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90화 (190/538)

190. 챕터30. 발전하다 (1)

이들이 지금껏 해온 일은 집을 짓고, 또 짓고, 계속 짓는 일.

오죽했으면, 움막 비슷한 집에서 살던 여진인들이 북방식 신가옥에 익숙해졌을까.

통일 규격화된 집을 분업해서 계속 짓는 탓에, 이런 일을 해본 적 없는 여진인들조차도 완벽한 공사장 인부로 변모했다.

“다들 모여 있었나? 읏차. 여기 오늘 잡은 걸세.”

“오...”

착호기병은 여진인 사냥꾼과 함께 가져온 토끼와 꿩을 잔뜩 풀어 던졌다.

“날도 추운데 용케도 꿩을 잡았군?”

“농장에 넘기려고 했는데, 죽어버렸지 뭔가.”

“먹으려고 일부러 쏜 건 아니고?”

한 사내가 꿩의 가슴팍에 푹 박힌 화살을 끄집어내어 흔들어대자, 사냥을 해온 사내는 그저 히죽 웃으며 대답을 삼갔다.

사냥감을 손질하는 건, 이제 밥 먹듯이 익숙해지지 않았나.

모두는 거침없이 토끼 가죽을 벗겨내고, 꿩의 깃털을 죄다 뽑아서 굽기 시작했다.

“미분 있나?”

“그건 다 먹어서 없고, 소금은 있지.”

“자자. 이거면 잡냄새를 죽일 수 있을 걸세.”

한 사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풀을 잔뜩 꺼내서 생고기에 문지르기 시작했고, 돌판 위에 놓고 구우면서 소금을 뿌려댔다.

이렇게 화롯불에 모여 앉아 고기를 구워먹는 풍습은 조선에 잘 없었지만, 연오랑을 따라다니면서 착호군 모두 익숙해지지 않았나.

그들뿐만 아니라, 옆자리에 자리한 여진인 사냥꾼들조차도 힐끔힐끔 살피면서 따라 굽고 있었다.

“저치들은 어때? 말은 잘 듣고?”

“어쩌고 자시고 할 게 있나. 자기들이 봐도 지금 사정이 예전보다 훨씬 나은 걸 느끼고 있지 않나. 조선말을 빨리 익히면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고 하니, 눈에 불을 켜고 배우더군.”

“하긴.”

사냥꾼만 그러겠는가.

공사장에서 일하는 여진인들 마저도, 흡사 과거응시생마냥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열정적인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 법이지.”

“맞네. 여진이나 한족이나 몽골이나. 그리고 우리나... 다 똑같은 거지.”

누군가 그리 말하자, 다들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대는, 평생 동안 고향 땅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이들이 대다수 아니냐.

허나 착호군 1기는 연오랑을 따라 천하를 주유했고, 어지간한 조정관리보다 견문이 넓어지고 세상 보는 눈이 깊어졌다.

오랑캐라 무시했던 이들도, 중화인이라 특별할 거라 생각했던 이들도, 사실은 죄다 거기서 거기라는 걸 금세 깨달았지.

“그나저나 이제 자네들은 어찌할 건가?”

“글쎄...”

잘 구워진 토끼 고기를 입에 물기 무섭게 누군가 묻자, 다들 와작와작 고기를 뜯어먹을 뿐 말문이 줄어들었다.

착호군 1기의 전역일은 이미 지나갔지만, 만주신도시를 버려두고 당장 고향으로 보낼 수 없는 법.

이들은 갑사에 준하는 녹봉을 받으면서, 올해가 지날 때까지 북방에 머물 예정이었다.

더불어 앞으로의 미래도 함께 고민하면서.

“나는 이곳에 남아서 축산기업을 해볼 생각이네.”

“오...?”

누군가 먼저 말문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꽂혔다.

“돈은 있고?”

