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챕터26. 변화하다 (1)
“조운선으로 개조하는 것도 가능해?”
“아무래도 외해용 함선은 힘들 것 같고, 내해용은 기존의 수로에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신 돛대를 여러 개 달아야 하겠지만요. 물론 그것도 제한적이겠지요.”
“그건 그렇겠지.”
조선의 조운선은 바닷길 말고도, 수많은 강줄기를 끼고 이어져 있지 않나.
서양범선 양식은 한강과 압록강 등의 이름난 큰 강을 제외하곤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을 거다. 강바람을 타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
‘카락이야 원래부터 무역선이었으니 상관없는데... 판옥선은 애매하네.’
그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자,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곽영수가 얼른 입을 열었다.
“그 옆에 있는 게, 내륙 조운용으로 만들어 본 겁니다.”
“이거?”
연오랑이 괴상하게 생긴 판옥선을 가리키자.
“예.”
곽영수는 머뭇거림 없이 재깍 답을 했다.
‘이건 아무리 봐도 판옥선처럼 안 생겼는데?’
그는 상상을 뛰어넘는 혼종을 보며,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예 백지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다보니, 이들은 전혀 엉뚱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원래 역사에서도 판옥선은 순수한 전투함 아니냐.
이건 더럽게 느리고 노꾼이 많이 필요해서, 수송공간이 많이 필요한 조운선으로 쓰기엔 부적합했다.
이들은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 첨저선과 평저선의 중간형태의 밑바닥을 만들고, 서양범선처럼 3,4개의 거대한 돛대에 돛을 달았는데... 그렇게 만들고 보니, 이게 판옥선이 맞는지 아닌지 헷갈리게 생겼다.
“이게 물에 뜨긴 해?”
“물에 잘 뜨는 건 물론이고, 생각보다 잘 나가던데요?”
“그러냐...”
오히려 곽영수는 “네가 이렇게 만들라고 했으면서, 그걸 왜 모르냐?”라는 듯 되물었다.
“음... 실물로 만들어본 건 있어?”
“주로 신형 어선을 만들었고, 신형 조운선을 한척 만들어 봤습니다.”
“설마 이거?”
연오랑이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앞에 놓인 혼종판옥선을 가리키자.
“예.”
“그렇습니다!”
“꽤 잘나왔습니다. 지금 시험운행 중입니다!”
아직 시험운행이 끝난 게 아니라서, 그나 조정에도 따로 보고하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다.
‘이런...’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만들라고 한건 안 만들고, 요상한 물건을 만들었으니까.
허나 모두는 연오랑의 안색을 살피며, “다 잘 만들어졌는데, 뭐가 문제야?”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함포용 전선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 대맹선과 구조가 엇비슷한 조운선을 먼저 만들어 봤습니다. 선체 밑바닥은 신형어선의 형상을 따와서, 크기만 몇 배로 불리면 되니까요.”
“...”
“조선공들의 실력도 키울 겸해서 말이죠.”
“위험부담은 덜고, 그게 싸게 먹혔다는 거군?”
“예. 뭐...”
매섭게 꼬집는 말에, 곽영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머리만 긁적였다.
세종이 여기에 깊은 관심을 갖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실패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나.
최대한 안전하게 가다보니, 오히려 조운용인 혼종판옥선을 만드는 게 가장 속편하고 쉬웠다.
‘그래. 이거라도 만든 게 어디냐.’
아무리 미래의 어설픈 지식을 알려주고, 하동에서부터 이미 연구를 진행해 왔어도, 진짜 제대로 인력과 재원을 갈아 넣은 건 몇 년 지나지도 않았다.
이런 성과라도 낸 게 대단한 거지.
“좋아. 앞으로는 이곳에선 신형 조운선을 만들자. 지금의 대맹선보다 대충 2배정도 크니 효과는 확실하겠지.”
“예.”
“그리고 우린 겨울동안 이주준비를 하자.”
“옙?”
“예에!?”
그의 뜬금없는 선포에, 모두는 하나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껏 이 허허벌판을 개간하고 선소를 만드느라 생고생을 했는데, 뜬금없이 갑자기 다른 곳으로 가자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모두의 눈빛을 받아낸 연오랑은 베시시 웃으며, 허나 반문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주상전하의 뜻이다. 우린 원산으로 간다.”
“...!”
“...?”
“그곳에서 앞으로 신형 전선과 수송선을 만들어, 착호군3기를 보조할 거다.”
그의 뜬금없는 선포에, 모두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
*****
조선 32년. 세종 5년.
“후하.”
“날이 생각보다 좋군요.”
“그러게 말이야.”
상쾌한 입김을 토해낸 이자경은 행수의 말에 히죽 웃으며, 저 멀리 펼쳐져 있는 푸르른 산맥과 들판을 바라봤다.
