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63화 (163/538)

163. 챕터26. 변화하다 (5)

“쉬었다가 가면 좋겠지만, 오늘은 날이 좋고 바람이 좋은 터라...”

“걱정 말게. 바로 출발할 수 있네.”

“다행이군요.”

물살과 바람은 인력으로 조종할 수 없는 노릇이건만, 조말생은 괜히 자기가 미안해서 쓴웃음만 연신 날려댔다.

도착하기 무섭게 일거리만 잔뜩 떠안은 이직은 곧장 관리들과 함께 부두로 걸음을 옮겼다.

뒤따르는 관노들만 수십명인데, 이들 모두가 지게와 수레에 한가득 서류와 비품을 싣고 뒤따르고 있었다.

부두의 한편은 비린내가 코를 찌를 정도로 신형어선이 잔뜩 몰려 있었고, 그곳 부두가엔 거중기나 녹로와 비슷하게 생긴 기구가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그 기구에 들려, 나무통에 잔뜩 채워 넣은 절인생선과, 경상도에서 올라온 온갖 물자가 하역되고 있었다.

‘저들은 기선군이겠군.’

딱 봐도 복색부터 차이가 나는데, 두정갑은 아니지만 형태만큼은 갑옷과 유사한 옷을 입고 있었다.

일반 양민이라면, 굳이 저런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을 이유가 없다.

포구를 딱 반으로 잘라서 구획을 정해 놓은 걸까?

반대편에서 하역작업에 한창이라면, 다른 편에선 뭍에서 배로 연신 물건을 옮겨 싣고 있었다.

물건도 다양해서 온갖 생필품은 당연한 거고, 이직이 보고 놀랐던 거대한 함선에는 쌀가마니와 주먹만한 석회석이 적재되고 있었다.

그 외에 탁자처럼 생겼으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공작기구, 배 한척을 전부 채울 면포와 소금. 신형 물레를 비롯한 직조기구. 삽, 곡괭이와 같은 건설공구.

이직에게도 이젠 익숙해진 신형 농기구, 기타 온갖 부수자재. 특히나 뭐에 쓰이는 건지 모를 금속부품이 배에 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짐을 가득가득 채운 배가,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오십척이 훌쩍 넘는다.

‘정말 엄청나구나. 강원도와 경상도의 세수와 물산이 전부 상왕전하께서 이끄는 착호군과 이곳 원산으로 몰린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어.’

이직은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동시에, 불연 듯 희열인지 경악인지 모를 소름이 폐부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이걸 달리 말하면... 나라 전체가 공사판이 된 조선이 전라, 경기, 충청, 황해도의 세수와 물산만으로 무탈하게 돌아가는 건 물론. 오히려 발전을 거듭할 정도로 여유가 있다는 뜻 아닌가.

지금껏 돈이 없어서 빌빌거리던 조정을 기억하던 그에게, 지금 상황은 꿈과 같았다.

‘옛 친우들의 신념이... 괜히 부서져 쓰러진 게 아니군.’

근본성리학 ver4.0계열의 유학자들은 지금 나라 상황을 보면서,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짧은 시야에 또 한번 붓을 꺾어버렸을 거다.

‘놀랍고 또 놀랍도다.’

생전 처음 보는 항구이자 부두인 만큼 놀랄 거리가 한가득.

그 중에서도 특이한 점이라면, 착호기병이 말한 것처럼 바닷가로 삐져나온 부두가 회칠한 석회부두로 마감됐다는 점.

그 부두와 선박 사이에 흡사 사다리처럼 생긴 넓적한 나무판자가 복잡하게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 위로 작은 바퀴가 달린 수레를 끌고, 노새와 조랑말이 연신 부두와 선박을 오가고 있었다.

“저건 뭔가?”

“하역과 적재를 도와주는 물건입니다. 저기 보시면 선로가 튀어나와 있지 않습니까? 저 선로를 이용하면 물건을 빠르게 실거나 내릴 수 있지요. 노새와 조랑말도 한몫하고 말입니다.”

박홍신은 이미 오래전에 원산에 와서 기선군을 조련하는 한편, 착호군을 훈련을 받지 않았나. 누구보다도 원산에 대해서 빠삭했다.

사실 저것도 연오랑이 시켜서, 박홍신이 착호군과 함께 만든 거니까.

신형조운선에서 눈을 떼고 다른 부두를 살펴보자.

날이 풀린 지 오래건만 흡사 겁이라도 집어먹은 것처럼 옷을 꽁꽁 싸매고, 온갖 집기를 지게와 손수레에 싣고 배에 올라타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음... 설마?’

“저들은...?”

“이번에 이주하는 이들이지요. 죄를 지은 이들도 있고, 기회를 찾아서 떠나는 이들도 있고, 신분도 출신도 다양합니다.”

