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챕터29. 고민하다 (5)
“달리 말하면 이제부턴 소출이 남는다는 말 아냐? 함흥평야가 개간 될 거고, 평주의 여진인이 더 내려오면 길주평야도 개간할 수 있을 거고... 그간 착호군이 개간해 놨던 땅에서도 본격적으로 소출이 나오겠지.”
“그건 그렇지만... 하오나 지금이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지방은 둘째 치고, 북방 땅에서는 앞으로 몇해간은 세금을 걷기 힘들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
연오랑은 목진공의 불퉁한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주신도시에서 발생하는 소득은 전부 신도시에 재투자되어야 그나마 살만해지지 않겠냐.
여긴 그냥 한동안 세금을 못 걷는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애초에 북방으로 이주하는 이주민들에게는, 몇 년간 세금을 안 걷을 거라고 공표하기도 했고.
“그래서. 다른 지방에서 함길도와 같은 통합작업을 진행하는 건, 당장은 무리라는 말이군?”
“예. 그나마 다행이라면, 한성 일대의 경기도. 양전사업이 가장 먼저 진행된 김제, 나주, 아산 인근 지역과 착호군이 오래 머물렀던 춘천, 원주, 홍천, 강릉 등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음.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마냥 못할 것도 아니잖아?”
“...”
“허허.”
연오랑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고, 모두는 “몇 해만에 고려의 잔재를 완전히 뿌리 뽑았는데, 반응이 고작 그게 전부야?”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곳들은 세종,태종,연오랑이 직접 머물면서 개발하고, 동시에 눈치 보면서 말을 안 듣던 지방토호를 때려잡은 곳 아니냐.
이게 가능했던 건, 향리들이 없어도 착호군 행정관리가 그 일을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착호군이 떠난 자리를 다른 곳에서 온 향리출신 중앙관리가 담당하고 있었다.
“거봐. 따지고 보면 다 사람 사는 곳 아니냐? 함길도나 다른 지방이나 다 마찬가지란 말이지. 굳이 특별히 개별사정을 봐주면서 진행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음...”
“아마 기업 덕분에 가능한 일일 겁니다.”
“착호군이 한바탕 뒤집어 놔서 가능한 일이기도...”
연오랑은 “하면 되는 데 뭐가 문제야?”라고 말하듯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지만, 모두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푸념 아닌 푸념을 내뱉었다.
사실 다들 말은 이렇게 해도, 속으로는 적잖게 놀라고 있었다.
과거의 그들은 “이게 설마 될까?” 했었고, 지금 와선 “이게 진짜 되네?”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으니까.
이렇듯. 두 번째 현실적인 문제는, 모든 지방행정조직을 똑같이 대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의 조선은 지방토호인 향리의 힘이 나름 막강했고, 중앙에서 내려온 수령, 양반사대부 집안과 함께 권력의 한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문제는 조선이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유학적 논리에 입각하여 적은 관리와 최소한의 간섭으로 나라를 꾸려나가기를 원하지 않았나.
이건 따지고 보면 모순이나 다름없고, 나라에 필요한 물품 및 세수를 감당하기 위해서 향리들을 압박하며 부담을 떠넘겼다.
각 지방의 처지에 대해서 잘 아는 이들은, 몇 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이 아니라 대대로 그 곳에 터 잡고 사는 토박이들 아니냐.
이곳의 특산물은 뭐가 있고, 어디에 가면 뭐가 나오고, 저 집안에는 누구가 살고, 저쪽 땅은 누구 소유고, 저쪽에 가면 군사를 활용하기에 좋은 요충지가 있고 등등.
안 그래도 자료정리가 제대로 안 되는 시대상황상. 토박이가 아니면 모르는 사안이 잔뜩 있었고, 수령은 이들의 도움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지.
