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챕터27. 진격하다 (5)
기업의 공인이 이뤄지고 난 후.
의주에는 의주와 평안도 북부집안뿐만 아니라 평양과 개성, 한성의 집안까지도 의주에 진출해 여러 기업을 일구기 시작했다.
평양 출신인 정 소위의 집안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기업을 키울 수 있었는데... 문제는 바다를 이용하는 기업집안에게, 수군착호군으로 오라는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나.
가문의 장자이자 가업을 이을 큰형을 보낼 수는 없어서, 둘째인 정 소위가 원산으로 오게 됐지.
고려 때의 관습이 강하게 살아 있는 지금은 유산을 장자에게 몰아주는 게 아니라, 형제자매들에게 거의 균분상속을 하지 않나.
정 소위는 자신에게 떨어질 유산을 미리 챙겨서, 원산으로 오기 무섭게 돼지농장을 시작했다.
집안에 있을 때부터 매양 보던 게 사업 일이었으니, 그도 자신의 사업을 작게나마 하고 싶었던 거지.
물론 강 중사의 핀잔처럼, 돼지보다 사냥개를 더 많이 키우긴 했지만 말이다.
“뭐 어쨌든, 내 농장에서 키우고 있는 돼지가 조선돼지가 아니라 요동돼지와 멧돼지 사이에서 난 돼지들 아니냐. 따지고 보면 녀석들의 고향이 반쯤 이곳이니, 여기서 키우면 더 잘 크지 않을까? 여진인들은 돼지를 풀어놓고 잘만 키우잖아?”
“글쎄요...?”
“으흐흐. 우마를 키우는 건 돈이 많이 드니까... 음. 어차피 빈 땅도 많겠다. 사슴농장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어차피 여기도 착호군이 훑기 시작하면 사슴이 엄청 잡힐 거 아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정 소위는 머릿속으로 분홍빛 미래를 꿈꾸며 실실 웃어댔고... 강 중사는 원산에 오기 무섭게 착호군이 사냥하는 걸 본적이 있는 터라,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배는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움직이니, 순풍이 부는 동안에는 딱히 할 일도 없잖나.
둘은 시시덕거리면서 이야기를 이어갔고, 수송선은 굽이굽이 이어진 강줄기를 따라 계속 나아갔으나... 평온한 분위기는 이내 끝나고 말았다.
“어...? 저기 보시죠.”
“음. 착호군인가?”
강 중사는 저 앞에서, 모래톱을 가로지르며 수송선단을 향해 달려오는 일단의 기병을 가리켰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오는 시커먼 갑옷을 입고 있는 걸로 보아 조선군이 분명하다.
여진족이 두정갑을 챙겨 입었을 리가 없고, 설령 입었더라도 저렇게 일부러 물들인 검은 갑옷을 입을 리가 없으니까.
“어이쿠야.”
“오... 날래네?”
둘은 소대깃발을 들고 달려온 기병들이 하는 짓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선두에 서서 움직이는 수송선에서 그물사다리가 내려오기 무섭게, 모래톱의 강물을 튕기며 달리던 기병이 훌쩍 몸을 날려 그물사다리를 붙잡고 함선에 달라붙는 게 아닌가.
함선의 속도가 비록 사람이 뛰는 속도밖에 안 나긴 하지만... 저렇게 말 위에서 몸을 날려, 뛰어 오를 줄은 몰랐다.
“여진족이 또 오나보군요?”
“그렇겠지. 전에 된통 당해놓고, 벌써 잊어버렸나.”
어째 겁이라곤 전혀 먹지 않았는지, 강 중사와 정 소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적赤기가 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기병이 다시 그물사다리를 타고 되돌아가기 무섭게, 수송함대의 지휘선에서 붉은색 깃발이 중앙 돛대의 꼭대기에 올라 작게 펄럭이기 시작했다.
