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챕터27. 진격하다 (6)
쿵! 연기를 토해낸 함포는 두툼한 바퀴를 밀어내며 거칠게 튀어나와 밧줄에 걸려 멈춰 섰고, 화포병들은 또 다시 바삐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값비싼 화약을 마구 낭비할 수 없어서 실사격 훈련은 열에 한번 꼴로 밖에 하지 않았지만, 준비 과정은 어깨가 빠지도록 훈련해 오지 않았나.
화포병들은 기계처럼 돌아가며 움직여서, 포구를 청소하고 재장전에 열중했다.
“불화살이다!”
“이런 샹.”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오기 무섭게, 겁도 없이 선미 누각에 우두커니 올라서서 활을 쏘고 있던 함장이 쌍욕을 내뱉는 게 들려왔다.
역시 전쟁터에선 양반이고 뭐고 할 거 없이 야만인이 되는 걸까?
함장은 바닥에 널려 있는 모래를 한 움큼 집어 뿌리고선, 두정갑에 박힌 불화살을 뽑아냈다.
“멈추지 말고 계속 쏴라! 어차피 사거리 안에 들어와 있다!”
화약 연기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여진족이나 기선군이나 마구잡이로 화살을 날려댔다.
어차피 서로 사거리 안에 들어왔으니, 갑옷을 두툼하게 껴입은 조선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 아니냐. 대충 쏘다보면 알아서 맞지 않을까.
“함장님! 돛을 접으라는 신호입니다!”
선수에서 화살을 날리고 있던 견시병은, 잔뜩 신경질이 난 함장에게 달려와 앞선 함선의 돛대 끝에 달린 녹綠기를 가리키며 목청을 높였다.
“여기서 끝장을 보려는 건가?”
“...”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견시병은 입을 다물었고, 함장은 자신의 판단을 뒤로 미루고 곧장 명령을 전달했다.
“신호기를 올리고 그대로 행하도록!”
“옙!”
견시병은 바삐 달려가 손을 놀리기 시작했고, 이윽고 안 그래도 느긋하게 가던 함선은 힘을 잃고 그저 관성을 받아 더욱 느려지기 시작했다.
‘적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까?’
함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연신 손은 기계적으로 화살을 재어 날리기를 반복했다.
화라락. 두두두. 여진족에 쏘아대는 불화살과 화살은 말 그대로 두서없이 빗줄기가 되어 마구 쏟아졌다.
두툼하게 보강한 선벽에 맞아 튕겨나기는 게 대다수지만, 가까이에 와서 쏜 화살 중 일부는 갑판까지 날아들었다.
그럼에도 모두는 갑옷을 믿고 겁 없이 활개 치며 돌아다녔다.
애초에 화살 한두대에 뚫릴 거였으면, 이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왜 입었겠나.
다들 모래를 물처럼 마구 날리며 불화살의 불을 꺼트렸고, 화포병들은 혹여나 화약통에 화살이 맞을 까 싶어서 유독 주의하면서 연신 포격을 이어나갔다.
쇠뇌병들 또한 마찬가지.
덩치가 커서 거추장스럽고, 장전속도가 느린 쇠뇌를 조선군은 선호하지 않았으니, 굳이 휴대용 쇠뇌를 만들 필요도 없지 않나.
함선에 장착한 쇠뇌는 그 덩치가 엄청 커서, 이건 사람 맞추려고 만든 물건이 아니라 배를 때려 부수기 위해 만든 물건처럼 보였다. 쇠뇌에 끼우는 화살조차도 거의 작살만 했으니까.
번외지만, 기선군은 이 물건을 의외로 좋아했는데, 동해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이걸로 돌고래나 고래를 잡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물건이 사람에게 쏘아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쾅쾅쾅! “으아악!” “아악!” 사방을 자욱하게 가리기 시작한 화약 연기를 가르며, 빛줄기마냥 날아간 쇠뇌화살이 비명과 함께 땅에 박히는 게 생생히 눈에 들어왔다.
