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68화 (168/538)

168. 챕터27. 진격하다 (3)

요동의 사신이 왔다는 소식이 퍼지기 무섭게, 사방에 나가 있던 연대장들이 모두 몰려든 것.

‘음... 다들 나름 잘 컸단 말이지. 옛날 물도 많이 빠지고.’

그는 자연스럽게 중앙탁자 주위에 앉아, 자기들끼리 킬킬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을 살폈다.

격식을 따지지도 않고, 의관을 정제하지도 않고 자유분방하게 앉아 있고, 행색마저도 제각각이다.

누구는 수염을 밀어버렸고, 누구는 상투도 귀찮아서 마상건을 끼고 있다.

연오랑에게 물들어가며 제대로 조선물이 빠진 모양새다.

물론 저렇게 보인다고해서 파락호라고 생각하면 오산.

실없이 웃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호랑이와 눈싸움을 할 정도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북정원정군에 함께 했던 이들은 완전히 착호군 연대장으로 눌러앉았고, 착호군 4기가 합쳐지면서 당연히 연대장들 또한 엄청나게 불어났다.

특기할 점은 연대장들 중에서 꽤나 이질적인 인물들이 섞여 있다는 점이다.

‘쟤들도 이젠 적응을 끝낸 것 같고...’

연오랑은 가볍게 눈인사를 날려주면서, 다시금 하나하나 굽어봤다.

몽골출신 도모경은 북정원정군이 흥안령을 넘을 때, 가장 먼저 조선에 복속을 청하고 원정기간 동안 조선군과 함께 싸우며 능력을 증명한 인물.

여진출신 이고는 이태모로 개명한 먼터무의 아들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고호진은 훈춘 일대에 살던 조선 번호 중 하나로, 그간 조선을 대신해 변경을 기웃거리던 야인여진을 두들겨 잡으며 실력을 입증했던 인물.

오추산은 포위된 우라산성에서 이민주 일당을 격파하고, 이만주의 목을 손수 베어버린 인물.

끝으로 중국출신 진강은 이제 고작 서른 초반이지만, 과거 북평부 소속 기병장군으로 남쪽전선에서 눈부시게 활약했던 인물이다.

다만 파벌싸움에 밀려서 기병장군임에도 거용관에 처박혀 있었는데... 한미한 집안 출신에 뒷배도 없던 인물이, 숙청이 아닌 좌천을 당한 것 자체가 그의 능력을 증명해 주지 않나.

북평부에서는 혹여나 위험상황이 터졌을 때, 회심의 패로 써먹기 위해 굳이 그를 살려서 거용관에 처박아 놨었다.

지금 와서 보면, 조선에게 좋은 일만 해준 꼴이 됐지.

‘어쩌다보니 다국적군이 된 것 같단 말이지.’

연오랑은 괜히 그런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모든 걸 조선식으로 덮어씌우고, 조선화 작업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인물이 연오랑 아니냐.

그가 정치적 배려 따윈 해줄 리가 없으니... 이 귀화인들은 아득바득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서, 모두의 인정을 받으며 연대장까지 올라왔다.

이미 수차례 겪어보긴 했지만, 그들은 이런 난상토론이 아직도 낯선 걸까?

“...”

“...”

어색하게 꼼지락거리고 있는 이들은 연오랑과 눈이 마주치자, 공경의 눈빛을 숨기지 않고 깊게 읍을 했다.

연대장이 어떤 위치인지, 이젠 저들도 사정을 알지 않나.

귀화인이라고 차별받지만 않아도 감지덕지인데, 무려 조선무관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됐다.

연오랑에게 감사한 건 당연하고, 조선에 대한 충성심이 하늘을 뚫고 치솟은 것 또한 당연한 일.

이들은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그 누구보다도 조선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지.

뭐... 저 먼 한성의 신료들이야 볼멘 표정으로 궁시렁 거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착호군 내에는 “감히 달자놈들이, 야인놈들이!”라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이들이 없었다.

능력도 없이 폄하만 늘어놓는 놈들은, 이미 연오랑에게 두들겨 맞고 머리통이 다 깨졌으니까.

이런저런 신변잡기와 이미 완성된 계획을 가볍게 재점검하고 있자, 드디어 기다리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역작업이 조금 지체 되서...”

오늘도 여전히 정찰임무를 하고 돌아온 특전대장 이정호와 수송선단을 이끌고 온 박무양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본래 역사에선 대마도정벌 때 죽었어야할 박무양은, 아직도 쌩쌩히 살아남아서 지금은 원산에서 기선군 훈련을 담당하고 있었다.

“다들 모인 건가?”

“옙!”

“그렇습니다!”

우렁찬 대답이 나오기 무섭게, 연오랑은 회의실을 가득채운 연대장들을 다시금 쓱 한번 살폈다.

세종의 아이돌그룹멤버는 여전히 든든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게임캐릭터로 구현되지 않아 모르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가 손수 확인하고 키워낸 역사 속 인물이 한가득.

