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79화 (179/538)

179. 챕터28. 차지하다 (6)

거친 눈강과 굽이굽이 흘러온 송화강이 만나 섞여드는 충적지 한쪽에선,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서로 옆에 강을 끼고 마주하고 있었는데, 한쪽은 지옥에서 튀어나온 것 같이 검은색 일색이었고, 다른 한쪽은 모래 속에서 튀어나온 듯 황토빛 일색이었다.

“저들이 한발 앞섰군.”

“예. 하지만 어차피 만나게 될 줄 알지 않았습니까. 용연군 대감께서도 그리 일러주셨고요.”

“그건 그렇지.”

13연대장 도모경은 자신의 옆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이를 힐끔 살피다가, 얼른 고개를 바로 했다.

바로 옆에 있는 대대장은 도모경과 나이가 얼마 차이도 안나는 청년이었는데, 그는 나름 유명한 양반가 자제 아니던가.

그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공대하고 있으니, 도모경은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피보다 진한 게 전우 아니던가.

두 사람 뿐만 아니라, 꽤 많은 귀화인들은 착호군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북원잔당 및 북평군과 싸워온 터라...

어느 꼰대 같은 인물이 “양반이라는 작자가 달단 놈들하고 뭐하는 거냐?”라고 비꼬면, 자기가 먼저 나서서 주둥이를 때려줄 정도로 친밀해졌지.

지금도 마찬가지.

“정녕 혼자 가시겠습니까?”

대대장은 진심을 담아 우려를 표했고.

“설마 저들이 나를 어찌할 수나 있겠나. 용연군 대감께서 대화를 먼저 해보라 하셨으니, 응당 명을 따라야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기사대원들과 함께 가시지요.”

“훗. 알겠네.”

도모경은 더 이상 마다하지 않고, 연대에 배속된 기사대원들 몇몇과 함께 천천히 말을 몰아 나아갔다.

딱 봐도 대화를 하자는 모양새를 취하자, 몽골기병 또한 몇몇 인물이 앞장서 마중 나왔다.

“평난군 장군 도모경이다. 그대는 누군가?”

이젠 조선말을 능숙하게 하는 도모경이지만, 그래도 몽골 억양을 숨기지 못하는 걸까?

“몽골 출신이군. 나는 안추의 아들. 야치부르다.”

‘음...!’

도모경은 사내의 이름을 듣고, 올게 왔다는 생각에 정신을 바로잡았다.

혹시나 했지만 꽤나 거물을 만났다.

야치부르는 무려 복여위 수장의 후계자였으니까.

도모경의 놀란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야치부르는 매서운 눈초리를 숨기지 않고 되물었다.

“누구 밑에 있었지?”

“내 집안은 과거 만호장 주바테무르를 모셨다.”

“음...”

주바테무르는 원나라 말에 명과 싸우다가 항복해서, 명이 망할 때까지 나름 위세를 떨쳤던 인물. 도모경은 귀족까진 아니어도 평범한 몽골평민은 아닌 모양이다.

“도르호치를 데리고 있나?”

“그렇다.”

“살아 있고?”

“...”

야치부르는 피식 웃으며 만곡도를 빙글 돌렸고, 몽골기병 사이에서 도르호치가 목에 밧줄 올가미를 묶은 채로 질질 끌려나왔다.

“봤나?”

“봤다. 내어 주겠나?”

“...”

야치부르는 침묵으로 답변을 대신했으나... 도모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망설이지 않고 품을 뒤적거렸다.

둘둘만 서신을 기사대원에게 건네주기 무섭게, 기사대원은 겁도 없이 야치부르 앞으로 냉큼 달려가 서신을 넘겨줬고...

야치부르는 서신을 읽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대들 사정을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나? 우리와 그대가 적대하고 대립할 이유가 없는데, 쓸데없는 기싸움은 그만하지. 어떤가? 함께 가겠나?”

“...”

야치부르는 대답 대신 서신을 뒤에 있던 부하들에게 보여줬고, 그들 모두 동요해 눈동자가 흔들렸다.

‘역시 용연군 대감의 말씀이 맞았구나.’

도모경은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는 것 같아, 속으로 미소를 한껏 머금었다.

그리고 이들의 선택을 종용하는 지원군이 등장.

두두두. 말발굽소리와 함께 얕게 먼지구름이 피어올랐고, 강 저편을 따라 검은 그림자들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13연대의 뒤를 쫓아온 11연대가 모습을 드러낸 것.

“...”

“어때? 한판 해볼 거냐?”라고 묻듯, 약 올리듯 이를 드러내며 웃는 도모경을 보며, 야치부르는 애써 쓴물을 삼켰다.

‘어쩔 수 없군.’

딱 봐도 기병 수백이 넘어가니, 이젠 머릿수조차 현저히 차이나는 상황 아니냐.

