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챕터30. 발전하다 (9)
분위기가 살짝 풀어지려 할 때. 남급이 다시금 조용히 손을 들었다.
“뭔가?”
“당장은 그리 해결할 수 있지만, 신형 인쇄기를 제대로 쓰이기 위해서는, 마골지를 개량하고 양산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되옵니다.”
“...?”
뜬금없는 말에 모두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남급과 김삼근은 보고서를 들춰서 보여주고선 함께 설명을 이어갔다.
“신형 인쇄기는 기존과 달리, 판으로 눌러 찍어내는 방식입니다. 이를 위해서 새로운 인쇄용 먹물이 필요한 바. 배봉연구소와 함께 오래전부터 연구를 해왔습니다.”
저지가 인기가 많은 건, 붓으로 쓰는 먹물이 잘 스며들었기 때문.
하지만 이러한 특성은 인쇄를 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됐다. 깔끔하게 찍혀 나와야 하는데, 먹물이 번지면서 글자가 엉망이 되었으니까.
“더불어 금속 활자에 먹물을 묻히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고, 여러 종이를 모두 실험하면서 금속 활자에 가장 적합한 종이를 연구했습니다.”
먹물은 먹을 물에 풀어서 쓰는 건데, 이걸 금속 활자에 묻힌다고 해서 제대로 뭉쳐 있겠는가. 당연히 줄줄 흘러내리지.
물론 원래 역사에서도 이 문제를 얼추 해결하긴 했다. 어찌됐건 인쇄서적을 찍어내긴 했으니까. 다만 효율이 별로였던 게 문제였지.
하지만 신형 인쇄기에는 기존 물건이 쓸모가 없었고, 아예 새로운 인쇄용 먹물을 만들어야 했다.
“동유나 면실유에, 흑색 안료를 섞고, 용연연구소에서 나온 탄역청을 섞어 새로운 인쇄용 먹물을 만들었는데, 그 점성이 뛰어나 금속활자에 쓰기에 적합합니다.”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은 작은 찻잔에 담긴 검은 액체를 대신들에게 나눠줬다.
모두는 나무젓가락을 들고 액체를 찍어보고, 냄새를 맡아보며 기존 먹물과 뭐가 다른지 비교했다. 과연 젓가락에 착 달라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 것이, 기존 먹물과는 확연히 차이난다.
“헌데 이 먹물에 가장 잘 맞는 종이는 마골지였고, 그 다음으론 노화지와 고정지 순이었습니다. 저지도 나쁘진 않으나, 계량을 잘못하면 번지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흐음...”
못마땅한 기색을 읽어서일까? 남급은 재깍 말을 덧붙였다.
“물론 저지용 인쇄 먹물도 개발 중에 있습니다만... 완성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면 주자소와 조지서는 마골지를 만드는 공장을 새로이 만들고 싶은 건가?”
“당장은 힘들겠지만, 앞으로도 더 많은 서적을 간행하기 위해선 필요하다고 사료되옵니다.”
“음...”
돈이 왕창 들어갈 게 뻔한 일이니, 대신들은 가볍게 신음을 흘렸고.
“어쩔 수 없지만... 나쁘지 않다. 훗날 마골지보다 더 나은 종이를 만들 수 있다면, 그 땅에선 마포麻布를 만들면 그만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예. 전하.”
세종이 단칼에 잘라내자, 다들 고개를 숙였다.
“또 문제가 있나?”
“송구스럽게도, 금속 활자를 당장 사용하긴 힘들 것 같고, 일단은 목판활자를 이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크음.”
“큼큼...”
세종의 신음이 전염이라도 된 듯, 대신들 모두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사서에 남을 대업도 이런 대업이 없으니, 모든 걸 최고, 최상으로 하고자 하는 건 당연한 말.
새로 만든 훈민정음을, 새로 만든 금속 활자를 사용해서, 새로 만든 인쇄기에 찍어, 전례 없이 대규모로 간행한다.
하나하나가 전부 역사에 남을 대사건인데, 이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뭔가 모양새가 예쁘지 않지. 종이 문제에서 한번 굽혀줬는데, 또 굽히게 생겼다.
하지만 이상은 이상이고, 현실은 현실인 법.
“뭐가 문제인가?”
“훈민정음의 서체가 완성되지 않았고, 활자를 만드는 규칙도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기존 한자 활자에 비해 훈민정음 활자가 압도적인 효율이 있을 것이지만, 당장 금속활자로 주조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음...”
모두의 까칠한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남급과 김삼근은 변명하듯 열심히 입을 놀렸다.
한문 활자는 그 수가 수만개가 넘는다.
반면 훈민정음은 몇 개 되지도 않으니, 낱말을 조합하기만 하면 끝.
인쇄의 효율은 아예 비교조차 불가하니, 앞으로는 무조건 훈민정음으로 활자를 만들고 인쇄해야 이득이다.
문제는 훈민정음은 만들었어도, 훈민정음에 맞는 각종 문법 정립과 훈민정음에 어울리는 서체가 아직 완성이 안됐다는 점.
“음...”
“맞는 말이지.”