조선 건국 후 이런 세월이 이어지자, 주객이 전도되어 “일은 우리가 알아서 다 처리해 놓을 테니, 한성에서 오신 수령님은 편하게 쉬다 가쇼. 뭘 그렇게 꼬치꼬치 파고듭니까?” 이런 반응을 보이기 일 수.
이러니 설령 향리와 토관을 중앙조직에 편입시켜서, 수령처럼 순환근무를 시킨다고 한들...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잖나.
이걸 가능케 하기 위해선, 모든 지방조직이 똑같은 방식과 똑같은 절차, 똑같은 양식으로 움직이는 통합행정규칙이나 방법이 필요했다.
더불어 지방관아에서 뭐 하나할 때마다 눈치를 주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양반사대부와 지방향리, 지주들도 억눌러줘야 했고.
허나... 엄청난 인력과 재원을 필요로 하는 이 개혁작업을, 대체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을까.
‘하지만 착호군이 있었단 말이지.’
연오랑은 초창기에 착호군이 활동했던 순간을 떠올리자, 자기도 모르게 입가가 들렸다.
물론 착호군 초창기에는 “그냥 지금처럼 살면 되지. 왜 갑자기 지랄이야? 왜 우리 특권을 빼앗는 거냐! 우리한테 맡기면 되는데 왜 일을 이렇게 어렵게 해?!”라며 반항하는 지역이 몇 곳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역사에서의 태종은 자잘한 지방반란을 가차 없이 진압한 전력이 있고, 연오랑이라는 미친 칼을 앞세워 수만명의 군대를 직접 이끌고 있다.
개기는 것도 상대와 상황을 봐가면서 개겨야지... 착호군은 무자비하게 지방토호와 지주를 짓누르고, 비리를 들춰내어 그들의 땅과 노비를 뜯어냈다.
그리곤 곧장 지방행정조직을 착호군과 유사한 방식으로 뜯어고치기 시작.
모든 곳은 똑같은 설계와 구조로 도시와 개간이 진행됐고, 양전사업을 통해 지방의 모든 것을 문서화,자료화 시키고, 그간 놀고먹으면서 대충 인맥으로 행정관리를 하던 향리들을 혹독하게 교육시켰다.
한동안은 얘들이 향리인지, 착호군 행정관리인지 헷갈릴 정도로 부려먹으면서, 과거에 합격한 조정관리에 못지않은 실무형 전문행정관료로 재탄생시켰지.
이러니 함길도의 토관과 향리를 중앙조정에 편입시켰을 때, 나가떨어진 이들의 아우성에 아무도 관심을 안 가졌던 거고.
그 결과. 착호군이 지나간 곳은 지방의 특수성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어딜 가도 구조와 체계는 엇비슷하고, 모든 게 자료화되어 있으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된 부분만 첨삭하고 적용하면 됐으니까.
또 하나의 특이점은 기업이 등장하면서, 일처리가 더 편해졌다는 거다.
향리가 열심히 발품 팔면서 해결했어야 될 일이, 기업을 통하거나 시키면 손쉽게 해결됐으니까.
예를 들면, 예전에는 “자기가 필요하다. 공물로 바쳐라.”라고 명이 떨어지면, 향리가 자기장인들을 따로 불러 모으고, 이들을 관리해서 가마터를 정리하고, 흙도 구해 와서 자기를 만들고, 사람을 모아서 이걸 다시 올려 보내고 등등.
모든 걸 향리가 주도해서 진행해야 했는데, 지금은 그냥 자기기업에 가서 “여기에 공물을 바쳐야 하는 백성들이 소속되어 있지? 공물 내놔.”라고 말만 던져 놓으면, 기업이 알아서 다 처리해줬다.
기업집안은 돈벌이를 찾아 움직였고, 자고로 돈이 되는 건 각 지방의 유명한 특산물인데, 특산물은 또 대부분 공물이니...
몇 해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작금에 이르러 공물의 상당수를 기업이 충당하는 상황이었지.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는 거군.’
분명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삼남지방에서 착호군 활동이 끝나는 날이 오면, 그 때는 향리를 인정해줄 필요조차 없어질 거다.
