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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드 마스터-162화 (162/538)

162. 챕터26. 변화하다 (4)

이윽고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상갓집에서 나온 이직.

그는 자신을 호위하는 착호기병들과 함께 다시금 천천히 말을 몰아갔다.

그의 찹찹한 심정에 맞물려 걸음은 점점 느려졌고, 반대로 그 덕분에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이 눈에 차곡차곡 새겨졌다.

힐끔 고개를 돌려 뒤를 살피자, 제멋대로 마구 섞인 전답이 눈에 들어왔고... 다시 앞을 바라보자 네모반듯하게 구분된 신농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만으로도 모든 명분은 무너졌다.’

이유가 어찌됐던, 과정이 어찌됐던, 백성들이 보기에 사학계열의 주장은 죄다 헛소리처럼 들릴 게 분명하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을 테니까.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듯, 이직은 논두렁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넓은 흙길을 걸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른 이들은 원산에 도착했겠지?”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희가 조금 지체했으니, 채비를 끝마쳤을 겁니다.”

“음...”

착호군 소속이라지만 고위 무관도 아닌데, 다른 관리들의 움직임을 알겠는가.

말단이면 시키는 일만 잘하면 그만이다.

“그런가... 괜히 나 때문에 늦어지겠군. 빨리 가지.”

“옙!”

이직은 노익장을 뽐내며 말을 달리기 시작했고, 착호기병들은 냉큼 그와 보조를 맞추며 나아갔다.

‘음... 과연. 원산을 개발하기 시작했다더니, 벌써부터 다르구나.’

본래 조선의 행정구역상으로 원산일대는 안변, 진명, 의천현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착호군이 원산으로 모여들자 이걸 모두 통합해서 원산목으로 바꾸었다.

고작 일이년만에 현에서 무려 목으로 뛰어넘었으니 그 성세를 어림짐작할 수 있지만... 눈으로 보니 더욱 실감난다.

한참을 나아갔건만, 달라지는 게 없었으니까.

산세를 끼고 이어진 전답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모두가 하나같이 네모반듯하게 구별되어 있었다.

이따금씩 서 있는 표지석과 장승이 아니고서야,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도 힘들 정도다.

“저기가 대로인가? 이곳에서도 나무를 심는 군.”

“예. 맞습니다.”

대로 가에 나무를 심는 건, 이제 규범 아닌 규범이 된 상황 아니냐.

전례가 없던 일이건만, 이직은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자신이 낯설었다.

“여기도 이앙법이 가능한가 보군?”

“물론입니다. 제가 알기론 여기보다 훨씬 북쪽인 함흥에서도 이앙법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 그런가?”

이직이 비록 농사일의 전문가가 아니지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벼농사가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조정에서 일할 때 봐왔던 공물이나 소출에도 쌀은 그리 많지 않았고.

헌데 이젠 그런 통념도 옛말이 된 모양이다.

“날이 춥고 서리가 자주 맺어 쉽지 않을 텐데...”

“정확히는 모르지만, 품종이 다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배봉연구소와 의주연구소에서 연구를 해오지 않았습니까. 그곳엔 중국과 요동의 품종도 많이 들어와서...”

착호기병은 확신이 없어서 동료들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고위직인 네가 더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 왜 나한테 자꾸 묻냐?”라는 눈빛을 애써 숨겼다.

“그렇군.”

“예에...”

‘내가 없는 사이에, 참으로 많이 변했구나.’

그는 예전에 복직되어 외직을 떠돌며 일하긴 했지만, 아직도 따라가기가 벅찼다.

관리가 없어 난리인데, 나름 경험이 많은 이들을 그냥 놔뒀겠는가. 이직을 비롯해서 이런저런 정치적인 문제에 휘말려 낙향하거나, 유배당한 조정신료들은 모두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다만 세종의 부름은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바.

안 그래도 관리가 많아지면서, 은근슬쩍 현직 관리가 아니면 녹봉도 안주고 있는데... 이번 요청마저 거절하고 자존심을 세웠다가는 양반으로서의 지위마저 박탈당할 게 분명.

몇몇 이들이 과거를 성토하며 상소문을 올렸다가 가문이 박살나 버린 경우도 있었기에, 사실상 선택지는 없는 거나 다름없었지.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계속 나아가자, 어느새 흙대로가 사라지고 귀를 어지럽히게 만드는 자갈도로가 등장했다.

더불어 온갖 곳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함께, 저 멀리에서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거대한 도시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허허...”

“엄청나게 커졌지요? 한성까진 못 되도, 적어도 평양이나 개성과 비견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직이 감탄을 금치 못하자, 함께 있던 착호기병들 모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 거대한 도시를 직접 만든 게 본인들 아니냐.

착호군에 와서 훈련만 죽도록 할 줄 알았는데, 정작 와서 보니 칼질보다 삽질과 톱질을 더 많이 했다.

