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챕터24. 쉬어가다 (8)
연오랑은 조정에 세력이 없으니, 태종이 당장 경계하고 정리할 일은 없다.
허나 세월이 흘러 녀석이 덩치를 불리면? 세종이 홀로 나라를 경락할 때쯤 되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그렇다 한들, 다른 마음을 품는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이징은 끔찍한 상상을 하고서도, 그게 의미가 없는 걸 알고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연오랑이 해온 일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왕실 인사들 아닌가.
혹시나 녀석이 검은 속내를 숨기고, 권신을 꿈꾸며 세력기반을 만들고 있다 한들... 녀석이 하는 짓을 통해 왕실의 권위와 위세가 몇 배는 커진다.
녀석이 1을 얻는 동안, 왕실은 10을 얻는 격이지.
자신이 얻는 게 더 많아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는 건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정작 자기 손으로 자신의 대적을 키워주는 꼴 아니냐.
똑똑한 미친놈이라는 소문을 달고 사는 녀석이,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이유가 없다.
‘녀석이 아무리 커져도 풍파를 일으킬지언정, 왕실을 위협하지 못 할 거다. 허나 부마가 되어서 오히려 일이 더 복잡해진건가...?’
이징은 그런 생각을 품었다가, 재빨리 지워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억측이니까.
부마는 사실상 왕실 내에서 힘이 없는 편이지만, 연오랑 쯤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나.
만약 왕세자나 왕세손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연오랑이 왕실 인사라는 명분으로 끼어들 여지가 있다.
물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선, 그저 지금처럼 태종, 세종, 이제 왕세자에 오를 문종이 잘 자라기만 하면 끝.
나라에 큰 변고만 없으면, 그의 참담한 우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그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반대로 생각하면, 왕실 종사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온갖 잡인들이 이합집산과 권모술수를 쓰려하는 걸, 연오랑이 다 때려잡아 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태종과 세종 또한 이러한 생각을 모두 정리하고서, 부마로 낙점했을 게 분명.
결론은 그저 지금처럼, 연오랑이 세종과 앞으로 왕세자가 될 문종과 더욱 가깝게 지내면 되는 거다. 조정신료를 견제할 왕실의 칼이 되어서 말이다.
자신을 두고서 모두가 이런저런 상념을 날리는 동안, 연오랑은 열심히 입을 놀리고 있었다.
원래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삼정승에 오른 황희, 허조, 맹사성.
이들의 운명 또한 원래역사와 많이 비틀렸다.
허조는 말할 필요도 없으니 넘어가고, 황희는 능력은 뛰어나나 축재에 관심이 많고 자식농사가 시원치 않았다.
허나 지금역사에선 축재를 꿈꾸지도 못했고, 자식들이 아직 사고를 치기 전일뿐더러 사고 칠 가능성도 줄어들었다.
일련의 자잘한 반란을 겪은 태종은 원래역사보다 강력하게 양반사대부, 지방호족을 족쳤고. 무려 노비쟁송에 직접 관여할 정도로, 사노비를 늘리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
기업의 공인 이전에는 재산을 늘리는 방법이 땅과 노비를 늘리는 것 말곤 별다른 게 없는데, 태종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지 않나.
간이 배 밖으로 나와 까불던 이들은 당연히 다 작살났는데, 황희가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태종의 총애를 받는 신료라고 눈감아 주긴 커녕, 오히려 배신감을 느껴서 더 작살냈을 거다.
맹사성이야 워낙 물과 같은 인물이니, 지금역사에서도 새로운 물길을 따라 잘 흐르고 있었지.
흥겨운 술자리건만, 이 상자리는 꽤나 진지했다.
다들 전국에 퍼져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어디 흔한가.
모인 김에 교통정리를 해놔야 하는 법. 그래야 내일부터 이어질 조회가 잡음 없이 쭉쭉 나아갈 테니까.
“전투보고서는 다들 보셔서 아실 테니...”
조용히 이어지는 연오랑의 말에, 모두는 귀를 기울이고 집중했다.
조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전투, 전쟁 기록은 생각 외로 부실한 편이었다. 경과를 시간의 진행 따라 풀어놓는 게 아닌, 그저 결과만 짤막하게 보고하는 편이었으니까.
허나 연오랑의 원정 전투보고서는 상식을 깨 부셨다.
녀석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는 장계 수준을 넘어서, 무려 5권짜리 서책이었으니까.
일기마냥 각 연대가 달성한 결과를 매일매일 적어놨을 뿐만 아니라, 지도를 만들기 위해 데려갔던 도화원의 화가를 통해서 전투삽화까지 집어넣었다.
이래서일까? 무관들은 흡사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 같은 적나라한 묘사에 부담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전투보고서를 보고 싶어 했다.
곁다리지만... 생각이 깊은 이들은, 앞으로 전투보고서의 양식이 연오랑의 방식으로 교체될 거라고 예측하곤 두통이 밀려왔지.
