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챕터27. 진격하다 (7)
저게 다 몇 발이냐. 눈으로 세지도 못하겠다.
“저놈들... 우릴 공격하진 않겠죠?”
“하겠나? 쟤들 당황한 걸 보라고.”
강 중사는 창을 꼬나들고 선벽에 단단히 붙어서, 옆에서 한손도끼를 계속 쥐었다 풀었다를 반복하는 정 소위를 바라봤다.
하는 꼴을 보니... 말은 호기롭게 해도, 강 중사마냥 적잖게 흥분한 모양이었다.
힐끔 고개를 밑으로 내려 살펴보자, 선체에 달라붙어서 공격하던 여진족은 죄다 도망가서 흩어졌다.
그들이 마구잡이로 날뛴 탓일까? 안 그래도 엉망이 된 전열은 더욱 엉망이 되기 시작.
화약연기로 가득 찼던 전장이 이젠 먼지와 모래구름으로 덮이게 생겼다.
“잘 지켜.”
“옙!”
화포장은 화포병들을 다독이며 부산스럽게 움직이다가, 갑판장과 눈이 마주치고는 얼른 선수루로 발길을 돌렸다.
“뭐 보이십니까?”
“뚫는군. 저기 중앙 보이나? 유독 튀어나와 있군.”
화포장과 갑판장은 함장의 들뜬 목소리에 시선을 돌려 살폈다.
잘 보이진 않는데, 하여간 화살비가 집중되는 걸로 보아 저쪽에서 한바탕 난리 난 게 분명했다.
“음...”
“흐음.”
한손도끼를 쥔 손에선 땀이 줄줄이 흘러 가죽끈 손잡이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지만, 세 사람은 전장의 흐름을 애써 읽으려 노력하며 눈을 부릅떴다.
조마조마한 그들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연대기병은 그들의 고민을 친절하게 줄여줬다.
쐐기꼴로 뭉친 기병이 무너진 중앙전열을 그대로 짓밟고서, 물밀듯이 쇄도해 들어가기 시작했으니까.
함장의 예측대로 무너진 중앙의 틈을 노리고, 검은 물결이 파도처럼 몰아처서 여진족 진영을 반으로 쪼개버리며 다가왔다.
그 최종 목적지는 다름 아닌 수송함대.
아예 진영을 일도양단해서, 하나씩 무너뜨리려는 속셈이 아닐까?
“맞겠지요?”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여진 부족장들을 사로잡으려는 걸지도 모르지.”
“아니면, 강 너머로 도망치지 못하게 미리 선점해 놓으려는 것 아니겠나.”
함장은 그리 답을 하고선, 어째 강 반대편을 향해 화살을 쏴대는 게 아닌가.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배에서도 이따금씩 화살이 날아가곤 했는데... 목표는 함선 틈 사이로 지나가서, 강 건너로 헤엄쳐서 도망가려는 이들이었다.
허나 이젠 물고기조차 화살로 쏘아 맞출 정도로, 활쏘기에는 이골이 난 기선군 아니냐.
물살에 밀려 천천히 헤엄치고 있는 자들을 못 맞출 리가 없지.
쏘는 족족 강물을 붉게 물들이며, 여진인은 죽은 개구리마냥 대자로 떠올랐다.
어울리지 않는 인간물고기 사냥을 하는 동안에도.
샤샥! 콰쾅! “으억!” “막아라!” “크헉!”
뚝 끊긴 화포의 포격소리와 다른, 보다 원초적이고 날카로운 소음이 전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연대기병들은 무수한 적들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린 편곤을 사정없이 휘두르며 여진족들의 머리를 날려버렸고,
기창을 꼬나든 이들은,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꼬치구이로 만들어주며 공간을 넓혔다.
몇몇 기병들은 동아시아 어디에도 없는 특이한 형상의 조선월도를 휘두르며, 말이건 여진족이건 할 것 없이 죄다 가르고 쪼개버렸다.
육중한 장병기를 선두에 세워 밀고 들어가, 여진 전열의 틈을 더욱 벌리자.
그 틈으로 보병용인 쌍수장도가 아닌, 기병용 한손장도를 든 기병들이 등장.
역수로 내리 찍고 하늘을 향해 올려치면서, 가까이 달라붙은 여진족들을 털어냈다.
그 옆으론 앞서서 돌파하는 기병을 보호하며, 꼭 솔방울을 달아놓은 것 같이 생긴 기병용 철퇴를 마구 휘두르는 기병이 보였다.
말을 타고서 3인 1조로 뭉쳐서 움직이는 게 결코 쉽지 않건만...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딱딱 맞춰 여진기병을 자르고 두들기고 밟아대는 게 아닌가.
“...”
“무시무시하군요.”
“그러게 말이야.”
셋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선,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평난군의 주축이 착호군 1기라더니... 과연.”
“예. 함길도에서 사냥할 때봤던 것하고는 전혀 다르군요.”
‘하긴...’
함장은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가슴을 애써 다독이며, 스스로 납득해 고개를 끄덕여댔다.