“집안 재산을 미리 물려받아서 분가하면 되고, 지금껏 잡은 표범피가 있지 않나. 무두질도 다 끝내놨으니 꽤나 값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음...”

사정은 다들 엇비슷하지 않나.

착호군 1기 중에선, 이런 식으로 공돈을 모아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뭘 키우려고? 말?”

“북방엔 소가 적으니, 소를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흐흐. 아닐세. 사슴농장을 해볼까 하네. 착호군이 잡은 사슴이 꽤 되니까, 그걸 불하받을 생각일세.”

“흐음. 사슴농장이라.”

“음...”

착호군은 사냥을 하면서 산 하나를 다 털어버렸고, 그 과정에서 얻은 야생동물은 따로 모아 관리를 해왔었다.

맹수들은 다 죽여서 가죽만 남겼고, 사슴, 토끼, 멧돼지 같은 녀석들은 가급적이면 산 채로 모아뒀다가 축산기업을 하려는 이들에게 팔아서 재원을 확충했지.

이건 만주에 와서도 변하지 않았고, 사내는 그 중에서 사슴을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갑자기 사슴이라. 자네는 수의학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잖아?”

“군의와 수의가 널려 있는데, 배우는 게 뭐가 어렵겠나. 그리고 북방사슴은 꽤나 돈이 될 거란 말이지. 전에 평주에 있을 때 보니까, 그곳에선 사슴농장이 아주 성행하더군.”

“어째서?”

“녹용 때문일세. 잘은 모르지만, 추운 곳에서 사는 사슴의 뿔이 더 크고 튼튼하고 약효가 좋다고 하더군. 녹용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중국에 내다팔면 떼돈을 벌 수 있겠지.”

“음...”

“그런가.”

모두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녹용은 왕실에서만 취급할 정도로 귀하고 희귀한 약재였다.

왕이 하사품으로만 내려주는 물건으로, 왕비들이 자식들 먹이겠다고 하도 야금야금 훔쳐가서 “어릴 때 녹용을 먹으면 백치가 된다.”라는 헛소문을 왕실에서 뿌릴 정도였지.

허나 착호군 활동으로 사슴농장이 늘어나면서, 다 옛 이야기가 됐다.

녹용의 생산량이 왕실의 수요를 훌쩍 뛰어넘자, 왕실에서 굳이 제재할 필요가 없지 않나.

이제는 민간에서는 물론, 중국상인들도 환장하는 물건이 됐지.

물꼬가 트여서 일까? 곧장 다른 이가 말을 받았다.

“사슴농장도 좋지만, 나는 아무래도 목마장이 좋을 것 같네.”

“역시... 초지를 이용하려면 말이 최고일까?”

“그렇지 않겠나? 얼마 전에 보니 사복시 관원이 지리감 관원들과 함께 돌아다니더군. 국영목장터를 찾아보는 것 같은데, 같이 끼어서 가면 편하지 않겠나?”

“사복시 관원이 왔었나? 용케 알아봤군?”

“못 알아 볼 게 뭔가. 옷차림이 달라서 한눈에 알아봤네. 물어보니, 한성에서 왔다고 말해주더군.”

“으음.”

“하긴...”

모두는 금세 이해하고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연오랑은 별 괴상한 옷들을 자주 입고 다녔고, 착호군은 누구보다도 익숙해져서 다들 따라 입기 시작했다.

신군복은 예전의 조선관복과 거리가 있었거니와, 누가 뭐래도 편한 건 사실이니까.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특징은, 단추를 다양하게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점.

지금까지 조선의복은 대부분 끈으로 조여서 묶는 형태였는데, 이게 죄다 단추로 바뀌기 시작했으니... 가히 의복혁명이라 할 수 있지.

오죽했으면 의주에서 단추만 만드는 공작기업이 생겼을까.

이러한 복식변화는 자연스레 착호군에 스며들었고, 곧 만주신도시 여진인의 복장에도 스며들었다.

