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챕터28. 차지하다 (9)
‘음... 또 뭔가 달라졌군. 무장이 조금 특이한데?’
이백강은 점점 가까워지는 조선기병을 보며, 빠르게 훑어 내렸다.
무장상단이 이 일대까지 돌아다녔으니 검은 두장갑에는 익숙했지만, 저들은 특이하게 생긴 마구에 꽤나 과무장을 하고 있었다.
말 엉덩이 쪽에 삐죽 솟아 오른 기창만 해도 여러개이니, ‘저걸 다 써먹을 수나 있을까?’라는 의문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이백강은 자기도 모르게 힐끔 고개를 돌려, 부하들을 무장상태를 보며 침음을 삼켰다.
효용성은 둘째 치고 일천에 가까운 조선기병 모두가 통일된 무장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자신의 부하들은 어중이떠중이마냥 갑옷도 무기도 통일되지 못하고 제각각이었으니까.
이것만 봐도 조선과 요동의 내실차이가 느껴졌다.
“평난군 장군 진강이다. 누가 무순 천호장인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인물은 투구를 벗기 무섭게, 능숙한 중국말을 내뱉었고.
“...!?”
골무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퍽 요상해서, 이백강은 바로 답을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나요. 천호장 이백강이오!”
“만나서 반갑소. 그간 고생하셨소.”
“어. 음...”
뜬금없이 히죽 웃으며 공치사를 하니, 이백강은 어색한 쓴웃음만 지을 따름.
‘헌데... 진강이라?’
조선군이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자 여유가 생긴 걸까? 그는 머릿속에 지렁이가 기어 다니는 것 마냥 간질거렸다.
‘들어본 이름인데?’
어색한 침묵 속에 기억을 더듬고 있자, 드디어 실마리가 잡혔다.
요동과 북평부는 원수사이니, 적국 장군의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알아야 하는 게 인지상정.
‘파벌에 밀려서 쓸려나간 줄 알았는데... 조선으로 갔을 줄이야! 거용관에 있었던 모양이군.’
진강은 나름 화려한 과거를 가진 인물인 만큼, 이백강은 금세 그의 사정을 알아차렸다.
다만 진강은 요동과 싸운 적이 없었는데, 굳이 각을 세울 필요가 있을까.
“장군이 조선에 귀화할 줄은 몰랐소.”
“나도 몰랐소.”
진강은 쓴웃음을 흘리며 말을 흐렸고, 이백강 또한 딱히 덧붙일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냥 내뱉은 말인데, 어째 상처를 후벼 판 것처럼 보였으니까.
“조선으로 귀화한 북직례 출신이 많소?”
“적지 않지요.”
조선의 사정을 캐보려는 걸까?
이백강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고, 진강은 의도한 건지 아니면 별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만... 거리낌 없이 답을 던져줬다.
“얼마나 되는 데 그러시오?”
“지난 원정 때 귀화한 이들이 아무리 못해도 이만명은 넘을 거외다. 왜 그러시오? 혹시 관심이 있으시오?”
오히려 진강이 한방 날려주자, 뭔가 찔리기라도 한 걸까? 이백강은 자기도 모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호주가 개발된 후로 여진부락만 귀화한 게 아니라, 요동 동쪽에 살던 요동인들도 꽤나 귀화했기 때문.
요동의 약점을 은근히 꼬집는 것 같아서, 이백강은 냉큼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저들은 여진포로들이오?”
“그렇소. 앞으로 이곳에 머물게 될 거요.”
“음...”
“아. 걱정하지 마시구려. 조선군도 함께 머물 테니까.”
이백강은 진강의 말에 시시각각 낯빛이 변해갔다.
이곳 무순 바로 옆이 요동 제2의 도시인 심양이다.
수도에 버금가는 대도시 바로 옆에 외국군대가 머무는 꼴이니, 부담이 안 될 수가 있나.
‘하지만...’
