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챕터29. 고민하다 (1)
호주가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압록강 북쪽의 천산,용강산맥에 살던 소규모 여진부락이 본격적으로 귀화해왔다.
그 수가 대략 만여명 정도.
중국 원정을 끝마치고 이만주와 건주위를 처단할 때.
그때 죽은 이들이 대략 오천명정도 되고, 포로로 사로잡은 이들이 사만명 정도. 중국으로 팔아넘긴 이들이 또 오천명 정도 된다.
그렇게 건주위 여진족을 쓸어버리고 나자, 요동 인근에 살다가 가호랍을 피해서 혹은 조선군에게 겁을 먹고 또 자발적으로 귀화한 이들이 만여명.
‘그러면 대충 38만명 정도 남았다는 거지? 일단 서쪽은 이 정도였고, 동쪽은...?’
훈춘과 연길로 진출하면서 집어삼킨 수가 대략 오만명 정도.
이쪽은 계속해서 동쪽과 북쪽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을 테니, 지금 이 순간에도 찾아와 귀화하는 야인여진이 한둘이 아닐 거다.
‘그럼 일단은 대충 33만명인가?’
끝으로 이번 전쟁을 통해서 죽은 여진인이 대략 이만에, 사로잡은 포로가 십팔만, 중국에 팔아넘길 포로가 이만 정도.
‘남은 건 대충 11만명 정도라는 거지?’
연오랑은 그리 계산하고선, 물끄러미 지도를 살펴봤다.
조선이 진출하지 않은 지역은 하얼빈 북쪽지역, 동쪽으로는 목단강 일대, 연해주 일대.
끝으로 조선군을 피해서 산과 숲으로 숨은 자잘한 부락들.
이런 외각에 사는 이들은 문명수준이 몇 단계 떨어지는 야인여진이니, 조선의 귀물에 눈이 뒤집혀서 알아서 찾아와 귀화하게 될 게 분명.
그게 아니면, 조선군이 조금만 휩쓸고 다녀도 알아서 싹 정리할 수 있을 숫자다.
‘이제 진짜로 여진은 없는 거지. 후금도 청나라도 없을 거다.’
연오랑은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헌데... 저들이 맹약을 따른다고 해도, 저희가 관리할 수 있겠습니까?”
방금 전까지 우량카이 3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걸까?
이조참판 원숙이 조심스럽게 반문을 던졌다.
“...?”
모두의 시선은 연오랑에게 향했고, 그는 잠시 과거를 더듬었다.
승전 소식은 이미 한성을 진동시키고 있었고, 모두는 드디어 지긋지긋한 북방의 위협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일반 백성들이나 그런 거고, 관리들은 예상하고 있던 난제가 코앞으로 닥쳐오자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이번 전쟁의 개요에 대해서 잘 모르던 하급관리들은 “아니! 전처럼 토벌하러 간 거 아니었어? 왜 거기에 눌러 앉아 있는 거야!?”라며 화들짝 놀랄 지경이었지.
조선관리들 입장에서 조선강역이란, 그 땅에 관리를 파견해 세금을 걷고 온전히 통치하는 걸 뜻했는데... 가능할 리가 있나.
작디작은 대마도조차도 쓸모가 없다고 “이걸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이들이니, 만주 땅을 통치하는 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영역이었다.
여기에 추가로 “수십만명의 거지떼를 또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라는 문제가 겹쳤고.
웃기게도. 우량카이 3위나 요동, 중국은 조선의 위용에 놀라서 겁을 먹고 있겠지만, 정작 조선은 까닥 잘못하면 배가 터지게 생긴 거지.
하지만 연오랑은 조선관리들의 고정관념을 깨고, 다른 의견을 내놨다.
“이 넓은 땅을 뭔 수로 관리해? 깔끔하게 포기하고, 우린 사람만 챙기면 그만이다.” 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참판이 되어가지고... 쯧쯧. 내가 전에 말해줬을 텐데?”
“그게...”
원숙은 괜히 민망해서, 주위에 있던 다른 참판들에게 도와달라고 눈빛을 보냈다.
