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챕터28. 차지하다 (3)
조선군도 그렇지만, 여진이나 요동 창병들은 기병을 상대로 밀집된 장창방진을 잘 꾸리지 않았다.
상대하는 적이 아무래도 궁기병 위주의 경기병인 탓에, 서양처럼 육중한 파이크방진을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는 거지.
반대로 보병간의 싸움에선, 예나 지금이나 밀집방진을 취했고.
저러한 포진은 의외의 효과를 나았는데, 바로 화포의 피해를 그나마 덜 받는다는 점.
“화기대장. 중군을 향해 발포하게.”
“알겠습니다!”
옆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화기대장. 강복은 재깍 말을 몰아 화기대로 향했고,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지금껏 화기대장을 역임했던 최해산은 포로로 데려온 북평부 화약기술자들과 함께 화약제조청에 들어가 신형 화약개발에 열중하고 있었다.
연오랑은 평난군을 조직하면서, 원정에 참가했던 화기중대장들을 위로 끌어올려 화기대장으로 삼아 각 사단에 배치.
강복도 그렇게 화기대장이 된 인물 아니냐.
지난날 포대장으로 활약했던 실력을 유감없이 뽐내듯, 오탄도 없이 죄다 선두 전열에 적중시켰다.
쾅쾅쾅! 히히힝!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 것 마냥 강철비가 쏟아졌고, 아니나 다를까 여진전열은 흙더미와 함께 흩어졌다.
아무리 서로간의 간격을 넓게 떨어뜨려놨어도, 포격을 맞고 멀쩡할 리가 있나.
“끄억.” “크헉!”
비록 땅이 무른 탓에 철환은 얼마 굴러가지 않고 박혔지만,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부서지고 찢겨진 사지가 난무했다.
직격타를 맞지 않았어도, 근처에 있던 이들은 넋이 나가 주저앉아서 일어나질 못했다.
히히잉! 더불어 온 사방에서 포격소리에 놀라 울부짖는 말울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조선군이 쓸데없이 비싼 화약을 날려가며 전마훈련을 시켰겠는가.
굉음에 놀란 여진전마들은 기수의 통제를 잃고 날뛰기 시작했고, 이리치고 저리 치이면서 기병전열을 엉망으로 만들어댔다.
“계속 쏘지.”
“발포!”
포격은 연거푸 이어졌고,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서 일까? 여진 제대는 앞서거니 두서거니 하면서 일제히 후퇴.
조선군은 또 다시 화살의 사거리를 유지하면서 전진해서 방열과 포격을 이어나갔다.
흡사 애들 장난마냥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포격을 얻어맞으면 여진 제대는 후퇴했고, 조선군이 전진하면 멈춰 서서 자리를 지키길 반복.
조선군은 어느새 여진이 첫 번째 포격을 받은 구덩이까지 전진하고 말았다.
“오래 버티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요?”
“글쎄...”
흡사 노인네 이빨마냥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린 여진전열을 보며, 전흥은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술해 보여도 너무 허술해 보이는 게 아닌가.
‘이제 와서 분열할리는 없을 터...’
여기 모인 이들은 오롯이 나치부루의 부락만 있는 게 아니다.
나치부루 휘하 부락과, 조선군을 피해 어쩌다보니 함께 딸려온 이들도 부지기수.
나치부루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다면, 추격당하는 동안 낙오해서 항복하고 말지... 여기까지 와서 저렇게 분열할 리가 없다.
김종서와 전흥은 ‘쟤들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걸까?’ 고민하다가...
“음...!?”
“저기. 방금 보셨습니까.”
‘물?’
포격이 떨어진 자리에서, 뭔가 달라진 걸 발견하고서 눈이 번쩍 뜨였다.
갑자기 뜬금없이 물보라가 확 피어올랐으니까.
“음.”
“흐음.”
같은 생각을 떠올린 걸까? 둘은 황급히 망원경을 돌려가며 전장 바닥을 살폈고, 이윽고 고개를 푹 숙여 전마의 발밑까지 살펴보자...
피를 끓게 하는 전장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느끼지 못했는데, 물컹해진 땅은 전마의 발목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설마...?”
“그런 건가.”
‘아무 생각도 없이 버티고 있는 게 아니었군.’
전흥은 나치부루가 왜 저러고 있는지 알아차리고선,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습지군요.”
“우리의 손발을 묶으려는 모양이야.”
저 앞은 뻘이나 다름없는 습지이니 직격탄만 맞지 않으면, 포격의 피해를 눈에 띄게 줄일 수 있을 거다.
더불어 중무장한 조선기병을 저기에 밀어 넣었다가는, 달려가긴 커녕 서로 뒤엉켜서 알아서 자빠질 거다.
‘말에서 내린 것도 저런 이유일 테지.’
경무장한 보병을 앞세운 것도 계획된 작전일게 분명.
진흙탕이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중장보병마냥 두정갑을 껴입은 조선군이 자신들처럼 민첩하게 움직이지 못할 거라 예상한 모양이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우릴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그런 모양입니다.”
