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77화 (177/538)

177. 챕터28. 차지하다 (4)

훈련대 2개중대와 기사대 2개중대 또한 둘과 마찬가지의 심정이었을까?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함성을 내지르며, 전의를 끌어올렸다.

기사대가 말 위에서만 잘 싸운다고 생각하면 천만의 말씀.

말 위에서도 유독 잘 싸우는 이들이니, 땅에 내려놔도 충분히 제몫을 발휘하는 이들 아니냐.

그들은 짧은 기창 대신, 예비로 준비해 놓은 보병용 장창을 챙겨들고 기운차게 나아갔다.

“준비됐나?”

“옙!”

기사대가 움직이자 훈련대도 뒤를 이었다.

훈련대장인 만큼 서정보는 연오랑의 추종자 중 한명인 걸까? 그는 나이도 적잖게 먹었지만, 깔끔하게 밀어버린 탓에 까끌까끌해진 턱을 매만지며 투구끈을 단단히 고쳐 맸다.

‘나쁘지 않군.’

뒤돌아 쓱 훑어보자, 손에 맞는 독문무기를 제각각 자유분방하게 챙겨든 부하들이 눈에 들어왔다.

착호군 창설 후로 조선군의 모든 무기는 규격화, 통일화되었고, 정병이 아닌 갑사와 토관, 무관들은 똑같은 제원을 가진 무기로 차근차근 교체됐다.

그럼에도 새로 만들어진 무기도 많고, 개량된 기존의 무기도 한두가지가 아니지 않나.

훈련대는 모든 군병을 훈련시키는 교관인 만큼, 각자 자신 있는 독문무기를 익히는 바.

누구는 장도의 달인이고, 누구는 장창, 양손쌍검, 조선월도, 심지어 연오랑이 시범적으로 만든 쌍수대검을 들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건 뭔 떨거지 조합인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진면목은 여진 제대와 맞부딪치는 순간 드러날 거다.

“가자! 납제복록의 목은 우리가 취한다!”

“충성!” “합!”

우렁찬 함성과 함께, 훈련대는 기사대의 뒤를 따라 성큼성큼 진창으로 발을 디뎠다.

전장의 상황은 눈뜨고 보기에도 어지럽고, 각 제대는 두서없이 뒤섞여 점점 엉망진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화기대와 지휘부. 여진기병을 견제하는 기병중대를 제외한 모든 병력이 전선에 투입 됐는데, 그 수가 대략 사천.

마찬가지로 여진 또한 거의 사천에 육박하는 인원을 보여줬는데, 애어른할 것 없이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이들을 다 끌고 나온 것 같았다.

허나 비슷한 병력을 보유한 것치고, 전황은 조선군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치부루는 후퇴하는 척 하면서 조선군을 습지로 유인하고, 중앙으로 깊숙이 들어온 조선군을 포위하려는 작전을 세운 것 같았는데...

성긴 보자기로 뾰족한 돌멩이를 감쌀 수가 있나.

조선군은 우악스런 돌격으로 여진의 첫 제대를 찢어버리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여진보병은 안 그래도 서로 간격을 넓게 둔 제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조선군이 맹수의 발톱마냥 파고들어 밀어붙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치부루가 긴급히 투입한 2파, 3파는 조선군에 밀려 뒷걸음치기 바빴고, 전선은 거대한 부채꼴 형태를 이루면서 점점 부풀어 올랐다.

머릿수는 점점 줄어드는데, 전선이 넓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나.

당연히 전선의 종심깊이가 얕아지기 마련이고, 나름 후방에 위치해 있던 나치부루의 중앙지휘부 또한 어느새 전선 한복판에 서 있게 됐다.

그런 이들을 향해 묵직한 일격이 날아들었으니, 바로 예비대 아닌 예비대로 남아 있던 기사대와 훈련대.

쿵쿵쿵. 결코 서두르지 않고, 기사대는 소대별로 쪼개져 뾰족한 가시를 앞세워 묵직하게 진군했다.