박홍신의 살짝 들뜬 대답에, 이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지금껏 해왔던 일이, 어쩌면 저들에게 철퇴를 내려치는 일이었으니까.

복직한 이직은 지금껏 전라도에서 양전사업을 지휘해 왔었다.

양전사업은 그저 어지럽게 널려 있는 땅을, 제대로 된 구획으로 나눠 이앙법이 가능한 수경지로 만드는 게 끝이 아니다.

농지를 확정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토지소유권을 명확히 하는 일이고, 이를 위해선 대대적인 호구조사사업도 함께 진행될 수밖에 없다.

괜히 양전사업이 몇 해에 걸쳐 이어지는 게 아니었지.

문제는 이러한 조정의 정책은, 지방지주들의 재산내역을 송두리째 털어내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점.

이 과정에서 은결이 발견되기도 하고, 불법으로 점유하거나 침탈한 땅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불법으로 양민을 노비로 만들어 소유하는 경과가 드러나기 마련.

고립된 향촌사회라면 동네의 터줏대감이 무서워서, 마을 주민들이 쉬쉬하고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착호군은 물론이고 생전 본적도 없는 외지인들이 떼로 몰려와, 전라도와 경상도를 뒤집어엎고 있지 않나.

사노비나 소작인들 입장에선, 지주집안들이 작살나면 그 땅이 나라에 넘어갔다가 자신이 대출받아 소유할 수 있게 되니... 두려울 게 없는 거지.

그 결과. 조정관리들에게 적발되는 경우는 물론이고, 무수한 고소고발이 이어진 터라 양반사대부와 지방호족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원래 역사에선 강상죄를 명목으로 양반사대부나 지방호족을 보호해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역사에서 강상죄가 웬 말인가.

그런 거 없어도 여러 업적으로 인해, 왕실의 권위는 하늘을 찌른다.

세종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지, 왜 니들이 중간에 껴서 백성들에게 이래라 저래라야?”라는 자세를 고수하고 있고, 오히려 왕과 조정이 나서서 기득권층을 족치고 노비를 풀어주는 상황.

그들은 지금껏 불법취득한 재산과 땅을 몇 배로 토해내는 건 물론이고, 질이 안 좋은 경우에는 적몰 당하는 경우도 있었지.

그런 이들에게 그나마 한줄기 빛이 내려왔으니...! 바로 북방으로 이주하는 경우에는 재산을 보전해주고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

“저런 집안이 많나?”

“의주를 거쳐 서북면으로 이주한 이들은 모르겠습니다만, 이곳을 거쳐서 동북면으로 이주한 집안만 이백여 호가 넘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봐선 앞으로도 줄어들진 않겠지요.”

“지주 집안만?”

“예.”

“허허.”

박홍신은 연오랑에게 물들기라도 한 듯 “꼴 좋구나!” 하며 헤실헤실 웃어댔지만, 이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과거 태조시절에 고려의 잔재를 지우면서 향리집안의 엄청난 이주 작업이 이어졌었는데, 이 평온한 시대에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지주집안의 직계, 방계 가족들 뿐만 아니라, 노비들까지도 전부 속량됐을 테니... 한 집안당 못해도 백명에서 이백명이 넘는 인원이 올라간 셈이다.

“그 외에 면천을 대가로 올라간 노비들도 있고, 강원도와 함길도의 큰 고읍에 살던 빈민도 함께 올라가고 있습니다.”

“음.”

이 시대의 빈민은 말 그대로 땅 한조각도 없어서, 심지어 소작조차 지을 연고도 없어서 날품 파는 이들 아닌가.

그들이 새로운 기회와 땅을 찾아서, 그것도 조정의 지원을 받아 떠나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끝으로 가장 특기할 점은, 자의로 떠나는 집안도 있다는 것.

“정말인가?”

이직이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자, 박홍신은 자기도 놀랐다는 듯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기업을 설립하기에도, 그냥 땅을 붙여먹기에도 애매한 재산을 가진 집안 중에서는 이번 기회에 조정의 지원을 받아 기업을 설립하려는 집안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나 함길도에 많지요.”

“허허...”

원래 역사의 사면정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고 정교하니, 이런 괴상한 일도 생기는 모양이다.

“듣기론 함길도의 험준한 산간지역에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압록강, 두만강 너머의 북방이 더 낫다는 소문도 들려오더군요.”

“그런가...”

“가서 보면 확실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둘 모두 두만강 너머 북쪽으로 가본 적이 없는데, 어찌 확신할 수 있을까.

그저 눈으로 확인하면 그만이다.

이윽고 모두가 승선을 완료했고, 수십척의 수송함대는 남풍을 타고 순탄하게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두만강 하류에 속한 조산포구에 이르러 잠시 재정비가 있었는데, 미래에 아오지 탄광으로 유명한 경흥탄광에서 가져온 석탄을 적재하고 두만강을 거슬러 올랐다.

