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챕터27. 진격하다 (2)
조선 정세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이제 연오랑의 이름값을 다들 알지 않나.
요동에선 한성으로 사신을 보내는 한편, 혹시나 해서 연오랑에게도 사신을 보내 알려왔다.
연오랑은 답신을 적어, 착호군 관리 편에 요동사신까지 얹혀서 한성으로 보냈지.
‘흐음... 이럴 계획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잘 된 건가, 아닌 건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그는 축 늘어지듯 상석에 파묻혀, 눈앞에 펼쳐진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연오랑은 원산포구를 대대적으로 개수하는 한편, 함길도를 개척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황희의 착호군이 전라도로, 태종의 착호군이 경상도로, 연오랑이 함길도로 가면, 조선내지를 한꺼번에 개척할 수 있었지.
헌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그의 예상보다도, 개마고원은 엄청나게 거대했던 것.
대략 함길도의 70%, 평안도의 20~30%이 개마고원에 속해있지 않나.
거길 개척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아무리 따져 봐도 수지타산을 맞출 수가 없었다.
착호군의 개척은 단순히 맹수4종세트를 퇴치하는 게 주목적이 아니다.
그 땅을 개간해 쓸모있게 만들고, 물류를 이동시켜 시장경제를 일깨우고, 지방세력을 해체해 토호와 백성들을 중앙에 편입시키는 게 목적 아닌가.
헌데 함길도는 해안지방을 제외하곤 인구밀도가 너무 낮아서, 굳이 들쑤시고 다녀봐야 성과가 전혀 나오지 않았던 것.
별 수 있나.
산간지역을 차근차근 정복하는 건 포기했다.
그냥 원산포구를 건설하는 한편, 동해안을 따라서 쭉쭉 치고 올라가 해안가 인근 고읍을 진짜 제대로 된 선진항구도시로 만들면서 두만강에 다다랐다.
더불어 산간에 살던 백성들을 전부 항구도시와 인근 위성도시로 끌어 모았지.
그 후 두만강을 넘어가자, 또 다시 문제 아닌 문제가 발생했다.
원래 역사를 알고 있는 연오랑이니,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동북면의 여진족은 말을 잘 들어도, 너무 잘 들었던 것.
평주로 명명된 훈춘에 착호군이 입성하기 무섭게, “아이고.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외치듯, 인근의 여진족이 미친 듯이 몰려와 조선에 복속을 청하는 게 아닌가.
아니 이럴 거면 진작 함길도로 들어오지, 왜 지금껏 두만강 변경에서 떠돌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훈춘을 넘어서 저 먼 우수리강까지 나아가는 게 아니면, 굳이 군사 활동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지.
이렇게 동북면이 순식간에 정리되자, 연오랑은 다시금 갈 길을 잃었고... 분위기가 이렇게 된 이상, 함길도를 건너뛰고 곧장 두만강 너머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이 바로 연주라 명명된 연길.
여긴 일전에 이만주를 비롯한 옛 건주위 여진족을 때려잡을 때. 북진토군이 혐진 올적합을 정리했던 터라, 저항하는 부락조차 없었다.
여기서도 훈춘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펼쳐졌다.
꽤 먼 곳에 있던 여진부락마저도 죄다 빨려 들어왔고, 심지어 원래 역사의 6진지역인 회령, 종성, 부령과 서쪽의 무산지역의 여진, 조선인들마저도 연주로 몰려들었다.
웃기게도 연주가 위도가 더 높은 북쪽에 위치해 있지만, 개마고원이 위치한 함길도 북부지방보다 더 따뜻하고 살기 좋았기 때문.
더욱이 지금의 6진 지역은 세종이 개척한 게 아니라, 거기 살던 여진인들이 그대로 눌러 앉아 토관 및 조선인이 된 상태 아니냐.
그들 입장에선 지금 사는 곳보다 살기 좋은 연주로, 그것도 조정의 지원을 받아 이주하는 건 전혀 나쁠 게 없던 거지.
이와 같은 현상은 원래 역사의 4군 북쪽에 위치한 집안. 정주에서도 발생했다.
원래 역사에서 4군 지역을 개척해 놓고도 그걸 유지하는 데 피똥을 쌌던 건, 개마고원 및 산간지방을 넘어서 육로로 보급하는 게 힘들었기 때문.
압록강을 이용하면 좋겠지만... 명의 눈치도 보였고, 제도와 체제가 잡히지 않아 압록강 수로를 이용하는 건 힘들었으니까.
허나 지금 역사에선 정반대로 진행됐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의주 반대편에 호주가 완성된 이후.
이주민과 포로들은 압록강을 따라 끝없이 동쪽으로 개척과 개간을 이어갔다.
험준한 조선내지에서 개척이 시작된 게 아니라, 압록강을 끼고 보급받기 편한 조선외지에서부터 개척을 시작한 것.
