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챕터25. 개발하다 (1)
“지금쯤이면 북정원정군의 소식이 들어갔을 테니, 이제 더 이상 결정을 미루지 못하겠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모두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히죽 입가가 들렸다.
그간 조선을 괴롭혔던 일본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조선이 무려 중국을 공격하고 그 유명한 거용관을 박살내 놨으니, 일본이 겁을 집어먹는 건 인지상정.
“말을 안 들으면 진짜 팬다?”라고 몸으로 보여줬잖아? 덩치 큰 중국도 후려쳤는데, 일본을 때리지 못할 이유가 없지.
이젠,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대마도를 내놓게 될 거다.
“대마도의 일이 마무리되면 왜관을 다시 여실 생각이십니까?”
“그래야 하지 않겠나? 다만 제주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고민을 해봐야겠지.”
“대마도에 왜관을 여는 건 어떤가?”
“가능은 하겠지만... 재정이 적잖게 소모될 겁니다.”
세종과 태종의 연이은 물음에 맹사성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댔다.
대마도는 죄다 불태워놔서, 농담이 아니라 건축자재로 쓸만한 목재가 없다.
아무리 석재와 벽돌을 이용해 건물을 짓는다 한들 목재는 필요하고, 그걸 조선에서 공수해야 하는데... 돈이 얼마나 들지 감히 상상도 못하겠다.
동래를 비롯한 조선내지에 왜관을 설치할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지금 조선의 발전과정과 성과를 굳이 일본에 전파해줄 이유가 없으니까.
연오랑은 맹사성의 생각을 읽고, 다른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도 그렇고... 일본이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하려면, 결국 대마도에도 기선군진을 설치해야 하는데... 지금은 시기상조 아니겠습니까? 일단은 원산에서 기선군을 개편하면서 그에 맞춰 준비해 보겠습니다.”
“음.”
“시간이 될지 모르겠으나... 이왕 하는 김에, 다 같이 하는 편이 반대가 적겠군.”
“예.”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차와 자기의 수출은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지금처럼 가면 강남상인만 배를 불리는 꼴인데...”
“그렇다 한들 제값을 주고 사가는 거니, 마냥 손해는 아닐 겁니다. 더욱이 입맛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닌데, 일본인들이 조선차에 익숙해지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훗날 왜관이 설치되면 그들이 중국차를 찾겠습니까. 조선차를 찾겠습니까.”
“하긴...”
“음...”
허조가 안건을 내놨으나 연오랑의 반문에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 맞는 말이니까. 어찌 보면 고생하지 않고 중국상인이 대신해서 조선차를 일본에 소개해주는 꼴 아닌가.
“그건 그렇게 하고... 말은 여전히 팔지 않는다. 산동에서 특별한 대가를 주면 그땐 고민해보지. 초석을 팔면 좋겠지만... 그건 상황을 봐서 결정할 일이다.”
“맞사옵니다.”
“그게 좋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모두가 일심동체였다.
조선에서 쓸 말도 아직 부족한데 중국에 내다 파는 건 무리다. 조선 팔도가 말똥에 질식하기 전까진, 어지간해선 말을 팔지 않을 생각이다.
“다음으론...”
이어 이번엔 황희가 입을 열었고, 술자리에서 벌어진 회의 아닌 회의는 계속 이어졌다.
*****
“호오. 멋지군!”
“그렇습니다. 어르신.”
“오...”
모두는 살짝 쌀쌀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끝도 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앞에는 흡사 한 폭의 유채화마냥, 정선공주와 그녀를 따라온 궁녀들이 말을 타며 놀고 있었다.
일평생 한성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공주 아니냐.
한성과 성저십리 밖으로 나온 것만으로도 신나서, 용연현에 다다랐는데도 아직도 저렇게 들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군.’
연오랑은 이미 예상을 했음에도, 현실로 다가오자 퍽 감상적인 느낌이 들었다.
하동 제일의 부자에, 나름 명문가의 후손인 연오랑에게 혼사 제의가 안 왔겠는가.
다 미래를 생각해서 미뤄둔 거지.
서로가 서로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고, 연오랑 또한 마찬가지. 괜히 태종, 세종과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을 열어줄 바에는,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게 좋은 법이지.
언제가 됐든 부마가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결국 예상대로 됐다.
‘21세기에도 안 해봤는데, 조선에서 결혼을 할 줄이야.’
다만... 이미 혼례를 치른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실감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다.
더불어 민망한 마음도 밀려온다.
현대로 치면 정선공주는 고등학생 아닌가. 이 세상에서 거의 스무해 가까이 살았지만, 괜히 얼굴이 붉어진다.
‘뭐... 인물이 나쁜 건 아니니까.’
멋쩍어서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려본다.
