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97화 (197/538)

197. 챕터30. 발전하다 (8)

“이미 읽어봤을 터. 노신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아직도 반대하는 이가 있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만족하는 이가 더 많았습니다.”

“아직도 있긴 있단 말이군?”

세종이 싸늘한 눈빛으로 쓱 훑어보자, 다들 자라목이 되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세종이 운동 삼아 칼질을 해온 게 벌써 몇 해던가.

착호군처럼 죽기살기로 수련하진 않았어도, 가랑비에 젓듯 운동하는 게 습관이 되어 쉼 없이 꾸준히 해왔다.

손바닥에는 어느덧 굳은살이 박였고, 안 그래도 풍채 좋던 몸은 무두질된 가죽처럼 탄탄해졌으며, 눈빛은 칼날을 박아 넣은 듯 강맹해졌다.

이러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혹여나 문제가 생길까 싶어,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아무튼 만족한단 말이지...”

“그러하옵니다!”

세종의 기세가 누그러지자, 이조판서 허지가 냉큼 답을 했다.

실제로도 그러했으니까.

노신들과 노학자들 중에선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이유로 “한자를 배우는 이들이 없어져, 학문적 수양이 떨어질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허나 결과물을 까놓고 보니 오히려 정반대다.

안 그래도 어려운 한자를 무작정 외우는 것보단, 오히려 조선말로 된 발음기호를 통해 한자를 외우는 게 훨씬 쉬웠기 때문.

정인지가 주장했던 것처럼, 외국어를 배움에 있어서도 훈민정음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걸로 예상됐다.

외국발음을 뜻과 상관없이 소리 나는 대로 훈민정음으로 옮겨 쓴 후에, 그걸 그대로 외워버리면 되니까.

미래에도 수험생들이 이런 방식으로 공부하는데, 어째 지금 시대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신형 인쇄기는 어떠한가.”

“신형 인쇄기는 완성되었으나... 재료의 충분한 수량을 확보할 때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합니다.”

이런 고위급 회의에 참석한 게 꽤나 부담스러운 걸까?

탁자 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주자소 정랑 남급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남급은 원래 역사에서도 활자 주조를 담당했는데, 지금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잘 풀려서, 전보다 훨씬 높은 품계에 올라 있었지.

원래 역사에서 활자 주조와 서적 편찬을 담당하던 주자소는 승정원 휘하에 있던 속아문이었다.

처지가 바뀌건, 오래전에 알음알음 소문나기 시작한 배봉연구소의 장서각에 관리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조정보다 더 많은 서책을 보유하고 있는 민간장서각을 태종과 세종은 두고 볼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궁내에 똑같이 생긴 장서각을 건설.

경복궁 구석에, 주변과 안 어울리게 흡사 성채마냥 홀로 우뚝 솟아 있는 석조건물의 정체가 바로 장서각이지.

이 때. 주자소는 승정원에서 빠져나와 독립기관이 되어 장서각을 담당하게 됐고, 자주화와 전문화의 물결을 타고 신학문이 대두하자 더욱 확장됐다.

별의 별 저서가 다 튀어나오고 있으니... 쓸모가 있든 없든 일단 주자소에선 서책을 긁어모으고, 부족한 건 직접 찍어냈지.

이러한 배경 탓에 세종이 만들어야 했던 경자자는 이미 태종 말년에 완성되었고, 배봉연구소를 통해 연오랑의 신형 인쇄기 개념이 도입되자 주자소는 또 한번 확장.

원래 역사에선 궁내의 내관, 궁밖의 외관으로 나눠져 있던 주자소가, 지금은 장서각 옆에 새로 만들어진 궁궐 전각을 통째로 차지하고 머물게 됐지.

사정이 이러하니... 일전에 세종과 여러번 마주했음에도, 짬밥이 부족한 남급 입장에선 이 자리가 꽤나 부담스러울 수밖에.

“으음...”

“...”

남급이 그러거나 말거나, 세종은 입술을 살포시 깨물며 신음을 흘렸다.

확인 차 물어본 건데, 역시나 아직은 무리인 모양이다.