대신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허지가 아까 했던 말처럼, 앞으로 수백년간 대대손손 내려갈 물건이니 허투루 만들 수 없는 법.
어쩌면 훈민정음의 기준 모양이자 크기가 될 서체를 만드는 건, 훈민정음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다.
“또한 한자 활자에 비해 훈민정음이 몇 배나 간편하고 간소하니 주조하는 데 간편하지만, 모든 경우에 걸 맞는 낱말 활자를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자 활자는 그냥 활자 하나만 있으면 끝이지만, 훈민정음은 자음과 모음이 합쳐지니 초성,중성,종성의 낱말 활자를 모두 만들어야 한다.
더불어 이젠 가로쓰기가 주류가 된 상황.
밑선을 기준으로 두고, 글자 하나하나를 정사각형 크기로 동일하게 해야 깔끔한 모양새가 나오고, 그러면서 문장 전체로 봤을 때도 크기와 모양새가 동일해야하니...
같은 자음과 모음이라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서 그 크기와 모양이 천차만별이었던 것.
차라리 그냥 목판으로 한 번에 깎아서 찍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수십개 형태의 활자를 내년초까지 만드는 건 물리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애초에 글자 모양 규정은 주자소에서 결정할 게 아니라, 어문학자들이 먼저 완성해야 하는 거였고.
“흐음... 이 또한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군.”
“그러하옵니다.”
“발행을 빨리하는 게 중요하니... 일단은 목판으로 만들어라. 앞으로 기존의 서책을 훈민정음으로 다시 간행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금속활자를 만들어야 할 터.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만들어 놓는 게 두고두고 쓰기 편하겠지.”
“예.”
“그러하옵니다.”
앞으로 엄청나게 밀려들 게 분명한 일지옥을 떠올리며, 남급과 김삼근은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훈민정음에 관한 논의가 끝나자, 남급과 김삼근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고... 바톤 터치를 하듯 제주목사 원길이 안으로 들어와 자리했다.
지난날 연오랑과 함께 일을 했던 하동현감이 바로 원길.
그 때의 포동포동했던 몸은 거품이라도 되는 듯, 지금은 수숫대마냥 깡말랐고 피부는 햇볕에 타서 까맣게 변해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목사가 아니라 농부처럼 보였을 거다.
“고생이 많군.”
“송구하옵니다.”
세종이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원길은 조용히 읍을 하는 걸로 대신했다.
일 년에 한번씩 직접 와서 보고를 해왔으니, 이젠 나름 친분도 생겼으니까.
“그래. 올해 제주 사정은 어떠한가.”
“보고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누구보다도 이런 회의에 익숙한 사람이 원길이니,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설명을 시작했다.
태종의 스파이로서 연오랑을 감시 아닌 감시를 해왔던 원길.
그는 연오랑이 이름을 떨치기 전부터, 연오랑이 하동에서 기업을 설립하고 어떤 식으로 기업을 이끌어 가는지 면밀히 분석했다.
여기에 하동출신 기업가청년들이 임시관리가 되어, 원길과 함께 제주로 떠났다.
지금 역사에선 제주가 꽤 살만한 동네였는데, 기업 전문가들이 그곳에 투입되면 무슨 일이 벌어졌겠는가.
조선팔도 그 어떤 곳보다도 빠르고, 크게 변해갔지.
“올해 새로 만든 목장이 3곳. 수산기업을 한곳, 제재기업을 한곳 더 늘렸고, 유황광산의 채굴양도 작년에 비해 1.5배 정도 늘었고, 귤, 유자농장과 양주釀酒기업을 3곳 더 늘렸습니다.”
“논농사는 어떻소?”
“기반은 잡아놨으니, 인원만 준비되면 수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
“역시. 빠르구려.”
“섬이라서 오히려 더 나은 건가.”
“한동안 술독에 빠지겠구려. 허허.”
원길의 자신감 가득 찬 결과물에, 모두는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지난날 부침이 많아 제주는 큰 토호세력이 없었고, 있어봐야 역사는 깊어도 세력은 약한 자잘한 토호만 존재했다.
나아가 땅이 비옥하지 못하니, 지주라고 해봐야 삼남지방의 지주와는 비교할 수준도 못됐지.
이런 상황에서 그간 백성들을 힘들게 했던 공물을 죄다 돈벌이로 만들어주니... 안 그래도 유학적 관념이 희박한 제주 토호들은 거부감 없이 곧장 기업을 받아들였다.
“중국에서 사온 식량을 지원한 게, 도움이 됐나 보군.”
“전하의 보살핌이 없었으면,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원길은 의례적인 수사가 아니라, 진짜로 고마워서 세종뿐만 아니라 다른 대신들에게도 넙죽넙죽 고개를 숙여댔다.
식량뿐이겠냐. 온갖 걸 다 지원해줘서,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헌데 양주기업이라...”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소. 그냥 놔두면 어차피 썩어 없어질 과실이고... 애초에 양주기술은 착호군에서 흘러나온 것 아니오.”
“끄응...”
술 문제에 관해서 예조판서 권홍이 살짝 우려를 표하려하자, 조말생의 후임으로 병조판서가 된 이수가 냉큼 말을 붙였다.
