든, 미욱하든 무슨 상관일까.
큰 피해 없이 연전연승을 하며 조선의 위엄을 떨치고 왔으니, 그저 신나서 한바탕 놀면 그만 아니냐.
백성이든, 군병이든 행사가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없었다.
심지어 조정신료들조차도, 행사가 꼬이는 것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대충 넘어갈 정도였다.
이들은 군병들에게 먹일 잔칫상을 준비하는 일과, 너무 많이 몰려든 백성들을 통제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졌으니까.
자신들을 보러 몰려온 백성들에게 자랑하며 늠름하게 행진을 끝마친 이들은, 숙영지에 도착하기 무섭게 거창한 잔치에 빠져들었다.
오늘만큼은 크게 사고치지 않는 이상, 군기가 풀어져도 이해해 줘야 하지 않겠나.
다들 그간 고생을 지우려는 듯 연신 술을 퍼먹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댔다.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차마 임시 군진으로 들어가진 못했지만, 제각각 흩어 모여서 개선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연신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따로 모인 대대장급 이상의 무관들 또한 술자리가 시작됐다.
다른 점이라면 이들은 조정백관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연신 무용담을 늘어놨다는 점이지.
그것도 저기 최상단에는 세종과 태종, 그 밑에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 연오랑과 삼정승을 앞에 두고서 말이다.
“음...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
“무엇 말인가?”
“용연군 대감 말일세.”
조정대신들과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모인 이순몽과 최윤덕.
둘은 저 앞에 태종과 세종, 삼정승과 함께 앉아 있는 연오랑을 바라봤다.
오늘만큼은 예를 잊어버리고 다들 편하게 모여서 노는 자리이지만, 그래도 저 사이에 연오랑이 껴 있는 게 꽤나 어색했다.
물론 연오랑의 그간 공적으로 보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수염도 제대로 나지 않은 녀석이 최고 대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니... 뭔가 기분이 묘할 수밖에.
특히나 대마도에서 처음 봤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는 둘은, 더욱 그런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직 공훈이 확정된 건 아니지만, 이번 원정을 통해서 용연군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지겠군.”
“당연한 말 아니겠나. 착호군을 키워낸 장본인이니...”
둘은 몸으로 경험해봤기에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우려, 혹은 걱정이 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앞으로 어찌될 것 같나? 내년이면 용연군도 이제 나이가 차는데, 조정에 입조할 것 같나? 다들 골치 아파지겠군. 흐흐.”
내년이면 연오랑이 음서를 통해 조정에 입조할 나이가 된다.
물론 무과든, 문과든 시험을 봐서 합격해야 하지만... 그가 지금껏 세운 공훈이 얼마인데, 시험이 필요나 할까?
문제라면 연오랑은 이미 더 올라갈 자리도 없는 정1품 용연군의 작호를 받았고,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공훈을 세우지 않았나.
만약 입조하면, 어느 관직에 올려야 할지 골치가 아플 거다.
“글쎄... 내가 보기엔 아닐 것 같은데...”
허나 이순몽은 자신에게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를 퍼붓던 연오랑을 떠올리며,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연오랑의 특이한 성격으로 보아 조정에 있다가는 온갖 풍파를 일으킬 게 뻔한데, 과연 조정에 입조할까?
“용연군의 성격을 알지 않나. 서로 피곤해지지 않겠나?”
“그렇다고 놔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이순몽과 최윤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술이 얼큰하게 취해 얼굴이 붉어진 황보인이 냉큼 끼어들었다.
셋은 원정을 떠나기 전부터도 안면이 있었고, 원정기간 동안 사선을 넘나들며 함께하지 않았나.
조정신료인 걸 넘어서, 서로 허물없이 대할 정도로 친밀해졌지.
“용연군 대감 말일세. 자네는 특히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지? 대감이 조정에 입조하겠나?”
“헹.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순몽은 비밀을 털어놓으라는 듯 은근히 캐물었지만, 어째 황보인은 코웃음을 치며 목청을 높였다.
“뭐 들은 거라도 있나?”
“대감은 조정에 관심도 없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네. 아마 착호군을 계속 이끌 걸?”
“그런가?”
“호오...?”
“내 확신할 수 있네. 그런 걱정은 하질 말게나.”
황보인은 가슴을 쿵쿵 치며 호언장담을 늘어놨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는 누구보다도 연오랑과 오래 지내왔고, 더불어 연오랑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연씨 삼총사와도 나름 친해졌다.
