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74화 (174/538)

174. 챕터28. 차지하다 (1)

“군량은 얼마나 남았지?”

“보급품이 예정대로 도착했다면... 대략 3개월치는 남았을 겁니다.”

“북쪽과 남쪽으로 출정한 연대가 얼마나 데려올지 모르니, 더 줄어들지도 모르겠군?”

“예. 아마도...”

연전위는 그것까진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애매하긴 한데... 나쁘지 않다.’

연오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일단 보유한 군량이 3개월치면 충분하니까.

“저놈들이 겨울까지 버틸 수 있을까?”

“힘들지 않겠습니까? 작년에도 제대로 수확하지 못했고, 올해는 아예 씨조차 뿌리지 못하고 사냥도 못했으니... 아무리 약탈한 식량이 있다고 한들 버티는 건 어렵지 않을까요?”

“그래야겠지.”

“그래도 겨울이 올 걸 대비해서, 군량을 더 비축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맞지.”

‘겨울이라... 연주도 추웠는데, 북쪽인 이곳은 더 춥겠지.’

연오랑은 연전위와 연손찬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이 오면 조선의 강마저도 죄다 얼어붙는데, 훨씬 북쪽에 위치한 만주의 강이 남아나겠는가.

여긴 겨울이 더 일찍 찾아오니, 초겨울만 되도 강이 얼어붙을 터... 수로를 이용할 수 없으면, 군량보급이 급격하게 어려워질 거다.

‘그래도 버틸 수 있다. 나쁘지 않아. 겨울이 오기 전에만 끝내면 돼.’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속으로 만족스런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려가자.”

“옙!”

일행은 낮은 구릉처럼 솟아 있던 성벽을 한걸음에 내려갔다.

‘흐음... 봐도 봐도 신기하네.’

연오랑은 끝도 없이 펼쳐진 게르의 파도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히죽 웃고 말았다.

이젠 착호군을 넘어서 여진인마저도 익숙해졌는데... 어째 이걸 만든 본인이 적응을 못하는 꼴이다.

주둔지 중앙에는 임시로 만든 건물이 어색하게 홀로 서 있었다.

이곳에 넘쳐나는 건 강물과 나무이니, 건물 짓는 게 어려울 게 있나. 다만 굳이 멋들어진 관아를 뭐 하러 짓겠나.

당장 필요한 대장간을 비롯한 각종 공방을 성벽 옆에 줄줄이 짓고 있었고, 중앙에는 그저 앞으로 창고로 쓰게 될 임시지휘소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충성!”

“별일 없냐? 몸 상태는?”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몸이 조금 쑤시는군요.”

“오냐. 알아서 잘 풀어라. 여기까지 왔는데, 괜히 다치면 곤란하지.”

“흐흐. 옙!”

짬밥이 잔뜩 찬 착호군 1기라서 그런 걸까? 기창을 점검하고 있던 병사는 쫄지도 않고, 그저 히죽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연오랑은 게르 근처에서 돌아다니던 병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재깍 지휘소 안으로 성큼 발을 내딛었다.

그저 통나무집에 불과했지만, 안은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중앙탁자에 놓여 있는 지도.

연오랑은 창문을 활짝 열게 시키고선, 등잔불을 피워 지도를 밝게 비췄다.

만주 일대가 그려진 지도 위에 목각인형을 하나씩 올려놓고, 지나온 길을 다시금 집어봤다.

‘연변. 돈화. 통화. 교하. 길림. 앞으로 차지할 장춘. 송원. 하얼빈.’

하나씩 가볍게 툭툭 집고 나가본다.

사실상 만주 일대를 관통하는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지역들.

지형은 수백년만에 바뀌지 않으니, 과거의 요충지는 지금도 요충지이고 미래에도 요충지다.

다른 점이라면 고구려,발해,금,원 시절에 세워놓은 유적과 도시는 죄다 박살나서 흔적만 남아 있었지.

‘자잘한 문제가 있었지만, 나름 잘 풀린 거 같은데 말이지.’