“술이라...”
깐깐한 권홍과 술 좋아하는 이수가 한바탕 하려하자, 세종이 먼저 나서서 말을 끊었다.
“양주기업이 늘었다고 하나, 이게 사치는 아니지 않나? 지금껏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나?”
“아니옵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군에는 술이 없으면 곤란하지. 안 그런가?”
“예...”
군사에 있어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세종이 끼어들자, 권홍은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세종의 말처럼 군대는 술이 없으면 큰일 나니까. 이건 조선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다.
착호군은 중국원정을 가서도, 몽골군과 요동군에게 술을 만들어 잘만 팔아먹지 않았냐.
착호군이 조선팔도를 활개치고 다닐수록, 자연스레 집에서 만드는 가양주의 한계를 깨부수고 술을 만드는 기업. 양주기업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다만 식량 문제는 여전히 빠듯해서, 소주는 여전히 비싼 물건이었고... 몽골,요동,중국의 양주기술을 죄다 배운 착호보조군들은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과실주, 약초주, 잡곡주와 이것저것 다 섞은 혼합주를 만들었지. 그 중 두드러지게 발전한 건 과실주였다.
용연의 과실연구소는 확실한 효과를 보였고, 조정의 지원 하에 전문적인 과수원이 하나둘씩 등장.
이로 인해 지금껏 조선에 없던 새로운 시장. 과일시장이 은근슬쩍 날개를 피기 시작했다.
다만 과일은 여전히 쉽게 썩는 물건이었기에, 과수원 인근 도시에만 내다팔 수 있었고 전국으로 팔긴 힘들었지.
남아서 썩어버릴 과일이니 뭐라도 뽑아먹어야 했는데... 착호군이 여기에 끼어들어 건과乾果를 만들어 보조식량으로 삼거나, 과실주나 과일식초로 만든 것.
과수원을 운영하는 이들이 이걸 보고 가만히 있었겠는가.
착호보조군을 통해 온갖 양주기술을 배울 수 있고, 공작기업을 통해 보다 정밀하고 큰 양주기구를 손쉽게 구입할 수 있고.
자기기업을 통해 술병으로 사용될 자기를 값싸게 구입하고, 옹기와 나무통으로 인해 대용량으로 보관이 가능해졌고, 행상을 통해 술을 팔 수 있게 됐다.
조선의 부흥에 맞춰, 술의 전성시대가 펼쳐지기 시작했으니... 권홍의 우려가 마냥 헛발질은 아니었던 거지.
“하오나 제주는 예외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간 고역을 생각해 보시지요.”
“음...”
원길의 조심스러운 반문에 권홍은 다시금 할 말이 없어졌다.
귤과 유자는 제주의 특산공물이나, 운송이 힘들어서 한성으로 가져오면 태반이 썩기 마련.
조정에선 “그건 내 알바 아니고, 닥치고 공물수량은 맞춰라.”라고 쪼아댔으니, 지난날 제주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보다 나은 수송선과 보다 자주 운행하는 조운선으로 인해, 그나마 사정이 나아지긴 했는데... 그래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순 없지.
별수 있나. 어차피 썩어버릴 물건이니, 과수원을 하는 집안은 양주기업을 병행하여 죄다 술로 만들어버렸다.
“감귤주도 은근히 맛이 괜찮지 않소. 평생 동안 귤과 유자를 맛보기도 힘든 북방의 백성들을 생각하면, 감귤주가 퍼지는 걸 마냥 사치나 방종으로 볼 순 없을 거외다.”
“감귤주 뿐이겠소. 제대로 된 과실주를 맛보지 못한 여진과 몽골에게도 과실주는 인기가 많으니, 그들을 위무하기 위해서라도 양주기업을 금지하는 건 불가하외다.”
“끄응...”
백성들을 들먹이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연이은 공격에 권홍은 결국 침몰하고 말았다.
이런저런 제주의 발전상황을 듣고 나서, 세종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전에 일본 사신이 왔다갔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예. 하오면...?”
“그래. 이제 제주에 왜관을 열 준비를 해야겠다.”
세종의 말에, 원길은 눈을 번뜩였다.
그가 지금까지 제주를 발전시켜 온 건. 제주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왜관을 열어도 버틸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함이니까.
일본은 드디어 조선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대마도를 포기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본도 조선 북쪽에 여진이 있고 이들이 조선의 우환거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헌데 지난날 중국을 두들겨 팼던 조선이, 이젠 북방의 위협까지 일소했다는 소식을 강남상인에게서 입수.
북쪽의 위험이 사라졌으니 조선이 시선을 돌릴 곳은 남쪽밖에 없고, 수십만명을 포로로 잡을 정도의 대전쟁을 치른 조선을 보며 일본의 경계심은 최고조로 치솟았다.
막부뿐만 아니라 그간 통교하지 않던 본주와 구주의 영주들이 죄다 공물을 바치겠다고 달려왔는데...
조선은 공물을 안 받아주고 꺼지라는 반응을 보였으니, 일본 입장에선 더 이상 미적거릴 여유가 없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