흡사 꽃잎이 피어나듯, 뒤따르던 함선에서도 계속 적기가 올라갔고.
“올려!”
“옙!”
정 소위와 강 중사가 타고 있는 선박에서도 적기를 끌어올렸다.
적기는 곧 전투태세를 갖추라는 의미이니, 머뭇거릴 틈이 없다.
중앙 돛대와 돛 사이에 연결된 도르래를 열심히 돌려 적기를 올리기 무섭게, 적기 밑으로 신호기가 줄줄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강 중사. 뭐라고 써 있는지 해독해봐.”
“음...”
강 중사는 적기 밑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상한 도형과 아라비아 숫자, 몇몇의 단어를 읽어내어 머릿속으로 조합해갔다.
‘화살이 왼쪽을 향하고 있으니까, 왼쪽에서 온다는 뜻이고, 함포와 숫자는 3문을 준비하라는 것 같은데...’
훈련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맹렬히 머리를 굴려본다.
수군갑사가 되기 전까지, 강 중사는 조선의 흔한 기선군 중 한명이었다.
그저 천자문 중 일부만 알고, 이젠 유행이 지나 일상이 되어버린 아라비아 숫자만 알아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지.
허나 수군갑사가 되자, 늦깎이 수험생이 되어 글공부를 해야만 했다.
색과 도형이 다른 신호기를 외우는 건 물론, 신형 선박의 각 부품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했고, 함포병인 강 중사의 경우에는 함포의 부품들까지도 읽고 쓸 줄 알아야 진급이 가능했으니까.
신新 기선군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시험을 봐서 진급시켰는데, 평생을 말단 병졸로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강 중사뿐만 아니라, 모든 기선군에게 한바탕 공부 열풍이 불었었다.
“... 그래서, 이거 같은데 맞습니까?”
“정답!”
장 소위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강 중사는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얼굴에 피워냈다.
“알아차렸으면 움직여야지. 뭐하나?”
“옙! 함장님.”
“넵!”
선미의 지휘누각에서 성큼 내려온 청년이 목청을 높이자, 강 중사는 웃음기를 지워내고 냉큼 몸을 날렸다.
“저 놈들은 저번에도 와서 두들겨 맞고 가더니, 또 보급선단을 노리는군. 학습능력이 없는 건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함포장.”
“음...”
정 소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슬그머니 함장의 눈치를 살폈다.
함장이라곤 하지만, 사실 정 소위와 한 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둘 다 착호군으로 끌려왔지만... 다른 점이라면 함장은 나주 해안가 출신이라서 예전부터 배를 타왔고, 그의 집안이 예전부터 왜구와 싸워왔다는 점?
대마도를 정벌하기 전까지는, 배 한두척만 끌고 와서 고깃배나 해안가 촌락을 약탈하는 왜구들은 꾸준히 있었으니까.
사실 이런 경우에는 규모가 너무 작아서, 약탈이 아니라 그냥 무장 강도라고 해야 더 어울릴 거다.
아무튼. 그런 경험이 있기에 승급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고, 똑같이 끌려왔음에도 누구는 함장으로 누구는 함포장이 되고 말았지.
그렇다고 정 소위가 불만이 있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착호군은 녹봉을 안 받으니 진급이 의미가 없고, 예전 조선군과 달라서 휘하 부하들을 사사로이 부릴 수도 없다.
멋도 모르고 제멋대로 굴다가, 판군사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
그에 비해 할 일은 더럽게 많고, 쓸데없이 책임질 일도 많아지니... 그저 몸 성히 전역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정 소위도 그런 사람 중 한명이었고.
물론 그렇다고 할 일을 빼먹고 농땡이 부리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 그랬다간 자기 목숨이 위험하니까.
“저들은 여진족이니 만큼 서로 연계가 잘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전에 당한 부족의 적대 부족일지도 모르지요.”