‘향리가 없어지고 중앙관리로 편입된다...’
연오랑은 미래를 굽어보며, 자신이 계획했던 미래를 겹쳐봤다.
이 모든 건 예전부터 계획된 일로, 점진적으로 신분제의 경계를 흐릿하게 해서, 궁극적으로는 양반을 날려버리는 게 그의 목표 아니냐.
‘지금까진 잘 진행되고 있단 말이지.’
기업이 등장하면서 신량역천인은 싹 사라져서, 이젠 천인취급이 아니라 거꾸로 돈을 벌어다주는 능력 있는 백성 취급을 받고 있다.
훗날 중인계층을 이룰 역리 또한 조정관리로 흡수됐다.
고령뉴타운을 본떠서 역참과 수참이 정비되고 물동량이 증가하면서, 흡사 미래의 물류터미널, 혹은 도로휴게소와 같은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그렇게 덩치를 불려나가자, 조정에선 역참을 병조에서 분리하여 이것만 관리할 새로운 부서를 만들려고 준비 중이었지.
‘중인계층을 이룰 역관도 다 흡수됐고.’
역관은 단순히 통역관이 아니라 사행무역을 통해 무역상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지금 역사에선 아예 시작조차 못하고 그냥 무역상인이 등장한 상황.
반대로 이들은 교육당을 통해 완전히 조정관리로서 입지를 굳혀나가고 있다.
‘훗날 중인계층의 대다수를 차지할 서얼도 정리됐지.’
서얼금고령이 폐지되면서, 서얼은 나라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 개별 집안에서 알아서 해결해야 될 문제로 격하됐다.
처첩간의 집안싸움이 어떻게 벌어지든, 그걸 조정에서 뭐 하러 신경 쓰겠나.
오히려 세종과 태종은 거대지주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는, 뼈대 있는 집안들이 분열하는 걸 방조하면서 이걸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다.
강상의 도리를 들먹이는 골수 유학자들은 힘을 잃고 다 쓰러졌으니, 이게 다시 조정의 화두로 떠오르는 일은 없겠지.
‘전문화가 이뤄지고 잡과가 득세하고 있으니, 다른 직업군도 중인으로 변모할 가능성은 줄어들었고...’
의술을 담당하는 의관, 회계를 담당하는 계사計士, 군무를 담당하는 군교軍校 등등의 기술관들 또한, 어중간한 잡직관원에서 그냥 9품계의 일반관직으로 옮긴 상황.
‘노비도 전에 비하면 반수 가까이 줄어들었고...’
사노비든 공노비든 할 것 없이, 먹고살 준비만 되어 있다면 여유가 되는대로 계속 풀어주고 있는 상태 아닌가.
노비의 수 또한 꾸준히 줄고 있었다.
‘이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던 향리와 토관마저 정리하면, 양반도 흔들어 버릴 수 있겠지.’
관리가 늘어도 너무 늘어나는 바람에, 양반관료라는 위치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내려앉고 있는 상황.
여기에 지방관리마저도 죄다 조정관리로 흡수되기 시작하면, 지방의 양반사대부와 지방향리 혹은 지방토호 간에는 서로의 다른점을 찾지 못하고 섞여버리게 될 거다.
‘큰 문제없이 계속 이대로 가자고.’
“...?”
“...”
연오랑이 말없이 혼자만의 사색에 빠져,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게 꽤 기괴하게 보인 탓일까?
모두는 “쟨 또 뭔 생각을 하면서 저러고 있냐?”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 잠깐 딴 생각을 했군. 어디까지 했지?”
“지방행정조직 통합을 이야기 했습니다.”
“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니까 넘어가고... 향교의 확대 또한 조정에서 승인이 났나?”
연오랑이 화제를 바꿔 다른 걸 묻자.
“예.”
“그렇습니다.”
이 사안 또한 보통이 아닌 걸, 모두가 알고 있는 탓일까?