그러니 아직도 옛 관복을 입고 있는 한성관리를 못 알아 볼 리가 없었지.

“음... 하긴 내지에서 사복시가 많이 밀리긴 했지.”

“그렇네.”

사복시의 처우가 박한 것은 사실이었고, 기업의 공인이 있던 초창기부터 직격타를 맞지 않았나.

숙련된 목자들은 축산기업에게 스카우트되어 천인 신분을 벗어던졌고, 조정에서 사태를 인식했을 때는 이미 꽤나 많은 이들이 사복시를 떠난 상황.

관노비 신분이었던 잡직관원의 대대적인 해방이 있을 때.

사복시 관노비들도 같이 해방됐고, 그제야 사복시는 제자리를 찾고 민간목마장과 경쟁을 시작했다.

다만 초지와 농지는 공존할 수 없는 바, 양전사업을 통해서 그전에는 초지로 쓰였던 땅도 죄다 농지로 변하지 않았나.

자연스럽게 목장은 농지로 쓰기 힘든 산기슭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고, 조정에선 내지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피해 북방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나쁘지 않은 선택일세. 이 허허벌판에서 당장 뽑아낼 수 있는 건 아무래도 목마장이 최선일 테니까.”

“그렇지? 흐흐.”

“자네들은 어떤가?”

“내 집안에선 제재와 약재기업에 관심을 갖는 것 같은데, 어쩌면 이주를 할지도 모르겠네.”

“오...”

“통 크게 지르는군?”

“뭐 나쁠 건 없지 않나. 내지에서 피곤하게 이것저것 따지는 것보단,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가업을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지.”

“호오...”

“과연. 과연.”

다들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박수를 쳤다.

조선내지의 각 집안에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가문을 보존하고 번성시킬 방법을 고심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대충 읽혀지잖아? 평범한 지주집안으로 살아남는 건, 최선의 방법이 아니었지.

당연한 말이지만, 그동안 착호군병들은 자신들이 겪은 무용담과 견문일지를 서신으로 적어 고향집에 보냈고, 고향집에서는 고향사정을 적은 서신을 보내 조언을 구했다.

착호군은 누구보다도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조정의 정책방향에 대해서 알지도 모르니까.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북방에 대한 선입견을 벗어던진 집안이 은근히 있었고, 시시각각 조여 오는 양전사업을 피해서 아예 이주를 생각하는 집안도 적지 않았다.

지금은 선산先山의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서 “선조들이 묻힌 고향땅을 죽어도 못 떠난다!”라고 외치는 시절도 아니고,

여말선초시절을 겪으면서 몇 대를 걸쳐 이어 내려온 뼈대 있는 집안이 많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혼란기 시절에 여차저차 땅을 차지하고 눌러 앉아, 양반사대부가 되거나 지방향리가 된 집안이 대다수 아니냐.

이주를 결심하는 것도, 어찌 보면 선조들의 지혜를 따르는 걸지도 모르지.

“나는 군에 남을 생각일세.”

“음...”

“그런가.”

누군가의 말에, 다들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착호군 1기 전역병들은 “군에 남지 않겠나?”라는 제안을 받았고, 꽤 많은 수가 이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놨으니까.

“하긴 자네는 본래 무과를 지망했으니...”

“맞네.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무과가 언제 열릴지 기약할 수가 없군.”

사내는 입에 묻은 토끼기름을 쓱쓱 문지르며, 쓴웃음을 흘렸다.

조정에선 별시라고 하여 수천명씩 관리를 뽑아대고, 잡직관리들도 일반관리로 편입을 시켰는데... 정작 무과는 감감무소식이다.

대부분의 무관은 취재에 합격해 하급갑사로 활동하면서, 무과에 응시해 정식무관이 되는 길을 걸었는데... 이 길이 중간에서 뚝 끊겨버린 것.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게. 갑사들은 본래 중앙군으로 편입되어야 하는데, 죄다 착호군으로 오고 있지 않나.”