따져봐야 딱히 할 말도 없고, 그가 알기론 이미 조선군이 동쪽, 북쪽을 다 집어삼켜 요동을 감싸고 있는 형국 아닌가.
무순을 놓고 불만을 토하려면 요양 옆에 위치한 본계, 개원로 위의 청양도 걸고 넘어져야 하는데... 요양파와 심양파가 대립하는 지금 상황에서 이게 될 리가 없다.
‘제발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군.’
이백강은 미소를 숨기지 못하는 진강을 보며, 애써 우려를 떨쳐 보냈다.
“허면... 이곳에서도 호주와 같은 교역이 가능한 거요?”
“그건 나도 모르겠소. 조정에서 결정을 내리지 않겠소? 설령 거래를 한다고 한들, 당장은 저들을 정착시키는 게 우선일 거요.”
“음...”
진강은 조선기병의 손길에 이끌려 이곳저곳에서 짐을 풀기 시작한 여진포로를 가리켰고, 이백강은 ‘당장은 힘들겠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뭐... 머지않아 교역을 하지 않겠소? 그게 모두에게 이득일 테니까.”
“그렇겠지요.”
진강과 이백강은 서로를 보며, 동상이몽을 품은 미소를 교환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수인계 작업은 동팔참의 시작이자 끝이라 할 수 있는 연산관부터 시작해서 개원로 북쪽 청양에 이르기까지.
요동군이 어설프게 점유하고 있던 모든 지역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야치부르가 떠난 뒤로 보름이 훌쩍 지나갔다.
보름동안 꽤 많은 일이 있었다.
나치부루를 쫓아갔던 2사단은 만여명이 넘는 포로를 이끌고 귀환했다.
눈치를 보면서 사정을 살피던 타안위, 태녕위의 사신들.
화들짝 놀란 그들은 복여위처럼 길림으로 찾아와, 똑같은 제안을 받고 황급히 본거지로 되돌아갔다.
요동이 점유하고 있던 많은 지역은 조선군의 수중으로 들어왔고, 연대기병은 여진포로들을 이끌고 재건을 시작했다.
허나 언제나처럼 전쟁보다 전쟁의 뒷수습이 더 힘든 법. 특히나 이번처럼 대승인 경우에는 더욱 힘든 게 당연한 말.
황보인을 필두로 착호보조군들은 눈 밑이 시커매져서, 강시마냥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괜찮으시오?”
“아... 왔소?”
부둣가 근처에서, 자기도 모르게 선 채로 졸고 있던 황보인.
그는 의주에서 4함대를 이끌고 온 이사검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잠깐 조는 와중에도 무슨 나쁜 꿈이라도 꾼 걸까?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졸음을 쫓아냈다.
“아흠... 무슨 일이오?”
“보급품은 다 하역했는데... 포로로 데려갈 이들은 따로 챙겨놨소?”
“아아.”
황보인은 하품과 함께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선, 부하를 시켜 작업을 지시했다.
“용연군 대감을 뵈러 가겠소?”
“물론이외다.”
이사검은 환하게 웃으며, 황보인의 어깨를 세차게 때려주며 함께 걸어갔다.
‘음... 과연!’
그는 정신없이 건설되고 있는 부두와 신도시를 보며, 함박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이미 오면서 포로수용소 겸 신도시를 방문했지만, 이곳만큼 대규모로 공사가 진행되는 곳은 없었으니까.
“기선군은 몇이나 데려왔소?”
“황해도와 평안도의 기선군만 챙긴 터라, 이천명이 살짝 못되오, 대신 기존 조운선을 많이 가져왔소.”
“다행이구려.”
황보인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 걸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검은 본래 평안도 수군 첨절제사를 역임하다가 신기선군으로 적을 옮겼고, 생경한 훈련을 받으며 수군장군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사정이 급한 터라, 황해도와 평안도의 기선군을 동원해서 기존의 조운선을 사용하는 임시 수송함대를 이끌고 있었지.
수산기업이 생겨나자 수군호에 속한 이들 중, 꽤 많은 수가 기업사원으로 입사하지 않았나.