수송함대는 어느덧 속도가 줄어 멈춰선 거나 다름없었고, 화포와 화살비는 끊임없이 쏟아졌다.
다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당연히 기선군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바, 아니나 다를까 쏟아지던 화살이 점점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선벽에 숨어서 조심스럽게 화살을 쏘던 이들이, 이젠 대놓고 마구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세가 끝난 건 아니었다.
여진족은 동료가 죽든 말든 우격다짐으로 돌벼락의 세례를 뚫고 함선을 향해 다가와 달라붙기 시작.
“화포병은 계속 방포하고, 나머지는 단병 준비!”
“옙!”
“단병 준비!”
함장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갑판장은 복명복창하며 병사들을 이끌었다.
화포병, 조타병과 견시병을 제외한 모든 선원이 활을 몸에 얹고, 선벽에 눕혀 놨던 장창을 끄집어 세웠다.
“세워!”
“세워!”
모두는 선벽에 달라붙어 창을 선벽에 붙이고 단단히 섰고, 검회색 연기를 뚫고 물보라를 튀기며 달려드는 여진기병을 노려봤다.
해상전은 결국 선상백병전으로 끝나기 마련이고, 아무리 화포를 좋아하는 조선이라지만 지금까진 왜구들과 싸울 때 배를 맞붙여서 창칼을 휘두르며 마무리 했다.
그러니 단병접전이 그리 낯선 건 아니지만, 기병이 배를 노리고 달려드는 경우는 또 처음 아니냐.
이 어색하면서도 낯선 전투에 다들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몸은 정직하게 움직이며 연신 창을 아래로 찔러댔다.
“어차피 못 올라온다! 여긴 성벽 위이나 마찬가지라고! 겁먹지 말고 배운 대로만 움직여라!”
갑판장은 양손에 하나씩 든 한손도끼를, 선벽에 마구 내리치며 목청을 높여댔다.
괜히 그렇게 휘두른 게 아닌 듯. “끄억!”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과 함께, 풍덩! 선벽에 겨우 달라붙은 여진인이 잘린 손목만 남겨두고, 강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판장은 선원을 총괄하는 행보관 같은 위치에 있으니, 누구보다도 용맹무쌍한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나.
그는 야차처럼 모래를 날려대며 몸을 놀렸고, 사정없이 한손도끼를 휘둘러서 선체를 기어오르는 여진족의 손목을 절단시켜줬다.
무예도감까지 만들어서 착호군 전체를 단련시킨 연오랑인데, 기선군을 기존의 조선군처럼 부릴 리가 있나.
자고로 단병은 장병을 이기기 어렵고, 단병 중에서는 방패와 한손무기 조합이 최고다.
그런 면에서, 기선군은 배에서 배로 넘어오지 못하게 막는 창술을 일단 익혀야 했지.
다음으론 어찌저찌해서 서로 넘어와, 단병백병전이 벌어지는 경우를 상정해서 무기술을 익혀야 했는데...
양손장도를 쓰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갑판 위에는 걸리적거리는 게 많은 터라 아무래도 한손무기가 더 나았다.
헌데 선상에서 큼직한 방패를 사용하는 건 상상외로 불편했다.
그렇다고 작은 방패를 쓰자니 효과는 생각보다 미비했고, 그것조차도 귀찮아서 선벽에 세워놓고 다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갑옷 입고 다니는데, 굳이 이렇게 작은 방패까지 필요하냐 이거지.
이에 다시 고민한 결과. 짧고 강력한 일격을 뿜어낼 수 있는 무기가 최고라 판단됐고, 그에 맞는 무술은 양손검술이 최고였지.
하지만 검이라는 건 보관과 유지가 은근히 까다로운 무기일뿐더러, 양손검술은 난이도가 꽤나 높지 않나.
연오랑은 누구나 익히기 쉬운 열화판을 만들어냈고, 무기조차도 양손쌍검이 아닌 토마호크와 유사한 양손쌍도끼로 바꿔버렸다.
