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챕터26. 변화하다 (2)
“다들 경원과 훈춘에 드나들었으니 알 것이오. 언제가 됐든 조선군이 올게 분명하지 않소!”
이들 모두 경원과 훈춘에서 거래를 해오지 않았나.
본래 훈춘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해탄고옥노, 해탄탑사, 동귀동 등의 부락들은 조선군이 밀고 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선에 복속되었다.
이들 모두는 아예 조선식으로 이름마저 바꿔서, 하루아침에 낯선 사람이 되어버렸지.
그리곤 이들 눈에도 허허벌판이었던 훈춘이, 하루가 다르게 개간지로 변모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일평생 본적도 없는 거대한 배가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 온갖 물산을 토해내는 걸 보며 기겁해서 나자빠질 정도였지.
“그렇다 한들, 대체 뭐 어쩌자는 거요? 다른 곳으로 가잔 말이요? 대체 어디로? 언제까지?”
누군가 억울한 성토를 토해내자.
“오히려 나는 조선이 오는 걸 찬성하오!”
“맞소! 나도 그러하오!”
반대로 날카롭고 어색한 억양의 여진부족장들이 목청을 높여댔다.
“끄응...”
“음...”
여진부족장들은 살기등등한 눈빛을 뿌리다가도, 그들의 행색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려댔다.
이들은 그들 눈으로 보더라도, 복색이 남루하고 꾀죄죄해 보였으니까. 제대로 된 옷도 아니고, 어설픈 가죽옷을 덜렁 걸치고 있었다.
연해주 일대와 우수리강 일대에 사는, 훗날 야인여진이라 불리는 이들은 요동과 만주의 여진인들에게도 한수 아래로 취급받는 이들 아니냐.
그들 눈에도 이들은 싸움질만 잘할 뿐, 무식하고 야만적인 놈들.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이들이니,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래서 야인여진은 건주여진, 해서여진에게 두들겨 맞고 흡수되거나 조선에 귀화하지 않았나.
지금 역사에선 조선과 야인여진과의 관계가 더욱 빠르게 진전되고 있었다.
이들 입장에선, 항상 아웅다웅하던 여진부락보다 몇 배는 세련되고, 발전된 조선의 신문물이 알아서 찾아왔으니까.
사탕을 처음 맛본 어린아이마냥, 눈이 뒤집히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귀화해서 이주라도 하겠다는 거요?”
“못할 건 뭐요?”
“그럼 진작하지! 왜 그러고 있소?”
“우리는...!”
애초에 하나로 합쳐지지도 못할 이들인데, 열심히 목청을 높여봐야 답이 나올 리가 있나.
이들은 무장상단이 도착할 때까지 말싸움만 계속하다가, 결국 언제나처럼 결말 없는 토론을 끝마치고 우르르 몰려나왔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안 드는 거지만, 혹시 또 아나? 괜히 늦게 갔다가 찍힐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럴 거면 뭐 하러 토론을 했는지 모르겠다만, 다들 아양 떠는 것 마냥 조선관리를 향해 한걸음에 달려갔다.
무장상단이 도착하자, 안 그래도 북적북적했던 마을은 순식간에 장터로 탈바꿈 했다.
이자경이 가져온 면포와 소금, 절인생선, 차, 식기, 조리도구, 실과 바늘 같은 생활물품 등이 좌판에 깔리기 시작했고, 여진인들은 알아서 자리를 잡고 물물교환할 물건을 챙기기 시작.
특전대는 마을 한쪽에 진을 세우고 앉아, 우두커니 여진부락민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음...”
“왜 그러십니까? 중대장님.”
“그냥. 웃겨서 말일세.”
이징석은 자기도 지어지는 쓴웃음을 애써 지워냈다.
나름 잘 적응해서 특전대 중대장으로 승진한 이징석 아니냐. 철없던 시절의 그는 이미 원정을 갔다 오면서 죽은 거나 다름없다.
어릴 적인 그저 다 때려잡아야할 야인이라 생각했던 여진인인데... 지금은 그들의 선망 섞인 눈길을 받으며 위무하고 있으니... 세상이 바뀐 건지, 자신이 바뀐 건지 모르겠다.
‘둘 다겠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석탄은 가져왔지?”
“예.”
이징석은 쓴웃음을 던져내며 물었고, 소대장들은 “그건 왜 묻냐?”라는 듯 바라봤다.
“더러워서 말이야.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욕탕과 한증막이라도 짓는 게 어떠냐? 아무리 여진 마을이라고 해도, 어째 사람이 넘쳐나는 군숙영지보다도 못해?”
“에이... 숙영지와 비교하면 되겠습니까.”
소대장들은 손을 내저으며 항변했다.
군숙영지는 오래 사용할 수 없어서 그렇지, 적어도 토대와 뼈대만큼은 어지간한 마을보다 훨씬 잘 만들어지지 않나.
토굴보다 조금 나은 집에서 사는 야인여진의 마을과 비교하면, 오히려 실례다.
