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챕터26. 변화하다 (6)
그걸 죄다 긁어모아, 고조선부터 조선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이어붙이기 시작했으니... 일이 커져도 너무 커져버린 거지.
이 혼란 속에서 또 한 번의 태풍이 들이쳤다.
조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북정을 시작하면서, 조선의 역사관이 한반도를 넘어 만주로 확장된 것.
조선은 고려를 이었고, 고려는 신라의 후계자이자, 고구려의 계승자라 자부했으니 어떻게든 엮일 수 있는데... 발해가 문제였다.
이 시절 학자들이 보기에 “발해는 고구려와 이어져 있으니 우리의 역사인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중국왕조는 아니지만 그냥 인접해 있던 나라 아냐?”라고 인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일반 백성들? 그들이 역사에 관심이나 있겠는가. 발해가 뭔지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지.
헌데 호주의 개발과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의 개척, 훈춘과 연길의 개척이 이어지자 발해의 유적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연오랑과 세종은 “옳다구나!”를 외치며, 발해의 역사를 조선으로 편입시켰지.
조선이 발해의 맥을 잇고 있다면, “발해 땅이 다 조선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니까.
이걸 상대가 받아들이든 말든, 일단 명분은 내세울 수 있다.
더불어 여진인에게 “너희나 우리나 다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고, 금이 망한 이상 우리가 종주라니까? 그러니까 까불지 말고 그냥 조선인이 되라고.”라고 우길 수 있다.
물론 이 또한 한 손에 칼을 들고 다른 한손을 내밀고 있는 형국이지만...
잡든 말든, 선택과 책임은 여진인이 감수해야 할 일이고, 조선은 또 다시 명분만 내세우면 그만이지.
이 계획의 첨병에 서 있는 이들이 바로, 착호군에 신설된 금석학당. 오래된 석비를 보고, 미친놈처럼 웃고 있는 이들이었다.
“후와!”
“오...”
“엄청나군요.”
“그러게 말일세.”
보다 쌀쌀해진 탓에 옷깃을 여미며, 이직과 박홍신은 부두를 살피곤 감탄을 토해냈다.
착호군이 개척을 해온 세월이 얼마인가.
삽질과 도끼질, 톱질에는 이골이 나서, 뚝딱뚝딱하면 온갖 것을 다 만들어냈다.
조선내지에도 아직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석회부두가 강가 한쪽에 만들어져 있었고, 저 편에는 고개를 쳐들고 봐야할 거대수차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요란한 소음을 내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거대수차를 보며, 복속한 여진인들은 도깨비를 본 것마냥 침을 흘리며 멍하니 구경하기 일 수였지.
아직도 좁아서 확장을 거듭하고 있는데, 좁은 부두에 서서 하염없이 구경할 수 있나.
둘은 인파와 하역물자에 떠밀리듯 부두에서 빠져나왔고, 아직 포장되지 않은 흙길에 발을 디뎠다.
“정말 많군.”
“예... 정말 많군요.”
조금 여유가 생기자, 원산에서 올라온 관리들은 하나같이 부둣가 구석에 뭉쳐서 신도시를 구경했다.
오면서 서류로 봐왔지만, 막연히 글자로 읽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게 같을 리가 있나.
절로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이곳에 모인 군병만 무려 이만오천이 넘어가고, 복속한 여진인 등, 이주한 조선인을 다 합치면 오만 가까이 된다.
그들이 하나같이 삽과 곡괭이, 톱과 망치를 들고 설치고 있는 터라, 가만히 있어도 귀가 째질 것처럼 시끄러웠다.
‘이게 정녕 조선이란 말인가...’
이미 더 이상 놀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에 이직은 다시금 한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군력이 가장 강성했던 태조시절에도, 이런 정병을 한곳에 왕창 모아 놓은 적이 있던가.
조선내지를 뒤져봐도, 오만에 가까운 이들이 한곳에 몰려 있는 고읍이 몇이나 될까.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게, 몸으로 느껴졌다.
계속 감탄을 늘어놓으며 구경하고 있자, 하역물자를 확인하러 온 몇몇 이들이 성큼 다가왔다.
“영감! 오랜만입니다.”
“오... 자네!”
이직은 자신을 알아보는 호피갑옷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사람이 변해도 어찌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손은 굳은살이 잔뜩 배어 있고, 수염은 어디 갔는지 말끔히 밀어버렸고, 살이 쫙 빠지고 근육만 생겼는지 풍채는 날렵하지만 단단한 느낌을 줬다.
주름진 눈가를 보건데 나이를 먹은 게 분명해 보이는데, 어째 전보다 훨씬 청명해진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인. 정말 오랜만이군.”
“예. 영감.”
이곳에서도 여전히 행보관 역할을 맡고 있는 황보인은, 자신을 보고 놀라는 이직에게 히죽 미소를 지어줬다.
