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챕터26. 변화하다 (3)
“궁금한 게 많다고 들었는데... 어떤 건가.”
이효량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온갖 질문이 흘러나왔다.
이것저것 많이 있긴 한데, 주된 주제는 “조선이 대체 어디까지, 혹은 언제 올 것인가.”라는 점이었다.
“어디까지 확장할지는 나도 모르네. 아마 갈 수 있는 곳까지 가겠지. 우수리 강까지 갈 수도 있고, 미타호까지 갈지도 모르지.”
“음...!”
“오! 저희 부락은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상했던 대답이 정확히 나오자, 누군가는 신음을 흘리고 또 누군가는 환호를 내질렀다.
환호하는 이들은 당연히 야인여진에 속하는 이들.
주로 수렵생활을 통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이들인 만큼, 풍족한 조선물산에 눈이 돌아가는 건 당연한 일.
허나 귀화해서 조선땅으로 이주하는 건 부담스럽고 두렵다.
이 모순적인 처지에서, 그들은 꽤나 발칙한 상상해봤다.
“이 땅이 조선땅이 되고, 우리가 조선인이 되면, 고향을 떠날 필요 없이 조선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품게 된 거지.
물론 강력한 통제를 받는 조선생활이 녹녹치 않을 건 분명한 일.
허나 적어도 먹고살 걱정, 다른 부락에게 공격받을 걱정이 없어지는 것만으로도 지금보단 나은 상황 아니냐.
이효량의 발언에 쌍수를 들고 환호할 수밖에.
“언제 진출할지는 나도 모르네. 지금은 훈춘에 집중해야 할 때니까.”
“음...”
“끄응...”
그가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미 눈앞에 펼쳐진 현실 때문에, 다들 신음만 흘려댔다.
압도적인 인력과 방대한 물산, 선진농업기술이 풀리기 시작하자, 두만강과 해안가 일대의 여진부락은 죄다 훈춘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곳은 미래에 슬라반캬라 불릴 지역으로, 두만강과 블라디보스토크 중간쯤에 위치한 곳.
여진족장들이 굳이 이곳에 모인 건, 훈춘에 빨려들어가지 않은 경계지역이자 마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조선이 동진과 북진을 계속해서, 우수리강이나 미타호 근처에 훈춘과 같은 도시를 더 만든다면?
그땐 정말로 야인여진을 다 쓸어담을지도 모를 일이고, 부족장들이 힘을 잃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게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운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여진부족장들의 고뇌 섞인 얼굴에서 근심을 읽어낸 걸까? 이효량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자제들은 선발했나?”
“옙! 물론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시나 기다렸던 질문이 나와서 인지, 모두의 눈이 반달눈이 되면서 가벼운 웃음이 서렸다.
“우리와 함께 훈춘으로 갔다가, 훈춘에 모인 이들과 함께 남하할 걸세. 미리미리 채비를 해두게.”
“예. 장군.”
“염려마시지요.”
‘하지만... 예전과 많이 다를 걸세.’
이효량은 희희낙락하는 이들을 보며, 속마음을 숨기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도 여진인을 위무하기 위해, 유력부족의 혈족들을 조선의 갑사로 특별 채용해서 궁궐을 숙위하는 경우는 꾸준히 있어왔었다.
다만 지금은 중앙군이 아니라, 원산의 착호군으로 가게 될 텐데... 그곳 생활은 이들 생각만큼 녹녹하지 않을 거다.
‘몸 쓰는 거나, 머리 쓰는 거나 말이야.
이효량은 계속해서 여진족장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이윽고 모두가 거래를 하기 위해 흩어졌다.
자리에 남은 건 이효량과 김호. 어느새 다가온 이징석과 이곳 마을을 다스리는 보을호대였다.
과거 보을호대는 모련위지휘에 임명될 정도로 나름 강성했던 부족장이자 조선과도 인연이 깊었는데, 어허출과 이만주에게 두들겨 맞고 이 먼 변방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이곳에서 야인여진을 흡수하면서 부족을 키우며 권토중래를 노렸으나, 조선이 이만주를 쓸어버리면서 완전한 친조선파로 돌아서게 됐지.
그 후 조선이 훈춘으로 진출하면서부터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지금껏 대가를 받고 조선을 대신해 정보를 수집해 왔다.
“허면... 우수리강과 미타호 일대로 진출하는 게, 그리 힘들지 않다는 거군?”
“예. 어르신. 감히 조선군을 건드릴 부락이 없고, 모두가 조선의 물산을 바라고 있는데... 거래를 마다하는 부락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때, 이징석이 날카로운 눈빛을 숨기지 않고 되물었다.
