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챕터29. 고민하다 (6)
“교생으로 가는 걸 예전엔 마다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아닌가 보군?”
“관리가 워낙 많이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별시를 여러번 치르면서, 문과와 잡과의 구분도 흐릿해져서...”
이조참판 원숙의 대답에 다들 “나도 이제 모르겠다.”라고 말하듯,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괴상한 표정을 머금었다.
운석핵꿀밤이 떨어지기 전. 지독하게 어려운 문과를 뚫고 관리가 된 이들인 만큼, 요즘 충원되는 신입관리들을 보면 “이게 맞게 가고 있는 건가?”라는 의문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으니까.
문과 과거시험은 바뀐 지 오래.
시와 글쓰기는 여전히 교양의 영역으로 남았지만 책문이 중심이 된 이상, 예전처럼 유학적 논리에 의거해 주장해봤자 씨알도 안 먹힌다.
무섭도록 변화해가는 지금 시대에 중요한 건. 오히려 문과출신이 무시했던 잡학을 비롯해,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생활밀접형 신학문들.
이런 신관료의 최일선에 서 있던 이들은 배봉마을과 경쟁하며 전문화된 집현전 학자들이고, 집현전이 확장되고 간섭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기존 관리와의 충돌도 빈번해졌다.
유학적 논리로 뭔가 일을 진행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모르면 그냥 좀 빠지든가, 아니면 시키는 대로 하면 안 될까?”라는 핀잔만 듣기 일 수였지.
기존 관리들은 아니꼬워서라도, 각자의 직무분야에서 전문성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이 판국에, 예전이라면 관직에 오르지도 못했을 녀석들이 전문분야만 익히고서 관리로 임용되었고, 이젠 그 수가 기존 문과출신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예전처럼 모든 부서를 경험하고, 완숙한 만능형 관리가 되는 건 앞으로 불가능해진 상황.
결국. 전문화로 인해 각 부서별 간의 교류근무가 어려워짐에 따라, 교육당 소속 관리는 교육당 안에서 경쟁하고 승차하게 될 게 분명.
이젠, 교생직이 승진이 불가능한 한직이 아니라, 반드시 거쳐 가야할 발판이 된 거지.
“상황이 그러한데도 무사부에 대해서는 말이 많단 말이지. 흐음...”
“...”
연오랑이 심통을 부리듯 중얼거리자, 다들 자라목이 되어 눈길을 피했다.
이건 또 다른 문제.
어쩌면 조선의 근본을 흔들 수 있는 정말 중차대한 문제였으니까.
조정에서 향교에 관한 논의가 한창 벌어질 때.
연주에서 개척에 열중하던 연오랑이 발칙한 의견을 주장했다.
“앞으로 교육당의 교육을 확장시켜, 향교에서 기초유학, 산학, 율학, 의학, 심지어 농업학도 가르치게 될 텐데... 무기술도 가르치는 건 어떻습니까? 북방에선 힘들더라도 조선내지에서라도 말입니다.” 라고 말이다.
당연히 이 의견을 가장 먼저 들은 태종은 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사병을 해체했을 뿐만 아니라, 혹시 모를 지방세력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 무기술을 익힌 무인을 경원시 하는 풍토를 조장했다.
난세였던 여말선초시절에 활동하던 칼잡이들은 그렇게 시류에 휩쓸려 사라졌고, 지금와선 나름의 효과를 거뒀다고 볼 수 있었다.
대마도 정벌 당시에, 연오랑은 제대로 된 칼잡이를 구하느라 개고생을 했으니까.
하지만 연오랑은 고려의 전례를 부활시키자고 말하고 있으니... 태종 입장에서 보면 사노비의 재무장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꼴 아니냐.
쉽게 용납할 수가 없는 거지.
‘하지만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못 담구는 꼴 아니냐.’
반대로 연오랑은 이런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반란을 획책하거나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놈들은, 나라에서 무기술을 가르치든 말든 알아서 세력을 일구고 사병을 키우기 마련.
몰래 무기술을 숙련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싸우면 전자가 우위를 점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전부 다 가르쳐서, 전체적인 수준을 높이는 게 오히려 더 낫지.
‘딴 마음을 품은 놈들이 하나를 키울 때, 우린 열을 키울 수 있단 말이지.’
몰래 숨어서 딴 짓하는 놈들이 있든 말든, 조정과 왕실에 충성하는 이들이 휠씬 많은 건 당연한 말.
수준이 비슷하면 머릿수로 승패가 결정 나는 법이니, 무기술과 무술을 전파하는 건 오히려 잠재적 아군을 몇 배로 늘리는 방안인 거지.
“이제 착호군 1기의 전역시기가 오고 있다.”
“...!”
“예. 그렇습니다.”
착호군 1기는 중국원정에 대부분 참가했고, 그들을 억지로 끌고 가기 위해 복무기간 단축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 시절이 어느덧 끝이 다가왔고, 올해 초겨울이면 드디어 착호군 1기가 해체된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정예들을 그냥 흩어지게 해서 녹여버릴 거냐? 아니면 몇몇 신료들의 논리처럼 사병으로 변모할 우려가 있으니, 전역병들은 팔이라도 한 짝씩 잘라서 내보내야 되냐?”