자기가 봐도 예전과 달라졌는데, 오랜만에 본 이직은 얼마나 놀랐을까.
“자네도 오랜만일세.”
“그러게 말일세.”
박홍신은 전보다 훨씬 위엄찬 황보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지요.”
“그럽세.”
길가에서 서서 이런저런 긴말을 할 필요 있나.
황보인은 부하에게 일을 넘기고선, 친히 관리들을 이끌며 나아갔다.
물론 심심하지 않게 설명도 곁들였지.
“이곳에서도 농사가 잘 되는가? 땅은 나쁘지 않아 보이는군.”
“수경을 통한 농사는 힘들지만 밭벼는 잘 자라더군요. 콩과 밀, 보리도 잘 자랍니다.”
“오...”
황보인은 해란강 저편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평야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
“품종이 다른가?”
“그렇습니다. 일전의 원정으로 북직례와 몽골초원의 품종을 대량으로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의주연구소에선 그걸 조선과 요동의 품종과 교접해서 개량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
“과연.”
이직은 전라도만 돌아다녔고, 박홍신은 군문의 일만 담당했었다.
당연히 북방의 농사일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해, 감탄만 늘어놨다.
“흐흐. 아실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저 먼 서역의 종자씨도 들여왔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돈만 있으면 힘들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흙에 심어서 물 주면서 가져오면 그만이지요.”
놀란 이직과 박홍신을 보며, 황보인은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가 생각해도 먼 타국의 종자씨, 그것도 특별히 관리하는 것도 아닌 흔하게 널려 있는 밀, 보리등의 작물종자를 가져온 건... 분명 신기하고 특이한 일이었으니까.
“저게 뭔 돈지랄이야?”라고 생각한 의주,호주 관리가 적지 않았지만, 연오랑은 “이게 바로 자본유학의 개화자강이다. 무식한 놈들아.”라고 외치며 밀어붙였다.
없던 걸 가져와서 기존의 것과 섞었으니, 당연히 새로운 게 만들어지기 마련.
그 결과. 이 시대엔 기전을 파악할 수 없는 이종 간의 결합이 일어나서, 북방 추위에 견디는 혼종 작물종자가 만들어 졌다.
그걸 본 관리들은 “저게 진짜로 되네?”라고 만세를 부르며, 필수품이 아닌 일상적인 물건까지도 죄다 수입해 조선의 것과 합치는 작업에 열중했다.
뭐라도 하나 쓸만한 게 만들어져봐라, 승차는 따 놓은 당상 아니냐.
“올량합 3위와 북원잔당 간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용케도 가능했군?”
“그치들이 사생결단을 내기에는 서로가 힘에 부치지 않습니까. 산발적인 교전은 여전히 있는 것 같은데, 한편으론 요동상인과의 거래는 둘 다 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사안은 보고서를 보시면 될 겁니다.
“음.”
하기야 북방 사정을 말로 다 하려면 하루아침으로 되겠는가.
어차피 알게 될 일 인터라, 이직은 애써 궁금증을 눌렀다.
일행들은 다시 고개를 돌려, 개간 중인 강 건너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조선인, 여진인, 몽골인이 죄다 뒤섞여 개미떼처럼 움직이고 있었는데... 공터에 이리저리 밧줄이 늘어져 있는 걸로 보아, 딱 봐도 네모반듯하게 구획을 나누고 있는 게 분명했다.
“복색이 다른 걸로 보아 몽골출신도 있는 모양이군?”
“이 땅에 온갖 부족이 다 섞여 있지 않습니까. 옛 명나라가 요동으로 진출할 때, 올량합 3위나 북원에 합류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몽골부락이 은근히 있더군요.”
“음...”
“허허.”
“여진인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다가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이직은 대충 어림잡아 짐작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유목, 목축, 수렵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국경이 의미가 있고, 정착지가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활동영역이 있을 뿐이지.
비록 혈통적으로 따져보면 차이가 있겠지만 생활양식이 거의 엇비슷한 터라, 만주 땅에는 여러 민족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
“흐음. 듣기론 몽골인들은 물고기를 안 먹는다고 들었는데, 보급품의 상당수가 해산물 아닌가. 괜찮은가?”
“그치들이 안 먹으면 어쩔 겁니까.”
“...”
자신감 가득하면서도 냉랭한 대답에, 이직은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하긴...’
조선이 이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데, 안 먹으면 자기들만 굶는 꼴 아닌가.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할 리가 없지.
“흐흐. 사실 그건 몽골초원에서나 통용되는 말이고, 이 지역 몽골인은 이미 여진에 동화된 지 오래라서 그런 거 따지지도 않습니다. 이 땅에 강이 얼마나 많은데, 민물고기를 안 먹어봤겠습니까.”
이직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봐서 일까? 황보인은 “농담이었습니다.”라고 말하듯 히죽 웃으며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이곳 북방은 몽골초원과 완전히 다른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고, 조금 추운 것만 빼면 조선내지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여진부족은 곡물수확량이 적어서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많이 먹은 거지, 그렇다고 곡물이나 생선을 싫어할 리가 있나.
