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챕터26. 변화하다 (7)
토관은 고려말, 조선초에 지방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만든 제도인 만큼, 당연히 조선내지의 향리들보다 백성들에게 영향력이 큰 지방지주들이었다.
다만 지금 역사에선 평안도는 의주의 무역으로 인해, 함길도는 여진족이 조선에 완전히 흡수되는 바람에, 원래 역사만큼 토관이 이질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역사가 짧은 탓에, 모든 토관직이 명문화되어 딱 정해지지 못하고 살짝 중구난방이었는데... 이곳에서 대대적인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태종과 세종이 꿈꾸는 완벽한 중앙집권의 큰 걸음을 이곳에서 준비 중이니까.
“전부 무술만 배워서는 안 될 텐데...?”
“하하. 저건 그냥 기본입니다. 아무리 붓질에 능력이 있어도 자기보신은 할 줄 알아야지요. 더불어 이런저런 교육을 전부 받아봐야 자신에게 맞는 특기를 찾지 않겠습니까.”
“음...”
토관이 동,서반으로 나뉘어 있으니, 문,무관이 모두 있는 건 당연한 말.
이직은 무기술 집체교육을 받는 걸 보며 되물었으나, 오히려 “당연한 걸 왜 묻고 있냐?”라는 대답만 듣고 말았다.
“착호군에서도 진행 중인가?”
“아직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성과를 보면 바로 시행되지 않겠습니까.”
“허허...”
일이 전입가경으로 그것도 일사천리로 쭉쭉 진행되는 걸 보며, 이직은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황보인은 “나도 놀랐는데, 너는 오죽하겠냐?”라고 말하듯 히죽 웃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들으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오면서 보고서를 보셨겠지만, 다 담지 못한 사안이 많으니까요.”
“그게 좋겠네.”
이직은 그런 황보인을 보며, 애써 놀란 표정을 숨기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댔다.
계속 나아가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광경이 이어졌다.
자기기업의 수십개의 가마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라 벽돌과 기와를 토해내고, 제재기업에서 썰어낸 목재들은 한곳으로 모여 산처럼 쌓여 있다.
공작기업에선 목재를 자재로 만들거나 각종 가구로 만들고, 건설기업에 속한 석공,목공,토공등은 일이 서투른 여진인들을 부리며 건물 짓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이런 과정은 전라도에서도 똑같이 겪었던 일이라서 특이할 게 없지만, 저 장인들이 기업인들뿐만 아니라 착호군 소속이라는 게 놀라울 따름.
드디어 중앙에 위치한 관아에 도착하자, 이곳 또한 한바탕 난리법석이었다.
원산에서 봤던 3층 관아를 이곳에도 지어놨는데, 눈이 쌓이는 걸 막기 위해 지붕을 더욱 경사지게 만들어놔서 일까? 관아가 아니라 흡사 첨탑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째 이게 나름 명물이라도 되는 모양인지, 관아 담벼락에 모여 잠시 일을 쉬면서 구경하는 빡빡머리 여진인, 몽골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의 어설픈 목례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이곳도 사정은 별반 다를 게 없이 정신없다.
가장 눈길을 끈 곳은, 일단의 관리들이 역관을 옆에 두고서 여진인들과 연신 손발을 흔들어가며 대화하고 있는 곳.
여진인이 말을 토해내기 무섭게, 관리는 부리나케 세필을 휘날리며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음...? 저건 삼 아닌가.”
“예. 맞을 겁니다.”
이직은 여진인이 조심스럽게 들고 있는 물건을 알아보고 되묻자, 황보인은 익숙한 터라 가볍게 대꾸했다.
조선삼이 유명한 건 누구나 알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곳 북방의 여진삼도 유명하지 않나. 의주에서 나가는 대표적인 수출품 중 하나가 여진삼이다.
“문헌화 작업이군?”
“예. 전라도에서 경험하셨지요?”
“그렇네.”
“여긴 낯선 게 더 많은 터라, 전라도보다 더 바쁘실 겁니다.”
“음...”
이직은 눈앞이 캄캄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침음을 흘리고 말았다.
자본유학의 실사구시, 잡학근본 등은 이미 조정에서도 빠르게 받아들여 접목시키고 있는 상황 아니냐.
이직이 전라도에서 양전사업을 진행할 때도 농부나 약초꾼, 장인들에게 이런저런 지식을 듣고, 그걸 보고서로 만들어 조정으로 보내곤 했었다.
조정에선 전국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취합해 책자로 만들었고, 그걸 집현전과 여러 연구소로 보내 연구.
효과가 있으면 새 책자를 다시 전국으로 배포해 적용케 했다.
그 작업이 조선팔도를 넘어서, 그간 알지 못했던 이 낯선 북방 땅에서도 진행되고 있으니... 전인미답의 길을 걷는 만큼, 일은 산더미처럼 쌓일 거다.
‘이걸 다하려면 당연히 사람이 많아야 할 텐데...?’
“몇이나 되는가?”