조선군은 나치부루가 피해를 감수하고 유인한 천연함정에 빠진 꼴이 되었지만... 둘은 그저 히죽 웃어줬다.
진흙탕에서 한바탕 개싸움을 하자는 거니, 그에 응해줘야 하지 않겠나.
“궁사를 했던 양익 기병은 바깥으로 빼야겠군.”
“그게 좋겠습니다.”
김종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락병은 검은깃발을 휘날리며 제대 끝으로 달려갔다. 초반에 여진기병과 싸웠던 중대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화기대장을 불러오게.”
“옙!”
또 다른 연락병은 재깍 달려가 강복을 데려왔고, 그가 한숨 돌리기도 전에 전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땅은 어떻지?”
“물러지고 있습니다. 더 전진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강복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예상했던 질문과 답을 던져줬다.
방열을 위해 땅을 평평하게 다지던 화포병이니, 갑자기 진창이 된 걸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차렸을 게 분명.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전흥이 먼저 말을 하자 강복은 기쁜 낯을 숨기지 못했다.
“고각으로 쏠 수 있겠나?”
“음... 지금이라면 가능합니다.”
“좋아. 조란탄으로 엄호포격을 하게. 중앙 제대 말고, 모든 제대를 향해 알아서 쏘도록.”
“알겠습니다!”
강복은 전흥이 무슨 의도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알아차리고선, 곧장 화기대로 되돌아갔다.
강복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화포병들은 그들의 영원한 친구 야전삽을 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착호군 모두는 삽질에는 이골이 났고, 화포병은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 아니냐.
안 그래도 진흙탕으로 변한 땅은 푹푹 파였고, 화포병들은 화포를 반쯤 묻어버리듯 비스듬하게 박아 넣었다.
야전화포는 애초에 공성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닌 만큼, 완구와 같이 곡사로 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그런 걸 따질 리가 있나.
어떻게든 화포를 쏴야할 때가 있었고, 화포병들은 그간 경험을 통해서 임기응변을 발휘할 줄 알았다.
이들은 착호군이 몰이사냥을 할 때, 칼로 깎은 것 같은 산비탈에서도 화포를 쏴대며 산짐승을 몰아가곤 했으니까.
그렇게 화기대가 방열 아닌 방열을 하는 동안, 본대가 움직였다.
“전군 하마下馬!”
“하마하라!”
지휘기와 대라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기병들은 성큼 말에서 내려 무장을 다시 챙겼다.
아예 활조차 마구에 걸쳐놓고, 각자 손에 익은 기창과 월도, 장도를 꼬나들고 자리 잡기 시작.
어째 예상에 없던 상황이 펼쳐졌건만... 조선군은 그저 갑옷을 점검하고 무기를 챙길 뿐, 두려움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군 돌격!”
“돌격!” “충성!” “와아아!”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방에서 펄럭이던 검은깃발이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
일정한 간격을 두고 촘촘히 선 조선군은 성큼성큼 발을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은 화살의 사거리인 200보 밖이니,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을 달리며 체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지 않나.
느긋하게 걸어가 사거리 안으로 들어가자. 쐐에엑! 기다렸다는 듯이 화살비가 몰려왔다.
허나 이들은 두려움 따위는 없는지, 여진보병이 쏴대는 화살비를 얼굴만 가리고 몸으로 받아내며 천천히 나아갔다.
제대로 된 제철, 제련기술이 없는 여진의 화살촉이 뭐 얼마나 무섭겠는가.
반대로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두정갑은 정련된 조선의 강철화살촉에도 쉽게 뚫리지 않는다. 이게 괜히 더럽게 비싸고 무거운 물건일까.
시각적 효과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만 않는다면, 여진의 화살공격은 충분히 몸으로 받아낼 수 있지.
150보 안으로 진입하자, 드디어 지원군이 등장.
콰콰쾅! 굉음과 함께, 진군하는 조선군의 머리위로 자갈비가 스쳐지나가 여진진영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조란탄은 파괴력은 극감하니, 이런 식으로 쏴봐야 크게 피해를 못 주지만...
그건 이론상 그런 거고, 그 돌세례를 몸으로 받아야 하는 여진인의 심정은 절망과 두려움에 가득 찼다.
하늘에서 돌멩이 우박이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사지가 뻥뻥 뚫리진 않더라도 맞으면 충분히 아프지 않나.
“아악!” “크헉!” “헉...”
마구잡이로 난사하는 돌세례에 맞고서, 사방에서 머리를 감싸고 쓰러지는 여진인들이 부지기수.
엄호포격으로 인해 쏟아지는 화살비가 줄어들자, 조선군은 조금 더 속도를 내어 달라붙었다.
100보. 50보. 가까이 다가갈수록 땅은 질어지며, 조란탄의 엄호도 줄어들었고.
20보. 서로의 얼굴과 표정이 보일 정도로 다가가자, 여진인들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누군가는 미친놈마냥 화살비를 얻어맞으며 걸어온 조선군에 겁을 먹기도 했고, 누군가는 전장을 전부 채우며 밀려든 검은 파도에 눈동자가 흔들렸고.
누군가는 두려움을 밀어내려는 듯, 제대를 무시하고 조선군을 향해 홀로 달려 나갔다.