원산포구를 둘러싸고 자갈도로는 서,북,남쪽으로 크게 이어져 있었는데, 일행이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를 타고 와서 일까?

저 편 모래터에서 연신 목청을 높이는 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날도 아직 쌀쌀한데... 웃통을 벗고 웬 해괴한 반바지만 입고서, 노래를 부르며 구보중인 빡빡머리들이 있었다.

‘저들도 착호군인가? 착호군은 보통 기병훈련을 많이 하지 않나? 아니면 개편중인 기선군인가...?’

“저들은 누군가?”

“이번에 훈춘으로 귀화한 여진부족장의 자제들입니다. 고생하고 있죠.”

착호기병들은 “별거 아닙니다. 저희도 다 해봤죠.”라고 말하듯,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어쩐지...’

노랫가락에 맞춰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왠지 어눌하다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꽤 많지 않나...?”

“지금 일개 연대가 훈련하는 걸로 보이는데... 제가 알기로 3개 연대가 더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허허...”

‘저들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단 말이군. 정녕 놀랍구나.’

이직도 착호군 편제에 대해서 대충 아는 바... 3개 연대면 3천명이 넘는 숫자 아닌가. 그렇게 많은 이들이 몰려 있는 것도 놀랍고, 그들이 전부 여진인이라는 것에 한 번 더 놀랐다.

“말썽을 일으키진 않고?”

“글쎄요... 저희는 저치들과 함께 다니는 건 아니라서... 다만 이곳에 모여 있는 군병들이 얼마나 되는지 저희도 모를 정도로 많은데, 저들이 사고를 치겠습니까? 가족들이 전부 훈춘에 있으니 말이죠.”

“그건 그렇겠군.”

지금껏 사고치는 건 평범하게 귀화한 이들이었다. 조정의 관원으로 뽑혀 온 이들은 눈치를 봐서라도 오히려 사고를 안치는 편이었지. 저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렴풋이 그려지던 원산포구의 윤곽은 점점 더 선명해져갔고... 드디어 도시에 다다르자 이직의 두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오호...”

더불어 감탄도 함께 터져 나온다.

자로 잰 듯 딱딱 맞춰서 나눠져 있는 구획과, 깔끔하게 정리된 도로. 그 도로 옆으로 줄줄이 늘어서 있는 이층집과 상가들.

죄다 회백색으로 회칠이 되어 있는 탓에, 흡사 모두가 돌덩이로 만들어진 요새 같은 느낌을 줬다.

끝으로 저 멀리 보이는 도로 끝 중앙에는 성벽처럼 보이는 관아의 담장과, 산처럼 우뚝 솟아 있는 3층 관아 건물이 눈을 사로잡았다.

마지막으로 그의 눈을 부시게 한 건, 햇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회백색 도로.

“이게 그 석회도로 인가?”

“예. 물량이 많지 않아서, 관아로 향하는 대로와 부두에만 깔았습니다.”

“음...”

이직과 착호기병들은 각자 다른 과거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착호기병들은 이 허허벌판의 땅을 죄다 헤집고, 자갈도로를 깔고, 삼물회를 쏟아내던 고생스런 기억을 떠올렸고.

이직은 용연연구소에서 새로 만든 삼물회를 놓고, 이걸 육조거리에 까니 마니 하면서 아직도 논쟁 중인 조정을 떠올렸다.

다만 이곳은 연오랑이 직접 개발을 총괄했던 터라,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던 모양이다.

타다닥. 흡사 돌판을 걷는 느낌을 주는 석회도로를 따라 계속 나아가, 드디어 관아에 들어섰다.

‘허허... 이게 관아인지 노름판인지 모를 노릇이구나.’

이젠 이직에게도 익숙해진 개량 관복을 입은 관리들이,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부산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관아가 보통 큰 게 아니건만... 검은두정갑을 입은 무관들, 두정갑은 아닌데 어째 생경해 보이는 갑옷을 입은 무관들. 서류와 세필을 들고 있는 관원들이 죄다 뒤섞여 있었다.

“오셨습니까!”

이직이 우두커니 서서 구경을 하고 있자, 저편에서 안면이 익은 몇몇 관원들이 냉큼 달려왔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렇네.”

상갓집에 갔다가 왔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지금껏 이직과 함께 돌아다니다가, 먼저 이곳으로 온 청년 관원들은 멋쩍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목사는 어디 계신가?”

“지금 연주로 갈 관리들과 함께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관원들은 냉큼 발을 놀려, 이직이 놀랐던 3층 관아를 향해 나아갔다.

이 또한 새로 만들어진 건축양식을 채용했는지, 1층은 삼물회를 섞은 석벽으로 이뤄져 있었고, 2층과 3층은 벽돌과 흙벽, 나무가 뒤섞인 생경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꽤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렇군.”

“저희도 처음 봤을 때 놀랐습니다. 전부다 돌로 만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삼물회로 마감을 했다고 하더군요. 석회가 이렇게 마구 쓰일 수 있는 물건이 될 줄은 정녕 상상도 못했습니다.”

