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챕터29. 고민하다 (2)
“그럼 개선식도 못하겠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여진포로를 내버려 두고 떠나는 건 둘째 치고, 어느 세월에 한성까지 갔다가 다시 올라오겠는가.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다.
“크흠...”
다만 사단장들은 개선식을 못한다는 말에, 알면서도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개선식은 조선 역사에서 없던 행사 아니냐.
좌충우돌하면서 어설프게 진행되긴 했지만, 어찌됐건 무관들에게는 죽을 때까지 회자될 사건.
아쉽지 않으면 무관이 아니지.
“또한 우릴 피해 도망친 여진부락이 꽤 될 테지만, 겨울이 오면 버티지 못하고 알아서 기어 나올 터. 각 연대는 도시를 건설하면서 무력순찰을 이어가도록. 어차피 맹수사냥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걸려들 거다.”
“알겠습니다.”
“흐흐. 넵!”
사단장들의 만족스런 대답을 듣고 난 후. 연오랑은 다시 참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지에서 올라올 이주민은 준비되고 있겠지?”
“예. 하오나 시간이 걸릴 듯 합니다. 워낙 많이 오기도 하거니와, 여러 곳에서 오는 터라.”
“올해는 힘들겠군?”
“예. 아마도 내년 봄에 수로가 열리면, 그 때 가능할 듯 합니다.”
이조참판 원숙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바로 섞는 것보다, 최소한의 교육은 시켜놓고 합치는 게 더 나을지도.’
연오랑 또한 차라리 그게 낫다고 애써 위안했다.
여진인을 정착시키고, 교육시킨다고 해서, 단번에 조선인으로 바뀌는 건 쉽지 않다.
효과적인 방법은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조선인이 넘쳐나는 곳에 집어 던져서 스스로가 변화하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다.
이를 위해선 당연히 삼남지방의 백성들을 북방으로 이주시키고, 반대로 여진인들을 조선내지로 보내야 했지.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관리들이 얼마나 고생할지, 얼마나 많은 사전작업이 있어야 하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호주와 압록강 일대의 개척마을에 사는 여진인을 조선내지로 이주시키는 건?”
“올해 안으로 가능할 듯 합니다.”
“그건 다행이군.”
연오랑은 이번엔 자기도 모르게 히죽 미소를 짓고 말았다.
드디어 한걸음 더 나아가는 발전이 이뤄지고 있으니까.
지난날 원정을 통해 십수만명의 귀화인이 생겨났고, 이들은 호주와 압록강 일대를 개척해 왔었다.
고려인을 필두로 일찍 적응을 끝내고 교육을 끝마친 이들은, 하나둘씩 기업집안에 고용되어 조선팔도로 퍼져나갔고, 대규모 인원은 삼남지방의 양전사업에 투입된 상황.
그럼에도 아직 몇만이 넘는 인원이 압록강 변경에 머물며 살고 있었는데, 이들을 한번 더 섞을 시간이 됐다.
‘만주 신도시의 여진포로들을 호주와 개척마을로 보내고, 압록강변에 살던 이들의 일부를 만주 신도시로 이주.’
연오랑은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봤다.
‘삼남에서 올라올 조선인을 만주 신도시로 이주시키고, 압록강변에 살던 이들 중 일부를 또 조선내지로 투입한다.’
흡사 야바위 돌을 굴리듯, 조선내지-압록강일대-만주신도시의 인구를 섞어 버리는 거지.
이래야 서로 적응하기도 편한 거고, 구심점을 가지고 하나로 뭉치기도 힘들 거다.
마지막 패가 하나 더 있다.
‘여기에 동북면 훈춘과 연길에 머무는 여진인까지 만주신도시로 보내면 더욱 완벽해지겠지.’
여진인들은 안 그래도 국가라는 정체성이 희박하니, 저 먼 동북면여진과 해서여진이 서로 동질감 같은 게 있을 리가 만무.
잘게 쪼개면 쪼갤수록, 상위 개념인 조선이라는 국가에 더욱 빨리 흡수될 거다.
물론 일은 어마어마하게 복잡해지겠지만... 어쩌겠어.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되어가고 있으니, 어떻게든 버텨내야지.
“그리고... 철원과 함흥, 김포의 개발준비는 끝마쳤겠지?”
“예. 이미 실지와 측지를 끝내놓고, 함께할 건설기업들도 선별해 놨습니다.”
“음.”
공조참판 황상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답을 던져줬다.
‘좋아. 드디어 여길 건드려 보는구나.’
연오랑은 이들이 모를 미래를 떠올리며, 속으로 히죽 웃어줬다.
이 시대엔 미래에 아는 수많은 평야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애초에 이앙법조차 제대로 전파가 안됐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지.
하나 착호군이 훑고 지나가면서 맹수4종세트를 정리하자, 이들 조선인의 눈으로 봐도 대평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 튀어나왔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김포와 철원, 함흥.