시대에 따라 미의 기준이 조금씩 달라지는 건 당연한 말이지만, 그럼에도 이른바 황금비율이라는 게 있지 않나.
지금껏 살면서 느꼈는데... 현대의 미인은 여기서도 미인이고, 이 시대의 미인도 잘 꾸미면 현대의 미인과 엇비슷했다.
공주도 마찬가지.
태종의 여성 편력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그도 눈이 있는데 아무나 비빈으로 들였겠는가. 당연히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아서인지, 공주의 미모도 어디가도 빠지지 않을 수준은 됐다.
이 시대 사람들이 보기엔 키가 큰 게 흠이 될지 모르지만, 연오랑 입장에선 오히려 더 좋은 편이지.
‘눈칫밥 먹은 세월이 길지만 의외로 성격문제도 없고, 생각도 나름 트여 있고 활달할 편이니... 정말 천만다행이군.’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해서 일까? 공주의 좋은 면만 눈에 들어왔다.
어린 시절부터 궁궐에서 홀로 기죽어서 살면, 성격이 괴팍해질 가능성이 큰데... 오히려 눈치만 엄청나게 늘어서,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사글사글한 성격인 줄 알았을 거다.
더불어 남들은 꺼려할지 모르나, 연오랑 입장에선 남다를 정도로 조선의 색이 묻어 있지 않은 게 오히려 가산점 아니냐.
여러모로 생각해봐도 정선공주만큼 속편한 배필은 없을 것 같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나?”
“아... 대군마마.”
연오랑이 말없이 걷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효령대군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달라붙었다.
효령대군이 불교에 관심이 많은 건, 원래 역사에서나 지금 역사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역사에선 눈치를 볼 필요도 없으니, 더욱 심취해 있는 상태였지.
당연한 말이지만 조선불교 공의회라는 엄청난 사건이 생겼는데, 그가 빠질 리가 있나.
그는 눈에 불을 켜고서 냉큼 달려가, 용연현으로 모여든 온갖 고승들과 함께 가르침을 받거나 불법을 논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은 개선식에 참석했다가, 연오랑과 함께 용연현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고.
그래서 일까? 그는 연오랑을 굉장히 좋게 보고 있었다.
“이런 말하면 부끄럽지만, 정선을 받아줘서 고맙군.”
“아. 예...”
연오랑은 히죽 웃는 효령대군을 보며, 뭐라 할 말이 없어 그저 따라 웃고 말았다.
‘뭐 따로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물론 속마음은 냉큼 숨겼다.
왕위에 오른 세종은 어느 누구하나 의심할 바 없이 건재하지만, 그럼에도 괜히 문제 삼는 이들이 튀어나오기 마련.
안 그래도 조선을 뒤집어 놓고 있는 연오랑 입장에선, 양녕대군이나 효령대군과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었다.
이게 다 정치공세로 돌아올 테니, 쓸데없이 뒷말이 나올만한 행동은 삼가야 했지.
당연히 효령대군과도 몇 번 스쳐가며 인사한 게 전부인데, 이렇게 친한 척을 하니... 기분이 퍽 묘할 수밖에.
“너무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네. 진실로 고마운 마음뿐이니까. 오라비가 되어서 정선을 제대로 돌봐주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저렇게 커버렸군.”
불법을 오래 익히더니 연오랑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효령대군은 가볍게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풀어놨다.
“그리고... 고마운 게 하나 더 있군.”
“...?”
“경전 말일세. 구하기도 어려운 금과 원나라 시절의 경전을 가져왔더군. 참으로 기꺼운 일일세.”
“아...”
‘하긴 고마워하긴 해야지.’
효령대군이 덧붙인 말에 연오랑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림좌기를 비롯한 몽골초원, 북직례의 사찰 등을 전부 다 털어왔지 않나.
그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불쏘시개로 사라지거나 알아서 삭아 없어졌을지 누가 아나. 중국이나 몽골이나, 옛 불교경전을 가치 있게 취급하진 않을 테니까.
“헌데... 범종이야 녹여서 쓴다고 쳐도, 벽화와 목,석탑은 어째서 가져온 건가?”
“그 땅에 있어봐야 봐주는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차라리 조선땅으로 가져와서 보존하는 게 좋지요. 더불어 종파를 통합중인데, 옛 금,원,명나라 시절의 불교 또한 흡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가볍게 물었건만 뜬금없이 튀어나온 무거운 대답에, 효령대군은 자기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그게 가능할 거라 보는가?”