“음...”

거의 일년 가까이 동고동락하면서 전라도를 떠돌지 않았나. 이들은 직위를 떠나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해진 상태였다.

이윽고 관아의 3층에 오르자, 툇마루처럼 확 트인 공간이 등장.

고개를 돌려보자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른 동해바다와 함께, 포구에 가지런히 모여 있는 수십척의 배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그가 봐왔던 배들도 있고, 못 보던 배들, 심지어 다른 배보다 두세배는 커 보이는 배들도 있었는데, 하늘을 찌르듯 솟아난 돛대 때문에 작은 배들이 가려서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오셨습니까. 영감.”

“홍신. 오랜만일세.”

“예.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이직은 새카맣게 탄 얼굴을 하고서, 자신에게 끔뻑 인사를 건네는 박홍신을 반겼다.

“목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지요.”

“그러지.”

박홍신은 얼른 앞장섰고 툇마루를 지나 방으로 들어가자, 따사로운 햇살이 그대로 쏟아지는 거대한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간 이직이 봐오고 만들어왔던 지도와 유사하면서도 달랐는데, 탁자 위에 놓인 지도는 조선내지가 아니라 북쪽 땅이 기록되어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일세.”

병조판서에서 원산목사로 부임한 조말생과 이직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눈빛을 나누었다.

“연주목사로 부임한 걸 축하드립니다.”

“늦었지만, 자네야 말로 원산목사로 부임한 걸 축하하네.”

본래 지방외직은 조정내직보다 한수 아래로 평가받긴 하지만, 원산과 연주는 사정이 다르지 않나.

둘은 서로 공치사를 날려댔다.

“그나저나... 자네. 많이 상했군.”

“그렇습니까? 용연군 대감이 보통 인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따라가려면 몸이 고생하는 수밖에요.”

“음...”

묘한 들뜸이 섞인 조말생의 대답에, 이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에 없던 새로운 신도시를 건설해왔는데, 그 고생을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조말생의 눈 밑이 시커메진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반대로 이런 대업을 자기 손으로 이뤄내고 있으니 감격 또한 말할 수 없을 만큼 클 테고.

“다른 때라면 느긋하게 지난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지만...”

“괜찮네.”

이직은 쓴웃음을 짓는 조말생을 보며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가 낙향하기 전에 둘이 엮였던 시절이 얼마인데, 그 회포를 하루아침에 다 풀 수 있을까. 허나 안타깝게도 회포를 풀 시간조차 없었다.

“연주에서 필요할 서류와 인원은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음...”

조말생의 손짓에, 이직을 따라온 청년관리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여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철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미 용연군 대감께서 연주에 계시니 큰 문제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그 뒷수습을 하는 게 쉽진 않으실 겁니다.”

“알고 있네.”

조말생은 “가면 엄청 고생할거요.”라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고, 이직은 “그 천방지축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지.”라는 눈빛으로 받아쳤다.

“이번에 연주절제사로 부임하게 된 친구입니다. 알고 계시지요?”

“물론일세.”

조말생의 소개에 박홍신은 히죽 웃으며 둘에게 눈인사를 던졌다.

“군사에 관한 일은 홍신이 처리할 테니 크게 신경 쓰실 건 없을 겁니다. 연주에 가셔도 전라도에서 해 왔던 일을 계속하다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나도 그리 생각하고 있네. 그곳이 조금 춥긴 하겠지만 말일세.”

“조금... 추운 게 아닐 겁니다. 기타 비품은 저희가 준비해 놓은 게 있겠지만... 따로 준비해 오셨겠지요?”

“물론일세.”

‘녀석이 그리도 고생했을 테니...’

이직은 쓴웃음을 지으며, 조말생의 우려를 날려 보냈다.

경원에 새로 터 잡은 이자경은 이직과 꾸준히 연락을 이어왔고, 이직의 발령소식을 들은 그가 미리 준비를 끝마쳐 놓은 상태였다.

“이 외에는 뭐. 알아서 잘 하실 테니...”

이직의 관직 생활 짬밥이 얼마인데, 조말생의 이런저런 잔소리가 필요할까.

그가 두루뭉술하게 말을 흐리자, 이직이 대신 어색함을 풀어줬다.

“조정에서 다른 말은 없었나?”

“훈춘. 아니지. 이젠 평주로 바뀔 곳과 함께 연주에 목사가 파견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실 겁니다. 이미 나가 있는 귀화교육당과 직업교육당이 있으니, 그들을 잘 관리하시면 될 겁니다.”

주州라는 명칭이 아무 도시에나 붙지 않고, 등급 높은 목牧이라는 행정구역은 아무 곳에나 세우는 게 아니다.

앞으로 그곳을 대도시로 키우겠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으니, 죽을힘을 다해서 열심히 일해라 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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