지금껏 6조체제의 개편을 논의 했던 참판들이지만, 잘 아는 만큼 무서운 터라 얼굴이 잔뜩 경직됐다.
“무武사부에 대한 사안은?”
“논의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만... 어찌될지는 저희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음...”
예조참판 정초는 괜히 부끄러워서 고개를 조아렸고, 연오랑은 이들의 고충을 아는 터라 별 말 안하고 쓴웃음만 머금었다.
의주와 호주, 그리고 북방에서 교육당이 밑도 끝도 없이 덩치를 불려가자, 다들 어쩔 수 없는 걸면서도 슬그머니 의문이 피어올랐다.
“이거 생각해 보면 말이지. 말도 안 통하는 귀화인들을 애들처럼 다루면서 가르치는 거나, 지방향교에서 애들 가르치는 거나 뭐가 다른 거냐?”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나아가 재원이 부족한 지방향교의 교육보다, 오히려 연오랑이 개입한 교육당의 방식이 훨씬 체계적, 전문적으로 다듬어지고 있는 상태.
귀화인에게 단순히 조선 문화와 유학적 기초지식을 넘어서, 실생활에 필요한 온갖 전문지식을 가르치고 있으니, “이거 주객이 전도된 거 아닌가? 역차별 아니야?”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이러한 의문은 곧 “향교와 학당을 교육당에게 흡수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논의로 이어졌다.
예조의 관할에서 벗어나서, 아예 교육당을 주축으로 한 새로운 부서의 설립과도 이어지는 내용이었지.
하지만 역시나 발목을 잡는 건 돈.
“재원이 되나 보군?”
“향교를 당장 엄청나게 늘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교생 또한 무한대로 늘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당장은 임시관리의 예를 준용하여 교육당 인원을 빼서 충당하고, 삼남의 양전사업에 맞춰 차차 정식관리로 교체될 예정입니다.”
“흐음.”
‘뭘 해도 돈돈. 진짜로 그냥 은,금이라도 캐서 내다 팔아야 하나.’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애써 고개를 내저으며 지워냈다.
같은 꼼수를 조정대신들이 생각 못했을 리가 있나.
은,금으로 유지하는 건 말 그대로 임시변통에 불과.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생산력이, 무섭도록 늘어나는 관리를 전부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걸 위해선 결국 개간상황과 소출에 맞춰, 야금야금 늘려나가는 수밖에 없지.
“임시관리라...”
‘이거 나중에 없어질 텐데, 계속 이렇게 꼼수를 써도 되나 모르겠네.’
조정대신들이 부린 다른 꼼수를 생각하며, 연오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시관리라는 말은 마구 혼용되며 사용됐는데, 초창기에는 조정소속 임시관리와 착호군 소속 임시관리로 나뉘었다.
과전이 있던 시절에. 과전 대신 직접 녹봉을 받는 관리를 조정소속 임시관리라 불렀는데, 이젠 그런 꼬리표도 사라졌지.
착호군 소속 임시관리는 착호군 행정관리와 비슷하면서도 살짝 달랐다.
착호군과 임시관리 모두. 군역 면제를 조건으로 무보수로 일을 하는 거다.
다른 점은 착호군은 사냥도 하고, 이것저것 만들어 팔면서 나름의 소득을 얻을 수 있지만, 임시관리는 말 그대로 붓질만 하는 데 무슨 돈을 벌겠냐.
정식관리도 비리를 저지르면 목이 날아가는데, 임시관리가 그런 짓을 했다가는 멀쩡한 집안을 말아먹는 꼴이지.
대신 칼질을 하지 않으니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지 않나.
이래서 임시관리에 지원하는 이들이 꽤 있었고, 녹봉 문제로 노심초사하는 조정에선 마다하지 않고 맘껏 부려먹었다.
이렇게 임시관리로 있다가, 실력을 인정받아 정식관리로 임명되는 이들도 적지 않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