조선은 고려 때부터 금속활자를 만들었고, 원시적이긴 하나 룰러처럼 생긴 인쇄기 등을 만들어 사용했었다.

태종 때는 구리를 이용한 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세종 초기에는 경자자庚子字, 후기에는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었지.

문제라면 한자가 너무 많아서 활자 또한 미친 듯이 많다는 점. 또한 완성된 인쇄기가 아니라 그때그때 결합하는 방식이라서 효율이 많이 안 나왔다는 점이다.

더불어 인식에도 살짝 문제가 있었다.

인쇄술을 통해 책이 많이 나오는 걸 좋아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반대로 반대하는 이들 또한 은근히 있었다.

필사筆寫는 단순히 손운동이 아니라 공부의 일환이니까.

손으로 옮겨 담으면서 서체를 숙달하고, 한권의 책을 오롯이 베끼면서 이해와 암기를 병행했던 거지.

허나 지금 역사에선, 훈민정음 배포와 맞물려 반대의견은 싹 사라졌다.

훈민정음은 밑에서든 위에서든 모두가 바라고 있고, 최대한 빨리 배포하고 교육시켜야 자신들의 업무량이 줄어들기 때문.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신형 인쇄기 또한 별 탈 없이 완성됐다.

연오랑은 이미 예전에 구텐베르크가 만든 인쇄기의 구조를 넌지시 흘렸고, 조선은 이것저것 만들면서 꽤나 기술력이 성장한 상태.

애초에 포도주 압착기에서 착안된 구텐베르크 인쇄기가, 만들기 어려운 물건도 아니잖아?

공야사와 연구소 장인들을 여기에 톱니바퀴와 기둥나사螺絲까지 결합시켜서, 더욱 수준 높은 인쇄기를 만들어냈다.

다만... 문제는 신형 인쇄기가 아닌 다른 부분.

종이와 잉크, 활자 그 자체에 있었다.

“저지楮紙를 대량으로 사용하기에는 수량이 턱없이 부족하고,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는 한... 당장 해결하긴 어려운 걸로 사료되옵니다.”

“크흠...”

“음.”

남급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신음을 흘렸지만, 차마 뭐라고 하진 못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

조선불교 공의회가 시작되고 난 후.

사원노비의 대대적인 속량이 있었고, 본래 기술자 출신이 많던 사원노비들을 각 지역의 기업들이 쫙 빨아들였다.

연오랑은 한발 앞서서 사원노비 출신의 종이기술자들을 배봉연구소로 끌어왔고, 그들은 제지기업의 연구원이 되어 종이개량에 열중했다.

종이는 온갖 곳에 다 쓰는 물건이니, 일단 만들기만 하면 돈이 되니까.

당연히 제지製紙기업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배봉연구소를 찾아와 기술을 배워가 각지에 제지기업을 설립.

이렇듯 원래 역사와 비교하면 몇 배나 많은 종이가 생산되고 있지만...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간다.

무지막지하게 늘어난 관리와 행정업무 때문에, 조선내지의 물량으로도 부족해서 중국에서 수입할 지경이지.

“이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착호군이 개간한 산간지역에 닥나무밭을 만들고 제지기업을 설립하고 있지만... 당장의 수요를 모두 충족하긴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음. 하기야 같은 땅을 놓고, 제지기업은 양잠, 면직기업과 경쟁해야 할 테니...”

“애매하군요.”

민간 기업이 각자 알아서 돈벌이를 찾아가는데, 조정에서 닥치고 닥나무만 키우라고 할 수 없는 노릇.

대신들도 할 말이 없어, 그냥 넋두리만 흘려댔다.

“왜닥나무를 가져왔어도 그러한가?”

“음... 왜닥나무는 잘 퍼졌고, 조선닥나무와 함께 번성하고 있지만, 그래도 앞선 문제를 해결할 방책은 못 되옵니다. 조지소造紙所를 확장해도 한계는 있습니다.”

세종의 물음에, 호조판서 정역은 보고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덧붙였다.