선상에서 도끼는 무기가 아니라 거의 공구처럼 일상화되어 있어서, 다들 친숙하게 여겼으니까.
착호군에 속해 무관이자 미래의 장교 취급을 받는 갑판장. 그는 당연히 양손도끼술의 달인이 될 수밖에 없었고,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은 연오랑이 친히 머리통을 깨주면서 되게 만들어줬지.
“못 올라오게 막아! 죄다 조져버려!”
갑판장 조 중위는 고난 했던 훈련을 떠올리며, 그 분풀이를 여진족에게 풀어내어 손목수집가로 변신했다.
갑판장의 용맹무쌍함을 본받아 선원들 또한 작살질을 하듯, 죄다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선 창을 내질렀다 회수하기를 반복했다.
애초에 이렇게 성벽처럼 써먹으려고, 갑판 위에 선벽과 누각을 세운 것 아니겠나.
“끄억.” “컥...” “으억!”
같은 배 위에서도 신형 수송선의 갑판이 높아서 넘기가 힘든데, 여긴 강물이 있는 모래톱 아니냐.
여진족이 탄 말은 다리까지 잠겨 있었고, 말 위에 올라 선벽을 공격하려고 하고 있으니... 제대로 공격할 수나 있나.
“계속 찔러!”
갑판장의 잔혹한 명령은 계속 이어졌고, 그에 맞춰 내지르는 창날에 머리와 어깨가 쪼개져 여진족들은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헙!” “히윽!”
난장판이 펼쳐진 와중에, 화포병들이 불쑥 튀어나온 손에 기겁해서 화들짝 놀라자.
“이런 쓰벌. 여기에 구멍이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순식간에 달려온 화포장 정 소위. 그는 양반체면 따윈 진작 날려버렸는지, 쌍욕을 내뱉으며 함포 구멍으로 불쑥 튀어나온 여진족의 손을 냉큼 찍어버렸다.
도끼날 반대편에는 뾰족한 징이 달려 있었고, 이건 어지간한 방패도 쪼개는 위력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 손이 멀쩡하겠는가.
“크헉!”
여진족은 비명을 내지르며, 다른 손으로 구멍 난 손을 감싸고 떨어졌다.
“얼른 밀어 넣고 쏴버려!”
“방포!”
화들짝 놀랐던 화포병들은 부끄러움을 날려버리려는 듯 함포를 밀어 넣기 무섭게 점화했고, 쾅! 조란탄이 터지는 순간. 말 그대로 피보라가 비산했다.
바로 직격에서 화포가 터졌으니, 다닥다닥 붙어 있던 여진족이 어떻게 됐겠는가.
말 그대로 어육이 되어서 형체도 찾을 수 없게 작살났고, 하늘 높게 치솟은 피와 내장조각들이 갑판너머로 튀어오를 정도였다.
“어우. 이게 뭔 난리야?”
안 그래도 피칠한 갑판장은 하늘에서 쏟아내는 내장 조각이 갑옷에 달라붙자, 자기도 모르게 털어내며 욕을 토해냈다.
대충 정리하기 무섭게, 다시 도끼날을 높이 세우고 몸을 움직였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모래톱에는 다시금 돌진해 오려는 여진족이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
또 다시 시체로 만들어진 언덕을 쌓으며, 여진족이 공성을 시작하려는 찰나.
“저기!”
“와아아!”
선수루에 서서 화살을 쏘고 있던 견시병이, 잘 보이지도 않는 모래톱을 가리키며 연신 환호성을 내질러댔다.
“뭐냐!?”
“청기가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저기! 연대기입니다. 드디어 공격하는 모양입니다!”
청기가 올라왔다는 건, 포격을 중지하라는 명령 아니냐.
함장과 화포장은 냉큼 선수루로 자리를 옮겨, 견시병이 가리키는 곳을 살펴봤다.
유독 눈이 좋은 이들을 견시병으로 골라 뽑은 탓에, 그리고 더욱더 짙어져 가는 화약연기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기병연대가 온 건 분명했다.