지금에 이르러선 집안인 정주까지 다다라, 그곳을 대대적으로 개척해 신도시로 만들고 있었다.
이 판국에 굳이 4군 지역. 여연, 우예, 지성, 무창을 개발할 필요도, 그곳에서 힘겹게 살 이유도 없잖아?
심지어 강계 이북에 살던 여진, 조선인들마저도 전부 압록강 너머의 정주로 이주를 완료했으니... 어찌 보면 개마고원과 그 일대를 텅 비워놓고 전부 북쪽으로 터전을 옮긴 꼴이다.
이렇게 조선의 강역이 하루가 멀다하고 넓어지고 있으니, 조정신료들은 “마을을 또 개척했어!? 관리가 또 필요하다고!?”라며 발작을 일으키곤 했지.
그리고... 조선의 느긋한 북진이 계속되자, 당연히 요동과 여진족에게는 비상등이 켜졌다.
“흐음...”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최윤덕은 심각한 분위기를 풍기는 연오랑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든 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 않나.
물론 순조롭다는 건, 착호군이 칼질이 아닌 삽질과 톱질을 하는 걸 의미했다.
“별건 아니고... 너무 빠르게 바뀌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글쎄요...?”
최윤덕은 뜬금없는 물음에,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없어 말을 흐렸다.
“...”
“...”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 이후로 정말 많이 바뀌긴 했군.’
최윤덕은 말없이 답을 기다리고 있는 연오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역시도 과거를 더듬어갔다.
벌써 5년이나 지났지만, 연오랑의 모습은 예전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큼지막한 체구도, 짧게 자른 수염도, 빛나는 눈동자도.
대마도에서 처음 만났던 그 소년이, 지금은 용연군이 되어있지만... 여전히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아니냐.
하지만 그는 어떤가.
원정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착호군에 머물면서, 이제와선 적을 옮겨 완전히 무관이자 장군이 되어버렸다.
관리로 생활하던 예전의 모습도, 머릿속에 품고 있던 생각도, 하다못해 뱃살마저 쪽 빠져서 근육질 곰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멋들어지게 기르던 수염마저도, 연오랑을 따라서 바싹 밀어버리지 않았나.
일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
번외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남성성의 상징인 수염을 깎는 일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허나 만인지적이나 마찬가지인 연오랑이 수염을 박박 밀어버리고선, “나보다 칼질 잘하는 사람만 까불어라. 수염 길면 위생에 안 좋아.”라고 말을 하는데, 그 누가 반문할 수 있을까.
그간의 업적으로 인해 착호군에는 은근히 팬클럽이 생겼으니, 그를 따라 수염을 밀어버리는 추종자들이 적지 않았지.
물론 수염 미는 걸 딱히 강요하지 않았지만, 최윤덕은 뭐... 괜히 눈치를 보고선 밀어버렸다.
‘음...’
까끌까끌한 턱을 매만지며 자신을 되돌아 본 최윤덕은, 다시 연오랑에게 집중했다.
‘생각해보니, 그가 말한 대로 되어가고 있구나.’
오래전 대마도에서 그에게 일장연설을 내던졌던 연오랑을 떠올리자,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그 시절엔 “말이야 좋은데, 그게 되겠냐?”라고 비웃었지만, 실제로 그게 차곡차곡 현실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 변화를 쉽게 체감하지 못하고, 느긋하게 감상하고 딴지를 늘어놓을 여유가 없는 건, 그만큼 바빴기 때문.
착호군은 사방팔방에 평지풍파를 일으켜놨지만, 정작 그 결실을 확인하지도 못하고 다른 곳으로 넘어가 또 난장판을 만들지 않았나.
흡사 고요한 태풍의 눈처럼, 최윤덕이 느끼기엔 착호군은 여전히 같은 것처럼 보였던 거지.
더불어 앞장서서 미친 듯이 달려가는 연오랑의 뒤를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미처 뒤를 바라볼 여유가 없던 것일 수도 있고.
중요한 건... 대마도에서도 연오랑의 의견에 동조했던 만큼, 지금도 여전히 그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방향은 제대로 가고 있으니, 속도의 문제는 적응의 문제겠지요.”
“그런가...”
기어코 최윤덕의 대답을 들은 연오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집안도 나름 잘나가는 양반 집안이잖아?’
연오랑은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윤덕 집안도 나름 잘나가는 양반 집안이니 만큼, 지금 조정의 시책에 불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은근히 돌려서 묻고 말았다.
“너희 집안도 사업을 시작했냐?”
“예. 작게나마 가축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다른 이들도 그러냐?”
“제가 알기론... 원정에 참가했던 이들 집안은 대부분 사업을 시작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호오...”
연오랑은 혹시나 싶어 물은 질문에 긍정적인 답이 흘러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착호군 1기에 잘나가는 집안 자제가 얼마나 많냐.
