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챕터30. 발전하다 (5)
“이거... 공야사에만 보낸 건 아니지?”
“예. 역리가 직접 왔는데, 이곳뿐만 아니라 삼남까지 내려간다고 했습니다.”
“허허.”
‘부창부수라더니...’
공주가 하는 짓과 똑같은 짓을 연오랑도 하고 있다.
‘아니군. 공주님이 대감께 배운 거겠지...’
장영실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연오랑이 연구소를 마구 만들었는데, 똑같이 착호군을 이끄는 태종과 황희는 가만히 있었겠는가. 태종은 원산연구소를, 황희는 나주연구소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뽑힌 이들이 공야사 및 배봉, 용연연구소로 와서 교육을 받고 갔지.
“뭔데 그러십니까?”
“새로운 시계를 만들어 보라고 하시는군.”
“시계요? 음... 하긴.”
착호기병은 의아한 표정을 잠깐 짓다가,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가?”
“전부터 이야기가 나왔던 거라서 말입니다.”
모두는, 그것도 서신을 전해주러 온 장인마저도 귀를 쫑긋 세우고서 착호기병의 입에 집중했다.
“저희가 조금 빡빡하게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보니 시간이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합동훈련을 하기 힘들어서 말입니다. 대감께서 미적거리는 걸 봐주는 성격도 아니시고...”
“...?”
장인들은 설명을 더 해보라는 듯, 물음표 섞인 눈빛을 마구 뿌려댔다.
이 시대엔 시간을 십이지신을 따라 12개로 나뉘었다.
문제는 이 시간대의 간격이 너무 컸다는 점.
예컨대 “오午시에 봅시다.”라고 하면, 11~13시 사이에 보자는 건데... 누구는 11시에 가깝게 생각할 거고, 누구는 13시에 가깝게 생각할 것 아닌가.
이 시대 사람들도 이걸 알아서 11~12시를 오초初, 12~13시를 오정正이라 불렀다.
훗날 오정은 정오라고 부르면서 낯12시를 부르는 말이 됐고, 자정은 밤12시를 뜻하는 말로 변해갔지.
다만... 시대 정황상 극강의 슬로우 라이프를 살 수밖에 없는데, 굳이 시간대를 세분화해서 12시간대를 24시간대로 바뀌어 부를 필요가 있을까.
해가 뜨면 농사일 하러 가고 해가 지면 집에 돌아오면 되는데, 시간이 뭐가 중요하겠냐.
관리들은 그래도 시간개념이 있었지만, 민간에선 전혀 아니었지.
이러한 경향은 군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어디어디로 집결하라!”라고 하면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고, 심지어 며칠씩 늦어지는 것도 다반사.
나아가 정확한 임무목표달성 보다는 자신의 전과를 올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시대 군대에게, 정확한 시간개념을 쑤셔 넣는 건 당연히 힘들었다.
연오랑이 착호군을 이끌면서, “쓸데없이 전과를 확대하지 말고, 시키는 것만 제대로 하고 넘어가라!”라고, 장군들을 쥐 잡듯이 잡은 이유에는 이 시간관념의 문제도 껴 있었지.
“오... 그런 사정이 있었군?”
“예. 그래서 대감께서는 해시계도 만들어보고, 물시계도 만들어보고, 향시계, 모래시계 등등. 이것저것 다 해보셨지 않습니까.”
“으... 그건 잘 알지.”
“크음... 맞습니다.”
착호기병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장인들 모두 치를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문제는 세종과 태종의 귀에게도 들어갔고, 당연히 연구소와 공야사에 명령이 떨어졌다.
두 왕은 군사에 관한 일에는 진심이었으니까.
“...”
“...”
장인들은 그 때의 잠 못 자던 기억이 떠오르는지, 다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착호군에서 써먹겠다고 “시계 빨리 내놔!”라고 계속 외쳐댔으니... 원래 역사에서 만든 발명품보다 작은, 솥뚜껑만한 휴대용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어야 했으니까.
물론 크기가 작아질수록 오차가 커져서, 제대로 못 만들었다고 연오랑에게 욕만 뒤지게 먹었지만... 만들어 낸 게 어디냐.
