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00화 (200/538)

200. 챕터30. 발전하다 (11)

“보면서 들어라.”

대신들 모두는 서책마냥 두툼한 법전을 읽기 시작했고, 세종은 말을 이어갔다.

“일전에 꽤 재밌는 보고를 들었다. 농산기업을 허가해 달라고 했다지?”

“...”

“아!”

대신들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고, 세종은 피식 웃으며 날카로운 눈빛을 뿌려댔다.

“약은 놈들. 그렇게나 땅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야.”

“흡...”

세종의 막말 아닌 막말에, 모두는 괜히 자세를 바로하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다.

자신들이 보기에도 속내가 훤히 보이는 주장이었고, 따지고 보면 그들 집안과도 연관 있는 이야기니까.

별의 별 기업이 다 생기고 있으니, 몇몇 지주들은 “나도 사원을 고용해서 농사를 지을 테니, 농산기업을 허가해 주시오!”라는 주장을 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조정에서는 당연히 갑론을박이 이어졌지.

형평성 문제를 따지면 농산기업을 허가해야 하나, 자영농을 육성하려는 조정의 기조에 따르면 농산기업은 금지해야 한다.

농산기업은 소출에 상관없이 일정한 임금을 지불해야 했으니, 이게 이득일지 손해일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또한 농산기업 사원은 엄밀히 말해서 소작농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주의 사노비도 아니게 되니...

이들의 처우를 어떻게 규정해야할지, 만약 농산기업이 제대로 된 수익을 거두지 못하면 그 임금을 어떻게 배분해야할지,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어떤 법률을 적용해야할지 등의 문제가 있었던 것.

‘허나 그 문제는 보류되어 집현전에서 열심히 논의 중이지 않나...’

정역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세종을 살폈다.

뭔가 결론이 났으니,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까?

“그 문제도 함께 해결할 법률의 초안이다. 세부적인 사항을 전부 말하기는 힘들고 굵직하게 보아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업종에 따른 기업규제법이라 부를 수 있으려나? 또 하나는 토지제한법, 마지막은 고리대금법이라 할 수 있겠지.”

“...!”

“...!”

중국은 물론 고려 때도 없던 법률을 들먹이자, 대신들 모두 입을 쩍 벌리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고.

‘나도 그러했는데, 너희는 오죽하랴.’

세종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오래전 과거를 더듬어갔다.

태종이 연오랑과 만나고, 그의 계획이 세종에게 전해졌을 때.

세종은 앞으로 펼쳐질 신세계를 느끼며, 그 이상향을 좇아 지금껏 달려왔다.

그 중심에는 자주화와 맞물린 조선의 경제력 향상도 분명 있었지만, 속에는 완벽한 중앙집권과 왕권강화가 있었지.

돈과 땅과 사람의 힘은 막강해서, 이게 하나로 합쳐지면 왕권을 위협하고 나라를 뒤엎을 정도의 힘을 갖게 되는 법.

먼저 해야 할 것은 땅과 사람의 힘을 빼앗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전사업을 통해 양반사대부, 지방호족 가릴 것 없이, 땅을 가진 지주들을 두들겨 패며 목덜미를 조여 갔다.

허나 이들을 무작정 잡아 족치면 당연히 반발하고, 심지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일.

그들에게 열어준 숨통이 바로 관리임용과 기업이었고, 예상대로 땅과 사람을 잃어버린 지주들은 돈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땅과 사람을 정리했으니, 남은 건 돈을 규제할 차례.

연오랑은 “왕실과 조정이 조선 제1의 부자가 되면 된다.”라고 말했고, 세종 또한 동의했다.

문제는 “부자가 되는 방법 중에서 무엇을 취할 것이냐?”였다.

내가 열심히 돈을 버는 것과, 남이 돈을 벌지 못하게 막는 것 방법이 있는데... 세종은 둘 다 취하기로 했지.

돈을 버는 방법으론 궁방전과 공신전을 전부 조정으로 환수했고, 천일염전의 5분의 3을 조정과 내수별좌의 소유로 돌려놨다.

죽어서도 없어지지 않는 금광과 같은 염전이니,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수별좌는 돈이 마를 일이 없지.

나아가 조정과 왕실의 전매품으로 만들어 놓은 특산물이 몇몇 있으니, 대외무역이 이어지는 한 절대로 왕실의 부는 깎여나가지 않을 거다.

다음으론 남이 돈을 벌지 못하게 막는 것.

‘만석꾼 한명 보다 천석꾼 열명이 낫고, 천석꾼 열명보다 백석꾼 백명이 낫다고 했지.’

세종은 오래전 연오랑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똑같은 만석이라지만, 하나로 집중된 부와 자잘하게 쪼개진 부의 힘을 비교할 수 없는 법.

조선이 성장함에 따라 절대적인 수치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겠지만, 상대적인 수치는 언제나 왕실이 자잘한 집안을 찍어 누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기업집안이 성장할 수 있는 한계치를 정해놔야 된다는 뜻.

‘그간 봐온바. 확실히 용연군 말대로 공장제 수공업에 기반한 기업은 한계치가 분명하다.’