“허헙.”
“크음...”
말을 해도 저렇게 우악스럽게 할 필요가 있을까. 모두는 기겁해서 고개를 내저었다.
착호군 1기야말로 지주 중에 지주, 지방의 터줏대감 집안의 자식들인데, 이들을 잘못 건드리면 난리가 난다.
그런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소일거리로 집안사람들에게 무기술을 전파하는 걸 막을 수 있을까.
무슨 이유와 무슨 논리로? 안 그래도 맨손운동, 스트레칭 등의 연오랑 체조가, 양생법이라는 이름을 달고 애들조차 하고 있는 데... 그 연장선이라고 말하면 뭐라고 답할 수 있겠나.
“안 그러냐? 향교에 무사부가 있든 말든, 문제가 생기려면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단 말이지. 오히려 무사부가 있는 게, 억제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냐?”
“...”
“교생직도 어쨌든 관직이며 관리다. 조정의 통제 하에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
“음...”
“흐음.”
연오랑의 말이 딱히 틀린 게 없는 터라, 다들 미간을 찌푸리며 골머리를 싸맸다.
사실 깊게 생각하면 답도 없는 문제 아니냐. 이걸 무서워 할 거면, 애초에 영진군이나 기선군조차도 훈련시키기 힘들다.
“실체도 없는 두려움에 휩쓸려서, 정작 현실을 외면하고 있단 말이지.”
‘사병이니 반란이니...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야? 조선이 이렇게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데 그게 씨알이나 먹히겠어?’
그는 답답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이들은 아직 고려 때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 거부감이 먼저 들지 몰라도, 지금 조선은 고려와 비교할 수 없지 않나.
반란이니 사병이니 하는 건, 다 먹고 살기 힘들 때나 발생하는 거다.
지금처럼 태평성대를 넘어서 급격하게 생활수준이 상승하는 시대에,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떼돈을 벌 수 있는 파도를 거슬러 잠수해 들어가겠냐.
옛 기억, 옛 기조, 옛 사상에 파묻혀 있던 이들은, 이미 운석핵꿀밤 이후로 꾸준히 줄어들었고, 작금에 이르러선 알아서 사멸했는데... 너무 중대한 문제를 앞두고 시야가 좁아진 모습이다.
‘쓸데없는 걱정들을 하고 있단 말이지. 오히려 걱정할 건 재원을 확보하는 일인데 말이야.’
“...”
“...”
연오랑은 쓴웃음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침통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서 일까? 모두는 같은 생각을 하며 침묵을 지켰다.
참판들 뿐만 아니라 사단장들마저도 마찬가지.
무관직으로 옮긴 이들마저도, 다들 ‘이걸 정말 해도 될까?’라는 의문이 시원하게 가시지 않았다.
사실 무사부 논쟁의 근본적인 핵심은 따로 있었으니까.
‘문치주의... 뭐 좋긴 하지만, 이거에만 몰두하면 곤란하지.’
연오랑은 침묵에 잠겨 있는 모두의 머릿속을 읽어내듯,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태종의 의견은 연오랑의 반론으로 잠재울 수 있지만, 조선의 기본 중에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문치주의가 발목. 아니 허리를 잡았다.
시절이 어쩔 수 없어서, 조정신료들은 근본성리학을 버리고 자본유학을 받아들였다.
허나 이걸 통해 얻고자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서 백성의 삶을 개선하고 평안하게 하려는 거지, 군력을 증강시키는 게 아니다.
물론 세수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군비도 늘어나겠지만, 그건 부수적인 효과.
이런 논리 하에. 조정이 나서서 무를 숭상하고 키우는 건, 조선건국의 기본 토대 자체가 부정되는 상황 아니냐.
더군다나 근본성리학을 버린 유학자들조차도, 고려가 망한 이유 중에서 무신집권기를 꼽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무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무가 문을 뛰어넘는 건. 단순한 밥그릇 싸움을 넘어서, 나라를 망조에 이르게 하는 길이라고 본 거지.
그리고... 이렇게 무를 문보다 높이 쳐주는 인식의 시발점을, 무사부의 창설이라고 보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
‘사실 의도한 게 그거긴 했는데 말이지. 용케도 알아차렸단 말이야.’
연오랑은 속내를 숨기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가 바라던 조선의 체질개선의 핵심 중에 하나가, 바로 숭무정신을 이식하는 거였으니까.
지금 조선은 원래 역사에서 한참 벗어난 길로 가고 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원래 역사처럼 몇백년간은 평화의 시대에 접어들지도 모르는 일.
자연스럽게 군대는 해이해질 거고, 사람들의 인식 또한 “전쟁도 없는데, 뭐 하러 군비를 이렇게 많이 쓰냐?”라고 변하면서 엉망이 되어갈 거다.