이직은 혹시나 싶어 되물었지만.
“오백 정도 됩니다.”
황보인은 ‘그럴 줄 알았다.’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히죽 웃었다.
“관리만?”
“예.”
‘허허...’
관아에 속해 일하는 관노나, 임시관리가 데려온 사용인들까지 합치면... 아무리 못해도 일천이 훌쩍 넘는 수가 이곳에 있다는 뜻 아닌가.
그 어디에도 한 도시에 이렇게 많은 관리가 모여 있는 곳은 없을 거다.
“가시지요. 다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럽세.”
황보인과 이직은 무수한 인사세례를 받으며 관아 안으로 들어갔고, 곧장 목적지를 향해 직진했다.
이윽고 쌀쌀한 외풍을 피하기 위해 두툼하게 만들어진 담벼락과, 그 담벼락 위쪽에 작게 뚫린 여러개의 창이 위치한 곳에 도착.
등잔불을 사방에 밝게 피우고 있는 곳엔, 이직에게 익숙한 얼굴이 잔뜩 모여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영감.”
“오... 자네가 여기 있었군.”
“드디어 오셨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자네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오래 못 보던 사이였던 만큼 옛 이야기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조참판 원숙, 호조의 목진공, 형조의 조치, 공조의 황상, 예조의 정초, 병조의 최사강. 인수부윤 성억 등.
한성에 있어야할 각 부서의 2인자들이 전부 이곳에 있었으니까.
‘정말로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구나.’
인사를 나누면서 이직은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들이 왜 이 먼 변방까지 죄다 나와 있겠는가.
‘특히나 성억이 함께 있는 걸로 봐선, 전하와 상왕전하와도 이야기가 모두 끝난 게 분명하겠지.’
이직은 상념을 이어가면서도, 어째 있어야 할 인물이 보이질 않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헌데 용연군 대감께서는...?”
“대감께선 고을 밖 성채보루를 점검하고 계시는 터라, 자리를 비웠습니다. 앞으로 며칠은 더 비우실 겁니다.”
“아...”
가장 먼저 인사를 드려야할 인물인데, 어째 가장 늦게 인사를 드리게 생겼다.
“대감 성격상 예법은 신경 쓰지 않을 테고... 오히려 이곳에 빨리 적응하는 걸 더 좋아하실 겁니다.”
“그건 그렇네만...”
“그러니. 일단 회의를 지켜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영감께서 연주목사로 부임하셨으니, 저희 일을 얼추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원숙의 말이 딱히 틀린 게 없는 터라, 이직은 엉거주춤하면서 대충 자리를 잡고 엉덩이를 붙였다.
어째 여기서도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일부터 하게 생겼다.
‘원래 이런 이들이 아닌데... 용연군 대감에게 어지간히 쪼였나 보군.’
그는 문뜩 그런 생각이 들어,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 말았다.
커다란 중앙탁자를 가운데 놓고, 양쪽에 앉아서 면대면으로 하는 토의는 이제 조정에서도 익숙한 광경 아니냐.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각 부서장들 뒤로는 하급관원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앉았다.
“고맙네.”
이직 또한 이조 관원이 내미는 두툼한 보고서를 받고선, 이야기를 들으면서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다들 이곳에서 머물면서 살펴보셨을 테니, 무엇부터 말해보시겠소?”
“귀화교육당과 직업교육당은 오래전부터 논의되던 문제이니, 그것부터 정리하고 가지요.”
“그럽시다.”
예조참판 정초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조는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부서였고, 처음에는 임시로 만들어졌으나 이젠 상설기구가 되어버린 귀화교육당과 직업교육당을 담당하고 있었다.
문제라면 하위부서가 엄청나게 비대해져서, 본래 예조가 하던 일과는 결이 다르게 나아가는 건 물론, 인원만 따져봤을 때는 예조를 집어삼키게 생겼다.
“예조에서 분리해서, 가칭이지만 교육당을 신설하는 게 좋겠지요?”
“그게 좋을 겁니다. 안 그래도 한성에서 신입관리를 교육시키는 교육관을 집현전이 총괄하고 있지 않습니까. 집현전에 그 일을 계속 맡겨두는 건 좋지 않습니다.”
정초의 의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집현전의 위상이 너무 커지는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서, 안 그래도 할 일 많은 집현전이 그것까지 담당하는 건 비효율적이니까.
그렇다고 신입관리 교육관을 폐쇄한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시작할 땐, “응당 관리라면 알아서 공부를 해와야지, 나라에서 공부까지 시켜줘야 하냐?”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지금 와서는 그런 말이 쏙 들어갔다.
모든 방면에 있어서 문헌화 작업이 시작된 이래로, 조정으로 모든 정보가 집중되는 바.
개별적으로 얻을 수 있는 지식과 정보의 총량은 조정과 비교할 수가 없다. 아무리 응용력이 좋고 통찰력이 있는 인물이라도, 머리에 많은 걸 담고 있어야 그걸 써먹을 것 아닌가.
