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챕터25. 개발하다 (9)
“다들 잘 적응했냐?”
“물론입니다. 귀화교육당을 통해 교육하기도 했고, 솔직히 말해서 이곳에서 대접을 꽤 잘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확신합니다.”
노비가 아닌 양민으로 떵떵거리면서, 그것도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신도시에 거주하는데 불만이 있을 리가 있나.
문화가 다른 것 빼고는 예전보다 훨씬 살림살이가 나아졌을 거다.
“실력은 어때?”
“뭐... 엄청나게 특출나거나 대단하진 않지만, 그래도 도움은 되고 있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군...’
“그나마 다행이네.”
“예. 뭐...”
연오랑은 얼추 예상하고 있던 터라, 곽영수의 쓴웃음 담긴 대답에 물들 수밖에 없었다.
원래 역사에선 영락제가 등극 하고나서 정화의 대원정이 시작됐는데, 지금은 명이 망하지 않았나.
아무리 무역상인이 힘을 키우는 시절이라고 해도, 나라에서 총력을 기울여 자금과 인력을 끌어 모은 대사업과 비교할 수 없는 법.
중국의 선박제조기술은 생각만큼 발전된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기존의 한선에 없던 기술을 받아들이는 정도로 만족해야했지.
“그런데 사원노비가 이곳에서도 일을 해?”
“승려들을 따라온 사원노비가 대략 사천명 정도 되는데, 건설기업과 광산에만 써먹기엔 너무 많아서...”
“흐음.”
연오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문을 지워냈다.
조선불교 공의회를 통해 사원노비에 대한 처우는 이미 결정 난 상황 아니냐.
대다수는 착호군에 소속되어 군역을 끝마치고 양민으로 속량될 예정이고, 그 외의 사원노비들은 각지로 퍼져서 임시관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부역기간에 맞춰 일을 하면서 자금을 모으고, 속량 되고나서 먹고살 방도를 찾아야 했지.
뭐. 대다수는 농부가 될 거고, 전부터 특수직업을 가진 사원노비야 하던 일을 그대로 하겠지만...
그게 아닌 이들은 생경한 일을 배우면서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자 했고, 이곳에 온 김에 조선일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꽤나 많이 생긴 모양이다.
‘하긴, 지금의 배는 건물이나 마찬가지니까...’
연오랑은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서 일을 하는지 재깍 알아차렸다.
지금의 선박은 나무를 조립해서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고, 이건 집을 만드는 것과 대동소이 하지 않나.
설계도를 만들고, 배의 형상을 짜는 건 전문영역이지만, 그 외의 작업은 건축 작업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나무 다루는 기술만 배워 소목장, 대목장이 된다면, 굳이 선소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먹고살 기술을 얻는 거지.
“자재는?”
“장연현과 황해도에서 공수해 오고 있습니다.”
배 만드는데 나무가 많이 드는 건 당연한 말이고, 이곳은 허허벌판이니 다른 곳에서 구해와야하지 않나.
다행히 장연현은 예전부터 사람이 별로 살지 않던 곳 인터라 숲과 산이 우거진 상태라서, 목재를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나보다.
‘제대로 밀어주네. 누가 화력덕후 아니랄까봐.’
연오랑은 술술 늘어놓는 보고를 들으며, 세종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느꼈다.
고려말부터 시작된 왜구의 침탈은 조선초까지 이어졌고, 태조, 태종은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기선군을 재편하는 한편 선박 개량에도 힘을 쏟았다.
거북선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작고 원시적인 장갑선인 귀선龜船을 만들기도 했으니까.
세종 대에 신형 쾌선을 만든 것도 같은 맥락이었지.
더불어 더 많은 조운을 실어 옮기기 위해서, 더 큰 조운선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역사에서도 엇비슷했으나, 연오랑 때문에 변곡점이 생겨났다.
첫째는 기존의 맹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형상을 가진 신형 어선의 등장.
둘째는 연오랑이 제안한 함선용 포가. 동차 때문이다.
특히나 둘째 이유가 화력덕후인 세종의 마음을 움직였다.
조선수군이 원거리 화력전이나 직접 왜선과 부딪쳐 왜선을 부수는 방법을 선호해도, 해상전은 결국 선상백병전으로 끝나는 시대 아니냐.
헌데 함선에서 화포를 빵빵 쏴댈 수 있게 해줄 동차라는 물건이 튀어나왔고, 세종은 수송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지금의 맹선으론 화포를 이용한 화력전이 힘들다고 판단.
맹선의 한계를 뛰어넘는, 화포를 본격적으로 활용하는, 오롯이 전투에만 특화된 신형 군함을 만들기로 마음먹은 거지.
그리곤? 역시나 전문가들을 긁어모아 이곳에 처박아, 민관합동으로 신형 선박의 연구를 시작했다.
곽영수가 연오랑을 안내한 곳은 의외로 건물 안이었는데, 이런저런 공구와 함께 나무먼지와 톱밥이 잔뜩 널려 있었다.