이제 막 겨울이 끝난 터라 산세의 그늘진 곳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보였고, 흰색과 녹빛이 뒤섞인 탓에 오히려 그게 꽤나 멋져 보였다.
‘저길 오르는 건 다른 이야기지만 말이야.’
그는 언제가 됐건 고생하게 될 이들을 떠올리며, 가볍게 묵념을 날려줬다.
시야를 당겨 보자, 행상의 주위를 감싸고 천천히 이동하는 백여기의 기마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위압스러운 검은 두정갑을 입고 있었고, 맹수피 갑옷을 입은 이들이 유독 눈에 도드라졌다.
손아귀엔 활과 화살을 쥐고 있긴 한데, 느긋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꽤나 여유로워 보였다.
‘음...’
호위하는 기마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려보자 이번엔 수레에 짐을 한가득 실은 마차행렬이 눈에 들어왔고, 그 끝에는 방울소리를 요란하게 울리고 있는 특이한 마차가 위치해 있었다.
“여러 번 봤지만,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뭐가 말입니까?”
“기리고차 말일세.”
“아...!”
행수는 이자경의 손가락 끝에 닿은 요상하게 생긴 마차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릴 때마다 방울소리와 북소리를 짤랑짤랑 울리는데, 신경 쓰이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냐.
이미 여러번 설명을 들었지만, 여전히 놀라운 건 놀라운 거지.
“저걸로 거리를 잰다니... 신기하긴 하지요.”
“물론이지. 더군다나 지리감 관원들과 함께 돌아다니게 될 줄도 몰랐고 말이야. 우리도 나름 출세한 거 아니겠어?”
“흐흐. 그러믄요.”
이자경과 행수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헤실헤실 웃음을 날려댔다.
기마행렬은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길을 계속 나아갔다.
옆에는 산세를 끼고, 반대편엔 시리도록 차가운 바다를 놓고 계속 나아갔고, 이윽고 저 멀리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먼지구름이 행렬을 향해 달려 왔는데, 먼지구름 사이에 희뿌여니 보이는 검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정찰대가 오는 모양입니다.”
“그러게. 잘 도착한 모양이야.”
이자경이 주변을 정찰하고 온 특전대가 합류하는 걸 보고 힐끔 주위를 살피자, 기다렸다는 듯이 행상들 몇몇이 달려왔다.
다만 이들 중에선 여진인이 꽤나 많은 걸까?
날도 추운데 털모자도 쓰지 않은 탓에, 머리가 밤송이와 같은 행색을 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작금에 이르러, 조선에 복속한 여진족과 그렇지 않은 여진족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머리카락 아니냐.
조선땅이 아닌 곳에 사는 여진족들 중에서도, 괜히 조선군에게 찍히기 싫어서 알아서 머리를 깎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여진인의 인솔자라도 되는 걸까?
초피貂皮모자를 쓰고 두툼한 솜으로 만든 개량한복에, 웅피가죽으로 만든 도포를 껴입은 청년이 성큼 다가왔다.
딱 봐도 더럽게 비싼 옷을 입고 있는 걸로 보아, 나름 한가닥하는 집안출신임이 분명했다.
“활아간(콜간) 여진인들이 꽤나 많이 모여 있는 것 같네만.”
“예. 전보다 훨씬 늘었습니다.”
이자경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선, 저 멀리 보이는 연기를 가리켰다.
마을에는 곳곳에서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일전에 왔을 때보다 훨씬 많았다.
“북쪽에서 온 이들도 있겠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좋은 일이긴 한데... 말이 통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군요.”
이자경은 히죽 웃으며 말을 하다가,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걱정을 표했다.
“저치들도 말이 통하니 함께 있는 것 아니겠나? 건너건너 말을 통하면 되겠지.”
“예.”
허나 청년은 히죽 웃으며 걱정을 날려줬고, 이번엔 정찰대의 보고를 받은 이가 성큼 다가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징석 중대장님.”
“이 행수. 봤나? 활아간 여진인들 뿐만 아니라, 남돌 출신도 있는 모양이야.”
“예. 봤습니다.”
이자경의 인사를 받은 이징석. 그는 히죽 웃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귀찮게 여러번 일할 필요 없이, 이번 한번에 끝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누구보다 빠르게 조선의 변혁에 동참해서, 무려 운송기업을 만들려 했던 상주 이가 출신의 서자. 이자경.
녀석은 연오랑에게 거창한 꿈을 늘어놨다가 퇴짜를 맞지 않았나.
허나 반대로 조언 또한 받았고, 언제가 됐건 때가 되면 운송기업이 태동할 날이 올 거라는 담보이자 확신을 받았다.
고령뉴타운에서 처음 만난 이후, 녀석은 연오랑의 지원 아닌 지원을 받아 전국의 행상조직과 긴밀한 연계를 취하며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다만 문제 아닌 문제가 발생했다.
