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95화 (195/538)

195. 챕터30. 발전하다 (6)

훈민정음은 원래 역사보다 빠르게 완성됐고, 완성되는 기간 또한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다.

과업이 시작된 지 고작 2년 만에, 벌써 완성과 배포를 코앞에 두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일찍 결실을 볼 수 있던 까닭은, 사실 별 게 아니다.

세종이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머릿수에는 장사 없으니까.

세종이 말년에 업무시간이 끝나고 짬짬이 만들었던 것과, 거의 백여명에 가까운 어문학 학자들이 달라붙어서 밤낮을 잊어가며 일하는 것을 비교할 수 있나.

이들은 맨땅에 헤딩하는 게 아니라, 연오랑이 넌지시 일러준 한글의 모양과 창제 이론에 대해서 대략적인 걸 알고 있었다.

이미 가이드라인이 정해져 있으니, 그걸 따라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더불어 이 일을 담당하는 학자들 또한, 원래 역사보다 수준이 높았다.

운석핵꿀밤 이후. 중국에서 건너온 모든 서적과 유학 논리에 대해 대대적인 재검토가 이뤄졌고, 유학자들 중에선 어문학을 파고든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 후 세종이 등극하면서 전문화 과정과 신학문이 대두되기 시작하자, 유학논리를 배제하고 본격적으로 어문학만 파고든 이들도 적지 않았지.

관리이자 학자인 이들은 겉으로 내세우지 않더라도 공명심이 있기 마련이고, 자신의 이름을 사서에 남기고 싶어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이치.

별의 별 것이 죄다 신학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튀어나오고 있으니, 자신의 이름을 세긴 어문학서를 집필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

조정에선 그런 전문학자들을 죄다 긁어모아 훈민정음 창제에 투입시켰으니... 천재인 세종의 성과를 백여명의 수재들이 힘을 합쳐 앞지르게 된 거지.

“하급무관들도 난리고... 전에는 호주에서도 서신이 왔지?”

“온 정도겠나? 많아도 너무 많이 왔지.”

“착호군이 내려간 삼남의 임시관리들에게서도 왔고.”

“그렇지.”

둘은 만담을 하듯 요상한 대화를 이어갔다.

착호군이 만들어지고 관리를 엄청나게 뽑으면서, 한 집안에서 형제들이 관리가 되는 경우는 드문 게 아니었다.

그들은 건너건너 아는 사람을 통해, 이들에게 서신을 보내왔는데...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대체 그 훈민정음은 언제 만들어지냐!?”라는 것.

그만큼 훈민정음 창제는 좋든 나쁘든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부정적인 의견보다 긍정적인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 원래 역사와 달라진 부분이지.

“훈련원이라... 잘 될까?”

“안 될게 뭐가 있겠나. 다만 고생을 좀 하겠지.”

“흐음.”

둘은 북방에서 벌어지고 있을 소란스러움을 예상해봤다.

조선 무관은 알아서 무기술과 병법을 익혀서, 시험에 통과하여 관리가 되는 방식을 취했다.

이건 조선만 그러는 게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나라가 대동소이했으니 크게 이상할 건 아니지.

무관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흡사 도제방식마냥 하급지휘관은 상급지휘관을 어깨너머로 배우면서 경험을 쌓고, 자기가 알아서 병법을 공부해 실력을 높이는 게 보편적이었다.

추가로 승차와 승진, 보직배정의 문제는 조정관리들의 추천과 천거로 이뤄졌으니, 문무관이 정치적으로 엮일 수밖에 없었지.

연오랑이 군부창건을 준비하면서 훈련원을 창설한 건, 진짜 야전지휘관을 만들려는 의도도 있지만 조정과 정치적으로 엮이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무관들의 승진과 배속은 조정과 관계없이 군부에서 알아서 하게 될 거고, 그 기준을 인맥이 아닌 시험성적과 실력으로 놓으려는 거지.

조정신료들도 이러한 의도를 알아차렸지만, 딱히 막을 명분이 없었다.

무과가 없어졌으니 무과를 대체할 제도는 필요한데... 하급 신입관리를 교육시키는 연수원이 생긴 마당에, 하급 무관을 교육시키는 훈련원이 생기는 걸 무슨 명분으로 막겠냐.

문제라면 훈련원을 조정의 어느 부서와 대등하게 놓을 것인지, 그 위치를 어디에 놓을 건지였는데... 이건 정치적인 문제이니 어떻게든 해결이 날 거다.

“훈련원도 훈련원이지만, 안 그래도 무관들 사이에서 보고서를 쓰는 일로 말이 많지 않았나. 그 연장선이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특히나 지금처럼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갑사를 많이 뽑았다면...”

둘은 훈련원 문제를 더욱 깊게 파고 들어갔다.

연오랑의 전투보고서는 나름 혁명이자 혁신 아니냐.

가로쓰기와 표와 도형을 이용한 보고서 형태는 둘째 치고, 지금껏 무관들은 전투보고서를 복잡하고 상세하게 작성하지 않았다.

설령 이런저런 수사가 덕지덕지 붙은 장계와 보고서를 올려 보낸다고 해도, 장군급들이나 보내는 거지 하급무관들이 매일같이 올리는 건 아니었지.