조선의 창은 중국의 창과 달리 단단하고 무거운 탓에, 화려하고 유려한 움직임을 보이긴 힘들지만... 수천명이 뒤엉켜서 싸우는 전장에서 멋들어진 모양새가 필요나 할까.

그저 매섭게 찌르고, 빠르게 회수해서 다시금 매섭게 찌르면 그만.

“찔러!”

삐빅! 소대장의 호각소리와 함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합!” 기사대원들은 장창을 빠르게 내질렀다.

휙! 찌르고, 푸헉! 피가 튀기고, 쿵쿵! 한걸음 전진. 다시 찌르고 회수하기를 반복.

흡사 거대한 벽처럼 다가오는 장창벽 앞에, 어설프게 제대를 짜서 모여 있던 여진보병들은 어쩔 줄 몰라 아우성을 질러댔다.

겁먹고 뒤로 도망가고 싶지만, 뒤에 이미 진흙밭에 파묻힌 2파, 3파가 잔뜩 뭉쳐 있지 않나.

중간에 껴버린 이들은 제대로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빛살처럼 쏟아지는 창날세례에 꼬치가 되어 허물어졌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눈이 시뻘게진 여진인 몇몇이, 손도끼와 만곡도를 휘두르며 장창의 창대를 타고 파고들려 했지만... 통할 리가 있나.

쉐익! 기사대원이 장창을 빠르게 회수하자 여진인들은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렸고, “크헉!” “컥...”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뒤통수와 등허리에 장창날이 틀어박혔다.

기사대는 거대한 랜스조차 휘두를 정도로 훈련을 받았는데, 그보다 훨씬 짧은 보병용 장창을 손에 쥐고 있지 않나.

이들은 장창을 쥔 왼손을 지렛대 삼아, 오른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여진보병의 정강이, 허리, 목덜미를 정신없이 노렸다.

파공음과 함께 거력을 이기지 못한 수실은 꽃잎처럼 휘날렸고, 안 그래도 붉은 수실은 피를 머금고 더욱 붉은색으로 변해갔다.

“벌려라!”

삐빅! 다시금 소대장의 호각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오합!” “하압!” 기사대원들은 성큼 파고들어 다시금 전열을 무너뜨렸다.

“큽...” “숨...숨이.”

아직 숨이 끊어지지도 않은 여진보병의 머리통을, 강철을 덧댄 기병장화로 사정없이 밟아댄다. 본의 아니게 무른 진흙밭에 아예 파묻어 익사시켰다.

사람 갈아먹는 톱니바퀴마냥 기사대는 중앙제대를 무너뜨리고, 몰려 있던 여진제대를 양옆으로 밀어내며 진공로를 만들었다.

그렇게 기사대가 나치부루가 있는 중앙지휘부로 가는 길을 뚫어내자.

“돌격!”

기사대의 뒤를 밟으며 다가온 훈련대가, 갑자기 속도를 내며 달려들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에 아랑곳하지 않고, 개구리처럼 껑충껑충 뛰어서 여진보병들을 향해 돌격.

“이오옵!” “압!”

괴성에 가까운 고함을 내지르며, 장도든 훈련대원이 여진보병을 향해 매서운 내려치기를 선사했다.

반원을 그리며 벼락처럼 날아든 장도.

베려고 휘두른 게 아니라 도끼질하듯 찍어 내린 장도를, 여진보병들은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죄다 사지가 절단되어 허물어졌다.

“크헉!” “억.” “아악. 내팔!”

호피갑옷을 그냥 입은 게 아닌 듯, 훈련대는 진짜 호랑이가 발톱을 휘두르듯 장도를 마구 휘두르며 여진보병대를 농락했다.

기창을 들어 장도를 막으면, 손목을 살짝 비틀어 기창을 타고 내려가 손목을 날려버린다.