그들 대다수가 기업에 긍정적이라는 건, 지금 방향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변화가 그리 낯설지 않나보군? 예전과 확연히 달라진 조정의 시책도 마음에 들고?”
“... 뭐. 피할 수 없으면, 시류를 잘 타야하지 않겠습니까.”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연오랑의 성격을 잘 아는 최윤덕은 힘겹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라면 조정의 시책에 대해서 입방아를 찍었다고, 어디 가서 이르고 다니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리고?”
“요즘 애들이 원체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도 분발해야지요.”
최윤덕은 연오랑이 데리고 다니는 꼬맹이들, 그리고 착호군 내에 있는 수많은 청년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당장 이순몽과 유은지가 또 망신을 당했고, 지금껏 판군사대에 끌려가 개망신이나 마찬가지인 변소청소노역을 당한 기존 무관들이 몇이던가.
뭐라 딱 잘라서 말할 수 없지만, 분명 기존 무관과 착호군병들 사이에는 뭔가 다른 점이 존재했다.
허나... 나름 심각한 이야기였으나, 연오랑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나도 요즘 애들인데?”
“대감께서는 예외 아닙니까...”
“그래?”
“예.”
“왜?”
“...”
최윤덕은 차마 ‘너는 옛날부터 별종이었잖아.’라고 말하진 못하고, 그저 어설픈 미소만 날려댔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운석핵꿀밤 세대가 다르긴 달랐지.’
연오랑은 농담을 던지면서도, 속으론 다른 생각을 이어나갔다.
조선이 급격한 변화를 그나마 쉽게 받아들이는 건, 여러 이유가 있을 거다.
운석핵꿀밤의 여파로 유학적 지배논리가 사회전반에 뿌리내리지 못한 것도 있고, 의주에서 사무역이 시작되면서 알게 모르게 시장경제가 자리 잡은 것도 있고.
기득권층을 압박하는 강력한 정책에도, 기업의 공인으로 인해 살 길을 마련해준 것도 있을 거다.
허나 보다 중요한 건, 제도나 정책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고 있다는 점.
그는 우스갯소리로 운석핵꿀밤 세대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이렇게 가볍게 말할 사안은 아니었던 거지.
운석핵꿀밤 세대는 운석핵꿀밤 이후에 태어난 이들, 혹은 그 후로 공부를 시작한 이들을 말했다.
이들은 중국의 연호와 역법을 따른 적도 없고, 뭐 할 때마다 명나라의 눈치를 봤던 적도, 조공을 바친다고 난리를 피웠던 적도 없다.
상국이라 모시며 본받으려 한 적도, 사신이 온다고 난리를 피웠던 적도, 중국문화를 신문물이라고 받아들인 적도 없다.
더불어 성리학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며 크지도 않았다.
잘게 쪼개진 사상계를 보면서, 이들은 각자 입맛에 맞는 계열의 공부를 골라가면서 했으니... 정해진 길이 아닌, 스스로 알아서 길을 개척해서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정립했지.
이러니 신입관리 중에서 ver4.0계열의 근본성리학자들을 찾아볼 수가 없는 거고, 명을 기억하는 기존 관리들과는 사상과 가치관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이 운석핵꿀밤 세대의 최고대표이자 첨병이 바로 세종.
세종이 연오랑과 합을 맞추며, 기존과 결이 다른 파격적인 정책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밀어붙일 수 있던 것도.
조선이 급격한 변화를 나름 잘 수용할 수 있었던 것도.
운석핵꿀밤 세대가 드디어 사회전반에 자리를 잡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연오랑이 최윤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연씨 삼인방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어르신. 연대장들이 오고 있습니다.”
“그래? 오는 족족 들여보내.”
“예.”
“아. 그리고 차도 준비하고.”
“알겠습니다.”
연손찬은 대답을 마치기 무섭게 밖으로 나갔고, 연전위와 연조운은 곰도 때려잡을 두툼한 손을 세심하게 움직이기 시작.
보고서를 보고 확인하면서, 이어붙인 지도 위에 목각인형을 하나둘씩 올려놓기 시작했다.
‘아깝군.’
저 덩치로 저러고 있는 게 아쉬울 따름이지만... 연씨 삼총사는 연오랑의 수족이나 마찬가지인데, 자기 밑으로 보내달라고 말할 수도 없잖나.
최윤덕은 부관으로 쓰기에는 너무 아까운 칼잡이들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이윽고 연대장들이 하나둘씩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착호군은 연주에서 공사일을 하는 한편, 반수는 연주 주위로 뻗어나가 온 산맥을 박살내고 개척하는 중이었다.
아예 두만강까지 이어지는 직통로를 만들어 버릴 정도로 다 작살냈고, 무수한 맹수들을 잡아들여 모피갑옷으로 만들었지.
허나 드디어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