착호군이 창설된 지 벌써 5년차에 접어들었다.
1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오랑의 감독 하에 조련됐고, 창칼을 휘두르며 요동,몽골,중국,북방을 떠돌았다.
산발적인 교전을 계속하고 있었던 중국,북원,여진을 통틀어도, 저들만큼 대단위 전투와 훈련을 끊임없이 수행한 부대가 없지 않나.
그야말로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이니, 제대로 된 갑옷도 입지 못한 여진기병이 상대가 될 리가 있나.
머릿수조차 부족하니, 중과부적도 이런 중과부적이 따로 없지.
순식간에 중앙은 무너지고, 사방에서 검은 소대 깃발 위로 이름 모를 부족장의 머리통이 하나둘씩 꽂히기 시작.
동시에 우렁찬 승리의 포효와 함께, 천지를 뒤흔드는 어색한 여진말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
뜬금없는 외침에, 셋은 자기도 모르게 서로 눈이 마주쳤다.
연대기병이 소리치는 여진말은, 그들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외운 말이니까.
“저희도 따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승기가 기울고 있으니, 여기서 완전히 쐐기를 박아버려야 되지 않겠나.
화포장은 들뜬 목소리로 함장을 바라봤고, 함장은 어느새 자신을 보고 있는 모든 선원의 눈빛을 확인하고선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모두 외쳐라!”
“옙!”
“와아!! 이겼다!”
선원들은 “우린 기선군인데 이걸 왜 배워야 하지?”라고 불평하면서도, 억지로 외워야 했던 그 말.
모두는 “항복하라!” “말에서 내려 엎드려라!”라는 여진말을,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다.
*****
뒷정리는 연대기병에게 맡기고, 수송함대는 뒤도 보지 않고 돛을 펼치고 나아갔다.
도와주면 전장정리가 빨리 끝나겠지만, 보급품을 기한 내에 맞춰 보내는 게 더 우선 아니냐.
혹여나 늦어지면 평난군은 물론이고, 포로로 잡힌 수만의 여진인이 배를 굶을 거다.
지체했던 시간을 보상하듯, 선원들은 선창으로 내려가 몇 개 되지도 않는 노를 열심히 저어가며 속도를 올렸다.
신형수송선은 맹선과 달리 바람의 힘을 이용하는데 중점을 둔 터라, 노가 몇 개 달려 있지도 않았다. 노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전투병력은 물론이고 적재량도 줄어드니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고, 특히나 파도가 없는 이런 강에서는 물밑에서 휙휙 내젓는 것만으로도 속도가 나름 나왔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며칠을 꼬박 달려 도착한 곳은, 송화강을 끼고 길림 바로 옆 동쪽에 콕 박혀 있는 곳.
금대에는 이속상경로, 해란로라 불렸고, 미래에는 교하라 불릴 곳이었다.
“여긴 여전히 정신없군?”
“그러게 말입니다.”
함장과 화포장은 저 멀리 보이는 신도시를 보자,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여진족의 공격을 뚫고 파저강과 송화강을 거슬러 이 먼곳까지 왔는데, 정작 이곳에선 여진포로를 먹여 살리고 있지 않나.
여진부락간의 관계는 워낙 개판이라서 하나로 딱 잘라 말하기 힘들지만... 이렇게 모순된 상황이 피부로 느껴지니, 헛웃음이 절로 나올 수밖에
전장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게 정리된 석회부두 옆으론, 수십척의 소형수송선이 줄줄이 접안해서 보급품을 내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기 보이십니까?”
“어. 1함대도 왔군.”
“저 친구들도 공격 받았을까요?”
“그럴 리가.”
함장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조선군의 수로를 이용한 보급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눠져 있었다.
의주에서 출발해 압록강을 따라 정주에 도착하고, 정주에서 파저강과 송화강을 타고 북상하는 경로.
경원에서 출발해 해란강을 거쳐 연주에 도착하고, 연주에서 목단강에 도착해 송화강으로 갈아타서 북상하는 경로.
즉. 조선반도의 서쪽끝과 동쪽끝에서 군량과 보급품을 끌어올려, 이곳에 쏟아내는 중이지.
다만 1함대가 타고 온 경로는 건주위 지역을 통과해 빙 돌아오는 경로인데, 그쪽에는 여진족이 있을 리가 없잖나.
만약 공격을 받았다면 이들이 겪었던 것처럼, 송화강 지류에서나 공격을 받았을 거다.
고개를 쓱 돌려 부둣가를 살펴보자, 전에 없던 건물이 우후죽순 솟아 오른 게 눈에 띄었다.
‘원산에서 봤던 광경과 똑같군. 아니야. 여진포로가 훨씬 많으니, 그만큼 더 빠르게 만들어지는 거 같은데?’
화포장 정 소위는 빠르게 눈을 굴리며, 부둣가 저편을 살펴봤다.
도시를 만들 때 가장 먼저 만들어지는 거대수차. 착호군이 지나가는 곳이면 빠지지 않고 세워지는 목욕탕과 한증막.