그리곤 당랑거철의 표본을 보여주듯, 퍽! “끄억!” 힘겹게 달려든 여진인은 제대로 칼조차 휘두르지 못하고 날렵한 월도날에 맞아 머리가 쪼개져 땅에 파묻혔다.
“와아아!” “죽어라!” “오합!”
서로가 완전히 한칼 거리에 진입하자, 여진인과 조선군 모두 불통이 튀긴 듯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내 이어진 충돌과 비명.
“컥!” “크헉.” “으어억...”
조선군 첫 전열이 여진과 부딪치기 무섭게... 기세 좋게 달려오던 여진인들은 어느 한곳 예외 없이 모조리 나자빠졌다.
제비처럼 유려하게 날아든 장도는 여진인의 손목과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고, 벼락처럼 떨어진 월도는 비틀거리는 여진인의 머리와 어깨를 쪼개놨고, 빛살처럼 꽂힌 기창은 여진인의 목덜미와 복부를 쑤시고 들어갔다.
콰콰쾅! 귀를 아리게 하는 날붙이의 파공음이 전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했고, 전진하는 동안 방사형 꼴로 퍼져나간 조선군은 전체가 한 몸이 되어 칼을 휘둘러댔다.
“하하하!”
“과연!”
전흥과 김종서는 망원경 너머로 펼쳐지는 살육의 향연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선군과 맞붙었던 첫 번째 제대는 충돌하기 무섭게 모래성처럼 허물어졌고, 화들짝 놀란 나치부루가 뒤에 있던 2제대, 3제대를 급히 전장에 밀어 넣는 게 보였으니까.
함정은 저들이 팠지만, 꽁무니가 잡힌 이상 더 이상 조선군을 더 깊은 진창으로 끌고 가지 못할 거다.
‘지금껏 노력한 보람이 있구나. 과연 천하제일 강군이다!’
온 사방에서 비명과 피보라가 밀려들건만, 전흥은 속으로 감탄을 연거푸 늘어놨다.
전략과 전술이 아무리 절묘해도, 개개인의 무용과 전의戰意가 극명하게 차이나면... 뭔 수를 써도 무용지물.
안타깝게도. 나름 꾀를 쓴 나치부루는 큰 착각을 하고 말았다.
조선군이 화포와 기병만 강하다고 생각해서 이런 개싸움을 유도한 모양인데... 그의 예상과 다르게 조선군은 말에서 내렸을 때 진면목을 발휘하니까.
사실 기마무술은 연오랑의 전공분야가 아니고, 오히려 맨땅에서 발을 딛고 싸우는 게 전공 아니냐.
착호군을 비롯해 이제는 토관과 갑사, 임시갑사까지 빨아들인 평난군은 모두가 연오랑의 제자와 다를 게 없다.
이들은 산과 강을 넘나들며,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에서도 칼질과 창질을 훈련해왔고... 그 세월이 벌써 5년차에 접어들었다.
세상천지 어느 나라에서, 이 정도 규모의 군대를 사시사철 훈련만 시키겠는가. 그간 미친 듯이 돈과 시간을 빨아먹은 효과가 아주 제대로 나오고 있다.
여진인들은 제대로 칼도 휘두르지 못하고, 파죽지세로 무너지고 있으니까.
저기가 그나마 운신이 힘든 진창이라서 저 정도지, 맨땅에서 부딪쳤으면 더 빨리 갈려나갔을 거다.
“적잖게 당황한 모양인데... 여기서 승부를 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저 뒤는 분명 더 심한 진창일 텐데, 더 빨려 들어가면 위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맞는 말. 기사대장과 훈련대장을 불러오라.”
“옙!”
김종서가 의견을 내놓기 무섭게, 전흥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재깍 명을 내렸다.
모든 조선군은 예비대조차 없이 전부 전장에 투입됐고, 남은 건 여진기병을 견제하는 기병중대와 화기대를 보호하고 있던 기사대와 훈련대 뿐.
“충성!” “부르셨습니까.”
2사단 기사대장으로 부임한 장호와 훈련대장 서정보가 살짝 기대감 섞인 목소리로 경례를 날렸다.
“시간을 더 끌어봐야 변수만 생길 터, 자네들이 마무리 하면 좋겠군.”
“...!”
전흥의 말에 둘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남들은 다 싸우고 있는데, 둘만 손가락을 놀리고 있었으니까.
역설적이지만 기사대와 훈련대는 최정예인터라, 어째 제대로 된 공을 세울 일이 없었다. 어지간해서는 기병중대 선에서 끝이 나니까.
오늘 같은 기회가 또 없으니, 둘은 잔뜩 기대할 수밖에.
“저기 중앙에 있는 장군기가 보이나?
“예.”
매번 두들겨 맞긴 했지만 해서여진은 몽골과도 나름 인연이 있는 터라, 나치부루는 몽골식 장군기를 세워놓고 흔들고 있었다.
“가져오게.”
“알겠습니다.”
이런저런 말이 더 필요한가. 전흥의 명에 둘은 일체의 군말도 없이 곧장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