일본에서 만든 종이를 왜지倭紙, 화지和紙라 불렀는데, 가볍고 윤택하다고 하여 왕실에서 쓰는 고급품 중 하나였다.

태종 때부터 대마도에서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었고, 연오랑이 대마도를 쓸어버리고 대마도출신 하급관원들을 흡수하자 그 비밀이 밝혀졌다.

종이를 만드는 방식은 조선과 크게 다를 게 없었지만, 원재료가 되는 닥나무가 달랐던 것.

조정은 강남상인을 통해 왜닥나무를 수입해왔고, 종이를 만드는 부서인 조지소에선 이걸 잘 키워내고 기업에 팔아 장려시켰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흐름으로 갔지만, 지금은 수십년 빠르게 진행된 상태.

더불어 반짝 하고 힘이 줄어든 원래 역사와 달리, 조지소는 더욱 확장해가며 각 지방에 종이공장을 설립해갔다.

그만큼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종이의 양이 무지막지했으니까.

허나 이런 번성에도 불구하고, 돈의 벽을 뛰어넘을 순 없다.

제지기업이 양잠, 면직기업 등의 다른 기업보다 압도적인 수익을 보장할 수 없는 한, 무작정 강제할 순 없으니까.

더불어 양잠, 면직 기업 또한 조정이 깊은 관심을 보이는 기업이니, 어느 하나 편애할 순 없는 거지.

“저지가 그럴 정도면, 상지桑紙를 만드는 것도 힘들겠군.”

“송구하옵니다.”

상지는 뽕나무 껍질을 원료로 만드는 종이로, 이전에도 꽤나 쓰던 종이였다.

문제는 뽕나무가 양잠의 핵심 원료이고, 더 많은 뽕잎을 만들기 위해 개량한 뽕나무는 종이로 써먹기엔 품질이 그리 좋지 않았다.

더불어 두고두고 써먹어야 할 뽕나무를, 종이 만든다고 베어버리면 누가 양잠기업을 할까.

양잠과 제지를 놓고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죄다 양잠의 손을 들어준 터라... 지금 역사에서 상지는 대규모로 만들기 어려운 종이였다.

“마골지麻骨紙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테고.”

“예...”

정역은 다시금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마골지는 삼대와 닥나무를 섞어서 만든 종이인데, 이건 닥나무 종이보다 더 오래전부터 쓰여 온 유서 깊은 종이였다.

다만 삼대는 삼베를 만드는 대마나, 모시를 만드는 저마로 쓰이는 물건.

양잠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원료를 놓고 “종이를 만들 거냐? 면직물을 만들 거냐?”라고 물으면 당연히 후자로 답하겠지.

“당장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면 고정지藁精紙나 유목지柳木紙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방법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정역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덧붙였다.

고정지는 볏짚, 보리짚, 귀리짚과 같은 짚을 약간의 닥나무와 섞어서 만든 종이, 유목지는 버드나무를 원료로 해서 만든 종이다.

당연히 다른 종이에 비해 값이 싸다는 장점이 있지만, 저지에 비하면 품질이 떨어졌지.

모두가 침묵에 잠겨 있을 때.

구석에서 남급과 함께 짱박혀 있던 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음...?”

“무언가?”

“조지소 정랑 김삼근이 아뢰옵니다. 배봉연구소에서 종이를 함께 연구해 온 바... 노화지蘆花紙의 품질을 끌어올렸습니다. 저지에 비할 바는 못하지만, 수량만큼은 부족하지 않사옵니다.”

조지소 또한 주자소와 마찬가지로 확장을 거듭해서, 호조에 속해 있긴 하지만 반쯤 독립부서로 떨어져 나온 상황.

조지소 총책임자인 김삼근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덧붙였다.

“노화지라...”

“여기 있사옵니다.”

김삼근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신들에게 노화지를 건넸고, 모두는 보고서에 껴 있던 다른 종이와 비교해봤다.

노화지는 갈대로 만든 종이로, 그 품질이 조악해서 조정에선 잘 쓰이지 않던 물건. 허나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흠...”

“괜찮구려.”