더불어 가까이 와서 보니 저들의 무장이 자신들보다 훨씬 나아 보인다. 실력이 어떨지는 모르나... 무장의 반만큼만 되도, 피해는 감히 추측할 수도 없다.

야치부르는 자신들의 부하들이 동요하는 걸,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게 없고... 그 자가 하는 말이 틀린 게 없군.’

그는 서신에 적힌 내용을 떠올리며, 결국 조선의 의도에 맞춰주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야치부르 일당은 잠시간의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눴고,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함께 가지.”

“환영하오.”

도모경은 조선인이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벌써 낯설어진 몽골식 인사를 하고선 야치부르를 향해 다가갔다.

천만다행이도 피를 보는 일 없이, 일이 술술 풀리게 생겼다.

야치부르는 오십여명의 호위병만 데리고 11연대, 13연대와 합류해 곧장 길림으로 향했다.

갈 때는 홀가분하게 기병들만 움직였다면, 올 때는 천여명이 넘는 포로들과 함께 하는 터라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는 데...

도르호치를 추격하고 부락들을 처리하느라 시간이 꽤 흐른 탓일까? 길림은 기병연대가 출발했을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끝났구나!’

“...!”

기병연대 틈에 껴서, 포로도 사신도 아닌 애매한 취급을 받고 있던 야치부르.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저 멀리 보이는 우라홍니 위에,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검은 깃발이 잔뜩 꽂혀 있었으니까.

더불어 멀어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활기찬 분위기가 몸으로 느껴질 정도다.

혹시 싶은 의심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확신으로 변해갔다.

애초에 목책과 어설픈 토성으로 만들어졌던 곳이니, 허무는 게 뭐 얼마나 어려울까.

포위 아닌 포위를 당하고 있어야할 우라홍니는, 포로들이 개미떼처럼 달라붙어서 삽과 곡괭이를 들고 살점을 떼어내고 있었다.

“음... 결국 가호랍이 졌군.”

“그런 모양입니다.”

야치부르는 놀란 표정을 애써 숨기고 있는 부하들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이들이 왜 이러는 지 안다. 자신 또한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크음.”

답답하고 막막한 마음을 토해내기 위해, 그는 다시금 헛기침을 내뱉고 말았다.

‘상상했던 것보다... 많군.’

우리홍니 이곳저곳에 박혀 있는 검은 깃발만 수백개. 주변을 떠돌고 있는 기병들은 셀 수도 없다.

‘저게 전부가 아닐 터...’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포로들을 끌고 오는 걸로 봐선 다른 기병대 또한 사방으로 퍼져 있을 터... 조선군의 총병력이 몇이나 되는지 감히 짐작하기도 힘들다.

“몇이나 되겠나?”

“모르겠습니다. 대충 보아도 수천이 넘어가는 군요.”

“...”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부하가 답을 했고, 야치부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연대기병이 오는 걸 알아차렸는지, 특전대 소속이 분명한 정찰병 일개 소대가 검은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뭔가 사정을 알려주는 건지 몇몇은 연대장에게 붙어서 이야기를 풀어 놨고, 몇몇은 야치부르가 왔다는 걸 알리기 위해 재깍 되돌아갔다.

“와아아!”

“끝이다!”

예상대로 조선기병들은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고... 자랑이라도 하려는 셈일까?

야치부르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도모경이 활짝 웃으며 다가와 입을 열었다.

“가호랍이 죽었다고 하오.”

아니나 다를까. 자랑과 위압을 늘어놓았다.

“그런 것 같더군. 어떻게 죽었나?”

“뻔하지 않소? 내분이오. 항쟁파와 항복파가 싸워서, 항복파가 승리했소.”

“그렇군.”

야치부르는 애써 담담하게 답을 했지만... 도모경은 ‘네 속내를 다 안다.’라는 눈빛으로, 히죽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사령관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바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소만?”

“그러지.”

갑자기 가벼워진 발걸음을 하고서, 연대기병은 우라홍니를 거쳐 새로 짓고 있는 주둔지와 도시를 향해 나아갔다.

“...!”

“음...!”

다가가기 무섭게, 야치부르 일행은 살풍경한 광경을 보며 살짝 눈을 찌푸렸다.

저기 잘 보이도록 튀어나온 단상 위에, 수십개의 머리통이 창대에 꽂혀 있었으니까.

‘음...!? 저 자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죽은 지 얼마 안 된 모양인지, 얼굴 생김새를 알아볼 수 있었고... 그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면 당연히 나름 유명했던 부족장이라는 뜻 아니겠나.

딱 봐도 협박하려고 박아 놓은 게 분명했다.

“가호랍이겠군?”

“그렇다고 하오. 가호랍과 그의 수하 족장들, 반항하던 몇몇 족장들이라는데...”

“몇이나 되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야치부르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물었고.

“내가 출발하기 전에 처단한 부족장이 130여명 쯤 됐으니... 지금은 더 늘었을 테고, 앞으로도 더 늘어날 거요. 복속한 부족장은 그보다 더 많을 거고.”