지금 조선의 무역은 의주에 편중되어 있고, 그곳은 조정의 관리는 물론이고, 나름 빵빵한 자본력을 가진 의주상인집안이 자리 잡고 있지 않나.
빈약한 자본을 가진 행상이 주도적으로 끼어들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그저 전처럼 상인집안 혹은 조정이 던져주는 일거리만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이걸로 만족하고, 포기할 수 있나.
남들이 생경하게 생각하던 자본유학을 뿌리 깊게 받아들여, 실천에 옮길 정도로 포부가 넘쳐나던 녀석 아니냐.
그는 시선을 돌려 다른 활로를 찾았다.
바로 동북면의 경원이다.
지금 역사에서 동북면은 원래 역사와 판이하게 달라지지 않았나.
명의 멸망, 태조와 태종의 화해로 인해 동북면 여진족의 이탈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연스레 6진이라 불릴 지역은 조선땅이나 마찬가지고, 직접통제 방식으로 바뀌자 여진인이 아니라 아예 조선인이 되었지.
이자경과 이야기를 나눈 김호가 바로 바뀐 역사의 산증인.
녀석은 원래 역사에서 경원을 공격했던 여진부족장 김문내의 손자로, 본래는 조선의 보복으로 인해 태어나지도 못했을 녀석이니까.
아무튼 의주에서 무역이 시작되자, 거의 모든 여진족의 시선이 의주로 쏠렸으나... 동북면의 여진인들이 의주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고 넘어야 할 적대부락이 많지 않나.
당연히 동북면에도 무역도시가 생겨났고, 그곳이 바로 경원이었다.
다만 이곳은 중국상인이 오지 못하고 조선-여진만 거래하는 곳.
당연히 큰 상인집안도 없고, 물동량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자경은 이곳을 선점해서 덩치를 불리기로 마음먹은 거지.
그렇게 연오랑의 조언을 받들어 꾸준히 말을 수입하고, 조선물산을 수출해 왔는데...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착호군3기가 창설되고 원산에서 훈련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연오랑의 눈길과 손길이 닿으면서 함길도가 요동치기 시작한 것.
그에 발맞춰서 이자경을 비롯한 몇몇 상인들은 경원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아예 두만강 너머의 여진부락에게 찾아가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한 거지.
그것도 이렇게 특전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말이다.
“진짜 오는 구려.”
“그럼 거짓인 줄 알았소?”
“내 말이 맞잖소. 얼마 전에도 영고탑 인근까지 왔다갔다고 하지 않았소.”
“끄응...”
조선군과 무장상단이 모습을 드러내자, 마을에 몰려 있던 여진부족장들의 목청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이징석과 이자경의 예상대로, 이들은 솔빈강 유역의 남돌이라 불리는 여진족, 연해주 일대의 활아간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명이 있을 시절엔 모련위에 속해 있기도 했고, 미래에는 건주, 야인여진에 속해 있기도 했던 부족인데...
지금 역사에선 그렇게 큰 부락으로 뭉치지 못하고, 온갖 작은 부족이 난립하는 상태였지.
이유야 별거 있나.
어지간히 큰 부족은 이미 조선에 다 달라붙거나 두들겨 맞았고, 조선이 경원에서 무제한에 가까운 무역을 허락하자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부락을 일궈나갔으니까.
문제라면... 조선이 두만강을 건너와 본격적으로 훈춘을 개발하고, 무장상단이 여진부락과 직접 거래하면서 부터다.
물론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찾아오니 당연히 편하지.
하지만 옛 건주위의 여진부락이 어떻게 됐던가?
무장상단이 지나다닌 후에 이만주를 필두로 한 올량합 부족은 다 작살났다.
북진토군에 의해 그간 조선에 애매한 자세를 취하던, 송화강 하류의 혐진 올적합 부족 중 일부가 갈려나갔다.
이들이 느끼기엔, 검은 두정갑을 껴입은 무장상단이 돌아다니기 시작한다는 건, 이제 곧 조선군이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신호나 다름없었지.
하지만 대체 무슨 수로 저항할 수 있을까?
여진인들은 조선군이 북원잔당과 북직례를 두들겨 팼다는 소식을 들었고, 기세등등하게 힘을 키우던 올량합 부족을 작살낸 걸 두 눈으로 봤다.
힘으로 저항한다는 건, 쉽게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지.
헌데 조선의 움직임이 살짝 애매모호했다. 무장상단이 돌아다니기 시작한지 1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조선군이 움직이진 않았으니까.
서서히 마음이 풀어지는 한편, 반대로 더욱 마음을 졸이는 이들이 있기 마련.
이곳에서 거래하기 위해 모인 부족장들의 목소리가 높아진 건, 다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