허나... 안타깝게도 아무도 도와주는 이들 없이, 모르는 척 피할 따름이다.
이들이 길주에 오기 무섭게, 연오랑은 “일 빨리 빨리 안하냐!”라고 사정없이 갈구지 않았나.
괜히 불통이 튀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이번에 얻은 땅은 아무리 못해도 조선내지보다 두 배나 넓은데, 여길 조선내지처럼 관리하는 게 가능이나 할까. 그저 지금 평난군과 정토군이 차지하고 앉은 요충지에만 도시를 건설하면 그만이다.”
“...”
연오랑은 그리 말을 하고선, 지도를 척척 집어나갔다.
“이미 완성된 길주와 이번에 자리 잡은 오주(돈화), 교주(교하), 송주(길림), 황주(장춘). 본주(본계), 석주(무순), 허주(통화), 사주(사평).”
“...”
“수로를 통해 이어지는 이곳을 지키고 개발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한계다.”
“음...”
“흐음.”
그의 말에 사단장들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참판들은 알면서도 천만다행이라는 심정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금 말한 지역은 맹약에 포함된 땅 중에서도 절반 가까이 밖에 안 되고, 요동 및 조선내지와 가까운 남쪽 지역에만 몰려 있었으니까.
2사단이 나치부루를 잡으러 갔던 하얼빈은 포함도 되지 않았으니, 그 위쪽과 동쪽 땅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
“고작 여덟 곳 밖에 안 되는데, 조선이 유지하지 못할 것 같나?”
“음...”
“크흠.”
‘너희들. 이거 밖에 안 돼?’라고 핀잔하듯 내뱉는 말에, 모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머리를 굴려댔다.
애초에 이렇게 하기 위해서, 포로들을 한곳에 모아두지 않고 각 도시에 분산 배치해놓지 않았나.
보급을 편하게 하려고 그런 것도 있지만, 그들을 그 땅에 눌러 앉혀서 조선백성으로 삼기 위함이 더 큰 이유였지.
‘이것조차 못하면, 만주 땅을 어떻게 집어먹으려고.’
연오랑은 침묵에 잠긴 이들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날려줬다.
미래에는 동북평원이 중국을 먹여 살리는 엄청난 곡창지대로 변하게 되지만, 그건 20세기나 돼서야 가능해진 일.
지금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조선군이 눌러 앉은 지역은 하나같이 미래에 대도시로 변모하는 곳.
강을 끼고 있어 수자원이 풍부하고, 목재도 많고, 나름 쏠쏠한 평야도 있고, 기타 광물자원은 넘쳐난다.
미래엔 수십만명이 사는 도시인데, 고작 해봐야 이만명을 조금 넘는 인구를 유지하지 못할 리가 있나.
시간이 지나면 수참과 역참을 따라 위성도시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이게 최선이다.
“다들 생각해 봤겠지만... 이들 여진인들은 왜 서로 자기들끼리 싸워대고, 과거엔 요동과 조선을 침범해 약탈과 납치를 해왔을까?”
“...”
당연한 걸 묻는 말에, 모두는 쉽게 답을 하지 못하고 눈을 굴려댔다.
“식량이 없어서 그렇지 않겠습니까?”
“농우도 없고, 여러 기술이 부족하니...?”
“성정이 본래 그러하니...”
잠자코 기다리고 있자, 정론에 가까운 대답이 흘러나오다가... 꼰대 같은 답변이 하나 튀어나왔다.
“성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예조참판 정초는 싸늘하게 쏘아붙이는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저들이 약탈하는 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탓으로, 나와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선 남의 것을 빼앗는 수밖에 없어서다. 조선인이 이 땅에서 살면 저들처럼 변하지 않을 것 같냐? 예조참판이라는 작자가 저들을 이해하고 교화시키진 못할망정, 그게 할 소리냐?”
“... 죄송합니다.”
“뭐... 마적떼 같은 놈들에게 당해온 세월이 있으니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만, 그렇게 까불던 놈들을 다 죽이지 않았냐. 이제 생각을 바꿔야 될 때도 됐지.”