당연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본 바. 연오랑은 진심으로 조정의 관직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럼 소문은? 왕실과 혼례를 하긴 하는 건 맞나?”
“나도 궁금하군. 정말로 정선공주님이 맞나?”
둘이 냉큼 입을 놀리자, 황보인은 놀리듯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대로 정선공주님과 하게 될 걸세. 대감께서 딱히 말을 많이 하시진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으니까.”
“흐음...”
“음. 부마라...”
셋 뿐만이 아니라, 은근슬쩍 셋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던 다른 연대장들 모두. 상석에 앉아 있는 연오랑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용연군 연오랑. 장난삼아 사세사공이라 자화자찬하는 명문가의 후손.
스스로의 힘으로 정1품 작호를 따낸 입지적인 인물. 온갖 평지풍파를 일으키며 조선을 뒤흔들어 놓은 인물.
작금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을 뽑으라면, 당연히 연오랑이지.
문제 아닌 문제라면... 일반 백성들이야 “오...!” 감탄하며 안주거리로 씹어댔지만, 조정신료들의 입장은 조금 미묘했다.
대신들과 중견, 초급 관리들 사이에서도 평이 갈렸으니까.
만약 연오랑이 조정에 입조하게 되면, 모두가 그의 밑에 깔릴 수밖에 없다. 흔히 말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는 거지.
헌데 연오랑은 내년이 지나도 이제 고작 약관이다.
앞으로 살날은 창창한데, 어지간히 큰 과오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떨어질 일이 없지 않나?
지금도 성체 호랑이인데 십년, 이십년, 삼십년. 시간이 지나 경력과 경륜이 쌓이면, 거의 산신 수준으로 변하게 되지 않을까.
이 부분이 조정신료들을 강하게 압박해 왔다.
어차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신들이야, 연오랑이 입조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하지만 이제 막 관직에 적응해 위로 올라가려는 이들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연오랑 밑에 깔려서, 절대 그를 넘어설 수가 없는 거지.
이래서 연오랑을 우러러보며 존경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티를 내진 않더라도 내심 질시하고 깎아내리려는 이들 또한 존재했다.
그런데 상황이 묘해졌다.
연오랑이 왕실과 엮여 부마가 되게 생겼으니까.
“...”
셋은 말하기 위험스러운 대화를 감히 꺼내지 못하고, 조용히 눈빛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전하와 상왕전하께서도 용연군을 견제하는 건가?’
‘상왕전하라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지금껏 용연군의 행실을 보아하면...?’
외척들 다 썰어버린 태종을 생각하면, 당연히 연오랑을 견제할 마음을 품고 있을 거다.
문제라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연오랑을 건드는 것보다, 그냥 놔두는 게 태종과 세종에게 이득이라는 것.
토사구팽도 때가 있는 법 아니냐.
왕권강화와 중앙집권, 조선개혁이라는 이 사냥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지 않나. 최고의 칼을 자신의 손으로 치워버리는 건 어리석은 선택.
이순몽과 최윤덕마저 이런 생각을 하는데, 태종과 세종이 못할 리가 없다.
‘그래서 선택한 패가 부마가 아닐까?’
‘혼기를 놓친 정선공주님의 짝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나 남은 공주인데 아무렇게나 혼사를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이미 혼기를 놓쳐버린 공주를 계속 궁에만 둘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서로 관심을 표하고 있으니... 연오랑과 맺어지는 건, 왕실입장에서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다.
“허면 혼례는 언제 하게 되는 건지... 들은 게 있나?”
“거창하게 하진 않는다고 했네. 용연군 성격을 알지 않나? 번거로운 예식을 좋아할 리가 없지.”
어지간한 예법을 다 깨부수고 자기 멋대로 구는 연오랑이니, 충분히 그럴 법도 하지만... 자기 혼사마저도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공주자가인데, 그래도 되나?”
“조정이나 왕실에선 안 그래도 바쁜데, 굳이 일을 키울 생각도 없는 것 같고... 정선공주님이지 않나.”
“음...”
정선공주의 처지야 다들 알고 있고, 까놓고 말해서 정선공주의 성격도 만만치 않게 독특하지 않나. 이렇게 가볍게 넘어가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부마라...’
‘흐음.’
둘은 눈빛을 마주하며, 복잡한 속내를 삼켰다.