“조선을 적대시하는 부락은 있소? 그들 성질머리를 봐선 분명 정신 못 차리는 자들이 있을 텐데...?”
그가 지금껏 봐온 여진부락이 몇인가.
야인여진들은 짐승과도 같은 속내를 품고 있어서, 약해보이거나 혹은 알면서도 욕심을 참지 못하고 실수를 저지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건... 솔직히 모르겠네.”
보을호대는 야인여진을 복속시키며 힘을 키우지 않았나.
이징석의 우려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가며 사용하던 조선이, 재작년부터는 과할 정도의 유화책을 쓰고 있었다.
이 선진문물에 눈이 돌아간 부족들이 적지 않고, 욕심을 내다가 조선군의 말발굽에 밟힌 이들 또한 있는 터라... 하나로 뭉뚱그려서 말하긴 힘들었다.
“헌데... 정말로 동쪽으로 더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곳은 그저 얼어붙은 바다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솟은 거목들뿐인데...”
보을호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알면서도 되물었다.
그나마 살기 좋은 땅을 놔두고, 왜 자꾸 변방으로 가려고 하는 걸까? 거긴 눈과 나무, 짐승밖에 없는데 말이다.
“난들 알겠는가. 조정의 뜻이 그러하니 움직이는 것뿐일세.”
“예...”
“그보다... 동쪽으로 가다보면, 항구로 삼을 만한 곳이 있는 건 확실한가? 자네는 두만강 하류의 녹둔도와 조산에 가봤을 터, 적어도 그곳과 비슷해야 할 걸세.”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곳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흐음.”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음을 흘려댔다.
두만강 하류에는 이미 신식부두와 항구가 건설되어, 원산에서 넘어온 경상도의 물산이 끊임없이 집적되고 있었다.
보을호대는 생각지도 못한 조선의 저력에 기겁을 하면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지.
그곳을 눈여겨보고 온 만큼, 비교해 봤을 때... 저 먼 동쪽에는 조산포구보다 더욱 입지 좋은 곳이 있었다.
“...”
“...”
잠시간의 침묵이 맴돌다가, 이효량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의 고민과 우려를 알고 있네. 허나... 막아 세울 수 없는 파도일세.”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보을호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공치사를 받아넘겼다.
조선이 이곳까지 진출하면 그가 누려왔던 권력은 없어질 거고, 어쩌면 부족이 찢어져서 이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허나 거부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우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노릇.
“그래서 자네 아들들을 일찍이 조선내지로 불러들이지 않았나. 이걸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해주면 좋겠군. 자네도 언제까지 변방의 야인으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것 아닌가.”
“예...”
“자네 아들들이 잘 수학하고 나면, 진짜 조선의 관리가 되어 이 황량한 땅이 아니라 조선내지에서 관직생활을 할 수도 있네.”
“...”
보을호대는 나름 조선과 연이 깊었고, 이러한 방침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거지. 어찌 보면 자신의 권력을 넘기고, 자식의 앞길을 열어준 셈이니까.
“자네뿐만 아니라 앞으로 복속할 모든 여진인이 마찬가지니, 자네가 나서서 잘 다독여주게. 특히나 우수리강과 미타호에 사는 여진인들은 조선에 대해서 풍문으로만 들었을 게 분명.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조율해주게.”
“걱정 마시지요. 어르신.”
보을호대는 이효량의 온기 어린 말에, 깊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
몇 기의 기마가 추수를 이제 막 끝낸 밭을 달려 나갔다.
이윽고 인적도 드물고, 황량할 정도로 허름한 마을에 도착.
일행은 목적지가 정해진 듯,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말머리를 마을 한편에 위치한 오래된 고택으로 향했다.
“자네들은 여기 있게.”
“예. 영감.”
성산부원군 이직. 그는 처량할 정도로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고택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스스로 되물어보지만, 답을 찾을 수가 있을까. 그저 나오는 건 한숨뿐이다.
고작해야 3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고택 안으로 들어가자, 피곤에 절어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한 중년인이 그를 반겼다.
으레 생각하는 상갓집의 풍경과는 사뭇 달라서, 이직은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닌 말일세.”
이직은 사내를 위로하곤, 조용히 향을 피우고 친우의 넋을 달랬다.
‘자네도 가고 말았군.’
오래전에 동문수학 했던 친우의 얼굴과 함께 했던 시절의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고려말에 이른바 신진사대부는 조선건국에 동참하는 관학파와 반대 혹은 거부하는 사학파로 쪼개졌다.
이직은 관학파에 속했고 친우는 낙향해 멀어졌으나, 동문수학한 정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허나 그런 인연도 이렇게 끝나고야 말았다.