수만명이 싸대는 오물을 모으기 위한 공용변소. 그 변소에서 나온 오물을 거름으로 발효시키기 위한 수십개의 거름산.
지붕만 세워서 확 트인 창고에 수북하게 쌓인 석탄과, 부둣가 근처에 빼곡하게 박힌 식량창고들.
도시에서 살짝 벗어난 산 중턱에, 어디서도 잘 보이도록 높게 솟아 있는 사찰과 목탑.
그 외에 도시건설자재를 수급하기 위한 수많은 공방들.
정주에 갔다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나 달라진 모습을 보아하니... 하루에도 수십채씩 건물이 지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짐부터 내리시죠.”
“그래야지.”
서로는 놀란 미소를 날려 보내고선, 곧장 선원을 부리기 시작했다.
수송선이 접안하기 무섭게,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여진포로들이 우르르 몰려와 보급품을 내리기 시작했다.
포로로 잡혔으니 반항할 법도 하건만... 그럴 리가 있나.
여진인들도 수송함대가 자신들이 먹을 식량을 싣고 오는 걸 익히 경험했기에, 평난군이 끝도 없이 잡아오는 다른 여진부락민을 알아서 감시하고 있었다.
갑판장에 선원들을 맡기고, 둘은 부둣가에 내려 도시 중심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자기도 모르게 발이 땅에 달라붙었다.
“흠.”
“또 잡은 모양입니다.”
“그러게.”
공사판 공터에 장승처럼 박혀 있는 창대가 눈을 사로잡는다.
아주 제대로 된 무력시위 아닌가.
창대 끝에는 이젠 썩어서 알아보기도 힘든 수급이 박혀 있었고, 몇몇 수급에선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걸로 보아...
연대기병이 해서여진에 동조한 여진부락을 또 다시 휩쓸고 온 게 분명했다.
“크음...”
“쯧.”
수급을 지나쳐 걸음을 옮기자 이번엔 악취가 밀려왔고,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막으며 눈을 찌푸렸다.
저쪽 한편에 위치한 거대한 담장너머에는, 넝마를 입고 굶어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는 여진인들이 보였으니까.
똑같은 여진인이건만 누군 일꾼이 되어 일하고 있고, 누군 저렇게 옥에 갇혀 있으니 퍽 괴상하게 보이지만... 웃기게도 여진인들 중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서여진이 뭉쳤다지만 일심동체로 하나가 된 것도 아니고, 이 넓은 북방 땅의 여진인들이 죄다 해서여진에게 동참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이들은 조선이 있든 없든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싸운 세월이 오래 돼서, 아무리 혼맥으로 엮여 있다고 한들 사실상 남남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원수지간인 부락은, 저 꼴을 보면서 속으로 환호를 지르고 있을 거다.
조선군 또한 저런 우악스런 방치를 망설이지 않았다.
저들은 온갖 회유를 마다하고 조선을 거부하는 자들이니, 굳이 곱게 대해줄 필요가 없지 않나.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렇게 반항하는 이들보다 순종적인 이들이 몇 배나 많다는 점이지.
“정말 많군... 이번에도 또 포로들을 옮기겠지요?”
“그래야 하지 않겠나? 아무리 식량을 배로 편하게 옮긴다고 해도, 이곳에 포로들을 계속 모아두는 건 문젯거리가 되겠지.”
“그렇겠죠.”
정 소위는 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해본 일 아니냐.
수송함대는 보급품과 군량을 싣고 와 이곳에 쏟아내고, 빈 배에 여진포로와 온갖 전리품을 옮겨 싣고 호주와 평주로 향했다.
물론 전쟁준비를 하며 쪼그라든 여진인이 가지고 있는 게 뭐 얼마나 있겠냐. 기껏해야 모피 정도가 끝이지. 만약 이게 장사라면 제대로 밑지는 장사일거다.
아직 제대로 기와조차 올리지 못한 중앙관아로 향하자, 저편에 임시로 만들어진 회의실에 함장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다른 선원들은 몰라도, 적어도 함장은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하는 법.
굳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1함대와 2함대의 함장들은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입이 심심한 이들은 말린 명태를 뜯어먹으며 출출함과 심심함을 달랬다.
“그런데 이거 여진인들도 잘 먹을까요?”
“없어서 못 먹을걸. 국으로 끓여서 먹으면, 특별히 뭘 안 넣어도 맛있잖아?”
“그건 그렇죠.”
정 소위는 이 명태를 잡기 위해 생고생을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안 먹는 여진인이 있다면 억지로라도 먹여줘야지.”라는 생각이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껏 조선은 명태를 제대로 먹지 않았는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지지 않았나.
기선군이 동해바다에서 엄청나게 잡아 올린 명태는, 순식간에 절인청어의 위상을 따라잡으면서 사방으로 팔려나가고 있었다.
이곳 여진인들에게도 엄청나게 풀려서, 이들은 지겹도록 북어국을 먹고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