말은 저렇게 했어도, 착호군에선 알음알음 써먹고 있었다.
원래 역사와 달리 일이 이렇게 빠르게 진행될 수 있는 건, 사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원래 역사에선 세종의 명을 받은 소수의 관원과 장인관노들이 삼삼오오 모여 시계프로젝트를 진행했다면, 지금 역사에선 수백, 천여명이 넘는 전문 장인이 시계프로젝트에 달려들었다.
최고위직인 정승의 일 년 녹봉이 쌀 백석을 조금 넘는데, 포상금은 수백석이 넘는다.
하급관리들 입장에선, 수십년치 녹봉을 한 번에 받을 수 있는 건수 아니냐.
돈의 힘은 막강했고, 다들 눈이 뒤집혀서 달려드는데... 아무리 천재적인 아이디어가 있어도 개발과 개량이라는 건 단순반복 노가다 작업이 필수잖나.
성과가 빨리 안 나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지.
“연구소들이 다 달려들면, 이번에도 만만치 않겠군...”
“이건 추를 이용해서 움직이는 톱니바퀴 시계 아닙니까. 기존 물시계나 해시계하고는 차원이 다를 테니... 긴 싸움이 될 겁니다.”
“포상금도 엄청나고.”
“흐흐. 예.”
서신에는 이번 포상금은 수백석이 아니라 천석 넘게 주겠다고 적혀 있으니, 진짜 다들 눈이 돌아갈 거다.
‘톱니바퀴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장영실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신감을 내비췄지만... 조심스럽게 지워냈다.
‘아니지. 안심해선 안 되지.’
조용히 고개를 내저으며 각오를 다져본다.
강력한 경쟁상대는 역사나 배봉연구소와 용연연구소.
배봉연구소는 온갖 종류의 수차를 만들며, 톱니바퀴를 이용한 공학이라는 신학문을 처음 탄생시키고 실생활에 적용시킨 곳.
용연연구소는 부두와 선소의 기중기, 배에 들어가는 물푸개를 만들면서 배봉연구소의 연구업적을 따라잡는 곳.
그치들은 공야사 못지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낙관하고 있다가는 큰일 난다.
“할 일이 많겠군.”
“예.”
연오랑의 의뢰뿐만 아니라, 공주가 보낸 물건도 개량을 해야 되니... 한동안은 정말 정신이 없을 것 같다.
“고생하시지요.”
일감을 잔뜩 던져준 착호기병은 괜히 자기가 미안해서, 멋쩍게 웃으며 격려할 따름이었다.
*****
매서운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이 다가왔지만, 한성은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조선은 무려 500년 이상 존속한 나라이고, 당연히 초기,중기,후기의 문화가 나눠질 정도로 격차가 크다.
궁궐 또한 그러했는데, 조선이 창건되고 수도를 한성으로 옮긴 게 고작 한세대 전의 일.
궁궐터 또한 미래보다 훨씬 작았으나, 반대로 원래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덩치를 불려가고 있었다.
육조거리부터 시작되는 축선을 따라 광화문, 홍례문, 근정문, 근정전, 편전이 쭉 이어지는데... 이 축선을 중심에 놓고 좌우로 궁궐 근처에 있던 민가를 허물어 버리고, 새로운 궁궐 전각이 우후죽순 세워지기 시작했으니까.
겨울에 웬 공사냐 하겠지만, 오히려 정반대.
할 일이 없어 손가락만 빠는 농부 백성들 입장에선, 차라리 뭐라도 해서 삯이라도 받는 게 훨씬 이득 아니냐.
본래 공역은 돈도 안주고 부려먹는 게 기본인데, 조정에서 최소한의 식량을 보수로 내거니 한성 인근의 백성들이 다 달려올 수밖에.
“대공사는 백성들에게 피해를 줍니다!”라는 말을 했다가는, 오히려 백성들에게 뺨을 맞을 거다.
더불어 이 일에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달려든 건설기업이 부지기수였다.
건설기업이 있기 전에도 집을 짓는 일은 꾸준히 있어왔고, 대목장, 소목장들은 일거리가 들어오면 알음알음 친분이 있는 이들을 모아 팀을 이뤄서 활동했다.
