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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드 마스터-180화 (180/538)

180. 챕터28. 차지하다 (7)

“...!”

탁탁. 껄끄러움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고.

‘후...’

야치부르는 회의실로 들어가기 무섭게, 뜨끔 놀란 가슴을 다독이며 티내지 않고 심호흡을 이어갔다.

‘백호장군이라더니.’

소문처럼 백호피를 뒤집어 쓴 거한이 우두커니 서서 지도를 보고 있었는데, 그게 흡사 먹잇감을 노리고 웅크리고 있는 백호처럼 느껴졌다.

"..."

‘소문이... 사실이었나?’

야치부르는 연오랑과 눈이 마주치자 칼날이 가슴을 후벼 파는 기분을 느끼곤, 자기도 모르게 흠칫 놀라 다리에 힘이 풀렸다.

수백명을 혼자 처죽였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마냥 헛소문이 아닌 게 분명.

유리알처럼 투명하면서도 동공은 밤하늘처럼 시커먼 연오랑의 눈.

그건 능숙한 도살자이자 살인자의 눈과 똑 닮았다.

‘이런 자가 조선의 대장군이라니... 위험하다.’

야치부르는 불쑥 떠오른 불길한 생각을 애써 지우고선,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지만... 옆에서도 입맛을 다시며, 그를 지켜보는 눈길이 따라붙었다.

‘... 저자들도 만만치 않군.’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연전위와 연조운.

둘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대와 장도손잡이를, 보란 듯이 가볍게 툭툭 두들기고 있었다.

까불면 뒤진다고 협박하는 거니 자존심이 상했지만... 야치부르는 애써 혀를 깨물며 참아냈다.

둘의 얼굴은 건물 그림자에 가려져, 맹수처럼 눈만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연오랑과 연씨 삼총사를 보며 한번 놀랐다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지도를 보며 두 번 놀랐다.

지도는 대충 이곳부터 몽골초원, 요동과 요서를 그려놓은 것 같았는데, 야치부르가 지금껏 봐왔던 지도와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음...’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야치부르의 머릿속은 연오랑의 속내를 캐기 위해 맹렬히 돌아갔다.

하지만 답은 뻔한 것 아닌가.

‘협박이군.’

저런 귀중한 보물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는 건, 이게 그렇게 귀한 물건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고. “너희들 땅을 우리가 이만큼 잘 안다. 까불지 마라.”라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복여위의 후계자라... 만나서 반갑군. 조선군 사령관. 용연군 연오랑이다.”

“... 복여위의 수장. 안추의 후계자. 야치부르다.”

야치부르는 연오랑의 능숙한 몽골말에 살짝 놀란 기색을 표하고선, 시건방진 소개에 시건방진 소개로 말을 받았다.

“이런저런 긴 말을 해봐야 의미가 없을 터.”

“...”

“요동과 맺었던 맹약을 잊진 않았겠지?”

“...?”

그는 “이게 뭔 소리인가?”라는 표정을 지었고, 연오랑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몽골초원으로 원정을 떠나면서 맺은 맹약 말이다. 옛 명의 권역을 인정하고 땅을 넘겨주기로 했지? 그 맹약을 우리가 이어 받았다.”

“...!”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이 크게 뜨였고, 연오랑이 물끄러미 내미는 두루마리를 냉큼 받아 챙겼다.

두루마리는 2권이었는데, 하나는 우량카이 3위가 요동과 맺은 맹약.

다른 하나는 요동이 조선과 맺은 맹약이 적혀 있는 문서였다.

‘이런...! 이래서 그런 조건을 내걸 수 있었구나.’

그는 연오랑이 보낸 서신의 배경을 알아차리고선, 허탈한 마음을 애써 잡아챘다.

지난날 북원잔당 원정은 사실상 우량카이 3위의 제안으로 이뤄진 사건이다.

요동도 북원잔당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우량카이 3위만큼은 아니었으니까.

우량카이 3위는 밍밍한 태도를 취하는 요동을 끌어들이기 위해 맹약을 맺었으니, 다름 아닌 개원로 위쪽의 영토을 걸었다.