지방수령까지 전부 소집된 거대한 행사니, 왕실 인원이 참석한 건 당연한 말. 태종의 자식들은 물론이고, 태조의 자식들 또한 모두 한자리에 모여 술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다만 유독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는 상자리가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충분히 그럴 만 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태종의 사촌인 학천군 이징, 영천군 이담, 태종의 서자인 공녕군 이인, 정종의 장남. 의평군 이원생이었으니까.
나름 왕실 인척의 기둥격인 인물들이랄까?
“용연군과 엮인다라... 용연군...”
“...”
학천군 이징은 이담의 형이었는데, 그는 조정에서 일을 하느라 연오랑과 직접적으로 부딪친 적이 없었다. 이리저리 들은 이야기는 많지만,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었지.
“네가 보기엔 어떠하냐?”
“글쎄요... 나쁘진 않을 겁니다. 용연군이 다재다능한 건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닙니까. 조정에 입조하면 분명 자리를 차지하고 남을 인물이니, 왕실과 함께 가는 게 나쁠 건 없지요.”
“음...”
북진토군을 이끌면서 이담은 연오랑과 자주 얼굴을 맞댔고, 특히나 생경한 판군사대를 운영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눠 본 바... 녀석이 소문처럼 독특하면서도 똑똑한 건 바로 알아차렸다.
“조카도 오랫동안 용연군을 봐왔을 터, 어찌 생각하느냐?”
“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용연군의 성품이 자유분방하나 물의를 일으킬 성격이 아니고, 패악질을 부릴 성격도 아닙니다. 적어도 왕실에 문젯거리를 던져주진 않을 겁니다.”
“흐음.”
이인은 이징의 물음에 냉큼 답을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착호군에서 함께 굴렀는데, 더 말할 필요가 있나.
어린 나이에 무려 태종의 오른팔이 되었는데도, 개인사에 관해 잡음이 일지 않는 것만 봐도 자기절제력이 강하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
“제가 보기엔 대체 무얼 위해서 저렇게 열과 성을 다해 움직이는 건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이인은 집안 어른들에게, 속시원하게 속마음을 풀어냈다.
따지고 보면 연오랑은 왕실인척도 아니고, 조정신료도 아니다. 그런데 대체 무얼 위해서 조선을 시끌시끌하게 만들면서, 이런저런 일을 벌이는 걸까?
그것도 미친놈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기존의 상식과 체계를 무너뜨리고 있지 않나.
이인은 솔직히 그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했다.
“뭐... 속을 알 순 없지만, 그의 충정이 왕실을 향하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
“그건 그렇지.”
“...”
모두는 잠시 침묵에 잠겨 생각을 더듬었고, 이내 이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가 어찌됐건... 용연군을 밖에 놔둘 수는 없는 노릇.”
“...”
꽤나 무게 있는 말에, 나이도 경륜도 어린 이인과 이원생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함부로 입을 놀릴 사안이 아니니까.
사실 왕실도 조정신료들과 같은 고민에 빠졌다.
용연군은 분명 조정에 큰 기둥이 될 인물인데, 이 녀석을 그냥 놔두는 게 과연 왕실에 이득일까?
물론 지금까지 해온 바를 보면, 의심할 까닭이 없지만... 세상만사가 자기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고,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태종과 세종이 버티고 있으니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훗날 연오랑이 권신이 되어 조정을 쥐락펴락하게 될지 어찌 아나.
그런 녀석이 또 다른 권세가와 결탁하여 세력을 키우는 건, 왕실 입장에선 큰 부담이지.
설령 연오랑이 그런 마음이 없다고 해도, 뒷말이 나오고 시기질투로 인한 이간질, 무고가 시작되면... 서로 골치 아파질게 분명하다.
“남에게 줄 수도 없고, 가만 놔둘 수도 없으면, 결국 손에 넣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나쁘긴 커녕, 오히려 이득 아니겠습니까.”
“음...”
이원생은 흡사 연오랑을 대변하듯 말을 던졌고, 이징과 이담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젊은 신료들 사이에선 당연히 연오랑이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고, 이른바 운석핵꿀밤 세대에게는 뭐랄까... 시대의 아이콘이라고 해야할까?
구체제를 변화시켜 새시대를 향해 호쾌하게 나아가는 연오랑을 보면서, 가슴이 뛰지 않는 이들이 없다.
물론 이걸 아니꼽게 보고, 변화를 두려워하고 반대하는 이들이 없진 않지만... 뭐 어쩌겠나.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인데 말이다.
‘하지만 부마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될 일은 아니다.’
이징은 새벽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