하지만 착호군이 활동할 당시에, 개발하는 건 무리였다.
첫째. 개간을 할 인력은 있지만, 이 땅에 정착해 살아갈 사람이 부족했다. 착호군은 계속 이동을 해야 하니, 얘들을 여기에 박아둘 순 없지 않나.
둘째. 대규모 인원이 장기간 거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
착호군은 이동하는 도시인만큼 무조건 수로 그게 아니면 여러 개로 이어지는 육로를 통해 보급 받아야 하는데, 이 보급로를 정비하고 있다가는 정작 착호군 활동을 못하게 생겼다.
셋째는 이곳을 개간한다고 해도, 당장 수익이나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창기 착호군은 남들이 보기엔 위태로울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고, 무조건 활동을 해서 뭐든지 수익을 내야 유지될 수 있었다.
연오랑은 “따서 갚으면 돼!”라는 마인드로, 카드돌려막기를 하듯 이곳의 이득을 뽑아서 착호군의 유지비 지출을 막아댔으니까.
이 판국에 습지나 늪지 그도 아니면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에 저수지와 보를 세우고, 여기에 씨를 뿌려 수확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럼 망하는 거지.
하지만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이냐.
지금은 지리감과 조정에서 파견 나온 관리들이 측량을 끝마쳤고, 보급을 할 수 있는 수참과 역참의 정비도 끝마쳤고, 끝으로 개간과 관개시설공사를 진행할 대규모 인력. 여진포로와 귀화한 여진인들까지 생겼다.
이제 드디어 미뤄뒀던 대공사를 진행할 시간이 된 거지.
“북방에서 이주시킬 인원 외에도 농한기 동안 일손을 노는 백성들을 공역에 동원하는 일이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보급품이 필요할 텐데... 준비는 다 됐나?”
“예. 그간 역참과 수참을 정비하면서 식량창고를 마련해 비축해 놨으니 문제는 없습니다만...”
“없습니다만?”
연오랑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황상이 슬쩍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조정에선 이번 기회에, 용연포구를 개방하는 게 어떨지 논의했습니다.”
“오! 그래?”
“예.”
황상은 예상과 다른 연오랑의 반응을 보며, 애써 놀란 표정을 억눌렀다.
연오랑이 이주하기 전에, 용연현은 황무지에 사람도 안사는 곳이었다.
지금은 온갖 신기술이 튀어나오는 조선제일의 신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으로, 상전벽해 수준으로 바뀌었지.
문제는... 조정의 도움도 분명히 있었지만, 사재를 쏟아부어서 그곳을 만들어 낸 건 연오랑 아니냐.
그런 곳을 조정이 이제 와서 날름 하려는 모습이니, 뭔가 조금 민망했던 거지. 물론 조정이 하는 일에 누가 감히 거부할까 만은... 연오랑의 위치가 또 만만한 건 아니잖나.
황상이 쉽게 입을 열기 힘들었던 건 이런 이유였는데.
‘드디어 시작되는고만, 그럼 이제 슬슬 왜관을 열 준비가 되고 있나 본데?’
오히려 연오랑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조선이 드디어 의주 외에 다른 곳에도, 무역항을 만들려고 마음을 먹었으니까.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이젠 사정이 어쩔 수 없어서 무역을 하는 게 아니라,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무역을 하겠다는 기조로 바뀌었다는 것.
농본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상업. 그것도 가장 규모가 큰 국제해상무역을 인정하고 조정에서 주도하겠는 거지.
“좋군. 나쁘지 않아.”
연오랑이 살짝 들뜬 표정을 지어서 일까?
호조참판 목진공 또한 연오랑의 분위기를 읽고 열심히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 문제가 떠오르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하면서도 사소한 이유 때문이었다.
조선은 무지막지한 양의 식량을 수입하고 있고, 그 물량은 전부 의주에 쏟아졌다가 다시 조운선을 통해 한성으로 몰리고, 한성에서 또 조선팔도로 흩어진다.
조정관리들 입장에선 이게 관리하기에는 분명히 편한데... 아무래도 두 번, 세번 일하는 꼴 아니냐.
중국에서 곧장 한성, 하다못해 고려 때 쓰던 벽란도와 같은 곳에 식량을 쏟아내기만 해도, 굳이 의주와 한성을 왔다갔다할 필요가 없는 거지.
중국상인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래선이 길면 길어질수록 기간도 오래 걸리고 지출도 늘어나니, 강남상인들은 “제발 조선땅 남쪽에도 무역항을 만들어주면 안 될까요?”라고 매일 애걸복걸해왔다.
그렇다고 가장 효율적으로 생각해서 한성의 포구를 개방한다? 이건 조정관리들 입장에선 미친 짓이다.
조선은 외국배가 수도 앞바다에 얼쩡거리는 걸 극도로 경계해서, 심지어 강화도에 중국상선이 어슬렁 거리기만해도 기선군이 출동하는 판국 아니냐.