“그렇겠지?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돼. 용연군 대감이 이끄는 본대에게 제대로 박살나서 도망친 놈들이, 이렇게 산발적으로 병력을 소모하는 게 말이 되나.”
“그렇겠지요. 어쩌면 가호랍 그자가 더 이상 해서여진을 휘어잡지 못하는 걸지도요.”
“음...”
둘 다 고위지휘관은 아니지만 이런 습격을 한두번 겪어본 것도 아니고, 알음알음 들은 소문이 있어서 전황을 대충 알지 않나.
하여간 이번 전쟁은 뭔가 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함장 이 대위, 함포장 정 소위, 갑판장 조 중위.
기선군에 신설된 직책이자 직급인 만큼 생경하지만, 벌써 1년 넘게 이렇게 생활하지 않았나.
언제나 그랬듯. 셋은 선미 누각에 모여서, 전투태세를 갖추는 함선을 굽어봤다.
워낙 작은 배라서 전투준비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이 작은 배에 함포를 무려 3문이나 싣고 다녔는데, 전부다 왼편으로 옮겼다.
저 앞에선 모래주머니를 풀어 갑판 바닥에 모래를 열심히 깔고 있는 선원이 보였고, 화포병들은 조심스럽게 화약통을 열어 장전을 준비했다.
선창에서 쉬고 있던 이들마저도 죄다 뛰쳐나와 활시위를 점검하고, 몇몇은 선벽을 보조하듯 쌓아놓은 사각방패 뒤에서 대형쇠뇌를 장착하고 있었다.
“쇠뇌는 어때? 문제없겠지?”
“걱정하지 마시죠. 한두번 쏴보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전에 보니까 이상한 곳에만 쏘던데, 확실한 거지?”
“옙. 제가 굴려놨으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갑판장은 자기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쿵쿵 때렸다.
고려 때 이후로 쇠뇌 대신 활을 중시하기 시작했고, 작금에 이르러선 조선은 쇠뇌를 거의 안 쓰는 것과 다름없었다.
문제라면... 기선군은 따지고 보면 일반 백성과 다를 게 없는데, 이들이 죄다 활을 쏠 줄 아는 건 아니잖나.
연오랑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쇠뇌를 끌어왔다.
중국에선 여전히 쇠뇌를 썼고, 거용관과 남구에서 끌고 온 무기, 쇠뇌제작자가 어디 한 둘이던가.
그들을 죄다 원산에 몰아넣어 쇠뇌를 연구, 제작하게 시켰고, 그 결과품이 바로 저 물건이었다.
“어디서 공격해 올까?”
“고작 몇 명이서 활을 깔짝깔짝 쏴봐야 효과도 없을 테니, 적어도 수백은 뭉쳐 있어야 할 거고... 그러려면 그만한 공간이 필요할 테니, 다음 모래톱에서 공격해 오지 않겠습니까? 거길 지나면 습지가 나오니까요.”
“그렇겠지...”
이 땅은 조선땅과 크게 다를 게 없어서 산, 구릉, 강, 황무지, 습지, 늪지, 개간되지 않은 농지 등이 죄다 뒤섞여 있었다.
본래 조선내지에서 강을 타고 조운선을 끌던 기선군들 입장에선, 의외로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지형인 거지.
그런 수송함대가 이 강줄기를 돌아다닌 게 한두번이냐. 이젠 모두가 지형을 훤히 읽을 정도가 됐다.
기병이 대다수인 여진족이 습지나 늪지에서 활동할 수 없으니, 공격해올 지점은 지금이 아니면 다음 모래톱이 분명.
“착호군이 언질을 준걸 보면, 아마 포위망을 만들고 있을 테고.”
“저희가 반격하면 뒤를 치지겠지요. 걔들이 우리 이용해 먹는 게 어디 한두번입니까.”
“흐응.”
갑판장인 조 중위가 불평을 내뱉었지만, 함장은 그저 쓴웃음을 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1개 연대에 배속된 화기대는 1개 포대. 야전화포 10문 밖에 안 된다.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었으니까.