가만히 보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다들 요동사신이 왔다간 거 알고 있지?”

“옙!”

“내용은 뭐 별거 없었다. 쟤들 어떻게 처리할거냐고 묻는 거였지.”

연오랑이 지도 북쪽에 뭉쳐 있는 목각인형들을 가리키자.

“묻는 게 아니라, 사실 애걸복걸하며 구걸한 거 아닙니까?”

이순몽은 자신감 충만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한술 더 떠 요동을 비웃어줬다.

“넌 장군이 되어서 말본새가 그게 뭐냐. 성질 좀 죽이라고 했지?”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흐흐.”

이젠 연오랑의 잔소리에도 이골이 난 걸까?

이순몽은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킬킬거리며 웃었고, 이 만담 또한 이젠 익숙해져서, 다들 피식 실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연오랑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고선, 이정호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해서 놈들 상황은?”

“겨울에 거하게 약탈한 후론 특이사항을 보이지 않았고, 예상대로 이탈하는 부락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역시 파종시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거겠지?”

“예. 그럴 겁니다.”

“맞습니다. 저치들이 애초에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 아닙니까.”

“한계점을 넘은지 오래이니, 이제 슬슬 속에서 불만이 폭주하고 있을 겁니다.”

“가호랍이 나름 세력이 크다지만, 다른 부락을 모두 따져보면 크게 차이도 없지요.”

이정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대장들은 차례차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한계라...”

‘하긴. 이제 무너질 때도 됐지.’

연오랑은 뭉쳐 있는 목각인형을 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연오랑이 함길도를 개발하는 동안에도, 특전대와 무장행상은 끊임없이 만주를 싸돌아다니며 상행을 이어갔다.

이만주 일당과 건주위 지역을 석권했으니 무장행상의 활동영역은 당연히 넓어져서, 원래 역사에선 크게 부딪치지 않았던 북쪽의 옛 해서위 지역의 여진부락과도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물론 조선 입장에서 인연을 맺은 거고, 여진족 입장에선 “안 오면 좋겠는데, 왜 계속 와? 부담스럽게.”라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지.

수십개의 부락으로 쪼개져 있었으니... 누군가는 반기고, 떨떠름하게 맞이하고, 겁먹고 도망가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물론 격렬하게 저항하는 건, 여진족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완전무장한 특전대를 상대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

그럼에도 행상이 공격당하면, 그들은 물품을 내던지고 몸만 챙겨서 줄행랑을 쳤다.

여진족이 흉흉한 발톱을 내밀고 있는 조선군을 쫒아가겠냐, 아니면 땅에 널린 금덩이들을 주우러 가겠냐.

애초에 제대로 된 군기도 없는 약탈자들이니, 당연히 전리품에 눈이 돌아가 추격을 포기하곤 했지.

그 후엔 조선군의 보복공격을 받아 약탈을 주도했던 부락이 지워지고, 그 인근 부락은 제안이라 쓰고 협박이라 읽는 강요를 받아 호주, 연주, 평주로 끌려와 귀화하기 일 수.

이와 같은 일이 계속 벌어지자, 건주위 잔당들과 옛 해서위 여진들이 동요를 일으킬 수밖에.

엎친 데 덮친다고, 이젠 수만명의 조선군이 연주에 웅크리고 눌러 앉았다.

이건 건주위 여진족을 쓸어버릴 때와 똑같은 상황이니, 해서위 여진족은 기겁해서 “조선군이 공격해 오지 않을까?”라며 잔뜩 겁먹을 수밖에.

그렇다면 조선군에 대항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 밖에 없다.

“조선이 쉽게 건드리지 못하게 우리도 뭉치자!”라는 거지.

제2의 이만주를 꿈꾸는 이들이 여럿 튀어나왔고, 제일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역사에 남지도 않은 가호랍이라는 자였다.

하지만 이게 쉬울 리가 있나.

해서여진은 16세기 중기에 이르러야 우라烏拉, 호이파輝発, 하다哈達, 예허葉赫의 네 개의 거대부족이 탄생하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이 수십, 수백개의 부락으로 쪼개져 있는 상태.

유목, 수렵민족 특유의 고질병이 도져서, 통합은커녕 지들끼리 싸우기 바빴다.

여기에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들은 인구부양력과 식량생산량이 부족해서, 인구밀도를 줄이고 각 영역으로 흩어져야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살 수 있지 않나.

그런 이들이 살겠다고 한자리에 뭉쳤으니... 당연히 식량이 부족해서 말라죽기 시작한 거지.

조선조차 연주를 유지하겠다고, 경상도와 강원도의 물산을 끌어와 버티고 있는데... 뒷배도 없는 여진부락이 뭔 수로 그 큰 덩치를 유지하겠어.

자고로 내환을 해결하려면 외환을 일으키는 게 최고.