“...!”

도모경은 담담하게 답을 했지만, 야치부르는 그 모습이 더욱 소름끼쳤다.

‘조선군이 정말 작정을 했구나. 그렇게나 많이...’

자기도 모르게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땅에 사는 부족은 천차만별이라서, 백명 정도도 안 되는 친족 단위의 부족도 있는 반면, 천명 넘게 모여 사는 부족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어찌됐건 이 많은 수를 단기간에 다 쓸어버리는 건, 복여위는커녕 우량카이 3위가 힘을 합쳐도 힘든 일 아닌가.

결과론적으론 조선군의 역량이 우량카이 전체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뜻.

그의 예상을 증명이라도 하듯, 송화강 강가로 다가가면 갈수록 점점 검은색이 짙어졌다.

비좁은 성형요새에서 빠져나와, 연대별로 주둔하고 있는 숙영지가 한둘이 아니니까.

게르가 산처럼 깔려 있는데, 몽골출신인 이들이 못 알아볼 리가 있나. 대충 개수만 세어도 병력수를 어림짐작할 수 있는 터라... 절로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만이 넘는데... 이게 끝이 아니지 않나. 어렵게 됐어.’

야치부르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길림을 죄다 검은색으로 덧칠할 생각인지... 온 사방에는 검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고, 조선기병과 포로들이 죄다 섞여서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몇몇은 뜬금없는 몽골기병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조선군이나 포로들이나 각자 할 일이 바빠 시선이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오히려 보면 볼수록 놀란 건 야치부르 일행이다.

“...!”

“놀랍군.”

“포로들 상태가...”

“저렇게 그냥 놔둬도 되는 모양입니다.”

야치부르는 부하들이 속닥거리는 대화를 들으며, 하나라도 더 담으려는 듯 눈을 갸름하게 떴다.

몇몇 숙영지 사이에는 감옥처럼 생긴 울타리가 있었고, 그 안엔 포로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건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몽골군도 비슷한 짓을 하니까.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낯설다.

어디서는 군병인지 문관인지 모를 이들이, 포로들을 부리며 땅을 다지고 흙을 갈고 집을 짓고 있다.

또 어디서는 천막 아래에 먹물을 묻히고 있는 이들이 앉아, 포로들을 취조하듯 뭔가를 묻고 또 받아 적고 있다.

저편에서는 톱과 도끼를 들고 나무를 쪼개는 이들이 보이고, 무덤처럼 생긴 몇몇 곳에선 후끈한 열기가 뿜어 나오고 있다.

저쪽 확 트인 천막 아래에선 부상병들이 치료를 받고 있는 게 보였고, 한쪽에선 거대한 솥 수십개가 걸려 향긋한 밥냄새를 풍기고 있다.

심지어 저쪽에선 화려한 가사대신 회색갑옷을 입은 군종승들이, 임시법당을 만들어 기도와 설교를 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게 어딜 봐서 포위전이고 공성전일까.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전쟁의 분위기가 아니라, 생동하며 발전하는 재건의 분위기다.

‘이미 끝났다. 끼어들기엔 너무 늦었어.’

“...?”

드디어 성형요새에 발을 디뎠고, 야치부르 일행은 생경한 언덕처럼 비스듬한 성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포로들이 지게와 수레, 삽을 들고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는 걸로 보아, 확실히 뭔가 짓는 거 같은데... 저게 뭐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

“...”

도모경 또한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지, 야치부르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그저 무시하며 히죽 웃을 뿐이었다.

이윽고 야치부르는 어설프게 새워진 중앙지휘소에 도착했고, 연대기병들은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 떠났다.

남은 이들은 야치부르 일당과 홍해, 도모경 뿐.

“오셨습니까.”

“...!”

그들을 마중하러 연손찬이 등장하자, 야치부르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며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런 거한은 생전 처음 봤고,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빛은 당장이라도 야치부르의 목을 뜯어먹을 것처럼 생겼으니까.

“돌가하와 수뇌부들은 따로 볼 필요 없이, 즉시 참수해서 걸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무심하게 내뱉는 말이건만, 그 뜻은 살벌하기 그지없어서 심지어 야치부르마저 살짝 눈을 치켜떴다.

‘괜히 힘들게 살려왔나?’라는 생각보다, ‘그 정도로 별 볼일 없던 인물인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다.

“...!”

“아. 알겠네.”

연손찬이 묵언으로 대답을 종용하고 있자, 연대장들은 재깍 답을 했다.

“경과보고는 나중에 받는다고 하셨고... 먼저 뵙고자 하시는데, 가시지요.”

“...”

야치부르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연손찬의 눈빛을 애써 뒤로하며, 부하들과 눈을 마주쳤다.

‘허나...’

“쯧.”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호위와 함께 가니 마니 이런 소리를 할 의미가 있나.

무장조차 해제하라는 말도 안하는데, 혼자 겁먹은 모습을 보여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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