“다른 종이에 비해 만드는 데 어려움이 있나?”

“수차를 이용한 파쇄기를 이용한 덕분에, 손이 보다 줄었습니다. 더불어 생산 방식을 바꾼 탓에 비록 저지만큼 튼튼하고 오래가진 못하지만, 그만큼 더 빠르게 만들 수 있사옵니다.”

“흐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김삼근을 보며, 세종은 설명을 더 해보라는 듯 손짓했다.

수세기 전에 만들어진 종이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했으나... 작금에 이르러선 동아시아 모든 나라에서, 저지가 다른 종이를 압도했다.

이 시대엔 미래처럼 화학처리를 할 수 없으니, 그 원료가 나무가 됐든, 짚이 됐든, 줄기가 됐든 일단 물리적으로 파쇄 해야 했다.

결국 원료가 뭐가됐든 만드는 과정과 수고는 엇비슷했는데, 결과물이 천지차이.

저지가 다른 종이에 비해 월등하니, 모든 사람들이 다른 종이는 제쳐 두고 저지만 찾은 거지.

다만 사치품에 준할 정도로 비싼 저지만 쓰기엔 수요가 모자라니, 어떻게든 싸게 만들려고 연구하면서 다른 종이가 나오게 된 것.

등지藤紙, 태지苔紙, 송피지松皮紙, 송엽지松葉紙 등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탄생한 물건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민간 제지기업에서 수지타산을 맞추기 위해선, 당연히 값나가는 저지를 만들 수밖에.

결국 나라에서 운용하는 조지소에서 노화지를 대량 생산할 수밖에 없다.

“일 리가 있군.”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세상에 처음 선보이는 훈민정음이고, 또한 조정에서 처음 대규모로 간행하는 서적인데... 품질이 조악한 종이를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이는 조정과 왕실의 위신이 걸려 있습니다.”

이조판서 허지의 반문에, 모두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종이는 공물로 받아왔고, 그 품위를 면밀히 따져서 왕실에서 쓸 것, 조정에서 쓸 것, 민간에서 쓸 것 등으로 가려왔다.

민간에서도 마찬가지.

크고 하얗고 매끈한 종이를 선호했고, 누리끼리하고 짜깁기한 것처럼 생긴 종이는 기피했지.

품계가 더 높은 이들이 더 좋은 종이를 사용하는 건 자부심이자 권리인데... 조정이 자신들보다 못한 물건을 쓰면, 백성들이 우습게보지 않겠나.

다만 가슴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도,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달리 해결할 방도가 없으니까.

결국 모두의 시선은 세종에게 향했고.

“음... 노화지로 하지.”

“...!”

“작금에 이르러 왕실과 조정의 위신은 고작 이런 종이의 품위로 결정될 정도로 미욱하지 않다. 지난날 상왕전하께서 조지소와 주자소를 설립한 까닭이 뭔가.”

“...”

“더 많은 서책을 보급해 백성들을 교육시키기 위함이었으니, 그 뜻을 따른다면 종이의 품위가 어떻든. 그게 중요하겠나?”

물론 태종이 서적 발간에 힘을 쓴 건, 불교를 때려잡고, 자기 입맛에 맞는 유학자를 양성해 중앙집권화에 힘쓰려 한 거지만... 세종이 말한 목적이 없는 건 아니지.

“고가 훈민정음을 만들어 배포하려는 것도 백성을 위함이니, 그 뜻이 백성들과 가장 닮고, 가장 낮은 노화지에 담기는 것이 오히려 사리에 맞지 않겠나.”

“...!”

“예. 전하.”

“또한 백성들의 삶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짚은 백성들이 유용하게 쓰는 물건. 짚을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갈대를 쓰는 게 백성들에게 피해를 덜 끼칠 거다.”

모두는 세종의 말에 감복해 고개를 숙였으나.

“뭐. 돈이 덜 드는 것도 덜 드는 거지만.”

“... 끄응.”

거창하게 말하다가 갑자기 옆길로 새서 피식 웃는 세종을 보며, 대신들은 그저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