더불어 실무 능력과 실력만 보고 닥치는 대로 갑사를 뽑다보니, 한자를 새롭게 배워야 하는 이들도 생기기 마련.

이건 개인의 문제가 분명하지만... 그들에게서 보고서를 받아서 다시 위로 올려 보내야 할 중간관리자급 무관들이 죽어나갔다.

자기 일이 편하기 위해서라도, 부하들에게 글공부까지 시켜줘야 할 판국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진짜 교육기관인 훈련원이 생기고, 이젠 보고서를 넘어서 병법서와 군사학, 지휘술을 가르쳐야 되니... 어느 세월에 이걸 다 한단 말인가.

무관들 모두가 편하기 위해서라도, 조선말과 뜻이 통하는 조선글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다.

“교육당도 마찬가지겠지.”

“그치들이야 처음부터 꾸준히 주장해 왔으니까.”

둘은 훈련원을 넘어 가장 많이 연락이 온 교육당을 떠올렸다.

정인지가 훈민정음의 필요성을 논할 때, 가장 처음에 내세웠던 이유가 바로 귀화인 교육 아니냐.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이들을 괴롭혔고, 작금에 이르러 여진을 완전히 복속시킨 후부터는 더욱 심해졌다.

여진인에게 안 그래도 어려운 한자공부를 시키느니, 차라리 기존에 없던 조선글을 교육시키는 게 훨씬 효과적이고 편할 테니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나?”

“자네 왔나.”

둘이서 심각하게 이야기 하는 게 의아했던 걸까? 점심을 먹고 온 다른 관리가 은근슬쩍 엉덩이를 붙이고 끼어들었다.

“옆으로 좀 가게.”

“자리는 많잖나.”

“많긴, 저거 잘 못 건드렸다가 무슨 욕을 먹으려고.”

사내는 큼지막한 탁자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종이더미를 가리키고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내는 기어코 엉덩이를 밀어붙이고 자리를 차지했다.

“으차. 따뜻하니 좋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별 건 아니고...”

각지에서 올라온 서신 이야기를 풀어 놓기 무섭게, 새로 합류한 사내 역시 맞장구를 치며 입을 열었다.

“자네들도 받았나? 나도 받았네. 나는 고향집에서 보냈더군.”

“자네 고향은 김제 아닌가? 거기서 왜?”

“왜라니, 거기도 난리니까 그렇지.”

“...?”

두둑해진 배를 소화시키려는 셈일까? 의아한 눈빛을 받기 무섭게, 사내는 열심히 입을 놀렸다.

양전사업이 끝난 지역에선 향리들마저도 중앙으로 편입시켜 관리하기 시작.

본래 향리직을 맡고 있던 이들은 죄다 연수원으로 끌려왔고, 이들은 재교육을 받았다.

그나마 본래 하던 일이니 대부분 어렵지 않게 따라왔고, 기준미달인 이들은 죽기 직전까지 굴려서 될 때까지 시켰다.

시원하게 확 잘라버리면 좋겠지만... 안 그래도 관리가 부족한데, 함부로 자를 수 있나. 어떻게든 굴려서 써먹어야지.

이들 외에도, 조정은 미친 듯이 관리를 뽑지 않았나.

대부분은 글을 아는 식자들이었지만,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뽑힌 이들 중에서는 글을 잘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하급 신입관리들이 유학자로서 경전을 읽고 쓰는 것은 할 줄 알아도, 조정과 관아에서만 쓰는 고어古語나 문어文語에는 약했던 것.

조정으로 올려 보내는 보고서에는 양식과 격식이 있었기에, 설령 수령이라 할지라도 운해韻解(한자사전)가 없으면 보고서를 못 쓸 정도 아니냐.

도표를 이용해 간단명료하게 올리는 보고서 양식이 유행해서 그나마 나아진 거지... 예전 같았으면 진짜 줄초상 났을 거다.

또한 하급관리가 10배로 늘어났다고 해서, 중간관리직이나 고위관리직의 숫자가 10배로 늘어난 건 아니다.

안 그래도 보고서의 홍수에 휩쓸려 익사하기 직전인데, 올라온 보고서마저도 개판이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

그 여파가 조정에도 미치고 있어서, “보고서 양식을 쉽게 바꾸던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알려줘라!”라고 아우성쳤다.

결국 그 목소리는 하나로 뭉쳐져서, 이들 훈민정음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관리들에게 쏟아졌지.

“오호. 그런 사정이 있었군.”

“어쩐지... 괜히 노려보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네.”

둘은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웃을 일이 아닐세. 내 친우가 착호군 임시관리로 있지 않나. 그쪽 이야기를 들어보니, 진짜 죽을 맛이라고 하더군.”

“왜?”

“계약서 때문에 말일세.”

“흐음.”

“...?”

둘은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렸고, 사내는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원래 역사에서 세종은 “훈민정음을 통해 백성들이 쉽게 글을 익히면, 법을 알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거나 쉽게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명분을 곁들였다.

지금 역사에선, 이게 너무나도 들어맞게 생겼다.