이러한 변화는 조정이 볼 때 이득과 우려가 공존했으나, 지금은 나름 이득으로 작용했다.
기존 수군역은 농한기 때에만 부를 수 있었는데, 바다일 하는 사원들은 아무 때나 불러서 군역을 시킬 수 있었으니까.
물론 기선군병들은 자신이 만주의 강을 거슬러 올라, 보급선을 옮기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겠지만 말이다.
“오면서 별 일 없었소? 기선군은 신기선군과 꽤 다를 텐데...”
“소문이 퍼진 건지, 아니면 죄다 겁을 집어먹었는지, 그도 아니면 진짜로 평난군이 여진부락을 다 사로잡았는지 모르겠다만... 오면서 여진인을 만나지 못했소이다.”
“그건 다행이구려. 허면 기선군과 신기선군을 비교해 보면 어떻소?”
이사검은 수군갑사로 이뤄진 신기선군과 기존 수군정병인 기선군을 둘 다 부리는 상황 아니냐.
누구보다도, 다른 점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거다.
“뱃일이야 솔직히 비슷비슷한데, 아무래도 노보다 돛을 더 많이 사용하는 신기선군의 실력이 더 좋을 거요.”
“그야 그럴 테지요. 다른 부분은 어떻소이까?”
“두말할 필요가 있겠소? 함포를 쏘는 거나 백병전이나. 신기선군과 비교하면 실례지 않겠소. 하하.”
이사검은 자신이 부리는 수군갑사들이 기특하기라도 한 듯, 너털웃음을 숨기지 않고 흘려댔다.
‘하긴. 돈을 그렇게 잡아먹는데, 전과 똑같으면 그거야 말로 낭패 아니냐.’
황보인은 이제 뼛속까지 행보관이 다됐는지, 모든 걸 돈으로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의주의 중국상인에게서 떠도는 소문은 따로 없소?”
“그저 놀라고 또 놀라는 게 전부 아니겠소? 그치들은 이 북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여진과 싸워서 대승을 했다는 건 알고 있소이다.”
“음... 그게 월동준비에 영향을 끼치겠소이까?”
“글쎄올시다. 산동상인이야 머릿속이 복잡해지겠지만, 강남상인들은 오히려 좋아하지 않겠소? 지금 조선의 물산을 그치들이 가져오는 미곡과 전부 교환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오.”
“흐음.”
두 말할 필요가 있나.
조선이 이런 미칠듯한 확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건, 여진과 조선의 수출품을 죄다 중국강남의 쌀과 곡식, 면포로 바꿔서 수입하고 있기 때문.
다른 수송함대가 그랬던 것처럼, 이사검이 인솔한 수송함대에도 강남에서 가져온 곡식이 가득 차 있었다.
“문제 아닌 문제라면, 강남의 미곡상들이 욕심을 내는 건데...”
“그치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모험을 하기는 힘들 거외다. 듣기로 올해도 중국은 대풍까지는 아니지만 평작은 될 거라 들었고. 강남상인들이 담합을 하기에는 서로 쌓인 원한이 한둘이 아니지 않소. 더불어 그들이 무리했다가는 산동상인만 배를 불리게 될 테니, 전과 크게 다를 게 없을 거외다.”
“음...”
이사검은 지금껏 의주를 드나드는 중국 상선을 검문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지 않았나.
중국사정에 꽤나 정통한 터라, 나름 신뢰할 수 있는 의견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그건 다행이구려.”
“더군다나, 이젠 여진이 없어지고 오롯이 조선만 남게 됐으니, 북방무역의 주도권은 우리가 잡게 되는 셈. 눈치를 봐야할 건 우리가 아니라 그치들 아니오? 고삐는 우리가 쥐고 있으니, 돈을 벌고 싶으면 알아서 따라 올 거외다.”
“흐음.”
‘그랬으면 좋겠다만.’
황보인은 자신만만한 이사검의 말에, 그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여댔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고, 이윽고 목적지에 다다랐다.