“예!”
“그렇습니다!”
정초를 비롯해 모두는 일심동체가 되어 외쳤고, 연오랑은 싸늘한 눈빛을 지우고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럼 반대로 생각해 봐라. 모든 걸 가진 우리가 이 땅을 개발하고, 여진인을 정착시키지 못할 이유가 있나?”
“...”
“흐음.”
모두는 연오랑의 질문에, 다시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유목,수렵민족이 부락 단위에서 성장하기 힘든 건, 생활양식 자체가 한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를 많이 늘린다 한들, 초지와 사냥터는 정해져 있으니 그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렇다고 무한정 땅을 넓혀간다 한들, 어차피 뿔뿔이 흩어져 사는 건 매한가지.
결국엔 농사를 지어야만 한곳에 뭉쳐 살면서 인구를 늘릴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선 선진농업기술과 수리관개시설을 갖출 토목기술 등의 많은 기술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런 대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또 많은 인력집중이 필요하다는 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꼴 아니냐.
이들은 덩어리로 뭉칠 수만 있으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지만, 뭉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거지.
하지만 조선이 주도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조선은 이들이 보유하지 못한 각종 선진기술이 있다. 원래 역사에서도 그랬는데, 연오랑이 개입한 후로는 더욱 발전한 상태.
여진이야 조선기술이 없으니 함선을 이용하기 힘들지만, 조선은 조운에 익숙한 나라 아니냐.
신도시의 토대를 잡는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식량은 얼마든지 보급할 수 있다.
끝으로. 이미 포로를 한곳에 모아두면서 개간, 개척에 필요한 인력을 마련해 놨다.
잡일을 할 일꾼들은 가득하니, 머리가 될 관리, 기술자들만 오면 개발이 시작되는 거지.
“이 신도시 터를 다들 가봐서 알겠지만, 비록 수전을 통한 쌀농사는 힘들어도 밭농사는 얼마든지 가능한 지역이다. 그 뿐일까. 그 외에 약재나 목재, 농장터, 수산물, 노천광산 또한 널려 있지.”
“예.”
“그건 그렇습니다.”
모두가 이미 눈으로 확인한 사안인터라, 다들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광물자원의 경우에는 조선내지와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풍족했는데, 본주(본계), 석주(무순), 교주(교하)에선 광맥을 파고들 필요도 없는 노천광산이 널려 있었으니까.
“지금 당장은 힘에 부치겠지만, 개간을 시작하면 얼마든지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로 괜찮은 땅이다. 비록 겨울이 길고 추워 농사가 쉽진 않겠지만, 함경도와 평안도에서도 자라는 작물을 연구해 왔으니 이곳에서도 금방 적응할 수 있겠지.”
“그렇습니다.”
“물론입니다.”
모두는 이미 연주(연길)와 평주(훈춘)에서 경험하지 않았나.
그곳에 뿌린 개량종자는 이미 성공적으로 자라서, 나름의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잊지 마라. 여길 조선내지처럼 마을을 여러개 만들고, 각자 살던 곳에 그대로 살게 놔둔다면... 수십만명의 화척이 떠돌아다니는 꼴을 보게 될 거다.”
“...!”
“그러니 땅에 연연하지 마라. 우린 땅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사람을 다스리는 거다. 앞으로 여진,몽골,요동인, 심지어 저 먼 거란인조차도 이 땅에 없는 거다. 조선내지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말을 쓰고, 똑같이 행동하는 조선인만 있게 되는 거지.”
“...”
“그렇게 만들기 위해선, 정초가 말한 대로 저들의 성정을 바꿔야 하는 바. 그들의 생활양식을 박살내고, 조선의 생활양식을 덧씌우는 게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사안이지.”
눈이 절로 돌아갈 정도로 수준 높은 문명생활.
15세기 수준이니 웃기게 들리는 이야기지만, 여진인들 입장에선 흔한 가마터나 기왓장, 가마솥마저도 놀라 자빠질 물건 아니냐.
