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75화 (175/538)

175. 챕터28. 차지하다 (2)

“보급품에 생고기가 있던가?”

“우라홍니에서 도망친 납제복록(나치부루)의 선물입니다. 죽은 말이 적지 않더군요.”

“음.”

이각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소금을 친 말고기 한점을 건넸고, 전흥은 망설이지 않고 냉큼 받아 입에 넣었다.

아무리 야전식량이 입에 맞는다고 해도, 고기를 마다할 순 없지.

“그나저나 여기가 금의 수도였던 상경회령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을 걸세. 지리감과 금석학당 소속 관원들이 그리 말하더군.”

“그런데 이렇게 허허벌판인 곳이 도성이 맞는 건지 모르겠군요.”

김종서는 저 멀리 숙영지 너머의 평원을 가리켰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렇지, 그래도 한 나라의 수도였던 곳이 이렇게 폐허가 될 줄이야.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다.

“그래도 도성터와 몇몇 석비를 찾지 않았나. 맞긴 맞을 테지. 납제복록이 여기까지 도망친 이유도 그래서 일거고.”

“음...”

“헌데 어째서 이렇게 추운 곳을 도성으로 삼은 걸까요? 한여름에도 이렇게 서늘하면, 겨울에는 얼마나 추울지 짐작도 안 되는 군요.”

“그건 그렇겠네.”

“맞는 말이야. 연주에 비하면 지독할 정도야.”

김종서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무리 했고, 부관이 끓여온 뜨끈한 차를 마시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납제복록은 어찌하고 있나?”

“어설픈 숙영지를 세우고 머물고 있습니다.”

“별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 도망치기에는 부락민이 너무 많아졌지요. 가축을 끌고가긴 했지만, 몇 되지도 않는 식량과 집기만 챙겨서 도주하는 중이니... 겨울이 오면 알아서 얼어 죽을 겁니다.”

“맞습니다. 결국 우리를 떨쳐내든지, 아니면 얼어 죽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하니, 우리와 한판 하는 쪽을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승부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대장들은 줄줄이 의견을 내놨는데, 하나같이 자신만만했다.

“문제라면 적의 수가 만만치 않다는 건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부락민은 병사들의 가족인데, 화살받이로 내몰 수 있겠습니까? 결국 장정들만 싸우게 될 겁니다.”

김종서는 전흥의 우려를 한방에 불식시켰다.

아무리 저들이 여진인이라 한들, 가족들마저 죄다 버리고 도망가면 누가 그를 따르겠는가.

더군다나 어느 정도 무리를 짓지 않고 북으로 올라갔다가는, 우량카이 3위나 기타 잡다한 부락에게 공격받아 알아서 허물어질 거다.

“화기대는?”

“화약은 문제없지만... 비가 와서 땅이 무른 터라, 철환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란탄을 쓰는 건 나쁘지 않은데, 이미 제대로 당했던 이들이 쉽게 당하겠습니까.”

“음... 일단 부딪쳐봐야 알겠군?”

“예.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좋아. 출정 준비를 하지.”

“옙!” “알겠습니다.”

모두는 전흥의 말에 시원하게 몸을 일으켰다.

지겨울 정도로 기나긴 추격전을 이제 끝날 시간이 됐으니까.

원래 역사에서 납제복록(나치부루)은 해서여진의 시조 쯤 여겨지는 인물이다.

지금 역사에서는 해서여진의 대표이자 종주쯤 되는 건 맞는데, 그 위세는 2인자로 국한됐다.

서쪽의 요동, 북의 해서, 남의 건주 사이에 껴 있던 가호랍이라는 자가 있었기 때문.

그는 조선군이 이만주와 건주위를 쓸어버릴 때.

사방으로 흩어진 건주위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급격히 성장해서, 북의 해서를 압박하더니 끝내는 송화강 유역을 차지했다. 나치부루를 누르고 해서의 1인자가 된 거지.

당연히 나치부루 휘하 부족은 노른자위를 빼앗기고 송화강 유역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았는데... 조선군이 북진을 시작하자 모든 게 망가졌다.

첫 대규모 회전에서 패전한 후. 가호랍이 이끄는 무리는 우라홍니에 틀어박혔고, 나치부루는 반대로 조선군을 피해 부락민을 이끌고 북쪽으로 도주를 시작했다.

우량카이 3위가 몽골초원에 집중하는 탓에, 해서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하얼빈 인근은 비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

그곳으로 되돌아가서 권토중래를 꿈꾸려 했던 거지.

하지만 조선군은 이들을 가만 놔둘 리 없었고, 전흥이 이끄는 2사단은 우라홍니에서부터 추격해서 끝내는 이곳. 하얼빈까지 쫓아왔다.

잠에서 깨어난 맹수처럼, 2사단 숙영지는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 병사들을 토해냈다.

보조군과 화기대 일부를 숙영지에 남겨두곤, 곧장 말을 몰아 북으로 나아갔다.