연오랑은 여전히 성형요새의 임시지휘소에서 머물고 있었고, 여긴 이제 전투지휘소가 아니라 개척지휘소로 변모해 있었다.
피와 쇠냄새가 나는 군병들뿐만 아니라, 먹물 냄새가 잔뜩 나는 착호군 행정병과 조선내지에서 올라온 임시관리가 한가득 이었으니까.
“사령관님은?”
“중앙회의실에 계십니다. 사단장님, 참판 어른들과 함께 계십니다.”
바삐 돌아다니는 관리 하나를 붙잡고 묻기 무섭게, 피곤에 찌든 청년관리는 냉큼 입을 놀리고선 발걸음을 옮겼다.
삐걱.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뭔가 싶어서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자리하자, 연오랑은 지휘봉을 들고서 지도 이곳저곳을 짚으며 설명하고 있었다.
“왔나?”
“예.”
“보급품은 다 왔고?”
“예. 문제 없습니다.”
황보인과 이사검은 좌중에 앉아 있는 이들과 눈인사를 하기 무섭게, 답변부터 늘어놨다.
“의주로 보낼 포로가 몇이나 되지? 지금껏 보낸 포로의 수는?”
“이번에 납제복록 일파에 속했던 이들이 대략 일천 정도 되고, 지금껏 의주로 보낸 이들이 대략 만명. 앞으로 보낼 이들 또한 대략 만명 정도 됩니다.”
“음...”
황보인이 무시무시한 발언을 내뱉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다들 “골칫거리를 드디어 치우게 됐구나.”라는 후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정도면, 올해 수확할 미곡을 충분히 챙겨올 수 있겠지?”
“예.”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포로가 한꺼번에 너무 많이 풀려서 값을 높게 받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충분할 겁니다.”
사단장들은 이구동성으로 긍정의 대답을 늘어놨다.
연오랑은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두의 눈을 살폈고, 이윽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2만이라... 나쁘지 않아.’
사람을 사고파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기에는, 지금껏 걸어온 길이 너무 거칠지 않나.
이들에게 반항적인 여진포로는 사람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으로 교환될 귀중한 재물일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승자는 독식하고 패자는 복속당하는 약탈문화에 젖은 탓일까?
대부분의 여진인은 건주와 해서를 무너뜨린 조선에게 굴종해,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면서 말로 잘 타이르고, 그것도 안 되면 그때서야 매로 다스리지 않았나.
이 정도면 조선으로선 해줄 만큼 해준 거고, 이럼에도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면 대체 무슨 방법을 취해야 할까.
그저 목을 쳐서 분란거리를 잠재우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피바다를 만들며 죽였다가는 혹시 모를 화근과 분란이 생길지도 모르지.
그냥 예전처럼 중국상인에게 팔아 버리는 게, 돈도 벌고 분란거리도 처리하는 일석이조의 방법이었다.
‘이제 진짜로 여진을 지워버릴 수 있겠어.’
연오랑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며, 생각을 이어갔다.
‘이 시절 여진 인구는 아무리 많아봐야 50만을 못 넘을 것 같은데...’
만주는 엄청나게 넓고 사람은 적어서, 정확히 얼마나 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미래의 학자들도 그저 추산할 뿐이고, 지금 역사에선 더욱 모르지.
다만 운석핵꿀밤으로 인해 지난 이십여년간 지들끼리 미친 듯이 싸워댔으니, 그 수가 줄었으면 줄었지, 절대 늘어날 리가 없다.
‘그리고... 역사가 변했다곤 해도 이들에게 제대로 된 농업기술이나 제철기술이 넘어가지 않았으니 딱히 달라진 건 없을 거고... 동북면 쪽은 오히려 조선인이 된 여진인이 훨씬 많을 테니, 수가 더 불어날 리는 없잖아?’
이것저것 생각하면 대략 45만명 정도 되지 않을까.
‘그럼...’
연오랑은 지금껏 여진을 얼마나 때려잡았는지 하나씩 더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