배운 관리와 배우지 않은 관리의 수준 차는 현격히 나기 마련.
번외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기존관리들은 신입관리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서 밤을 새어가며 개별적으로 공부하고 있었지.
“더군다나 이곳에서 향교와 학당을 확대한 교육당이 운영 중이지 않습니까. 그 효용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니, 앞으로는 조선내지에도 적용하는 게 좋을 겁니다.”
“허나 쉽지 않을 겁니다. 기존의 향교가 왜 확장되지 못했는지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지금은 향교에 투자할 재원이 부족합니다.”
지금껏 향교는 각 지방관아가 알아서 재원을 마련해 운용을 해야 했고, 원래 역사에서도 그래서 향교가 몰락하고 서원이 대두됐다.
지금은 세수가 엄청나게 불어났지만, 조정은 조선팔도를 공사판으로 만들며 뜯어고치고 있는 터라 향교에 투자할 여유가 없었다.
“더불어 작금에 이르러 향교의 교육방침 또한 애매해지지 않았습니까. 이곳 교육당에서는 유학뿐만 아니라 온갖 잡학과 개인무술 또한 가르치고 있는데, 미래를 생각하면 향교에서도 이와 같은 교육방침으로 운용되어야 옳지 않겠습니까.”
“음... 옳은 말이나. 역시나 재원이 문제요.”
“자자. 자세한 사안은 조정에서 판단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의견을 내는 것에만 집중하지요. 재원은 그렇다 쳐도 향교를 대체할 이곳의 교육학당 또한 교육당에 포함하는 게 좋겠지요?”
“그럽시다.”
“좋소이다.”
정초는 괜히 돈 문제에 관해서 시끌시끌 해지기전에, 얼른 찬물을 끼얹어 열기를 털어냈다.
어차피 여기서 결정 나지도 않을 건데, 열변을 토해서 뭐할 건가. 큰 틀만 잡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금석학당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아무래도 교육당에 포함시키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허나, 금석학당은 지금으로 멈추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옛 유적이 나올지 모르는데, 관리가 확충되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음...”
모두는 정초의 반문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금석학은 금석문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고증학이 유행하면서 함께 대두된 학문이다.
옛 문헌을 제대로 되살리자는 취지에서 고문서, 고석비등을 연구하는 건데, 원래 역사에선 명말청초 시기에 유행하던 학문이지.
다만 지금 시대에도 금석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었고, 세종은 역사서를 집필하면서 본격적으로 금석학을 키워나갔다.
“비록 주류학문은 아니지만 금석학을 무시할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고.”
“옳소이다. 그들이 찾아낸 옛 비석이 한두개가 아니지 않습니까.”
“흐음...”
다들 가볍게 머리를 싸매며 미래를 그려봤다.
착호군은 조선내지를 뒤집고 다녔다.
당연히 조정에서 알지 못하던, 혹은 각 지방의 민간설화로만 내려오던 별의 별 유적과 문헌을 발견해냈지.
원래 역사에서 한참 미래에 찾아낼 진흥왕 순수비는 물론, 집안에선 광개토대왕릉비마저 벌써 발견해서 연구하고 있지 않나.
조선의 강역이 넓어질수록 이런 옛 유적은 계속 튀어나올 테니, 금석학당은 계속 커갈 수밖에 없다.
“예문관에 포함시키는 건 무리겠지요?”
“비슷해 보이나, 따져보면 한참 다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사관이 속해 있는 예문관은 현재의 역사를 기록하는 곳이고, 금석학당은 옛 역사를 끄집어내는 곳 아니냐.
둘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니, 하나로 뭉치는 건 불가능하다.
“허면 금석학당도 별개로 분류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만 교육당만큼 크지 않으니, 예조 휘하에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예조가 아니라 교육당 휘하의 별개 부서로 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자자. 모두가 독립부서로 남겨두는 건 찬성한다는 뜻이구려. 어디에 속할지는 다음에 논의합시다.”
이번엔 이조참판 원숙이 모두를 진정시켰다.
“다음으론 농업당, 어업당, 축업당, 산림당, 상업당, 공업당, 무역당, 건설당, 기업당, 전함당, 항만당인데...”
“끄응...”
“흠.”
호조참판 목진공이 입을 열기 무섭게, 다들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감쌌다.
작금에 이르러, 착호군이 조선 개혁의 첨병인 걸 모르는 신료가 없다. 이들은 말이 군대지, 속을 까보면 또 하나의 조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다만 조정의 눈치를 보느라 격이 한참 떨어지는 “당堂”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뿐이지, 사실상 “부部,처處,사司”라고 봐도 무방했지.
착호군에서 효과를 발휘한 정책과 제도는 곧장 조정에 이식되어 왔으니, 6조체제의 변화 또한 착호군의 제도가 이식될 수밖에 없는 바.
이들이 이곳에서 머물면서 살펴보고 논의를 거듭한 것도, 이젠 한계에 다다른 6조체제를 바꾸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