어설픈 도끼날과 어디서 굴러먹은 지 모를 녹슨 칼로 장도를 막자, 역시나 날이 부딪치기 무섭게 힘으로 밀어붙여 뒷걸음치게 만들고,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일격을 선사.

빛살처럼 찍어 내렸던 장도는, 진흙물을 튕기며 성큼 내딛는 진각에 맞춰 갑자기 장창으로 변신.

허우적거리는 여진보병의 뱃가죽을 뚫고 들어갔다.

“밀어붙여라!”

“우리차례다!”

장도를 든 이들이 선두에 서서 여진선두를 무너뜨리고 멈춰 서자, 뒤따르던 이들이 선두 자리를 빼앗고 은빛풍차로 변신.

휭휭.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날아든 조선월도와 보병편곤을 든 이들이 전열을 휩쓸었다.

연오랑이 익히 보여주지 않았나. 훈련대원들은 조선월도를 짧게 잡았다가 길게 잡았다가를 반복하며 주변을 태풍처럼 휩쓸었다.

기병편곤보다 손잡이를 길게 만든 보병편곤도 마찬가지.

흡사 빗자루질을 하듯, 훈련대원은 여진보병이 기창으로 막든, 만곡도로 막든, 아랑곳하지 않고 우악스럽게 여진보병의 머리통을 깨부셔줬다.

제대로 된 갑옷도 투구도 없는 이들인 만큼, 굳이 잘 갈린 날붙이가 아니어도 쇳덩이나 마찬가지인 편곤의 자편에 맞아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터졌다.

“지금이다. 밀어붙여!”

“오합!” “이이얍!”

앞서서 조선월도를 휘두르던 서정보의 목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서로 칼을 휘두르기 힘들 정도로 밀집되어 있던 여진보병들 사이로 사신이 등장했다.

짧은 양손쌍검과 양손쌍도끼를 든 훈련대원들이 파고들었고, 이들은 박수무당이 살풀이를 하듯 사정없이 칼날을 휘둘러 피로 그림을 그려냈다.

춤사위의 박자를 타듯 양손쌍검과 양손쌍도끼는 눈이 어지럽게 휘날렸고, 훈련대원 주위에 있던 여진보병은 죄다 목덜미와 어깻죽지를 붙잡고 쓰러졌다.

“밟고 나가라!”

“옙!”

쓰러진 여진보병을 대하는 건 훈련대원들도 마찬가지.

이게 진흙인지 사람 살결인지 모를 정도로 뭉클한 느낌을 뒤로하고, 훈련대원은 말 그대로 시체를 쌓아 발 디딤판을 만들며 나치부루의 호위병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긴 역시 함정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보이는군. 다행이 잘 피해가고 있어.”

전선 뒤편에서 망원경으로 전장을 살피던 전흥과 김종서는, 왠지 모르게 침묵과 정적이 감돌고 있는 전장 한편을 유심히 살폈다.

여진전열이 이가 빠진 모양을 하고 있던 건, 가벼운 경무장을 한 여진보병조차 발을 딛기 힘들 정도로 깊은 습지가 있었기 때문.

다행이 소대장과 중대장들이 먼저 눈치를 챘는지, 그쪽을 피해서 여진전열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음... 끝이 보이는군요.”

“그래도 방심하지 말게.”

김종서는 다시금 전장을 쓱 살피며, 희망찬 전망을 내놓았다.

확장된 전선의 모든 방면에서 조선군이 여진보병을 밀어붙이고 있다.

2파, 3파로 추가된 여진예비대는 제대로 축차투입이 되기도 전에, 최전선에 합류되어 조선군과 맞부딪치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 또한 갈려나가는 중인데... 아까보다 더욱 빠르게 무너지는 게 아닌가.

저건 싸워서 쓰러지는 게 아니라, 조선군을 피해 눈치 보면서 후퇴하는 모양새다.

뒤에서 밀려오는 예비대와 앞에서 짓이기는 조선군 사이에 껴 있던 여진 선두제대.