나아가 지금의 한성은 한강을 쭉 타고 올라와야 노량포구, 마포포구 등의 포구를 만날 수 있다.
조선 입장에선 진짜로 수도 코앞을 노출시키는 거니, 받아들일 리가 없지.
한강의 출입구라 할 수 있는 인천이나 부평 등의 포구는 조운을 운반하기 위한 포구이지, 무역을 할 만한 항구가 아니었고.
그 다음으로 논의된 건 고려 때에 써먹던 벽란도.
하지만 벽란도도 사실상 강화도와 바로 붙어 있는 곳이나 마찬가지고, 조운로의 목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강하류에 위치한 곳 아니냐.
여길 노출시키는 것 또한 조선입장에선 탐탁지 않다.
“어디가 적당히 멀면서, 적당히 편한 곳일까?”하고 찾다보니, 용연포구가 딱 걸려든 거지.
게다가 여긴 조선소까지 있어서 조운을 옮기기도 편하고, 수군영도 있어서 중국상인을 단속하기에도 용이했다.
“의주와 같이 만들려는 건가?”
“그건 아니고... 오롯이 중국미곡상들만 받고, 북방이 아닌 조선의 특산물만 거래할 생각입니다.”
“음... 나쁘지 않아.”
“예. 지금은 의주가 무역의 중심이 되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니 말입니다.”
호조참판 목진공은 길주에 와서 연오랑과 꽤 오랫동안 구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않았나.
그가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 재깍 알아차리고선, 조정의 입장을 대변했다.
의주에서 벌어지는 무역은 단순히 여진 및 북방무역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다.
조선팔도의 모든 물산이 조선땅을 관통하며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고, 이는 곧 상업과 시장경제라는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농사 중심의 고요하고 고립된 향촌사회가 이리저리 떠도는 행상 및 관리들로 인해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거지.
일반 백성들의 인식만 깨어나는 게 아니라, 이걸 관리할 조정관리들의 인식도 넓어지고 있다.
이건 여러모로 고무적이면서 긍정적인 신호였고, 조정에선 용연포구를 개방하더라도 이 분위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아가 북방물산을 의주가 아닌 용연포구에서 거래를 하는 건, 어찌 보면 동선 낭비 아니냐.
조삼모사도 아니고 말이다.
“다른 물건들을 거래하는 건 아직은 시기상조고.”
“옙!”
목진공은 이심전심을 몸으로 보여주는 연오랑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흥이 나서 어깨춤을 췄다.
연오랑이 지금껏 누차 피력해 왔던 의견은, 중국물산에 밀리지 않게 조선물산의 경쟁력을 키우자는 것 아닌가.
그 세월이 벌써 5년에 가까워졌고, 예전 조선과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단순히 나라의 세수가 더 많이 걷히는 걸 넘어서, 백성들의 생활양식자체가 향상되고 있었으니까.
초가집 대신 기와집에서 살고, 목기그릇 대신 자기그릇을 쓰고, 짚신 대신 가죽신을 신는 일반 백성들이 늘어가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유학자든 아니든 계파와 계열에 상관없이, 위정자이자 관리로서 백성들이 풍요로워지는 걸 마다하는 이들이 누가 있겠나.
모두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경험하고 있으니... 괜히 중국물산을 마구 끌어와서, 이러한 성장곡선을 둔화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빡빡하게 무역을 제재해서, 일단 내수시장을 계속 키우는 게 최우선이다.
‘그리고 다른 의도도 있겠군.’
“하긴 개성과 평양도 이제 슬슬 손을 댈 때가 됐지.”
“...”
“맞습니다.”
연오랑의 혼잣말에, 참판들 모두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용연포구는 북으로 평양, 남으로 개성과 바로 맞붙어 있지 않나.
용연포구가 활성화되기 시작하면, 두 대도시 또한 당연히 영향을 받을 터.
‘착호군이 활동한지 오년이 다 되가니, 슬슬 평안도와 황해도도 손을 써야겠지.’
연오랑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조정의 의도를 읽어 내려갔다.
지금껏 착호군이 삼남지방에서 활동을 한 건, 간단히 말해서 그게 가장 효과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먹여 살리는 곡창지대인 만큼 가장 많은 지주가 살았고, 당연히 각 지역에는 오랫동안 터 잡은 토호들이 넘쳐났지.
그게 양반사대부든, 향리출신이든 상관없었고, 태종과 세종은 그들을 다 박살내서 중앙에 편입시키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나.
더욱이 원래 옥토였던 곳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으로 바꾸면, 긴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바로 효과를 볼 수 있다.
착호군 활동과 양전사업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고, 앞으로도 무탈하게 진행될 걸로 예상이 되니... 그간 미뤄뒀던 황해도와 평안도에도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
‘하지만 착호군이 활동하긴 힘드니, 이런 식으로 미리 갈라치기를 하려는 모양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