“기업은 기업내규가 있고, 사실상 기업내규는 거의 법과 같이 적용되고 있지 않나.”

“음...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럴 걸세.”

조정에선 기업내규를 법으로 끌어들여, 그걸 새롭게 제정하고 있는 상법 및 기업법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치들은 조선법 제정을 담당하는 게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작업이 진행 중이지.

“그런데 기업내규에선 계약서를 떡하니 규정해 놨단 말이지.”

“그래서?”

“그래서는 뭔 그래서인가. 계약서를 뭐로 쓰겠나? 그리고 그걸 일반 백성들이 제대로 이해나 하겠나?”

“아...”

“그렇겠군!”

풀어내기 무섭게, 둘은 무슨 말인지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업과 사원의 관계는 소작인이나 장인에게 의뢰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훨씬 복잡하고 다양했다.

예전처럼 구두계약으로 끝내거나, 한 줄짜리 약속으로 끝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

빼곡하게 적힌 계약서 2부를 작성해 수결하면, 하나는 기업이 하나는 사원이 가져갈 텐데... 중요한 건 사원이 계약서의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일반 백성들도 글을 대충은 알지만... 그건 앞뒤 문맥을 보고 때려 맞추는 수준이지, 청산유수로 읽어 내려가는 수준은 아니지 않나.

결국 이 계약서의 내용을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고용주인 기업가의 말만 믿을 순 없으니, 중개인이나 공증인마냥 하급관리가 그 일을 대신해주고 있었던 거지.

“그런 일이 있었군.”

“그래서 정작 자기 할일은 못하고, 하루 종일 계약서만 설명해주고 있다고 하더군. 기업이 한두 곳이 아니니까.”

“그렇겠지.”

“암암.”

“헌데 그게 어디 지방에서만 벌어지고 있겠나? 조선팔도는 물론이고, 저 북방에선 일이 더 복잡할 걸세.”

“아...!”

보나마나다.

말이 통하는 조선내지에서도 이렇게 난장판인데... 말이 잘 안 통하는 여진인과 계약하려면 수고로움이 두 배, 난장판도 두 배로 펼쳐지고 있겠지.

“그래서 우리를 독촉하는 거군?”

“맞네. 적어도 백성들이 글을 알고 이해할 수 있으면, 일이 몇 배는 줄어들 테니까.”

“흐음...”

너무나도 현실적인 문제라서, 차마 명분론은 꺼내지도 못할 판국이다.

세종과 태종은 기업의 활성화에 있어서 한 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을 테니, 결국 조정과 제도가 바뀌어야겠지.

“생각해보니까... 정말 가벼운 문제가 아니군. 송사訟事도 장난이 아니겠는데?”

“하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충 그럴 걸세.”

셋은 지방에서 벌어지고 있을 난장판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기업은 기업내규 내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취하려 할 테고, 백성들은 억울하다고 소리를 칠 테니...

“왜 계약대로 안 해주냐!” “아니 이거 봐라. 계약서에 적혀 있지 않냐!”라며 송사가 빗발칠 거다.

또한 기업과 기업간의 계약도 빈번하고, 기업과 조정과의 계약도 빈번하니, 백성과의 송사와 다른 또 다른 형태의 송사 또한 빗발칠 거다.

조정에선 “지금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모르냐? 농땡이 피우면 뒤진다!”라며 무섭게 쪼아대고 있으니, 수령 또한 자기 할 일을 못하고, 하루 종일 송사만 보고 있을 게 분명.

“수령을 도와주는 착호군 임시관리로 버티고 있겠지만, 착호군이 떠난 지역에선 진짜 곡소리가 나겠군?”

“그럴 걸세.”

“맞는 말. 경제육전에는 상법과 기업에 관한 법률이 없지 않나.”

“음...”

운석핵꿀밤 이후로. 대명률을 제거하기 시작하면서 경제육전은 엉망이 됐고, 이 개정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지 않나.

그 판국에 전례가 없던 기업이 튀어나왔으니, 이에 관한 법조문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아직도 논의 중이었다.

이러니 수령의 송사가 쉬울 리가 있나.

골머리를 싸매던 수령조차 답을 못 내리고 조정으로 올려 보낼 테니, 조정관리들 또한 전국에서 올라온 송사장계에 머리가 터져나갈 거다.

“아!?”

그때. 갑자기 뭔가 떠오른 걸까? 구석에 있던 사내가 박수를 치며 외쳤다.

“뭔가?”

“지난 별시에 율관律官들을 잔뜩 뽑아서 연수원에서 교육시키고 있지 않나. 이를 대비한 걸까?”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러게?”

이들은 지난 2년간 어디 가지도 못하고, 그저 집현전과 이 신식 전각에 파묻혀 훈민정음만 연구하지 않았나.

다른 부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고, 자기 일이 바빠서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사서에 남을 대역사에 참여했는데, 다른 일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나. 완성단계에 다다랐으니, 이제야 슬쩍 다른 곳을 살펴볼 여유가 생긴 거지.

“율관이라...”

“흐음...”

셋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생각에 잠겨들었다.

얼핏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엄청난 사건이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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