그들이 모조리 몰살당하자 전선에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모두가 패배를 직감하고 손이 무거워지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

‘저기도 마찬가지인가?’

김종서는 고개를 돌려, 전선 양익에 위치해 이도저도 아니게 어슬렁거리고 있는 여진기병을 살폈다.

저들은 기회를 노려 조선군 후방을 치거나, 아니면 이곳 화기대를 노려야 했는데... 기병중대에게 호되게 당한 탓인지, 그저 변죽만 계속 올리고 있었다.

저게 의미하는 건 단 하나.

이젠 저들도 싸울 의지를 잃은 거다.

“납제복록의 지휘부만 무너지면 끝나겠군요.”

“그러겠지. 이 정도까지 했으면, 저들도 충분히 할 만큼 한 거 아닌가.”

“예.”

김종서와 전흥은 그리 결론을 내렸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역시나 여진족 특유의 고질병이 도졌다.

나치부루가 아무리 통솔력이 강해도, 살아 있어야 통솔을 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패배는 눈앞으로 다가왔고, 조선군은 나치부루를 살려둘리가 없으니... 이번엔 진짜로 각자 살길을 찾아가는 게 인지상정.

“와아아!” “끝이다!” “승리다!”

둘이 승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

조선군의 함성소리와 함께, 망원경의 작은 시야로 호랑이 떼가 사방에서 몰려와 황소를 물어뜯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는 역시군요.”

“그렇군.”

둘은 자기도 모르게 히죽 입가가 들렸다.

기사대와 훈련대는 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가장 강렬하게 저항하고 있던 나치부루의 호위병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끝내는 장군기를 꺾어버렸으니까.

*****

“음...”

“어찌하시겠습니까?”

차가우면서도 따스한 햇살과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수백기의 기병이 구릉 위에 올라 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몽골군 특유의 가죽갑옷을 차려 입은 이들은, 저 멀리 보이는 먼지구름과 평원 저편에서 있어서 보이지도 않는 미지의 적을 그려봤다.

“정찰병은?”

“이제 곧...”

누군가 말을 하기 무섭게, 사방으로 퍼져나갔던 정찰기병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조선군이 맞나?”

“예. 가까이 가서 살피진 못했으나 화포의 폭음을 들었고, 검은 두정갑을 입은 기병을 봤습니다.”

“음...”

“크음.”

정찰병의 말에 모두는 자기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이 땅에서 비싼 두정갑을 입고 다닐 이들이 몇이나 될까. 그 두정갑을 검게 물들여서 떼로 몰려다닐 이들은 또 몇이나 될까.

지금와선 검은 두정갑이 조선군의 상징인 걸 모르는 이들이 없으니, 정찰병의 보고는 사실임이 분명했다.

“전황은?”

“멀어서 확실히 알아보진 못했으나... 해서놈들은 회전에서 패배했고, 조선군이 추격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나치부루였나?”

“지휘기로 보아 나치부루가 아니라 도르호치인 것 같습니다.”

“음...”

정찰병의 설명을 들은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가 구겨졌다.

나치부루의 후계자이자 아들인 도르호치가 따로 박살난 걸 보면, 나치부루 또한 조선군에게 공격받았을 게 분명.

“조선군이 여기까지 올까?”

그가 애써 침음을 삼키며 조용히 묻자, 모두는 바람결에 실린 무게감을 느끼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해서를 정리하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왔으니... 반드시 도르호치를 잡으려 할 겁니다. 후환을 남겨둘 리가 없을 테니까요.”

누군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자.

“우리가 겁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 땅을 지켜야 합니다.”

“조선군이 얼마나 왔는지 모르지 않나! 경거망동하게 행동할 수 없네.”

“맞는 말. 우린 해서를 살피러왔지, 조선군을 상대하러 온 게 아닐세!”

“그게 무슨!”

물꼬가 트인 듯 사내를 중심으로 고함이 터져 나왔고, 순식간에 시장바닥이 된 것 마냥 실랑이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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