연오랑은 손바닥에 쥔 목각인형을 가볍게 굴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 전쟁이 남들이 보기에 퍽 괴상한 전쟁이 된 건, 전투가 아니라 보급으로 결정되는 전쟁이 되어버린 탓이다.

해서여진이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건, 다름 아닌 시간과 식량이다.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방을 약탈했던 녀석들인데, 조선군을 견제한답시고 약탈을 못하면 자기 살이 깎여나갈 수밖에 없다.

이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빨리 끝나야 했고, 질질 끌면 알아서 말라죽는다.

그렇다고 덩치를 유지하지 않고 뿔뿔이 흩어지면, 조선군의 한끼 식사가 아니라 한숟가락 밖에 안 될 거다.

그렇다면 조선이 부담스러워 하는 건? 마찬가지로 군량과 전비. 끝으로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는 점이다.

연이은 농업혁명, 양전사업으로 세수가 몇 배나 뛰었지만, 조선팔도가 공사판인 이상 그만큼 나가는 돈이 많다.

비록 착호군은 개개인이 유지비를 부담하는 상태지만, 그럼에도 군비의 비중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원산에 신 기선군을 창설하면서부턴 그게 더 심해졌지.

이 판국에 무려 완편된 3만기병 이끌고 전쟁을 한다고? 전비가 얼마나 소모될지 상상이나 될까.

아무리 해서여진이 위험요소라고 해도... 조선이 조금 더 부유해진 후에, 해서여진이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면, 그 때 처리하는 게 좋지 않나.

더불어 해서여진을 친다고 한들, 얻을 수 있는 게 뭔가.

차라리 몽골부락이나 중국은 털어 먹을 전리품이라도 있지.

이제 막 태동해서 해서여진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려 하는데, 제대로 된 쇠붙이나 특산물도 없는 이들을 털어봐야 모피나 가축 말고 얻을 게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땅과 사람을 얻을 수 있지.’

연오랑은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속으로 피식 웃어줬다.

이렇듯 조정신료들은 “돈도 없고 관리할 사람도 없어요. 돈과 사람이!”라고 반대를 외쳤지만, 세종,태종,연오랑의 생각은 달랐다.

태종은 자신의 대에 어떻게든 여진을 정리하길 바랐고, 세종은 착호군 1기가 전역하기 전에 이 최정예 병력을 이용해서 위험부담을 줄이고자 했다.

연오랑은 한술 더 떴다.

그는 오래전부터 여진을 조선에 흡수하려고 마음먹지 않았나.

이번 전쟁을 통해서 단순히 해서여진을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아예 만주 일대를 다 집어삼킬 생각이었지.

그리곤? 왜인포로와 원정포로를 이용해 조선을 뒤흔들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십수만명의 여진포로폭탄을 집어던져서 조선을 벼랑 끝으로 밀어붙일 작정이었다.

나라가 망하지 않으려면, 다시 한 번. 기존의 제도와 관습,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할 수밖에 없을 거다.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고 했지? 이젠 생각이 달라졌을걸.’

연오랑은 직접 연주까지 와서 열변을 토하던 조정대신들을 떠올리며,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수지타산이야 맞춰주면 되는 것 아니냐.

3만기병은 그냥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 자체가 돈 잡아먹는 귀신이다.

오히려 가만히 있지 않고, 뭐라도 해야 차라리 이득인 셈.

장기적으로 봤을 땐 연주를 개발하는 게 이득이지만...

오히려 눈앞의 돈을 쫓는다면, 그 일대의 산을 털어서 맹수를 잡듯, 산짐승을 잡든, 약초를 캐든, 목재를 얻든, 뭐라도 얻어서 중국상인에게 팔아먹는 게 낫잖아?

연오랑은 이런 의견을 내면서, 해서여진이나 조정신료들의 바람과 정반대로 움직였다.

돌아가더라도 수로를 따라가면서, 소모되는 군량을 최소화시켜 최대한 느긋하게 이동.