콰콰쾅! 함포소리와 살짝 결이 다른 화포소리가 어디선가에서 터져 나오고, 저 멀리 떨어진 전장 밖 산기슭에서 검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눈에 들어왔으니까.
“야전화포군?”
“예. 포위망을 완성한 모양입니다.”
여진족이 화포 따위가 있을 리가 없으니, 당연히 조선군일 거다.
두두두... 강 위에 떠 있으니 땅의 진동이 느껴질 리 만무하지만, 모두는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 들어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저기. 땅바닥을 스멀스멀 잠식하며, 점점 늘어나는 검은 형상이 보였으니까.
모래톱을 완전히 감싸고, 산세의 협곡을 전부 점거하고 밀려오는 걸 보면... 대략 3개 연대가 모인 것처럼 보였다.
이젠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실전에서 겪어보니 전혀 아니다.
연대기병이 일제히 돌격해 오는 모습을 보자, 같은 편인 걸 알면서도 절로 두려움이 밀려왔다.
“옛 여진이나 몽골기병들이 저런 모습이었을까?”
“글쎄요...”
“에이. 이젠 우리 조선기병 아닙니까.”
함장과 갑판장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살짝 떨리자, 화포장은 괜히 호기로움을 내비치며 목청을 높였다.
혹여나 오탄이 날아갈지도 몰라서 함포사격은 멈췄지만, 모래톱을 감싸고 있는 양측에서 포탄이 날아와 모래톱과 평원을 가로지르는 게 눈에 들어왔다.
포격을 멈추자 강바람에 맞춰 연기가 조금씩 흩어지는 것도 있고... 누가 봐도 강철철환이 쓸고 지나간 것 마냥, 군데군데 원형을 그리며 나자빠진 여진기병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조린탄과 철환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확연히 티가 날 정도로 차이가 났다.
원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선원들 모두는 환호성을 내질렀고, 전장을 가로지르며 뭔가 말할 수 없는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으나.
“멈추지 마라! 계속 찔러!”
함장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던 여진족의 머리통에 화살을 날려주고서, 계속해서 선원들을 독려했다.
‘저놈들도 당황했군.’
뜬금없이 조선군 선원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소강상태에 들어서니, 여진지휘관들도 뭔가 이상해진 걸 알지 않겠나.
그 틈을 노려 한발 날려봤는데... 여진지휘관 중 하나가 운 좋게 목덜미에 화살에 맞아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게 보였다.
“화포병들도 움직여라!”
함장의 속마음을 읽어낸 걸까? 화포장 정 소위 또한 피 묻은 한손도끼를 흔들며, 화포병들을 이끌었다.
저렇게 새까맣게 기병이 밀려와 돌격해 오는데, 여진부족이 어떻게 대응하겠냐.
저항하다가 죽거나, 항복하거나, 강 건너로 도망치거나, 어쩌면 죽기 살기로 수송함대를 노릴지도 모르는 일 아니냐.
3개 연대가 연합해서 포위작전을 완성했는데, 방심한 수송함대 때문에 실패했다는 말을 들으면... 적잖게 피곤해질 거다.
“찔러!”
“단단히 뭉쳐서 틈을 보이지 마라!”
“쇠뇌는 계속 쏘도록! 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라!”
모두는 일심동체가 되어, 여진족이 수송함대에 달라붙지 못하게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바짝 세웠다.
수송함대가 모루 아닌 모루가 되어 단단히 버티고 있자, 사방에서 질서정연하게 밀고 들어온 연대기병은 천천히 하지만 묵직하게 밀고 들어왔다.
수송함대를 노리기 위해서, 모래톱 근처에 모여 축차공격을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여진족들 아닌가.
뜬금없이 양측면에서 터져 나온 야전화포의 포격으로 전열은 죄다 망가졌고, 그렇게 무너진 틈바구니 사이로 화살비가 쏟아졌다.
“으...”
“허업...”
직접 맞을 때는 오히려 그러려니 했는데, 여진족 진영 중앙으로 쏟아지는 화살비를 보고 있자니 절로 다리가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