앞으로 평주라 불릴 훈춘을 지나서, 원래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온성이라 명명된 지역을 지나고, 원나라 때에 개원로 남경만호부라 불린 지역에 다다랐다.

이 지역은 미래에 도문이라 불리는 지역인데, 지금은 여진인들조차 살지 않는 미개간지로 남아 있었고 이주선단 역시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남경만호부를 가로지르는 가야강으로 건너타기 무섭게 다시 해란강으로 건너 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목적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

기나긴 항해를 끝마치고 도착한 곳은, 미래에는 연변 혹은 연길이라고 불리나 지금은 연주라 명명된 곳이었다.

*****

“나리. 이거 맞습죠?”

“어디 보게.”

흰수염을 멋들어지게 늘어놓은 관리는 침침한 눈을 가늘게 뜨고서, 사내가 말한 돌덩이를 유심히 살폈다.

땅에서 막 뽑아낸 듯, 돌덩이의 밑동은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런 게 한두개가 아닌 터라, 여러 곳에서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작은 빗자루와 짐승털로 만든 거친 붓으로 연신 흙을 털어내느라 바빴다.

“흐음...”

관리는 조심스럽게 돌덩이를 매만지며, 비바람에 상처 입은 돌덩이를 위로해줬다.

헌데 돌덩이는 흡사 비석처럼 각이 져 있었고, 그 넓적한 정면에는 음각으로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후...”

후후. 입바람을 불어내며 살펴보자, 확실히 글자의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 이보게들! 이거 보게!”

조심스럽게 글자를 읽어가던 그가 목청을 높이자, 옆에서 같은 작업을 하고 있던 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관리들의 나이는 두서없이 다양했으나,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나.

“와!”

“찾았다!”

모두는 석문의 글자를 읽기 무섭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물론 관리들이야 방방 뛰며 신났지만, 일꾼으로 불려온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따름.

대체 땅에서 뽑아낸 비석이 뭐 얼마다 대단한 물건이기에, 저렇게 좋아하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난들 아나.”

“관리나리들이 좋아하는 걸 보면, 뭐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여진인들이 살던 이 땅에 대단할 게 있나? 대단한 건 저런 거지.”

일꾼 중 한명이 허허벌판에서 신도시로 탈바꿈 하고 있는, 저 아래 연주 평원를 가리켰다.

“혹시 모르지.”

“흐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인부 중 한명이 조심스럽게 관리에게 다가갔다. 그나마 가장 나이가 어려보이는 청년관리의 옆구리를 조심스럽게 찔러본다.

“으흐흐. 아. 뭔가?”

“나리. 이게 뭔데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이거 말인가? 발해의 유적일세.”

“...?”

“발해랍쇼?”

모두는 “그게 뭐냐?”라는 눈빛을 숨기지 못했고,

“거. 답답하긴, 내가 설명해 주지. 그러니까...”

청년관리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말았다.

원래 역사에서 조선이 건국된 후.

고려시대의 역사 편찬이 시작됐고 이는 곧 고려국사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그 외에 동국사략과 같은 고대사와 삼국사를 다루는 역사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다만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동국사략의 경우에는 명의 눈치를 보면서, 성리학적 명분론을 바탕에 깔고 만들어진 역사서였고.

고려국사의 경우에는 너무 급하게 만든 터라, 그 시절에도 이미 이런저런 논란이 많았던 역사서였다. 완벽한 고려사가 완성된 건 결국 세종말기에 이르러서였지.

허나 지금 역사에선, 태종이 즉위하기 무섭게 운석핵꿀밤이 떨어졌다.

사상계가 분열되어 개판이 되었는데, 역사서 편찬이 웬 말인가. 당연히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고, 태종 말기에 이르러서야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지.

허나 이땐 이미 자주화의 물결이 거칠게 몰아치던 시절.

자주화를 이룩하기 위해선 자기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하지 않나.

조선의 역사, 고려와 삼한의 역사를 중화질서나 중국세계관이 아닌, 조선만의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역사서를 집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됐다.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격으로, 배봉마을 장서각에는 몰락한 사찰에서 긁어모은 온갖 고서가 있지 않았나.

태종은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한 고려사를 넘어서, 고대사와 삼국사를 관통하는 역사서를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세조 때에 편찬된 동국통감의 대대적인 확장판이, 훨씬 이른 태종시기에 벌써 편찬되기 시작한 거지.

이후 착호군이 활동하기 시작하자, 다시금 역사서 편찬은 탄력을 받았다. 어쩌면 탄력을 넘어서, 과부하가 걸릴 정도다.

연오랑이 행상을 통해 알음알음 돈으로 사들인 것과, 수많은 착호군의 행정관리가 나서서 지방가문과 사찰을 뒤져서 옛 고서를 찾는 것을 비교할 수 있나.

조정관리들과 학자들이 알지도 못했던 무수한 고서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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