“그야 그렇지만... 욕탕은 힘들어도, 한증막은 진짜로 지어 놓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공구는 가져왔잖아?”
“그럴까요?”
“어. 다들 씻긴 씻어야 하잖아.”
그간 북변에서 지내면서, 이젠 한증막 없이는 못 살게 된 중대원들 아니냐.
위생은 둘째치고라도, 추위를 떨쳐내고 기분전환을 하는데 한증막보다 좋은 건 없다. 오죽했으면 훈춘의 여진인들이 사족을 못 쓰는 게 욕탕과 한증막이었다.
이들이 농담반 진담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여진인 아이들이 겁도 없이 조선군 근처를 얼쩡거렸다.
딱 봐도 신기해 보이고, 그냥 보기만 해도 겁에 질릴 맹수갑옷을 입고 있지 않나.
애들뿐만 아니라, 여진 청년들 또한 눈을 반짝여댔다.
그래서 일까? 이징석과 소대장들이 손짓하자 아이들과 청년들 몇이 냉큼 달려왔고, 어눌한 조선말을 늘어놓았다.
“그... 한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오? 조선말을 잘하는데?”
다들 한바탕 웃음이 터졌고, 청년은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만져보게.”
“감사합니다. 장군.”
“하하.”
“장군이라니, 중대장님 언제 승진하셨습니까?”
“어허. 경을 칠 소리!”
이징석은 정말 사람이 바뀌었는지,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 부하들의 농담을 실실 웃으며 넘겼다.
청년과 꼬마들은 이징석이 훌쩍 벗어준 호피가죽을 연신 매만지느라 정신이 팔려서, 그들이 웃고 있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한번 물꼬가 트여서 일까? 여진인들은 중대원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들의 무구를 한번이라도 만져보길 희망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창, 활 따위와는 비교조차 못할 고급품이었으니까.
“이걸... 사는 건 무리겠지요?”
“당연한 말이다. 조선군에 들어오면 구할 지도 모르지?”
“예에...”
말이야 쉽지, 조선에 귀화하는 게 그리 쉽게 결정할 일인가. 청년들은 그저 부러운 마음을 숨기는 게 고작이었다.
마을 주민들이 서로 어울리기 시작할 때.
몇몇 관원들은 특전대원들과 함께 해안가를 살피며 걷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뒤를 따르는 건 기리고차와, 흡사 지휘망루마냥 높게 마차 위에 단을 만들어 놓은 괴상한 마차였다.
단상탑 위엔 앳된 얼굴이 역력한 소년관리가 앉아서 수평선과 산세를 번갈아 바라보며, 열심히 목탄으로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그 후엔 다시 세필로 조심스럽게 덧칠하며 지도를 완성.
“후...”
뻐근한 허리를 펴고 숨을 들이키자, 쌀쌀할 정도로 시원한 바닷바람이 코끝으로 파고들었다.
“다 끝났나!?”
“예!”
소년 관리는 사다리를 타고 얼른 내려와, 지도를 건네줬다.
“해안선 측지까지 마친 건가?”
“예.”
아래에서 지켜보던 관리는, 퍼즐조각처럼 나눠져 있는 지도를 이어 맞추며 제대로 그려졌는지 확인했다.
“오... 잘 만들어졌군?”
“그렇죠? 헤헤.”
이회의 아들인 이춘보와 소년 최경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보며, 서로 웃음을 날려댔다.
최경은 원래 역사에서 안견과 함께 인물화로 유명해진 화원이지만, 지금은 그 꿈을 지도를 그리는 쪽으로 펼치고 있었다.
원정군을 따라가 요동과 몽골초원의 지도를 그리고 온 이춘보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지도제작자였고.
‘내가 여기까지 올 줄이야.’
‘와... 여기가 조선땅이 될 거란 말이지?’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헤실헤실 웃음으로 세어나왔다.
조선과 고려를 통틀어, 이렇게 먼 곳까지 나와 지도를 만든 인물이 누가 있을까.
이번 일은 나름 사서에 남을 정도의 대업 아니냐. 비록 북방에서 개고생을 해야 하지만, 지리감 소속들에게는 꿈과 같은 작업이었지.
다만 소년 최경의 머릿속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앞으로도 한참 더 가야하지요?”
“그렇다만?”
“음... 헌데 이 땅을 얻을 필요가 있을까요?”
“글쎄...”
이춘보는 최경의 엉뚱하면서도 당연한 질문에, 자기도 모르게 말을 흐렸다.
솔직히 말해서 그 자신도 확신을 갖지 못했으니까.
조정신료들은 “북방의 고토를 되찾자!”라는 막연한 의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요동과 서간도 지역을 말하는 거였지, 동북면의 연해주를 포함하는 개념은 아니었다.
조정관리들은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야만적인 여진인 땅을 굳이 우리가 가질 필요가 있나? 거긴 농사도 제대로 못 짓는 땅이잖아?”
“안 그래도 조선내지에 쏟아 부을 재원도 부족한데, 그냥 여진인들이 준동하지 못하게 압력을 넣으면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연오랑은 당연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착호군 특전대와 무장상단을 밀어 넣어 정찰을 이어가자 결국 반전이 일어났다.