옛 명나라가 “원나라 땅은 전부 우리땅!”이라고 우기면서, 여진과 몽골부락에게 열심히 관직을 날려대며 위소를 세웠던 땅을 넘겨준 거지.

그 맹약을 조선이 이어받았으니, 이젠 그 땅이 조선땅이 되었다는 뜻이고.

“...!”

“진위 여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여기서 우리끼리 협약이나 맹약을 맺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아가서 정식으로 사신을 한성으로 보내면 체결될 일이지.”

“...”

“왜 믿기지 않나?”

충격에 휩싸인 야치부르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고, 연오랑은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조선의 속내야 어떻든, 요동은 해서여진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심양파와 요양파로 쪼개진 이상, 누가 이들을 상대하고 싶어 할까? 특히나 해서여진이 약탈하고 다니는 곳은 심양파 권역이 더 많았으니, 요양파는 박수치며 조용히 지켜봤는데...

해서여진의 약탈구역이 점점 남하하자, 마냥 남 일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고, 도와줄 세력은 조선밖에 없는데... 심양파건 요양파건 조선에게 대가로 줄 게 없다는 게 문제.

이 때 오히려 조선이 역으로 제안했다.

“우량카이 3위로부터 받은 땅 있지? 어차피 너희들 그 땅 관리도 못하잖아? 우리에게 넘기는 게 어때?”라고 말이다.

요동에선 이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의 제안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안 그래도 자기 먹고 살기 바쁘고, 북평부 견제하기도 바쁜 요동이 쓸모없는 땅을 신경이나 썼을까.

그냥 가끔씩 위력시위만 하곤 했었으니, 해서여진을 비롯해서 온갖 부락이 은근슬쩍 그곳에 자리 잡았던 거고... 우량카이 3위 또한 맹약을 무시하고 여길 와서 부락을 약탈하곤 그랬지.

요동은 “어차피 우리도 관리를 못해서 속만 썩는데, 줘도 상관없잖아? 그리고 거길 관리하려면 피똥 쌀 텐데... 조선을 견제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라는 속셈을 품었다.

어차피 줄 거, 아예 거하게 먹여서 배탈 나게 만들겠다는 거지.

“그러니 정당성 문제를 따져봐야, 너희 꼴만 우스워질 터.”

“...”

연오랑이 야치부르의 속내를 읽어내자, 그는 뭐라 말을 하려다가 애써 반문을 집어삼켰다.

“솔직히 말해서, 너희 입장에서도 조선이 이곳에 오는 게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닐 텐데?”

“...?”

야치부르가 더 말해보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자, 연오랑은 손으로 지도를 집어가며 입을 열었다.

“과거. 내가 타안위의 눈엣가시였던 토가바토르와 항명 출신 몽골부락을 쓸어버리면서, 타안위의 권역이 넓어졌지.”

북평부 위쪽, 만리장성 너머 북쪽을 짚으며 타안위를 읊었고.

“...”

“태녕위는 황수(시라무렌 강)를 따라 흥안령 서쪽으로 영역을 넓혀, 옛 옷치긴 왕가의 본원本原을 찾으려 하고 있고.”

“...”

그 위쪽을 짚으며 흥안령 중앙의 태녕위를 말하고.

“여기가 너희 복여위의 영역인데... 내가 보기엔 너흰 딱히 크게 얻은 게 없단 말이지? 흥안령 서쪽으로 진출했다지만, 적만 더 늘어난 꼴 아닌가?”

끝으로 더욱 위쪽. 하얼빈 서쪽 지역. 복여위를 말했다.

“...!”

“더불어 이곳엔 지난날 명에게 박살나서, 겨우 명줄만 남은 카사르 왕가의 제왕이 아르군(아르구네)강 남쪽에서 버티고 있지.”

손가락은 계속 움직이며, 흥안령 북쪽 동몽골 초원을 짚었다.

과거 옷치긴 왕가와 카치운 왕가는 명에 항복하면서 우량카이 3위로 변모했지만... 카사르 왕가는 워낙 북쪽에 있던 탓에, 항복하지 않고 반항하다가 결국 박살났다.