일단 집을 한 채라도 잘 완성시키면, “누구누구가 집을 잘 짓는다던데?”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양반사대부, 지방호족 네트워크를 통해서 추천을 받아 일감을 얻는 거지.
다만 지금껏 장인들은 천민 비스무리한 취급을 받았으니... 양반가나 지방호족들은 집을 받고서도, 이런저런 핑계로 보수를 안 주는 경우도 있던 게 문제일 따름.
허나 건설기업이 등장하면서, 조선의 건축업계에 대격변이 일어났다.
연구소와 착호군을 필두로, 도제식이 아닌 집체교육방식으로 장인들을 찍어내기 시작.
건설기업은 유명한 대목장, 소목장들을 수소문해서 스카우트했고, 이들을 통해 신입사원들을 교육시키며 활용했다.
도제식은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밀려버린 거지.
나아가 건설기업은, 지주에서 벗어난 집안이 명운을 걸고하는 사업 아니냐.
거래하는 이들 또한 같은 양반사대부 혹은 지방호족이었으니, 돈을 떼어먹었다가는 당장 송사가 벌어지기 일 수.
경영과 실무가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예전과 달리 일이 복잡하면서도 매끄럽게 진행되는 거지.
다만 건설기업 또한 일감을 얻으려면, 이름값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말.
그런 이름값을 얻는 가장 쉽고 거창한 방법은 조정의 일감을 따내는 것. 그것도 궁궐을 짓는다? 이보다 더 완벽한 실적이 어디 있을까.
궁궐 전각을 새로 짓는 일에, 한성 인근의 건설기업들이 죄다 달라붙는 건 어찌 보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을 국방세라는 명목으로 돈을 적게 주고 부릴 수 있으니 조정 입장에선 이득.
건설기업은 명성을 얻을 수 있으니 이득.
잡부로 활동하는 백성들은 노임을 받을 수 있으니 이득.
모두가 이득인 상황이니, 궁궐을 확장하는 건 순풍을 맞은 배처럼 시원시원하게 나아가고 있었지.
“으...”
쿵쾅쿵쾅. 지겹도록 들은 망치질 소리와 대패소리가 요란하건만... 하루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신입관리들은 아무렇지 않게 공사판에 파고들었다.
“빨리 지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러게 말일세.”
“그래도 시끄럽긴 하지만, 좁아터진 집현전보다는 낫지 않나.”
“당연하지.”
신입관리들은 피식 웃음을 흘려대며, 뻐근해진 목을 풀었다.
웅장할 정도로 크게 만들어진 집현전 전각이지만, 그 안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몇이냐.
하급관리가 워낙 많아서 상급자와 부딪치는 부담은 없지만, 그냥 사람자체가 많아서 정신이 없다.
차라리 망치소리가 울리는 여기가 더 낫지.
공사장 한편에는 이미 완성된 전각이 있었는데, 이곳 또한 집현전과 비슷한 양식을 하고 있었다.
무려 궁궐전각을 짓는 일이니 예법과 양식이 있기 마련이지만... 지금 역사에선 예법과 전례를 따지고 들면 서로 피곤한 일 아니냐.
그냥 세종이 마음에 들어 하는,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는 신건축 양식으로 지으면 그만.
나무와 석재, 벽돌이 죄다 섞이고, 요즘 들어 유행하기 시작한 삼물회를 이용한 회칠까지 섞여 들어갔으니...
새로 지은 전각은 우중충한 회색이 아니라, 눈이 부실정도로 하얗게 표백된 벽을 하고 있었다.
그 위에는 청기와를 하나둘씩 깔고 있으니, 뭐랄까. 흰색과 청색이 뒤섞여서 꼭 겨울하늘을 보는 느낌을 줬다.
“저거 엄청 비싸겠지?”
“생각보다 별로 안 비싸네.”
“자네가 어찌 아나?”
“자기기업을 하는 친우에게 들었네. 요즘에는 청자 대신에 청기와도 많이 만든다고 하더군.”
“오...”
청년관리는 몰랐던 사실에 감탄하며 탄성을 흘렸다.