조선이 무서워서 뭉쳤는데 미쳤다고 조선을 공격할 리 없으니, 가호랍이 이끄는 어설픈 통합 해서여진은 요동과 우량카이 3위를 마구잡이로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젠 산 밑으로, 저절로 굴러가기 시작한 수레바퀴 아니냐.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선 약탈을 해야 하고, 약탈을 하면 결국 요동 및 우량카이 3위와 상잔하면서 병력이 소진된다.

이런 상황이 재작년부터 지속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여진부락의 이탈이 가속화됐다.

더불어 뜬금없이 얻어맞은 요동은 “너희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어떻게든 해결해! 아니. 해주세요!”라고 조선에 사신을 보내게 된 거지.

“오래 버티긴 했어. 그지?”

“예. 가호랍 그자가 나름 능력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보다는 약탈을 통해 부서진 소부족을 가호랍이 흡수해서 버티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내놨고, 김종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보다... 여진부락이 요동인을 마구 흡수하는 걸, 그냥 방치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게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잘 알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과거의 전례를 비춰보아, 그들을 가만 놔두는 건 큰 우환거리가 될 겁니다.”

다들 김종서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며, 열기를 토해냈다.

여진족이 끊임없이 조선과 요동을 약탈하는 이유가 뭔가.

땅은 있는데, 그걸 이용할 기술과 사람이 부족해서다.

하다못해 특별한 기술이 없는 그냥 동네 농부조차도, 여진인들보다 농사를 잘 짓지 않나.

그렇게 끌고 간 노예들에게 기술을 배워 축적하면, 싸움질만 잘하는 여진족이 이젠 농사일도 잘하게 되는 꼴.

“우려되는 부분은 하나 더 있습니다.”

이번엔 연대장들 중에서 가장 연차가 높은 전흥이 입을 열었다.

“물론 지금 분위기가 나쁘진 않습니다만... 이 상황이 계속되면 전체적인 병력 수는 줄어들어도, 가호랍의 입지는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선 그게 더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제2의 이만주가 튀어나오면, 그것 또한 골치 아픈 일 아니겠습니까.”

전흥의 말을 이어받아, 오추산이 강경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같은 여진인인만큼 여진의 습성을 잘 아는바, 이들은 세가 약해진 부락을 집어삼켜서 자신의 부락을 키우는 게 기본이자 상식이다.

계속된 싸움으로 전리품과 약화된 부락이 나오고 있는데, 이걸 챙기는 건 당연히 가장 힘이 센 가호랍부락 아니겠냐.

만약 가호랍이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으면, 해서위 여진족을 통합한 대추장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지.

‘원래 역사에서 청나라가 그런 식으로 튀어나왔고 말이야.’

연오랑은 미래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계획대로 치긴 쳐야한다는 거고, 요동에게 최대한 뜯어내야겠군.”

“헌데... 요동이 더 이상 줄게 있는지 의문입니다.”

하경복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동은 자기들 먹고 살기도 벅찬 이들 아닌가.

서쪽의 우환거리였던 북원잔당을 밀어냈더니, 이번엔 동쪽의 여진족이 분탕질을 치는 형국이라... 골치가 이만저만 아픈 게 아닐 거다.

“하지만 요양파와 심양파의 대립이 격해지면서, 제대로 대응조차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어떻게든 우리에게 손을 내밀 겁니다.”

“맞습니다. 북직례도 그렇고, 산동도 그렇고, 저희가 거용관을 무너뜨린 이후로 사정이 더욱 복잡해졌으니까요.”

그쪽 사정을 잘 아는 진강이 입을 열자, 모두가 동의를 표했다.

북평부 출신인 진강이지만, 그는 배신당한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인질이 되어 북평에 살던 그의 가족들은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있었다. 조선이 산동상인을 통해 가족을 데려오기 전에는, 북평부에게 팽 당해서 거지꼴로 살고 있었지.

당연히 조선에 대한 충성심은 드높았고, 북평부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짙어져 그들의 속셈을 남김없이 토해냈다.

‘하긴 요동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없긴 없지...’

연오랑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북평부가 거용관을 회복하기 위해 인력과 재원을 쏟아 붓고 있지만, 하루이틀 사이에 될 일이 아니다.

칼간상인들이 북원잔당에게 무수한 밀수로를 알려준 탓에, 북직례 북쪽은 난장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지금 당장 움직이기 힘든 북평부는 요동이 어려움에 처하는 걸 크게 반기면서, 더욱 골탕을 먹이려고 할 게 분명.

쌍둥이 성처럼 마주보고 있는 산해관의 병력을 일부러 빼지 않을 테고, 당연히 맞은편 광녕위의 영원성 또한 병력을 못 뺄 거다.

요동반도의 금주위? 거긴 요동의 목줄이니, 요동이 망하는 날까지도 병력을 안 뺄 거고.

‘더욱이 그쪽은 요양파가 꽉 잡고 있는 곳이고, 해서여진에게 두들겨 맞는 곳은 심양파의 영역이잖아?’

지난 원정으로 기세가 꺾인 요양파로서는, 이번 기회에 심양파를 약화시켜 다시 주도권을 되찾으려 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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