원래 역사라면 우량카이 3위와 북원잔당에 흡수되어 사라져버리겠지만, 지금은 그래도 세력으로 남아 있었지.

연이어 연오랑은 훌룬호수 위쪽을 집었고, 곧장 훌룬호수 밑에 위치한 부이르호수 서쪽을 집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곳 활솔해闊率海(훌룬호수) 옆엔 칸의 자리를 노리는 아자이가 그대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지. 아. 지금은 조금 소강상태인가?”

“...”

‘끄응...’

야치부르는 연오랑이 흡사 몽골장군이라도 되는 것 마냥. 속속들이 다 아는 걸 보면서, 이를 갈며 끙끙 앓는 수밖에 없었다.

훌룬 부이르라 불리는 지역은 몽골제국의 발원지나 다름없는 곳이고, 당연히 나름 번성한 곳.

원래 역사에선 영락제 시절에 개박살이 나지만, 지금은 쌩쌩하게 살아 있었다.

그러니 그곳에 터 잡은 아자이가 우량카이 3위 전체와 싸우면서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지.

“자. 당사자인 네가 한번 말해봐라. 사방으로 둘러싸인 복여위가 태녕위와 타안위, 아자이의 북원잔당, 카사르 왕가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뭘 어떻게 해야 되지?”

“...”

비수처럼 가슴을 갈기갈기 헤집는 말에... 야치부르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그저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쥘 따름이다.

우량카이 3위라고 묶이긴 하지만, 이들은 하나로 통일된 집단이 아니다.

타안위는 카치운 왕가를 잇고 있고, 태녕위와 복여위는 옷치긴 왕가를 잇고 있는데, 요왕 아자스리의 정통성은 태녕위가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초기엔 태녕위의 세력이 가장 강성했으나, 명은 이이제이를 노리며 타안위를 밀어줬고... 명이 망할 때쯤에는 타안위가 태녕위를 살짝 웃돌 지경이 되었지.

이런 상황에서 명이 망했으니 어찌됐겠는가.

애초에 하나가 아니었던 이들을 묶어놨으니, 통제자가 없어지면 제자리를 되찾아가는 게 인지상정.

우량카이 3위는 순식간에 쪼개져, 옛 영광을 되찾으려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허나... 이들 또한 몽골,여진과 마찬가지로, 명의 지원과 무역이 없으면 번영이 어렵지 않나.

해답은 당연히 약탈.

복여위가 송화강 유역으로 동진해서 해서여진을 두들겨 패고, 세력을 확장했던 까닭도 여기 있었다.

다만... 이 문제는 해소되긴 커녕, 더욱더 악화되어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헌데...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단 말이지. 내가 만리장성 북쪽의 항명출신 북원잔당을 털어내고 거용관을 무너뜨리니까, 북평부가 타안위와 붙어먹으려는 모습을 보이더군. 맞지?”

“...”

연오랑은 “다 알고 있으니, 시치미 떼지 마라.”라고 말하듯, 비릿하게 웃었고... 야치부르는 입술에 피가 맺힐 정도로, 이를 꾹 악물었다.

명이 건재하던 시절.

미래에 북방진이라 불릴, 북평 동북쪽 만리장성 인근에선 마시가 열렸고, 이곳은 우량카이 3위가 애용하던 곳이었다.

헌데 명이 망하자. 만리장성 북쪽에 위치한 항명출신 몽골부락이 죄다 들고 일어났고, 우량카이 3위는 마시를 더 이상 이용할 수 없어서 요동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요동과 우량카이 3위가 관계를 맺으면, 요동과 원수사이인 북평부가 손을 내밀겠는가.

자연스럽게 북평부와 우량카이 3위. 특히나 가장 가까이에 붙어 있던 타안위와는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헌데 거용관이 무너지고 연산, 태행산맥의 밀수로가 열리자, 북평부는 북원잔당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

반대로 타안위는 조선군과 요동군이 깔끔하게 밀어버린 흥안령 남쪽의 빈자리를 차지하곤, 결국 북평부와 권역을 맞대게 됐다.