이 땅은 지평선이 보일정도로 광활한 평원지대였고, 습지와 늪지, 담수호와 강줄기, 초지가 모두 섞인 지형이었다.

만약 추위에 땅이 얼어붙는다면, 말을 달리기엔 최고의 환경인 셈이지.

그래서 일까? 전흥이 목에 걸고 있던 망원경을 들고 살피자, 확 트인 저편에서 점처럼 흔들리고 있는 해서기병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었다.

“저기. 북북서를 보게. 우릴 기다리고 있군.”

“예. 보입니다.”

김종서 또한 조심스럽게 망원경을 들고 적진을 살폈다.

저쪽 평원저편에서 그림자가 뭉쳐서 아른거리는 모습이, 원형으로 잘린 시야에 들어왔다.

‘봐도 봐도 신기한 물건일세.’

망원경이 손에 익은지 한참 됐지만, 김종서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연오랑이 원체 특이하고 요상한 물건을 많이 만든 걸 알고 있지만... 대체 이런 물건을 어떻게 생각해낼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놀랄 따름이다.

사실 망원경의 구조와 원리는 어려울 게 없었다.

비록 대중화되진 못했지만, 이미 송나라 때에 안경이나 선글라스, 돋보기 비슷한 걸 만들어서 쓰기도 했고.

문제는 재료와 장인의 숙련도.

유리를 구할 수가 없는 탓에, 연오랑은 렌즈를 수정으로 대체했는데... 이게 무거운 것 빼고는 꽤나 잘 나왔다.

동양에서 보석의 최고봉은 단연 옥이고, 조선은 이미 신라 때부터 옥세공품으로 유명하지 않았나.

원래 역사에선 명나라가 자꾸 옥을 조공으로 바치라고 하고, 유학사상에 의거해 사치를 멀리하는 풍조 때문에, 옥 채굴과 세공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았지만...

지금 역사에선 오히려 정반대였다.

운석핵꿀밤 이후 유학적 생활관념의 전파가 멈춘 터라. 사치를 멀리하는 건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나라가 나서서 막아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더불어 옥은 세수를 늘려주는 효도상품 아니냐.

의주에서 사무역이 시작될 때부터, 공조의 상의원에선 옥세공사를 꾸준히 육성해왔었다.

기업이 공인된 후로는 민간 집안마저 옥시장에 뛰어들어서, 굳이 연오랑이 개입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성장하는 분야 중 하나였지.

이런 배경이 깔려 있는 탓에 망원경 제작은 금세 탄력을 받았고, 장인이 늘고 손기술이 숙련될수록 더욱 빠르게 만들어지기 마련.

지금은 대대장에게까지 뿌릴 정도로 많이 생산되고 있었다.

“수는...”

“뒤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보다 적어 보이는군. 확실히 쫒아가면서 잔당을 처리한 보람이 있어.”

“예. 그래 보입니다. 그리고... 역시나 저희 숙영지를 공략하지 않았나 봅니다.”

“당연한 말일세.”

전흥과 김종서는 계획대로 되는 것 같아, 마주보며 미소를 날렸다.

막연한 편견과 반대로 해서여진은 보병이 꽤나 많이 섞여 있었고, 오히려 조선군이 죄다 기병이었다.

이 판국에 조선군을 피해 전장을 크게 돌아서, 보급품이 있는 숙영지를 공격하는 건 무리.

더불어 급하고 위급한건, 조선군이 아니라 해서여진이다.

만약 조선군이 숙영지를 지키려 하지 않고, 역으로 여진부락민을 노린다면... 지금껏 도망쳐 온 게 모두 물거품이 될 것 아닌가.

조선군은 이 사실을 알고 거침없이 부락민 숙영지를 향해 나아갔고, 해서여진은 부락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끌려나와 조선군의 앞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화기대를 중앙에 배치하고, 일자진으로, 중대별로 제대를 넓게 펼치는 게 좋겠군.”

“포위하실 생각이십니까?”

“포위가 되겠나?”

“...”

김종서는 확언할 수가 없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싸울 수 있는 해서여진의 군병은 조선군보다 적지만, 부락민 전체가 들고 일어나 저항하면 수적 우위는 단박에 역전된다.

저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알 수가 없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더욱이 특전대가 정찰을 했다지만, 이 지역은 본래 저들이 살던 땅 아닌가. 우리가 모르는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지.”

“예.”

“그러니 화기대를 앞세워서 천천히 찍어 누르도록 하지. 해서기병의 전마는 여전히 화포에 익숙해지지 못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김종서는 전흥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둥둥둥! 뿌웅!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고 그에 맞춰 대라소리가 섞여 들어가자, 조용했던 전장은 순식간에 끓어올랐다.

체력을 안배하는 동시에 전마의 피를 달구기 위해 천천히 움직이던 조선군은 일순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멀리서보면 그저 검은 깃발이 꽃잎처럼 흩날리며, 마구잡이로 퍼지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조선기병이 매일 같이 하던 분진합벽훈련 아니냐.