어떤 건 큼지막한 탁자에 쇳덩이가 줄줄이 붙어 있는 것도 있고, 또 어떤 건 발판과 연결되어 긴 줄이 상하왕복운동을 하게 생긴 물건도 있고, 또 어떤 건 톱니바퀴에 손잡이가 달려 회전운동을 하게 만든 물건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봤을 때, 그야말로 도깨비 소굴처럼 보이지 않을까?
“새 공구에 다들 익숙해졌어?”
“물론입니다. 효율을 따라가지 못하는데, 익숙해지지 않고 베기겠습니까.”
“음.”
연오랑은 톱밥이 잔뜩 껴 있는 탁자를 쓱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걸 떠먹여줬는데도, 예전 게 좋다고 안 먹는 놈들이 있을까.
이건 단순한 구조의 수동식이지만, 어찌됐건 21세기엔 선반이라 불릴 초기형 공작기계들 아니냐.
소목장, 대목장들이 눈에 불을 켜고 환장할 공작기구들이지.
“이것도 팔리지?”
“제가 그것까진 담당하지 않아서...”
“예. 흐흐. 꽤 잘나가죠.”
곽영수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젓자, 조용히 관리들과 귓속말을 나누던 윤현이 냉큼 답을 던졌다.
“잘됐네. 중국 상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주의하고 있고?”
“의주의 조정 관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살피고 있으니, 걱정 안하셔도 될걸요.”
“음.”
‘하긴.’
이 비싸고 생경한 공작기구를 사갈 사람은 공작기업 밖에 없고,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공작기업은 중국상인과 직접 부딪칠 일이 없다.
나아가 중국상인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의주밖에 없는데, 그곳은 조정관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감시 중에 있지 않나.
괜히 밀무역을 하거나, 허가되지 않은 물품을 잘못 팔았다가는 집안이 풍비박산날 거라는 걸, 상인집안들이 더욱 잘 알았다.
이미 여러 번 본보기를 보였으니까.
“축소한 시제품은?”
“다음 방에 있습니다. 이쪽으로...”
곽영수는 작업장을 지나쳐, 흡사 창고마냥 거대한 건물로 연오랑을 안내했다.
그곳엔 벽면을 따라, 받침대에 올려놓은 수십개의 선박모형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흡사 어린아이가 타고 놀만한 크기의 장난감 같은 모형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장난감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정교하고 잘 만들어졌다.
“오... 생각보다 괜찮은데?”
“흐흐. 하동에 있을 적보다 훨씬 낫죠?”
“그야 당연한 말이지.”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곽영수를 보며, 그 역시도 어깨를 들썩이며 함박웃음을 날려줬다.
그땐 조정의 눈치를 보면서 일해야 했고, 지금은 조정의 지원을 받아서 일하고 있는데 비교가 되나.
“몇대몇으로 줄인 거냐?”
“대략 200대1부터 50대1 사이로 만들었습니다.”
“흐음.”
그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곽영수 뒤에 늘어선 관리들을 쓱 훑고선, 살짝 냉랭한 목소리를 흘렸다.
“이런 방식이 익숙하지 않았을 텐데? 별말 없었어?”
“글쎄요?”
“아닙니다. 확실히 이렇게 미리 만들어보니 좋았습니다. 대감.”
“아깝게 자재를 낭비할 일도 없어서, 확실히 좋았습니다.”
“흐음...”
그가 뜬금없이 날카로운 눈빛을 뿌려서일까? 눈을 마주친 관리들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입을 놀렸다.
“지금껏 없던 방식이었는데도, 별 탈 없었다고? 자기만의 기술과 경험이 있는 장인들이 한소리 했을 텐데?”
“주상전하께서 친히 관심을 가지는 일에, 감히 어느 누가 그런 불측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예.”
이천과 윤득민은 관리들을 대표해서 연신 장인들을 비호했다.
이런 식의 목업Mockup을 만들고, 실물크기를 축소한 샘플을 만들어 설계하는 방식은 지금껏 조선에 없던 방식이잖아?
당연히 이런저런 반발이 나올 법도 하건만, 진짜로 별 탈 없이 넘어간 모양이다.
설령 있었더라도 어찌됐건 일단 만들고 나서부턴, 이게 더 효과적인 걸 알고서 군말이 싹 사라졌을 테지.
“이곳에 주상전하는 물론이고 상왕전하의 관심이 지대하니, 헛소리하는 이들이 없어야 할 거다. 오히려 각자 품고 있는 지식을 체계화해서 하나로 묶는 작업을 해야 할 거고.”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이미 진행 중에 있으니, 심려하지 마시지요.”
혹시나 싶어 잔소리를 날려주자, 다들 냉큼 고개를 조아려댔다.
“그럼...”
모두를 긴장시킨 연오랑은 이번에 시선을 돌려 샘플 선박을 주시했다.
양손으로 품고 안아야 겨우 들 수 있는 선박 하나를 들어올려, 배 밑창을 살폈다.
과연 위에서 봤을 땐 다들 비슷하게 생겼어도, 바닥을 살펴보자 기울어진 각도와 모양이 다들 제각각이다.
‘생각보다 잘 만들었는데?’