이걸 방지하기 위해선, 조선인의 의식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 “자고로 싸움질은 조선인이 최고!”라는 공식이 생겨날 정도로, 조선의 dna자체를 개조해서 피맛을 아는 야생짐승의 투지를 일깨워야 한다.
양반사대부의 기본소양이 활질인 것처럼, 칼질과 창질 또한 자연스러운 기본소양으로 만들고.
무술과 무기술을 배우는 걸, 책을 읽는 것처럼 일상생활화 시켜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자고로 어렸을 때부터, 그것도 국가가 주도해서 바뀌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니... 향교에 무사부를 쑤셔 넣으려고 애를 쓰는 거지.
연오랑이 온갖 무기술 수련법이 정립된 무예도감을 괜히 만들었겠는가. 이걸 추진하기 위해서 밑그림을 그려 놓은 거다.
‘이래서 화승총에도 관심을 안 가진 건데 말이야.’
그는 누구도 모를 속내를 다시금 되삼켰다.
그가 화승총과 같은 보병용화기에 관심을 갖지 않은 건, 잘 모르는 것도 있지만 애초에 정반대의 기조를 취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멀리서 화력전만 하는 걸 좋아하는 조선인데, 연오랑은 반대로 피를 마시는 백병전을 겁내지 않고 또 잘하기를 바라고 있다.
화승총과 같이 압도적인 화력을 뿜어낼 수 있는 무기는, 그의 계획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꼴.
‘나중에 서방에서 화승총이 들여오면, 그때 가서 접목하면 되는 일 아니냐. 지금은 조선이 칼질에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 지는 게 우선이야.’
아무도 모르는 연오랑만의 계획은 나름의 효과를 거두지 않았나.
조정신료들이 우려할 정도로 착호군은 백병전의 전문가가 되었고, 이들이 이제 조선팔도 곳곳에 자리잡고 전과 다른 분위기를 만들게 될 거다.
‘지금은 향교에서 시작하겠지만, 나중에는 민간사설무관의 설립을 허가해 줘야겠지. 그럼 제법 볼만하겠어.’
무기술과 무술을 배우는 사설무관이 과연 돈벌이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어찌됐건 허가를 해주는 것 자체가 이미 개혁 아니냐.
‘사병 같은 소리는 찍소리도 못하게 밟아 놔야지.’
이렇게 아예 대놓고 사설무관이 성행하게 되면, 사병 같은 소리는 나올 수가 없다.
오히려 개인교습선생인 독선생과 같은 형태로 무사부가 끼어드는 게, 오히려 사병화의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강습료를 받고, 아무나 가르치는 게 더 안전한 편이지.
그리고 이런 문치주의에서 벗어나려는 계획은 이것 말고 하나 더 있었다.
오히려 이쪽이 더욱 거창하고 직접적이다.
“전...”
“전조 때에 집권무신들의 행태를 말하는 거냐?”
“...예.”
정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하자, 연오랑이 먼저 선수를 쳤다.
고려의 예를 비춰서 반문하는 건 당연한 말. 조정에서도 똑같은 논의를 계속 하고 있었으니까.
“다들 군제개편 아니. 이건 개혁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겠군. 군제개혁이 진행되고 있는 걸 알고 있지?”
“예...”
“음.”
모두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급관리들은 정확한 개요는 모르고, “뭔가 바뀌고 있구나.”라고 그저 막연히 느끼고 있는 상황.
조정에선 “앞으로 군제를 고치겠다!”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군제개혁은 꾸준히 야금야금 진행되고 있었다.
그 실험체이자 첨병에 위치한 게 착호군이니까.
“앞으로 군부는 육조와 완전히 분리될 거다. 다들 알고 있지?”
“옙!”
“...”
연오랑은 사단장들을 쓱 훑어봤고, 다들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죄다 무관직을 넘어서, 아예 착호군으로 적을 옮긴 이유가 뭔가. 병조의 관리들이 무관직으로 전환된 것.
그 외에 군무와 관련된 부서에 속한 문과출신이, 무과로 전환하던가 아니면 다른 부서로 옮기라는 선택을 강요받은 것.
중앙군 10위의 갑사들과, 지방의 영진군, 기선군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절제사 등이 착호군으로 파견 나와 교육을 받은 것.
개별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이었지만, 전부 하나의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무관만으로 이뤄진 독립부서.
지금껏 없던 진짜 군부의 탄생이지.
“앞으로 문무관의 직위혼용은 없을 거다. 문관이 군부의 일에 끼어들 일도, 무관이 조정의 일에 끼어드는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 일부 신료들의 우려는 무시해도 된다.”
“...!”
“으음...”
그 일부 신료가 여기 있었는지, 몇몇은 가슴이 찔려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들이 우려하는 건, 간단히 말해서 무신들이 고려무신집권기처럼 전횡을 펼치지 않을까 하는 점.
그리고 문민통제가 되지 않는 무신들만 모아 놓으면, 이들이 딴생각을 하고서 쿠데타를 벌이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 또한 말이 쉽지. 그게 되겠냐. 무관들이 반기면 반겼지, 문제를 일으키겠어?’
연오랑은 또 다시 고개를 내저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