허나 지금 함께 움직이는 수송함대는 총 17척. 여기에 배치된 함포만 50문에 가깝고, 함포는 야전화포보다 구경이 커서 위력이 더 크다.
그가 만약 기병지휘관이었어도, 어떻게든 이걸 써먹었을 거다.
심장을 떨리게 하는 긴장감 속에서, 수송함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굽이치는 산세를 옆에 끼고 크게 돌기 무섭게, 퇴적침식작용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모래톱이 등장.
“온다!”
둥둥둥둥! 더엉! 누군가 날카롭게 외치는 목소리와 함께, 저 앞에선 지휘함에서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낮게 퍼져나가는 징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총원 전투준비!”
“전투준비!”
아직 산을 지나치지 않아서 모래톱이 보이지도 않지만, 함장은 목청이 높여라 소리치며. “삑삑!” 입에 문 호각을 요란하게 불어댔다.
저 앞에선 수송함대를 향해 비 오듯이 쏟아지는 화살비가 눈에 들어왔고, 그에 대항해 이젠 모두가 익숙해진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콰쾅! 앞서가던 함선은 배가 살짝 기우뚱 거릴 정도로 일제히 포격을 날려댔고, 순식간에 회색 연기가 피어올라 강가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포격 준비! 장전!”
“장전!”
함포장인 정 소위의 외침이 터지기 무섭게, 강 중사를 비롯한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화포병 한명은 화약통에서 미리 포장되어 있던 화약뭉치를 꺼내 화포에 쑤셔 넣었고, 반대편에 있던 화포병은 격목을 넣기 무섭게 둥글둥글하게 갈린 조린탄을 쑤셔 넣었다.
다시 화약을 넣었던 화포병은 꽂을대를 가지고 꾹꾹 눌러 담았고,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수는 얇고 긴 쇠꼬챙이에 심지를 둘둘 말아 점화구에 쑤셔 넣었다.
이윽고 모든 준비가 끝이 나자, 선벽 사이에 좁게 난 구멍 사이로 함포를 밀어 넣었다.
반동을 잡아줄 밧줄을 팽팽하게 당겨 함포를 고정시키고, 반동으로 동차가 이상한 곳으로 튀어나오지 못하게 바퀴를 고정시켰다.
“방포준비!”
“준비!”
함포장은 알아들을 수 없는 요란한 괴성과, 괜히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악취를 맡으며 목청을 높였다.
이제 모래톱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시야를 가리고 있는 절벽과도 같은 산세를 지나치면 적이 보일 게 분명.
휘릭! 그리 급선회를 하지도 않았지만, 함포장은 내장이 쏠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순식간에 전장 한복판에 떨어졌다.
시야가 트이기 무섭게, 저 앞에서 마구 몰려와 화살을 쏴대는 여진족이 눈에 들어왔으니까.
“와아아!”
앞에서부터 계속 뿜어 나오는 회색 연기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눈에 아른 거릴 정도로 여진족이 잔뜩 몰려 있는 것 같았다.
‘옹기종기 잘 모여 있는 거 같은데, 이거나 먹어라. 귀찮은 놈들아.’
함포장은 두려운 마음을 애써 꾹 누르며, 억지로라도 호기로운 생각을 떠올렸고.
“방포!”
“방포!”
그와 동시에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내질렀다.
콰콰쾅! 화약을 담고 있던 천조각이 반쯤 타버려서 하늘로 날아가고, 그와 동시에 화약 연기를 뚫고 돌벼락이 솟구쳤다.
여진족이 화살을 날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으니, 화포의 사정거리에 완전히 들어온 꼴 아니냐.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저걸 맞고 어떻게 될지 눈에 훤히 보였다.
아니다. 차라리 그 지옥도와 같은 참상을 눈으로 보지 않은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