사정이 이리되니, 적의 적은 아군이 되어야 하는 법.

북원잔당에 대항해서, 북평부와 타안위가 어설프게 손을 잡는 상황이 펼쳐지게 됐다.

“하지만 북평 쪽으로 오줌도 갈기기 싫어하는 요동이 타안위가 북평부에게 붙는 걸 가만 놔뒀을까.”

“...”

만약 타안위가 북평부에 붙으면, 요동 입장에선 기껏 밀어냈던 북원잔당 대신 다른 적이 생기는 꼴.

당연히 타안위에게 당근을 제시하며, 북평부에 붙지 못하게 견제했다.

“타안위가 이젠 건방지게 카치운 왕가의 부활을 노리며, 오왕이라고 떠들고 다닌다지? 요동과 북평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아주 살맛이 난 모양이야.”

연오랑은 같잖다는 듯 피식 비웃었지만... 적대 당사자인 야치부르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속이 쓰려서 얼굴이 구겨졌다.

“태녕위는 어떨까? 북평부가 수작질을 벌이는 걸, 산동과 요동이 가만히 지켜봤을까. 그럴 리가 있나.”

연오랑은 지도 붙은 날파리를 치우는 것처럼, 산동과 요동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말을 이어갔다.

명의 지원 하에 우위를 점한 타안위는 태녕위를 짓누르려 했고, 태녕위는 옛 위세를 되찾기 위해 타안위와 기싸움을 벌였다.

산동과 요동 입장에선, 타안위를 견제하기 위한 좋은 패가 알아서 생긴 꼴 아닌가.

타안위와 접하고 있는 요동은 살짝 미지근한 태도를 취했지만, 산동은 상인을 통해 태녕위를 지원해서 타안위가 북평부에 붙지 못하게 견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타안위와 태녕위는 북평부-산동,요동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자기 잇속만 챙기려 했지.

“문젠 괜히 불똥이 튄 너희란 말이지. 타안위가 오왕을 자처하는데, 태녕위가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 요왕을 자처하고 있으니... 본래 옷치긴 왕가 밑에 있던 너희들 가문을 어찌해야 할까.”

“끄응...”

야치부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결국 침음을 입 밖으로 토해내고 말았다.

연오랑의 말이 정곡을 짚었으니까.

태녕위는 “너희 원래 우리 밑에 있었잖아? 좋은말 할 때, 빨리 돌아와라.”라고 외치며 복여위를 집어삼키려 했지만, 이미 세력을 이룬 복여위는 마수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조선이 우릴 지원해 주겠다는 거요?”

야치부르는 참지 못하고 버럭 목청을 높였으나.

“큭. 조선을 감당할 자신은 있고?”

피식 웃는 연오랑을 보며, 그는 갑자기 피가 싸늘하게 식어서 냉큼 입을 다물었다.

요동조차도 땅을 떼어주고 조선을 끌어들였는데, 복여위는 무얼 내줘야 할까. 그 대가를 감히 감당할 수 있을까.

야치부르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 밀려왔다.

“그러니 우선 요동과 맺었던 맹약을 지켜라. 앞으로 이곳 눈강의 서쪽은 너희가, 동쪽은 조선이 차지하게 될 거다.”

연오랑은 동북평원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을 따라 손가락을 쭉 훑어 내리다가, 송화강과 만나는 지점. 미래에는 송원이라 불릴 지점에서 잠시 멈췄다.

“여기서부터, 남쪽에 위치한 요동의 개원로까지 국경선이 이어지겠지.”

손가락은 지도를 쭉 훑고 내려갔다.

송원에서 시작해서 장춘 서쪽평원을 지나고, 미래의 사평을 지나, 요동의 최북단 권역인 개원로에서 멈춰 섰다.

“북으로는 흑룡강을 기준으로 흑룡강 남쪽은 조선땅이 될 거다.”

이번엔 한술 더 뜬다.

연오랑의 손가락은 다시 눈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 지도에 제대로 표시되지도 않은 북쪽의 흑룡강(아무르강)을 짚으며 동쪽으로 쭉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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