“뭐... 지금 당장은 티가 안날 지 모르나, 먼 훗날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
생각만큼이나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연오랑을 보며, 효령대군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명이 망하고 난 후. 겨우 되살아난 토번(티베트)은 다시금 분열되어 정세가 어지럽게 되지 않았습니까. 듣기론 아직도 종파싸움이 끊이질 않고 있으니 어찌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
“중국이야 뭐... 명이 망하고 나서 관방도교나 관방불교 모두 몰락해 민간신앙이 되었으니, 그들 모두가 허우적거리는 틈에 조선불교가 기틀을 잡는 건 나쁠 게 없지 않습니까. 한발 앞서 나가면 따라오게 되어 있고, 그 맥이 옛 요,금,원의 맥을 잇고 있으면 명분도 앞서겠지요.”
“크음.”
‘허황된 말처럼 들리나, 마냥 틀린 말은 아니구나.’
효령대군은 시원시원하게 내뱉는 연오랑의 말을 들으며, 연신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탁발승 생활을 한 홍무제 아니냐.
그는 조선만큼은 아니지만 억불정책을 취해 불교계를 개혁하려고 했다.
더불어 어찌됐건 명나라도 유학을 국시로 삼은 나라다보니, 나라에서 국교로 밀어줄 순 없고 오히려 탄압을 가했지.
반대로 원나라 때에 크게 부흥한 도교는 홍무제 시절에도 나름 기세를 키우다가, 명이 망하면서 흐지부지된 상황.
결국 나라를 등에 업고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민간으로 파고들어간 상태였다.
이러니 조선불교가 중국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 마냥 거짓부렁이는 아닌 셈이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조선불교 개창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글쎄... 확답을 하긴 힘들군.”
“역시 그렇군요.”
연오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효령대군은 다시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녕 모를 녀석이구나.’
자기도 모르게 속에서 나온 한탄이 목젖을 때렸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연오랑을 불교의 수호자쯤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허나 속을 까보면 절대 그게 아니다.
짓밟히던 불교의 맥을 살려둔 건 확실하고, 어찌 보면 번창시키려는 것 같은데... 또 한편으론 맥을 살린 게 아니라, 자기가 편한 쪽으로 확 틀어버린 것처럼 보였으니까.
과연 이게 삼한시절부터 내려온 조선의 불교가 맞긴 맞는 걸까?
여러 계파로 나눠져 있던 종파를 억지로 하나로 뭉치는 게 과연 맞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어쩌겠나.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신발이 타더라도 일단 불은 끄고 봐야지.
‘후...’
효령대군이 만난 모든 고승들의 속마음이 딱 이런 심정이었다.
“논의가 길어지는 건, 아무래도 종파통합 때문이겠지요?”
“그렇네.”
“흐음. 다른 부분은 얼추 결론이 난 모양이군요?”
“...”
효령대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들이 뭘 어쩌겠어.’
연오랑은 속마음을 숨기며, 다시금 히죽 미소를 지었다.
종교세, 승려역役, 승과를 대신할 내부자격시험제도, 여진어를 중점으로 한 외국어교육, 빈민구제와 봉안당奉安堂설립, 하나로 된 종파통합.
사실 연오랑이 불교개혁을 내걸며 주장한 내용은 조정신료들의 입맛에 딱 맞았다. 이렇게 되기만 한다면, 굳이 불교를 두들겨 팰 이유가 없으니까.
반대로 불교계에선 이에 대해 감히 거부할 수도 없었다.
이미 정해진 사안이고, 그저 그 속에서 세세한 부분을 놓고 서로 밀고 당기기를 하는 중이었지.
원래 역사에서도 그랬지만, 민간 백성들이 승려가 되려고 한 까닭이 뭔가. 도첩을 통해 인정받으면, 역과 세금을 면제 받기 때문 아닌가.
허나 종교세와 승려역이 시행되면, 백성들이나 승려나 똑같이 세금과 역을 부담할 텐데... 그런 꼼수가 통할 리가 없지.
더군다나 승려역은 군종승이라는 형태로 시범운용중인데, 역을 피하겠다고 승려가 되었다가는 군대로 끌려가게 생겼지 않나.
정말 불심 깊은 이가 아니고선, 승려가 될 마음을 섣불리 품을 수가 없다.
내부자격시험은 조정에서 실시되던 승과를 확대, 대체하는 것.
이 또한 어설피 공부해서, 땡중 노릇을 하려는 이들을 때려잡기 위한 방편이니... 여기서 또 한번 걸러지게 될 거다.
여진어를 필두로 한 외국어교육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건 이미 효과를 보고도 남았으니, 불교계가 싫어하든 말든 조정이 밀어붙이고 있다.
“그런데... 옛 경전을 복원하고 있으니, 어쩌면 시간이 더 걸리게 되겠군요? 괜히 가져왔나.”
“푸흡...”
연오랑이 실없는 소리를 내뱉자, 효령대군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관심이 없다는 녀석이,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벽화까지 뜯어왔겠는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