지금 시대가 산업혁명시대도 아니고, 신문물이 적용되어 발전하고 있다고는 하나 결국은 인력과 축력, 수력에 의지하는 시대다.

이들은 아무리 크게 사업을 일궈도, 그만큼 나가는 돈이 많기 때문에 태생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계가 없는 건 돈과 땅.’

세종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허나 형평성이 문제가 될 것인데...”

예조판서 권홍이 중얼거리며 말을 흐렸다.

얼핏 생각하면 당연히 형평성 문제가 나올 법 한데, 한편으론 그리 간단한 건 아니니까.

“업종에 따라 규제를 달리하는 게 문제가 될 거라 보는가?”

“애매합니다.”

“아닙니다. 반드시 달리 규제해야 합니다.”

권홍이 자신감 없이 말을 흐리는 것에 반해, 돈에 능숙한 정역은 핏대를 세우며 목청을 높였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면, 조선기업과 수산기업은 그들이 소유한 토지는 적으나, 수입은 많고 부리는 사원 또한 많습니다.”

“...”

“허나 축산기업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토지를 소유하면서도, 수입은 그리 크지 않고 부리는 사원 또한 적습니다.”

“...”

극명하게 차이나는 비교에 모두는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기업 또한 모두 제각각 사정이 다를 게 분명하니 형평성을 따진다고 동일한 규제를 가한다면, 그거야 말로 역차별이 되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이다.”

“...”

“무역. 유통. 물류. 용연군은 참으로 신선한 말을 많이 만들더군.”

이들 모두 자본유학론을 읽어본 터라, 세종이 무얼 말하는지 곧장 알아차렸다.

그들이 상행, 상인이라 부르던 말의 세부, 확장개념이니까.

“그대들 모두가 상인집안의 난립을 우려하지 않나?”

“예...”

고려 때의 역사,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의 이유, 돈에 매몰되어 인의를 잊어버린 이들.

그들이 조선에도 출현하는 건, 모두가 부담스럽다.

“허나 같은 기업이라 내세우며, 행상과 다를 바 없다고 내세우는 상인집안을 인정하지 않는 건... 그 또한 역차별 아닌가.”

“...”

“그러니 차별 받는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똑같이, 허나 다르게 규제해 줘야하지 않겠나.”

“...!”

대신들은 세종의 말에,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은 상인집안의 득세를 억눌러, 조정과 나라를 흔들 수 없는, 고만고만한 상인집안만 인정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으니까.

“하오나... 그렇게 되면, 중국상인과 경쟁할 수 있겠습니까?”

미래를 굽어본 정역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조선이 진짜로 돈을 벌기 위해선 오는 외국상인을 막지 않는 걸 넘어서, 조선이 직접 밖으로 나가야 한다.

결국 상인집안은 언젠가 대외무역을 하게 된다는 건데... 일개 가문의 힘으로는 중국상인과 감히 경쟁할 수 없다.

체급차이가 너무 나서, 돈으로 찍어 누르면 뭐해보지도 못하고 다 눌릴 테니까.

“맞는 말이다. 중국이 통일에서 멀어져 점점 점입가경으로 빠져들고 있는 건, 일국을 뒤흔들 정도로 세를 키운 상인집단 때문 아닌가. 그들은 여전히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고착화 시키고 있지.”

“...”

의주로 들려오는 소문은 예나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중국은 관리와 상인, 군벌이 모두 뒤섞여서 혼탁한 흙탕물이 된 상태.

당장 조선과 가장 거래를 많이 하는 산동조차 그러했다.

“그러니 조선상인이 살아남으려면 힘을 키워야 하지 않겠나?”

“어찌...?”

모순된 말에 모두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떠올랐고.

“행상의 예를 따르면 되는 것 아니냐. 협동조합이라 했던가? 이 또한 용연군의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참으로 쓸 만하지 않나.”

“아...”

“그런...!”

대신들은 곧장 이해를 하고선, 행간에 숨어 있는 속내까지 읽어 들어갔다.

하나로 뭉쳐진 자본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수십개의 자본이 뭉쳐진 힘은 주장主將의 의지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러니 자본력은 키운다 한들, 감히 왕실과 조정의 뜻을 거스르려 한다면 협동조합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릴 거다.

그들이 의견의 합치를 이루는 건. 돈을 향해 나아갈 때지, 권력을 향해 나아갈 때가 아니니까.

중국상인 또한 명칭은 달라도,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뭉쳐 있으니... 조선상인에게도 그리 낯선 개념은 아닐 테고.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겠지.’

모두들 세종의 비상한 머리를 알고 있기에,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목덜미를 옭아맬 밧줄이 하나 더 날아온다.

“마찬가지로. 고가 토지제한법을 내세운 것도 그러한 이치다.”

“음...”

“흠...”

모두는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토지제한법은 기업규제법에 맞물려, 업종에 따른 토지소유의 상한선을 정해 놓는 것.

만약 목장을 한다고 하면 보다 많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고, 작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기업이라면 보다 적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겠지.

‘그렇다면... 농산기업은 어찌하려는 건가.’