본래 부족한 게, 더 귀한 취급을 받는 법이지.
공사판을 계속 나아가자, 저쪽에선 또 생경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의 어귀를 요철모양으로 움푹 파냈는데, 그런 곳이 한두곳이 아니다.
땅으로 움푹 들어온 물길의 양쪽은 강둑을 세워 막아놨고, 맞은편은 땅과 비스듬히 이어져서 물살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배를 땅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저렇게 만들어 놓은 거 같은데...?’
더불어 솟아 있는 둑에는, 원산포구에서 봤던 기괴하고 거대한 기구들이 박혀 있었다.
‘강에서도 저런 선소를 만들 수 있는 건가?’
“선소가 맞나?”
“예. 앞으로 이곳이 수운로의 중심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곳에는 큰 강에서 쓰는 신형조운선이 돌아다닐 수가 없어서, 새로 만든 소형수송선을 가져왔습니다. 그걸 수리하려고 만든 선소입니다.”
“음...”
어쩐지... 선소에 통나무만 잔뜩 물에 잠겨 있다 했더니, 저런 이유가 있었나 보다.
중맹선 크기의 신형수송선은 이미 오면서 지겹도록 봤으니, 이직은 앞으로 어떻게 운용될지 금세 감을 잡았다.
계속 걸음을 옮겨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연주는 커도 너무 컸고, 완전히 백지에서 시작하는 신도시인 터라, 중앙관아를 중심으로 방사형 꼴로 8개의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연오랑이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호주는 북방도시의 표준이자 시범작으로 지어진 곳 아니냐.
그 표본은 훌륭하게 결실을 맺어, 이곳 연주에서도 꽃을 피웠다.
길옆으로는 구획을 나누기 위한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아직도 흙냄새와 생나무냄새를 뿜어내는 신식 북방가옥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몇몇 곳은 기병훈련장마냥 훤하게 뚫린 공터가 있었다.
‘저걸 연무장이라고 했던가?’
이직은 원산에서 봤던 기억을 떠올렸는데... 어째 봤던 것보다 크기가 작고, 군데군데 그네를 비롯해 놀이기구처럼 보이는 것들이 보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생경한 곳을 가리켰다.
“저긴 뭔가? 착호군이 집체훈련을 받는 연무장은 아닌 것 같은데?”
“글쎄요... 아직 정확한 명칭이 정해지지 않아서 그냥 저흰 교육당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교육당? 학당이나 향교와 비슷한 건가?”
“예.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진 아이들과 토관자제들을 교육시키는 곳인데... 아. 저기 나오는 군요.”
황보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무장 저편의 큼지막한 건물에서 개미가 알을 까듯 아이들과 청년들이 우르르 뛰쳐나왔고, 공터에 알아서 서서 연신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꺄르륵꺄르륵. 아이들 웃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니, 저들이 여진인인 걸 잊어먹을 정도로 절로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용연군 대감의 작품인가?”
“당연하지요. 적어도 올해까지는 이주민들을 조정이 먹여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개간 작업에 굳이 저 조막손까지 빌릴 필요가 없으니, 차라리 한데 모아서 교육시키는 게 낫다고 하시더군요.”
“호오...”
미래의 초등교육시설을 본떠서 만들어놨으니, 이직뿐만 아니라 함께 온 관리들 모두가 당연히 놀랄 수밖에.
조선내지에는 한성의 5부학당, 지방의 향교가 있지만, 이 정도 규모는 절대 아니니까.
“효과가 있나?”
“물론입니다. 여진인이라고 해서 자식들이 편하게 지내는 걸 싫어할 리가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조선말을 배우자, 덩달아 부모들도 열심히 익히더군요. 더불어 나라에서 공부를 시켜주니, 감격한 건 당연하고요.”
“그건 그렇겠군.”
“맞는 말일세.”
“흐음... 향교의 확장이라.”
황보인의 대답은 큰 반향을 일으켰는지, 이직의 뒤를 따라오던 모든 관리들이 다들 한마디씩 덧붙였다.
고개를 돌려 반대편 교육당을 바라보자, 저쪽은 아이들처럼 노는 게 아니라 딱딱 오와열을 맞춰 서서 칼질을 연습하고 있었다.
다만 연차가 천차만별이라서 청년으로 보이는 이들도 있고, 아직 소년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뒤섞여 있었다.
“저치들은 토관 집안사람들이겠군?”
“예. 평안도와 함길도에서 온 이들입니다.”
“설마... 전부 왔나?”
이직이 혹시나 싶어서 되묻자.
“예. 전부 왔습니다.”
그 속내를 읽어냈는지, 황보인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정말로 하려나 보구나.’
이직은 어렴풋이 들었던 조정의 계획을 떠올리고선,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