중대별로 찢어진 기병은 순식간에 오열종대로 모여 넓게 퍼졌고, 비가 온 탓에 살짝 질퍽거리는 땅을 거칠게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기병의 활동영역은 수십키로에 달하고, 막강한 이동력을 보유한 기병의 전술운용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효과가 천차만별이다.

순식간에 급습해 적진을 뚫어버릴 수도 있고, 빙 돌아서 후방을 점거해 포위할 수도 있고, 양측면을 공략해 전열 전체를 흔들어 버릴 수도 있지.

하지만 전흥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먹잇감은 전부 저기에 있는데 복잡하게 움직일 필요 있나.

또한 기병을 보병처럼 활용하는 건 착호군 모두에게 익숙한 일이고, 이미 수년전의 원정 때도 보여주지 않았나.

앞을 막고 얼기설기 방진을 짜고 있는 해서여진을 향해, 조선기병은 느긋한 속도로 계속 나아갈 따름.

서로가 서로의 윤각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고, 그제야 전열의 양 날개에 위치해 있던 여진기병이 움직였다.

“오는군.”

“뻔하지 않겠습니까.”

예상처럼 흘러가자 전흥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고, 김종서 또한 맞장구를 쳤다.

“장단을 맞춰주지. 허나 적 본대로 돌격하진 말도록.”

“옙!”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휘기와 북소리가 울려 퍼졌고, 일자진 가장자리에 있던 중대기병들 또한 여진기병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서로 간을 보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나.

궁기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쉐에엑! 여진기병은 조선군을 향해 매섭게 달려들어 화살을 날려댔다.

허나 여진보다 이 짓을 훨씬 잘하는 몽골군과도 싸워봤는데, 이게 제대로 먹힐 리가 있나.

중대별로 쪼개진 기병들은 말 위에 우두커니 앉아, 50보 이내로 다가와 화살을 날려대는 여진기병에게 똑같이 화살을 날려줬다.

쏟아져 내리는 화살비의 양이 차이나고, 무장상태도 차이가 나니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나.

조선군 주위를 돌던 여진기병들은 무수한 화살비 세례에 속절없이 쓰러졌고, 동료들을 데려가지도 못하고 제각각 후퇴했다.

반대로 여진 전열의 옆구리를 치러간 조선기병도, 여진기병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짓을 반복했다.

조선기병은 매섭게 몰아쳐 화살을 쏘고 튀는 대신, 그냥 느긋하게 다가와 멈춰선 후. 여진보병제대 하나를 향해 맞사격을 시작.

그리곤 여진기병이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려 하자, 부리나케 말머리를 돌려 조선군 진영으로 후퇴했다.

“와아아!” 여진기병은 괴성과 함께 조선기병을 뒤쫓아 왔으나, 그들을 맞이한 건 어느새 다가온 또 다른 조선기병들.

가죽갑옷도 없어서 털가죽만 덜렁 입고 있는 경기병들이, 완전무장한 중기병을 상대로 근접전을 벌이면 쓰나.

콰콰쾅! 퍽퍽! 편곤과 기창을 꼬나든 조선기병들은 먹이를 노리는 늑대 떼처럼 사방에서 달려와 여진기병을 찢어버렸다.

“저놈들은 우리가 지금껏 누구와, 어떻게 싸워 왔는지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흣. 그럴지도.”

저편에서 먼지구름을 살짝 일으키는 소규모 접전을 보며, 김종서는 같잖다는 듯이 웃어줬다.

지금껏 쓸어 담은 여진부락이 몇이던가.

그들은 자신들의 전투경험을 공유하지 않았으니...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덤벼들었고, 조선군은 경험치만 계속 축적해서 저런 식의 치고 빠지는 전술에는 이골이 났다.

이젠 어떻게 하면 더 확실하게 밟아버릴 수 있는지, 중대별로 서로 간이교본까지 만들어 공유할 지경이지.

“이젠 우리가 한방 먹여보지. 방열하게.”

“옙!”

양군은 화살의 사정거리 밖에서 서로 마주보고선 형세였는데, 일순간 조선군 중앙이 꿈틀거리며 분열했다.

야전화포를 끌고 온 전마를 뒤로 빼고, 화포병들이 재깍 손을 놀려 방열을 시작.

땅이 물러서 인지 몰라도 포가는 뻘에 박히듯 푹 박혔고, 화포병들은 끌고 온 부속마차에서 철환과 화약등을 꺼내 재빨리 장전마저 끝마쳤다.

40문의 화포는 언제든지 불을 뿜을 준비를 완료했고, 이러한 모습은 해서여진들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화포에 얻어맞기 싫으면 돌진하든지, 아니면 도망치라는 뜻이지.

“다 보면서도 안 오는군?”

“예. 적들의 전열이 보이십니까?”

“보이는군. 설마 저걸로 피해를 줄여보려는 생각인건가?”

“모르겠습니다.”

김종서는 당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리석어 보이는 포진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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