대신들 모두는 당장 이 생각이 먼저 떠올랐고,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곧장 서책을 뒤져 세부사항을 찾아갔다.

허나 세종은 피식 웃으며, 친절하게 집어줬다.

“오백석. 그 정도면 충분히 가세를 불리고, 집안을 보존할 수 있지 않겠나?”

“끄응...”

“흠...”

대신들 또한 지주이니, 다들 골머리를 싸매며 생각을 이어갔다.

조선의 부자를 일컬어 흔히들 만석꾼이라 부르지만, 사실 만석꾼은 역사를 손꼽아 몇 명 되지도 않는 진짜 엄청난 부농이다.

그들이 만석꾼이 될 수 있었던 건. 조선중후기에 지주전호제가 보편화되고, 양민을 쉽게 노비화 시키고, 생활고를 버티지 못한 자영농의 토지를 쉽게 흡수하면서 그렇게 된 건데...

지금은 고려가 망한 지, 고작 한세대 밖에 지나지 않은 시대.

고려 때의 권문세족을 족치면서 그들의 땅을 잘게 쪼개버렸고, 태종이 집권하고선 원래 역사보다 훨씬 많은 피를 뿌리며 공신과 외척, 지방세력을 갈아버렸으니...

이들이 설령 대신이라 한들, 만석꾼을 꿈꾸는 건 어불성설.

시대 정황상 부농의 기준 자체가 다르니... 오백석 정도면 동네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대지주지.

모두는 쉽게 반대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오백석 정도면 농산기업을 인정해줘도 문제없지 않나? 다만 사원수를 규제하면 그치들이 알아서 먹고살 길을 찾게 되겠지.”

“...”

“흐음.”

“하오나...”

농사도 다 같은 농사가 아니고, 심는 품종에 따라 인력의 필요량 또한 달라지고, 논과 밭의 생산력 또한 달라질 테니...

결국은 법률로 오백석이라 규정해도, 오백석까지 못 가게 만들겠다는 뜻.

“만약 지금 소유하고 있는 땅이, 규정을 초과하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뭘 어찌하나. 팔아야지.”

“...!”

“혹여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너무 심한 규제가 아닐지...”

“왜? 그대들 집안이 소유한 토지가 오백석이 넘는가?”

“그건 아니옵니다!”

세종이 빈정거림 속에서 날선 칼을 세우자, 대신들 모두가 반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말이 쉬워 오백석이지. 오백석이면 사치하지 않는 한, 몇 대를 놀고먹어도 부족하지 않을 땅이다. 나라에 보탬도 되지 않으면서, 그렇게 많은 땅을 소유하려는 의도가 뭔가. 사노비라도 키우려고?”

“...!”

“전하!”

세종의 무시무시한 말에, 모두는 아예 의자에서 일어나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사노비. 그놈의 사노비 때문에 태종 대에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가.

몇 번의 자잘한 반란 때문에, 사병을 해체시킨 태종은 사노비 소유에 대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반란방지라는 명분 앞에 양반사대부든, 지방호족이든 사노비를 빼앗기는 걸,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헌데 세종마저 그 칼을 다시 꺼내들려 하니, 기겁할 수밖에.

“자리에 앉아라.”

“...”

“법률을 시행하지 않았으나, 양전사업이 진행된 지역에선 이미 토지규제법을 적용해 왔었다. 토지를 잃어버렸어도, 사노비를 잃어버렸어도, 지주집안은 자기 살길을 찾아 기업을 일궜고, 멀쩡히 번성하고 있는데, 무슨 문제가 생긴다는 것인가.”

“...”

모두는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고, 이내 공조판서 이지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허면... 농산기업을 일군 집안이 남는 토지를 이용하여, 다른 기업을 일구는 건 막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속에 피어오른 의문을 속시원하게 내지른 이지실을 보며, 모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지와 사원을 규제하려고 이런 법률을 제정했는데, 기업을 무한정 늘려버리면 규제의 의미가 없지 않나.

“업종이 다른 세 개 혹은 네 개의 기업까지는 허가해 줘야겠지.”

“...!?”

“과인이 그저 압박만 하려고 기업규제법과 토지제한법을 꺼냈겠는가. 토지를 소유하고 그 땅을 그저 농지로만 사용하면, 그게 나라에 보탬이 될까.”

“...”

“자영농인 전호佃戶가 늘어나는 건 바람직하나, 나라전체의 생산성과 발전을 생각하면 부자와 기업이 필요한 것 또한 당연한 말.”

“결국. 땅에서 벗어나 기업을 일궈 경쟁하면 모두가 좋은 일 아닌가. 허나 하나의 기업을 일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한 집안이 여러 개의 기업을 일구는 게 어디 쉬울까.”

“망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니, 그 피해는 사원인 백성이 고스란히 질 게 뻔한 일. 그러니 그 대책을 미리 마련해 둬야지.”

“...”

일리가 있는 말이라서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쉬워 서너개의 기업이지, 그걸 오롯이 토지로만 따지면 천석꾼을 훌쩍 뛰어넘는 재산이자 토지와 사원을 소유하는 꼴.

거기까지 평탄하게 갈 수 있는 집안이 몇이나 될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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