더불어 군사에 관한 부분은 그렇다 쳐도, 뒤편에 이르러선 요동,몽골,북직례의 온갖 물산, 기후, 문화 등을 서술해 놨으니...
조정신료들 사이에서 “사실 원정을 떠난 게 아니라, 탐사를 하고 온 거 아니냐?”라는 말이, 괜히 떠도는 게 아니었다.
“북방산 작물종자를 가져왔으니, 조선 기후에 맞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특히나 기후가 비슷한 평안도와 함길도에서 재배할 수 있는지 연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연오랑은 모두의 동의를 구하듯 한명씩 바라봤고, 다들 그 뜻에 동조해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관심을 갖는 작물이 있는가?”
“모든 게 다 중요하지만... 냉해에 강한 겨울밀과 봄밀, 순무, 약재 그리고 몽골초원의 생초입니다. 조선에 없는 작물이나 효용이 있을 거라 보입니다.”
재깍 이어지는 대답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연오랑이 의도하는 게 뭔지 알아차렸으니까.
식량과 말먹이를 늘리고 개량하는 건, 반드시 필요한 일 아니냐. 삼남지방에서 생산되는 쌀로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북정원정군과 북진토군이 여진부락을 정리하는 중에 이미 종자들을 심어 놨습니다. 허나...”
“사람이 부족한 모양이군.”
“송구스럽습니다.”
허조가 조용히 덧붙이자, 세종이 재깍 말을 받아쳤다.
농사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관원은, 농사직설을 전파하기 위해 전국으로 파견 나가지 않았나.
호주로 간 이들은 귀화인과 기존 평안도 백성들을 가르치는 업무에 더해서, 이젠 신품종 작물의 개량까지 하게 생겼다.
“배봉마을의 연구소엔 아직 사람이 있으니, 그들을 북방으로 올려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흠.”
연오랑이 태종과 세종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말을 던지자, 둘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배봉마을은 여전히 서얼들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작금에 이르러선 풍운의 꿈을 품은 서얼들 말고, 그냥 놀고먹던 서얼들까지도 끌어오고 있었다.
서얼금고령이 폐지되었다고 한들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 한, 처지가 달라질 건 없지 않나.
이들은 착호군이든 정병갑사든 뭐가 됐든 군역을 치러야 했고, 어쩌다보니 이에 대한 도피책으로 배봉마을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적어도 배봉연구소의 연구원이 되면 군역을 미룰 수 있고, 설령 착호군에 들어가게 되도 전투병과로 끌려갈 일은 없으니까.
세종과 태종은 꼼수로 군역을 회피하는 사태가, 살짝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수가 몇이나 되지?”
“농업연구소에서 일하는 이들이 대략 백여명 정도 됩니다.”
“착호군에 속해 임시관리로 임명해서 호주로 보내야겠군.”
세종은 동의를 구하듯 태종을 바라봤고, 태종뿐만 아니라 모두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북직례 출신의 귀화인들은 장인이 많다고 들었는데...?”
“예. 귀화교육당에서 교육을 하는 한편, 그들의 지식을 명문화해서 서책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더불어 실습에 나선 이들도 있습니다.”
“오... 벌써? 어떤 장인들인가?”
“벽돌과 성곽을 쌓던 이들입니다.”
허조의 대답에 다시금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중국의 벽돌은 조선에서도 유명했고, 북직례에서 끌고 온 포로들 중에서는 성벽만 전문적으로 쌓는 이들이 부지기수였으니까.
“성곽을 쌓을 정도면 집을 짓는 건 여반장이겠지. 허나 흙이 중요하다고 알고 있는데, 북변에 괜찮은 흙이 있는가?”
“예. 생각 외로 비슷한 모양입니다. 압록강 이북의 천산산맥과 용강산맥을 뒤지면서, 가마터를 찾아 만들고 있습니다.”
“좋군.”
태종과 세종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장인들은?”
“일단 정리된 이들만 말씀드리면...”
허조는 술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왕창 들고 온 보고서더미를 헤집으며 열심히 설명을 늘어놨다.
온갖 장인들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서,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착호군 3기를 모집해야겠지?”
“예. 문제없을 거라 사료됩니다.”
자신의 수족이 늘어나는 게 기쁜 걸까? 태종이 술잔을 벌컥 들이키며 빙긋 웃자, 황희는 냉큼 말을 받았다.
착호군의 위상은 너무 높아져서, 이젠 기존 무관들 사이에서 슬쩍 반발이 나올 정도가 되지 않았나.
더불어 그저 위상만 높아졌을까.
이젠 착호군에 끌려가는 게, 마냥 손해가 아니라는 인식도 퍼졌다.
착호군의 유지비는 사실상 각 개인이 부담하는 형태였다. 이들이 먹을 식량과 의복 등의 생필품은 나라에서 제공하는 게 아니라, 각자 알아서 구해 와야 했으니까.