이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떠돌면서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조선인이 되어서 풍족한 문명생활을 하는 게 훨씬 낫지.
그렇다고 이들이 익숙하지 않은 농사만 짓느냐. 기업이 등장한 이상, 그것도 아니지 않나.
별의 별 기업이 생길테니... 제대로 된 직업도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던 여진인들은,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찾아가지 않을까?
낯선 부락민들과 섞여서 한 곳에 뭉쳐 살게 된 이상, 싫더라도 이렇게 해야만 살아갈 수 있을 거다.
“예.”
“그렇게 하기 위해선 뭘 해야 한다고?”
“여진포로들을 한곳에 모아 교육시키고, 농사를 짓게 하고, 도시를 만드는 겁니다.”
“맞다. 아직 터도 닦지 않은 곳에, 어째서 “주”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기억해라. 이곳들은 앞으로 조선내지의 대읍 못지않게 사람이 몰려 사는 유명한 도시가 될 테니까.”
모두는 연오랑이 무얼 말하는지 다시금 깨닫고서 고개를 조아렸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길주나 평주를 몇 개 더 만든다고 생각하면 되고, 그것도 힘들면 그냥 규모가 작은 착호군이 여러개가 생겼다고 보면 마음이 편해질 걸?”
“...”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
이 일의 뒤처리를 할 한성의 관리들이 들었으면, 분명 쌍욕을 내뱉었을 거다.
“더불어 여진인을 빠르게 동화시키기 위해선, 그들의 수장들을 치워야 하는 데... 작업은 잘 되고 있지?”
“예.”
“물론입니다.”
사단장들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주에서 여진부락을 다루는 방식은, 이제 거의 표준화되지 않았나.
부락의 중심이자 머리라 할 수 있는 부족장과 권력자, 샤먼(박수무당)들을 다 치워버리고, 부락을 가족단위로 해채해서 흩어놓는 것.
호주에선 이 작업이 그나마 온건하게 진행되었다면, 이번에는 꽤나 거칠게 진행됐다. 반항하거나 복속한 부족장들의 목이 우수수 잘려 나갔으니까.
보기 흉한 수급을 수백개씩이나, 괜히 각 도시 한복판에 박아 놓은 게 아니었지.
바짝 머리를 굽히고 항복한 부족장들은, 부락민과 떨어져서 다른 도시나 정주 혹은 길주로 이주시키고 있었고.
“그럼... 목단강 일대의 여진은 처리하지 않는 것입니까?”
“일단은.”
“분위기를 보아, 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지금은 무리다.”
5사단장 송거신이 의견을 내봤지만, 연오랑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분위기가 좋은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력이 없어.”
각 도시에는 여진포로를 교육시키고 감시할 연대기병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데, 포로들을 놔두고 병력을 쪼개서 싸움을 거는 건 힘들다.
당연히 승리하겠지만, 뭐하러 불필요한 피해를 감수한단 말인가.
“게다가 목단강 상류 지역의 수로는 아직 다 파악하지 못했고, 이제 곧 겨울이 온다. 설령 목단강 일대를 차지하고 포로를 잡는다고 해도, 강이 얼어붙으면 보급이 힘들어질 거야.”
“예...”
“허면 북쪽은?”
“북쪽은 모든 도시가 완성될 때까지 버려둘 거다. 그저 국경을 따라서 순찰하고, 조선강역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사로잡으면 되겠지.”
‘거긴 앞으로 거대한 낚시터가 될 거니까.’
연오랑은 속내를 숨기며, 담담히 대답했다.
몽골이든, 여진,거란 기타 유목민족이든 따질 필요 있나. 그들은 빈 초지와 그나마 따뜻한 기후를 찾아 계속 남하할 게 분명.
조선은 그들을 상대로 실전훈련을 하면서, 꾸준히 포로로 사로잡아 인구를 늘리면 그만.
이 짓을 계속 하다보면, 흑룡강 일대에 사는 이들마저도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을 거다.
‘더불어 그들이 뭉치고, 덩치가 커지지 못하게 막는 방편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