원래 역사에서 후대의 청기와는 염초가 들어가서 비쌀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시절에 궁궐 짓는다고 했을 때, 신료들이 거품을 물고 반대한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허나 시대가 수백년 이른 지금 역사에선, 오히려 상황이 반대다.
수없이 많은 자기기업이 활동하고, 고려청자를 만드는 기술은 명맥을 유지한 걸 넘어 오히려 부활하여 성행하고 있다.
지금 깔리는 청기와는 염초를 넣어 만든 청기와가 아니라, 그냥 고려청자를 만드는 방식으로 만든 청기와란 말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자기 양식 또한 청자에서 백자로 변화되는 과정을 겪는데.... 지금은 긴 과도기의 초창기 아니냐.
자기기업은 청자든 백자든 닥치는 대로 만들고 있었고, 자기기업의 활성화로 사치품에 해당하던 자기가 일상품의 영역으로 내려오고 있으니... 그 물량이 엄청난 건 당연한 말.
규모의 경제가 이뤄지면서, 자연스럽게 청기와의 가격 또한 떨어지고 있는 거지.
둘은 새로 지어서 아직도 흙냄새와 나무냄새가 물씬 풍기는 전각으로 향하기 무섭게, 검은두정갑을 입은 이들이 망태기를 메고 떠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착호군인가?”
“서신을 주러 왔나보네.”
“그런가 보군.”
이미 익숙한 모습인 터라, 둘은 낯선 착호군의 모습에도 별반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우편 업무는 본래 병조의 소관이었으나, 착호군이 등장하고 북방에 진출하면서 역참과 연계되어 부서간의 통폐합이 알게 모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예전에야 조정에서 보내는 명령서나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계 말고는 딱히 돌아다니는 서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관리가 워낙 많아지지 않았나.
북방신도시에서 보낸 우편물은 호주와 의주로 모이고, 그곳에서 역참을 통해 한성에 집결.
한성에서 다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 일은 충원된 역리가 담당해야 맞지만 요샌 이 역참 또한 재정비가 이뤄지고 있는 터라, 착호군이 직접 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밥은 잘 먹었나?”
“그냥저냥 배만 채웠네. 자네는?”
“아흠... 나는 이제 먹으러 가야지.”
숙직 아닌 숙직을 서고 있던 사내는 졸린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고, 수북하게 쌓여 있던 서신 중 하나를 내밀었다.
“자네에게 온 걸세.”
“오. 그래?”
신입관리는 반색하며 서신을 챙겨들었다.
그의 동생이 임시관리가 되어 착호군으로 나가 있으니, 북방에서 온 서신이라면 동생이 보냈을 게 뻔한 일.
신입관리는 냉큼 집어 들고 걸음을 옮겼고, 집무실 겸 회의실로 들어가자 먹물냄새와 종이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기가 창고인지 회의실인지 모를 정도로. 온 사방에는 서책이 잔뜩 박혀 있거나 널려 있었으니까.
저쪽 한 귀퉁이에는 의자를 겹쳐 놓고 낮잠을 자는 이들도 있었고, 불이 날까 싶어서 대청 밖에 피워둔 화로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들도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들이 조정관리인지, 잡부인지 모를 정도로 난잡했지만... 어쩌겠나.
다들 과로에 치어서 죽기 직전이니, 쉴 땐 알아서 쉬어야 하는 법이다.
“뭐라고 적혀 있나? 새로운 소식은 있나?”
북방신도시에서 벌어지는 일은 초미의 관심사 아니냐. 관리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별 건 없고... 전에 했던 이야기일세.”
허나 진짜로 사적인 이야기가 별로 없는 듯, 신입관리는 아예 동료에게 알아서 읽어보라고 서신을 넘겨줬다.
쓱 훑어보니... 어째 신나는 북방 소식은 별로 안 적혀 있고, 독촉하는 내용만 잔뜩 적혀 있다.
“음... 훈련원이 만들어진다더니, 그치들도 우리 일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
“안 그러겠나.”
“하긴...”
이미 익히 들어온 독촉인 터라 둘은 쓴웃음만 머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