“두만강 너머에 괜찮은 땅이 나올지 누가 알았겠나. 앞으로도 계속 가다보면 또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지.”
“흐응. 그건 그렇네요.”
최경은 일견 말이 되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험준한 함길도의 산세가 두만강 너머로도 계속 이어질 줄 알았는데, 농사가 가능하고도 남는 훈춘의 대평원이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을까.
여진부락이 살기 힘들다고 해서, 재원과 인력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조선마저 살기 힘든 조건은 아니었던 것.
조정의 선입견이 바뀐 건 당연한 일.
더불어 직접통치를 천명한 이상, 조선의 관리가 두만강 너머로 진출하는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어디까지 가야할까요?”
“여진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솔빈강 하류가 빠져나가는 만이 있다고 하는데, 그곳까지 가야하지 않을까 싶네만... 용연군 대감께서 따로 말씀해 주시지 않겠나?”
“예...”
최경은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연오랑을 상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다시 훈춘으로 되돌아가면, 다음 명령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어떤 인물일까?’
소년은 흡사 이상과 같은 연오랑을 떠올리자 가슴이 뛰었고,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지난 원정 때 용연군 대감을 가까이서 뵈셨죠? 어떤 분이신가요?”
“글쎄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존경스런 인물은 아닐 텐데... 아닌가? 특이한 걸로 치면 조선 제일이긴 하겠군.’
이춘보는 천진난만한 소년의 물음에 피식 웃음이 세어나왔다.
최경의 장밋빛 상상을 깨줘야 할지, 아니면 말아야 할지 고민이 들어서다.
여진족장들은 마을 한쪽에 위치한 확 트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인여진의 마을에 뭐 얼마나 거창한 건물이나 집이 있겠는가. 대인원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없었고, 차라리 화롯불을 피워놓은 마을 밖 공터에서 만나는 게 속편했다.
“음...”
“어르신 아드님이 오셨군.”
“그러게 말일세.”
여진족장들은 온몸으로 위엄을 뿜어내며 다가오는 이들을 보고, 조용히 귓속말을 나눴다.
손잡이가 굽은 한손직도를 양 허리춤에 차고, 다른 한손에는 장도를 쥐고 있는 훈련대원들. 그들은 매서운 눈빛을 숨기지 않고 여진족장들을 노려봤다.
호피갑옷을 입은 훈련대원의 호위를 받으며 등장한 인물은 이효량과 김호.
그들은 엉거주춤 일어나서 반기는 여진부족장들의 인사를 받으며, 접이식 의자인 교의交椅에 거침없이 엉덩이를 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군.”
“편히 앉게.”
이효량은 손을 내저으며 모두의 환대를 가볍게 물렸다.
그는 이지란의 손자로, 바뀐 역사에 휩쓸려 인생이 바뀐 인물이었다.
이지란의 아들인 이화영도 개국공신이었고, 그는 조정의 요직을 역임하다가 이지란이 태조과 함께 불교에 귀의해 생을 마감할 때, 그의 수발을 들었었다.
그 후엔 이지란의 뒤를 이어받아 조정의 관리인 동시에, 동북면 여진인의 정신적 구심점 중 하나이자 기둥으로 지내다가 역사보다 빠르게 세상을 떠났다.
그런 이화영의 뒤를 이어 받은 게 장남인 이효량으로 원래 역사에선 조정관리가 되었어야 했으나, 지금 역사에선 한성의 조정관리가 아닌 동북면에 머물면서 여진인들을 통제, 감독하고 있었지.
여진족장들이 이효량을 알아본 건, 조선이 두만강 너머로 영역을 확장하기 전부터 꾸준히 안면을 익혀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 순식간에 시장통이 되어 여진족장들이 목청을 높였고, 저 먼 북쪽에서 온 여진인들도 있는 만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여기...”
이윽고 정리가 되고, 여진인들이 무두질 되지 않은 생가죽 및 인삼을 비롯한 토산물을 바치려 하자.
“공물과 예물은 필요 없네.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이효랑은 냉랭한 목소리로 단칼에 잘라냈다.
조선이 공물과 조공무역을 끝낸 게 언젠데,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행동인가.
허나 먼 곳에서 온 여진족장들은 “요동관리는 넙죽넙죽 잘만 받던데, 얘는 왜 저러지?”하는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공물이야 그렇다 쳐도 예물조차 안 받는 게 이상했지만... 이효량은 양 옆에 장승처럼 서 있는 훈련대원을 힐끔 살피며 표정을 굳혔다.
칼귀신인 착호군 훈련대원은 연오랑의 직속제자나 다름없는 이들 아닌가.
예물이라 쓰고 뇌물이라 읽는 물건을 잘못 받았다가, 연오랑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떻게든 여수구죄법을 끌어와 청해이씨 집안을 작살내 놓을 거다.
공신집안이라고 봐주지 않을 것도 당연한 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