“그건 그렇지.”

“맞네.”

이건 이들이 더 잘 아는 사실 아니냐.

예전 착호군 1기는 강제징집된 있는 집 자식이 대다수였지만, 이후 착호군에는 취재를 거쳐 별의별 출신이 다 끼어들었다.

“거기에 북변의 토관과 토병도 착호군으로 온 건 물론이고, 실력이 떨어지는 토병들 중에서는 아예 군호에서 제적된 이들도 있네.”

“흐음.”

지역방위군의 성격을 가진 토관과 토병이 해체되고, 이들이 착호군으로 끌려 들어온 건... 누가 보더라도 수상하지 않나.

지금이야 여진을 다 때려잡았으니 북변의 지역방위군이 필요가 없다지만, 이러한 흐름은 무려 건주여진을 두들겨 패기 전부터 있어왔었다.

“용연군 대감께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조선의 모든 군병을 착호군으로 끌어 모으고 있네.”

“맞아. 최근에 입대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영진군 출신이었다가 관청의 추천으로 시험을 봐서 들어온 이들도 있던데?”

“하급갑사들 중에선 보충군 출신도 적지 않지.”

모두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일 인터라, 망설이지 않고 의견을 토해냈다.

“기선군도 신기선군으로 개편하고 있고 말이야.”

“음...”

이들도 원산에서 있었기에, 신기선군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지켜봤다.

아무리 다르게 보려 해도, 신기선군은 수군 착호군이나 다름없잖아? 이걸 달리 말하면. 착호군 또한 신영진군, 혹은 신중앙군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뜻.

“어쩌면 영진군이 해체되고 착호군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지.”

“자네 말은 모든 조선군병이 취재를 거쳐 착호군으로 들어오고 있으니, 결국 무과가 사라질 거라는 거군?”

“맞네. 게다가 훈련원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훈련원이 뭔가. 조정에서 하급관리를 교육시키는 연수원과 다를 게 없지 않나?”

“음...”

“그건 그러네.”

연수원은 기존에 없던 조직이었지만, 그 효과를 만천하에 증명하며 자신의 가치를 올리지 않았나.

요즘에는 기존 관리들조차도 연수원으로 들어가서, 개별 전문화 교육을 받고 나오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만약 무과가 없어진다면 훈련원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될 거고... 결국엔 모든 군병은 하급갑사에서부터 밟고 올라가서, 훈련원을 거쳐야 고위직으로 올라갈 수 있지 않겠나? 그러니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영영 무관이 될 기회를 놓치게 되겠지.”

“그건 그렇겠군.”

“하긴, 착호보조군 중에서도 관리로 전직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까.”

이들은 다시금 사정이 이해되어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군이나 조정에 남는 게 보편적인 반응이니까.

지난날 조선에서 성공이라 함은, 결국 관리가 되는 게 끝이었다.

신분상승의 길이 열리는 걸 떠나서. 관리가 되는 것 말고는 딱히 돈을 벌 수단도, 집안을 일으킬 방법도 없었던 것.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름난 명사가 되는 것? 그건 제자를 잘 키워서 제자들이 조정요직에 올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야 의미가 있는 거다.

제자들도 없이 혼자 학식만 높아봐야, 방구석 학자와 다를 게 뭔가.

게다가 농본주의를 표방하는 이상, 땅을 늘리고 노비를 늘리는 것 외에는 재산축적의 다른 방법이 없었다.

허나 세종 5년차인 지금. 시대가 완전히 바뀌었다.

관리는 늘어도 너무 늘어나서 관리로서의 특전이 죄다 사라지고 있는 판국이고, 양반사대부가 된다한들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

예전이라면 대접받으며 뒷돈을 챙길 수 있다지만, 지금은 여수구죄법이 무서워서 그런 짓은 꿈도 못 꾼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