이번엔 다른 선박을 줄줄이 옆에 붙인 후에, 바닥에 쪼그려 앉아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밑창을 살폈다.
‘이야. 진짜 시키는 대로 하긴 했네.’
연오랑은 미묘하게 생김새가 다른 바닥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첨저선이든, 평저선이든, 바닥의 형상과 기울어진 각도에 따라서 선회력, 복원력, 속도 등이 차이나기 마련.
이런 형상차이가 실제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연오랑은 물론이고 이들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언제나 그랬듯. 맨땅에 헤딩하듯 하나하나 다 깎아가면서, 선체구조를 설계하는 작업을 하고 있던 거지.
배 밑창뿐만 아니라, 밑창은 똑같은데 선장과 선폭, 선고의 크기를 제각각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여러 개다.
“이렇게 만들어서 실험해 보니 어때? 확실히 다르지?”
“예. 똑같은 형상인데도, 선체의 비율에 따라 속도가 달라지더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그야 당연한 거지.”
윤득민은 자화자찬하는 연오랑을 보면서도, 연신 감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나름 선박전문가라 자부하던 인물 아니냐.
그런 인물조차 이곳에 와서 신천지를 경험했다. 이 모든 걸 설계한 인물이 연오랑이니,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끔뻑 죽을 수밖에.
연오랑은 이런저런 선박을 계속 훑어갔고, 끝으로 갈수록 더욱 커진 샘플 선박이 위치했다.
더불어 그의 기억 속에 익숙한 형상의 선박이 눈에 들어온다.
‘판옥선하고 카락, 갤리온인가? 작은 건 캐러밸이겠지.’
겉으로 봐선, 그의 기억 속 범선과 꽤 비슷하게 생겼다.
그가 요리조리 신형 선박을 살피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저런 형태의 배는 일찍이 조선에 없었고, 오롯이 연오랑이 직접 개념과 형상을 설명하고 그려줘서 만든 물건 아니냐.
흡사 시험검사를 받는 아이들 마냥, 모두는 연오랑의 입에 집중했다.
‘흐음. 그래도 거의 엇비슷한 거 같은데?’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며, 기억을 연신 더듬어갔다.
그는 범선에 대해 문외한이고, 아는 거라고는 게임 미디블워를 통해 배운 수치화된 지식이 전부 아니냐.
이게 실제로 적용될 수 있는지는, 그에게도 조선에게도 큰 도전이었지.
물론 이거라도 아는 게 어디냐.
최적의 전장과 전폭의 비율과 수치, 대략적인 돛대의 형상과 위치, 크기 등의 가이드라인을 알고 있으니... 오차범위 안에서 여러개 만들어 최적의 설계를 찾아가는 거지.
더군다나 지금 조선의 맹선과 비교하면 만재배수량이 몇배나 차이나기 때문에, 실제로 만들면 캐러밸 크기의 작은 카락이나 갤리온이 나오지 않을까?
나중에 기술력을 축적하면, 진짜 카락이나 갤리온을 만들 수 있을 거다.
‘어차피 지금 유럽에선 카락의 초기형이 만들어지고 있을 테니까... 하나둘씩 만들다보면 따라잡을 수 있겠지.’
“음...”
“어떤 것 같습니까?”
“잘 만들었네.”
“오!”
“와...!”
연오랑의 목소리에 긍정의 기운이 실리자, 관리들 모두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탄성을 내질렀다.
그간 이거 만든다고, 골머리 싸매던 고통이 싹 지워지는 것 같았으니까.
‘결국 이 형태가 최종 진화형이니까...’
이미 원래 역사에서 검증된 형상 아니냐.
더불어 세종이 바라는 함포전용 선박은 이런 형태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함포를 편히 쏘기 위해선 흘수 위로 올라온 갑판이 필요하다. 여기에 함포와 포병, 노꾼을 보호하기 위해선 누각과 선벽이 필요.
더불어 선상백병전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선, 이 선체가 성벽 역할을 할 수 있게 꽤 높아야 했지.
이 모든 걸 충족시키려면 선박의 크기가 종래보다 몇 배는 커야했고, 이렇게 대형화 된 선박을 움직이려면 더 많은 돛, 아니면 더 많은 노꾼을 실을 수 있어야 했다.
결론은 어찌됐건 판옥선 형태, 아니면 아예 서양범선인 카락과 소형형인 캐러밸, 진화형인 갤리온 형태로 갈 수밖에 없는 거지.
“이건 내해용일 테고, 이건 외해용이겠지?”
“물론입니다.”
그가 혹시나 싶어서 되묻자,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세종은 의주의 무역현황을 지켜보면서, ‘산동 및 강남상인과 직접 거래하는 게 이득 아닐까?’라는 마음을 일찍부터 품지 않았나.
한반도 내해를 돌아다니는 선박은 물론이고, 서해와 남해를 건너 중국과 직접 거래할 수 있는 외해용 선박 또한 개발하길 바랐다.
그러니 세종은 신형 선박이 지금껏 볼 수 없던 배든 아니든, 효과만 있으면 어떻게 생겨먹든 신경 쓰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