착호군이 지나가는 곳마다 원시적인 상설시장과 온갖 기업이 생긴 게, 우연히 벌어진 일이겠는가.
집에서 모든 걸 가져올 수 없으니, 토종기업들이 생산한 물건과 나라에서 대신 구매한 쌀과 절인생선을 비롯한 식량을 면포로 교환해 왔던 거지.
이렇듯 착호군이 움직이는 것 자체만으로, 초급수준의 시장경제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착호군이 사냥한 짐승은 나라가 아니라 개인의 소유로 넘겼고, 그게 하나둘씩 팔리기 시작하자 은근슬쩍 돈주머니를 챙기는 이들이 생겨났으니...
“음... 마냥 손해가 아니잖아? 호랑이라도 한 마리 잡으면 수지타산을 넘어서 이득이 생기겠는데?”라는 인식이 퍼진 거지.
“허면 내년 초에 3기를 모집하면 되겠군.”
“하지만 지금보다 수를 더 불리면, 오히려 굼떠지지 않겠습니까.”
세종은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고, 태종 또한 짐작했던 일인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움직이는 도시라 할 만큼 몰려 있는데, 여기에 몇만명이 더 추가된다? 그걸 유지하고 보급하느라, 오히려 손해가 날 게 분명하다.
“3기 착호군은 따로 분리를 해야겠군. 허나 오합지졸만 가지고 굴리면 문제가 생길 테니, 1,2기와 섞을 필요가 있을 테고...”
태종은 술잔을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1기는 연오랑이, 2기는 태종이 이끌고 있는데, 3기를 따로 분리하면 누구에게 맡겨야 할까.
허나 오래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올까. 적임자는 사실상 정해져 있지 않나.
“그대가 맡아야 겠군.”
“예.”
황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냉큼 고개를 조아렸다.
태종을 따라 다니면서 착호군을 운영했으니, 3기의 주축은 당연히 황희가 맡아야 하지 않겠나.
“3기가 가야할 곳은...”
“전라도로 가야되지 않겠습니까?”
세종이 재깍 되묻자, 태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라도엔 벌써 고려인들이 속속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들을 통제하는 한편, 양전사업과 토지정리사업에 반발할 기존 지주들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칼이 필요한 법.
나아가 아무리 평지가 많은 전라도라도 산이 없겠는가. 거기도 맹수4종세트는 널려 있고, 싹 정리해야 마땅하다.
“허면... 너는 어찌할 생각이냐?”
“이제 겨울이니, 올해는 용연현에서 쉬고 해가 지나면 원산으로 갈 생각입니다.”
연오랑은 시원하게 답을 늘어놨다.
원정군에게는 휴식이 필요하고, 지금부터 대략 2,3개월 정도 휴가를 줄 생각이었다.
거하게 승리를 하고 왔으니, 고향으로 돌아가 열심히 무용담을 늘어놔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다 조선과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착호군의 필요성과 조선군의 강함을 알릴 선전작업이 될 테니... 일석이조지.
“원산이라... 하긴 그 외에는 방법이 없겠구나.”
“예.”
이미 계획을 다 아는 터라, 세종과 태종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산은 강원도 북부에 위치해 있으니, 1기 착호군이 향할 방향은 당연히 함길도가 될 거다.
문제는 개마고원이 위치한 함길도는 지랄 맞은 땅이고, 여길 개척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냥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보급과 행군 그 자체가 난항일 테니까.
원래 역사에서 4군6진을 유지하는 데 개고생을 한 건, 육로로 보급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 아닌가.
“허면 해안을 따라 이동하게 되겠군.”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면에선 원산은 입지가 꽤 좋은 편이지요.”
원산을 개발시켜 그곳에서 해로를 통해 징검다리를 건너듯 해안도시를 완성하고, 끝내는 두만강까지 도달하는 게 목표다.
“음. 결국 배를 이용해야하는데... 지금 당장 기선군을 개혁하는 게 가능하겠나?”
태종은 답을 알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넌지시 물었지만, 모두는 무례를 무릅쓰고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불어난 군비를 충당할 수가 없어서 착호군을 만들었고, 착호군조차 간당간당하게 유지되고 있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있나.
“지금껏 늘린 갑사가 팔천명에 이르는데, 녹봉과 무장을 유지하는 것도 벅차지 않겠습니까? 삼남의 토지정리사업이 진행한 후에, 경과를 봐야 가능할 듯합니다.”
“맞사옵니다. 다음 계획은 남은 중앙군을 북진토군과 동일하게 교체하고 훈련시키는 게 우선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건주위 일대의 여진인들을 정리했으나, 이제 새로운 부락이 자리를 잡을 테고, 귀화교육당에서 교육받는 이들 또한 통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북방을 비워둘 순 없는 노릇입니다.”
삼정승들은 재깍 반문을 던지며 만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