착호군의 겉치레 명분을 상기시키듯, 진공로의 주변을 초토화시키며 뭐든지 뽑아냈다.

‘생각만큼 잘 됐고 말이야.’

그렇게 움직이는 동안에도, 인근의 여진부락도 함께 쓸어서 포로로 잡아와 부려먹었지.

이렇듯, 상리에 벗어난 조선군의 움직임에 해서여진은 당황했다.

거리로 따져보면, 길림에서 연주까지 말을 달리면, 빠르면 일주일 늦어도 보름이면 도착할 수 있는데... 무려 두 달에 걸쳐 거북이마냥 느긋하게 올라오고 있으니까.

조선군은 여진을 토벌하고 예방전쟁을 하려는 게 아니라... 아예 이 땅을 점령할 낌새를 물씬 풍기는 거지.

결국 참지 못한 해서여진이 먼저 움직였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깔짝거리면서 미끼를 던지고, 미끼를 문 이들이 끌려나오면 포위섬멸하려는 작전을 취했는데... 뻔히 아는 수를 조선군이 당해줄 리가 있나.

“너희가 오든 말든, 우린 이 땅에 교두보와 보급창을 건설한다.”라고 외치듯, 진지를 단단히 세우고 웅크리고 앉았다.

뭘 해도 통하지 않자 해서여진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전군을 몰아쳤고, 이젠 조선땅이 된 교하 인근에서 한바탕 회전이 벌어졌는데...

조선군이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 상상이나 했을까.

수백문의 야전화포가 토해내는 강철비를 얻어맞고, 기세 좋게 달려온 여진기병은 일순간에 돈좌되어 박살났지.

무려 전투인원만 3만여명에 가깝던 이들이, 한 번의 충돌로 2천여명이 사망하고 5천여명이 사로잡혔다.

그렇게 패주한 해서여진은 부리나케 본래 근거지였던 길림으로 후퇴했고, 뿔뿔이 흩어져버린 이들은 싸움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도망치고 말았지.

남은 작업은 지금껏 해왔던 일의 연속.

평난군은 여유롭게 이삭 줍듯, 탈주병들을 쫓아 여진부락을 하나씩 털어서 교하에 쓸어 담았다.

그리곤 압록강을 지키던 정토군이 교하로 올라와서 포로를 관리했고, 평난군은 또 다시 목을 조이기 위해 우라홍니. 길림으로 이동.

그게 벌써, 여름이 막 시작되던 한달 전의 상황이었다.

“2사단과 3사단은 잘 쫓아가고 있겠지?”

“패주해서 재정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결국 우라홍니를 박차고 도망친 이들 아닙니까.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어르신.”

“그래야지.”

연오랑은 목각인형을 쥐고 있다가, 미래에 송원, 하얼빈이라 불릴 지역에 내려놓았다.

*****

10연대장 겸 2사단장인 전흥.

그는 귀를 간지럼 피우는 소음에 잠이 깼다.

잠기운을 애써 밀어내며 슬그머니 눈을 뜨니, 십자로 박혀 있는 작은 게르의 천막기둥이 보였다.

“끄음.”

뜨겁게 달궈서 땅에 묻어놨던 잔돌은 차갑게 식은 지 오래.

날이 추워 모피갑옷을 껴입고 잔 탓에, 온몸이 돌덩이처럼 무겁고 뻐근했다. 그래도 추위에 떠는 것보단 몸이 피곤한 게 낫지 않나.

“후웁...”

풀어놨던 허리단추를 채우고, 손 떼가 묻어 번들거리는 가죽허리띠를 채웠다.

지금껏 조선에 없던 옷과 갑옷이지만, 착호군에 들어온 게 벌써 몇 년인가.

전흥은 능숙하다 못해 자연스럽게 옷을 챙겨 입었다.

‘음.’

두두둑. 뼛소리와 함께 몸을 풀고선, 부관이 미리 준비해둔 나무대야에 손을 댔다.