잠시간의 위로를 마치고, 사내와 이직은 자연스럽게 마당 한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갓집이건만 찾아오는 사람 한 명 없어서, 싸늘한 기운만 맴돌지 않나. 둘은 눈치 보지 않고 아무 곳에나 자리 잡고 앉았다.
“상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
“아버님께서는 더 이상 고생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왕실의 전례를 본받아 49일상으로 하라 하셨습니다.”
“음...”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는 3년상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시더군요.”
“후우...”
이직은 한편으론 이해가 되면서도, 또 다시 씁쓸함이 밀려왔다.
그 누구보다도 올곧게 신념을 고수하던 친우마저도,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지고 말았으니까.
지금 역사에서 조선의 장례 방식은 유학식과 불교식이 합쳐진 형태 아니냐.
원래 역사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건, 태조 때문이었다.
태조가 사망할 때엔 운석핵꿀밤의 여파가 정통으로 조선을 흔들고 있던 시절.
태조는 태종과 화해한 후. 거의 승려마냥 불교에 귀의한 삶을 살았고, 자신의 장례 또한 불교식으로 거행하라 유언을 남겼다.
허나 온갖 부침에 시달리던 그 시절에도 조선은 유학이 국시였는데, 앞으로 두고두고 전례로 남을 왕실의 첫 장례를 불교식으로 한다고? 이 문제는 당연히 엄청난 격론을 불러 일으켰지.
허나 태조의 시체가 점점 썩고 있는 마당에, 말싸움을 오래할 수 없는 법.
그리하여 태종은 불교의 49재를 끌어와 유학식으로 상을 치르는 49일상을 만들어냈다.
이건 뭐 말도 안 되는 혼종이었지만... 골육상잔을 용서해준 태조에게, 마음의 빚이 크게 남아 있는 태종이 아니냐.
그로서는 태조의 유언을 헌신짝처럼 버릴 수가 없었고, 운석핵꿀밤의 여파로 유학식 장례방식인 3년상에 대한 의심이 피어오르는 상황.
어떻게든 타협점을 만든 결과가 49일상이었다.
사실 말이 좋아 3년상이지... 3년 동안 무덤 옆에 초막을 지어놓고 살면서, 제대로 된 음식도 못 먹고, 때 맞춰서 곡을 하다보면 몸이 망가지는 게 당연한 수순.
원래 역사에서도, 3년상을 지독하게 고수하다 골병이 든 조선왕족이 적지 않다.
3년상이 힘든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고, 유학자 집안에서도 합법적으로 회피할 수단이 생긴 걸 반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물론 유학을 배운 집안이 이런 고민을 하는 시절에도, 민간백성들은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른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
그 결과. 지금 와서 3년상을 고수하는 이들은 “꼰대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과시하는 것도 아니고... 왜 사서 고생이야? 있을 때나 잘하지.”라는 눈초리를 받았다.
더불어 이걸 고수하는 이들은 조정에서 밀려난 사학계열, 근본성리학 ver4.0에 속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눈총을 두 배로 받을 수밖에.
“광우에게 제자들이 적잖게 있었을 텐데... 어찌하여?”
“... 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어르신. 주상전하께서 등극하시고 나서부터 많이 바뀌었지요.”
“으음...”
사내가 쓴웃음을 머금자, 이직은 속내를 읽어내고선 다시금 침음을 흘렸다.
‘정말로 끝이 왔구나. 녀석이 했던 말이 마냥,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었어...’
이직은 오래전 연오랑과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솟았다.
그 시절 재기발랄했던 녀석이 지금은 올려봐야 할 용연군이 되었고, 허풍이자 과장이라 생각했던 녀석의 주장이 현실이 되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나름 이름난 학자인 친우에게 제자가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이미 조정에서 완전히 밀려나버린 근본성리학 ver4.0계열을 배우려는 이가 누가 있을까.
관직에 오르는 길이 어려워야, 이른바 명문 스승과 사학이 이름 날리기 마련.
허나 지금은 글줄 좀 읽을 줄 안다면, 죄다 관리로 빨려들어가고 있는데... 굳이 조정에게 찍힌 이들에게 배울 필요가 있을까.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예. 변해도 너무 변해서, 꿈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제가 그간 배웠던 모든 게 부정되었으니까 말입니다. 대체 무얼 위해 그리도 경서를 달달 읽고 익혔는지 모르겠습니다.”
“...”
이직은 뭐라 해줄 말이 없어, 그저 쓴웃음을 함께 짓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속이 쓰려왔지만... 저 멀리 있을 연오랑은 지금 상황을 보며 함박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 조선을 흔들어 놨던 사림세력을, 드디어 말려 죽였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