여름이 한껏 다가왔건만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세수를 하기 무섭게 정신이 번쩍 든다.

“후.”

얼굴의 물기를 털어내기 무섭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고, 탁탁. 가볍게 먼지를 털어낸 마상건을 뒤집어쓰고선 투구를 썼다.

‘비가 왔나보군.’

게르 밖으로 나가자 비릿한 물냄새와 함께, 게르의 천막을 타고 오줌줄기마냥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밤새 비가 온 탓일까? 아침안개는 쉽게 밀려나지 않고, 서서히 떠오르는 햇살과 힘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나둘셋넷!”

얕게 터지는 기합소리가 사방에 가득한 게르 사이를 바람처럼 스치며 퍼지고, 각자의 게르 앞에 선 병사들이 비슷한 동작을 취하며 몸을 푸는 게 눈에 들어왔다.

‘후...’

그 역시도 마찬가지.

연오랑 몸풀기운동이라 알려진 도수체조는, 이제 착호군을 넘어서 민간백성들까지 따라할 정도로 퍼지지 않았나.

전흥이 팔다리를 휘두르며 몸을 풀고 있자, 부관이 재깍 달려왔다.

“기침하셨습니까.”

“간밤에 별일 없었나?”

“숙영지를 배회하던 몽골인들을 몇 명 잡았습니다.”

“몽골? 올량합 3위인가?”

혹시나 싶어 전흥이 눈을 치켜뜨자.

“그건 아니고, 오래 전에 원나라에서 떨어져 나온 부락인 듯합니다. 아무래도 사방이 난장판이 된 터라, 전화를 피해서 도망치다가 굶주림에 지친 모양입니다.”

부관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해서여진과 조선의 충돌은 곧장 북방을 흔들었고, 조선군이 회전에서 승리한 후 북진하자 더욱 난장판이 벌어졌다.

조선군은 출신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포로로 잡아갔고, 도망치는 해서여진 또한 다른 여진부락의 영역을 마구잡이로 밟으며 사방으로 퍼졌다.

그 사이에 껴 있던 자잘한 여진, 몽골 부락들은 된서리를 맞은 꼴이었지.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가지.”

셀 수도 없이 깔린 게르 사이에는 곳곳에 공터가 있었고, 하나같이 흰연기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가볍게 발을 놀려 도착한 곳은, 연대장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곳.

“잘 주무셨습니까?”

“날이 조금 춥더군. 자네들은?”

“뭐. 이젠 이골이 나지 않았습니까.”

6연대장 이각은 히죽 웃으며 대꾸했고.

“거. 옆으로 좀 가게.”

“고기 굽는 거 안 보이나.”

7연대장 김효성과 9연대장 김윤수는 모닥불 위에 올린 고기를 뒤집으며 티격태격 입을 놀려댔다.

결국 모닥불 앞에 원을 그리며 모여 있던 연대장들은, 서로의 엉덩이를 밀치며 전흥의 자리를 마련했다.

‘허허...’

전흥은 괜히 실웃음이 피식 흘러나왔다.

과연 한성에 있을 조정대신들이 이 꼴을 봤으면 무슨 말을 했을까.

다들 하나같이 명문집안에, 한성에 있을 때는 거드름을 피울 정도로 잘 나가던 양반들인데... 여기에선 애들 마냥 저러고 있으니, 믿기지가 않는다.

“다 끓었습니다. 드시지요.”

“고맙군.”

전흥은 8연대장 김종서가 내민 나무그릇을 냉큼 받았다.

식사는 언제나처럼 똑같았다. 각종 말린 생선과 쌀과 콩을 섞어 끓인 죽.

착호군에 들어와서 지겹도록 먹은 야전취식인데, 오늘은 특별한 별미가 하나 더 있었다.

모닥불에 자글자글 끓고 있는 연오랑 야전식기 사이에 두툼한 돌판이 올려 있었고, 얇게 썬 정체모를 고기가 그 위에서 익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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