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챕터31. 머무르다 (1)
“고리대금법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
모두는 세종의 싸늘한 말투에,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으니까.
양반사대부든, 지방호족이든 가릴 것 없이, 그들의 치부나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
“조정 입장에서 보면 극악한 꼼수이나, 그치들 입장에선 쉽게 재산을 불릴 수 있는 편한 수단이었겠지.”
지금 시대의 의창은 이자를 받지 않고 환곡하거나, 무상으로 곡물을 나눠줬다.
자연스레 의창의 비축미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관아에선 보증 방법을 깐깐하게 하면서 최대한 환곡 받으려 했다.
이 기준을 넘지 못한 빈한한 이들은 결국 사채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고, 지주집안에선 일수,월수,장리長利, 복리이자라 할 수 있는 갑리甲利까지 적용해 등골을 빨아먹었다.
장리조차 이자가 연50%, 갑리의 경우 연100%를 넘는 경우가 있었으니, 백성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민간에서만 그랬을까.
공채公債라 하여 관아에선 민간지주들과 함께 펀드 비슷한 걸 조성해서 자본금을 만들고, 이걸 백성들에게 빌려줘서 부족한 지방예산을 조달하려 했다.
“...”
“그러나... 한편으론 이해할 수 있다. 재산을 불리는 방법이 토지와 노비 밖에 없었으니, 사채私債에 눈을 돌리는 것 또한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겠지.”
점점 고조되는 말투에, 대신들은 괜한 불안감이 들었다.
“전하...”
“하지만 그대들은 전조가 어찌하여 망했는지 모르는 건가!”
아니나 다를까. 벼락처럼 떨어진 책망에, 모두는 다시금 고개를 조아렸다.
고려 때에 문벌귀족들의 사채놀이가 극심해지면서, 자영농과 양민은 죄다 빚을 못 갚고 토지를 빼앗겨 노비로 빨려 들어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이 들어섰는데, 조선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지 않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법인데... 따지고 보면 이렇게 된 이유는 결국 조선조정에 돈이 없었기 때문.
“허나 지금은 달라졌다. 더 이상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다.”
세종의 자신만만한 말에, 모두는 고개를 조아린 채로 귀만 열었다.
‘금융이라 했던가.’
세종은 오래전 연오랑이 말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상업자본을 인정한 이상, 돈이 돈을 부르는 법. 그리고 그 돈을 가장 쉽게 불리는 방법이 바로 금융이자 고리대금업이다.
이를 풀어주면 백성들이 고초를 겪는 건 물론이거니와, 훗날 조정과 왕실을 위협할 자본금을 보유한 집안과 세력이 등장할 지도 모르는 일.
훗날에 어찌될지는 둘째 치고, 당장은 시작부터 그 싹을 잘라버려야 했고... 지금은 명분도, 상황도 딱 좋다.
이앙법 및 선진농법으로 인한 소출 증대, 양전사업과 사노비 속량으로 인한 자영농의 급격한 증가, 중국에서 수입한 막대한 양의 곡물.
해산물을 비롯해 곡물식량을 대체한 다양한 식재료의 활성화, 행상과 기업의 활성화로 인한 물산의 가볍고 빠른 이동.
이 모든 게 하나로 결합되어, 대다수 백성들은 빚을 지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다.
원래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진 상태.
의창과 공채의 사정 및 국가재정상태 또한 마찬가지다.
“양전사업이 진행된 곳에선 의창과 군자창을 비롯한 관창官倉을 하나로 통합하여 단일세수가 걷히고 있고, 곡창은 전부 재보수하여 손실분이 줄어들었다.”
곡식창고를 열심히 지어본들 각 지방관아에서 관할하는 한, 뭐 얼마나 제대로 지어놓고 관리하겠는가.
쥐는 어디에든 있고, 창고가 부실하면 곡물을 아무리 잘 쌓아놔도 순식간에 썩기 마련.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에선 곡물창고만 관리하는 부서를 따로 신설했고, 석재와 벽돌을 활용한 전문 곡물저장창고를 짓기 시작하면서 손망실분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늘어난 세수와 무역을 통해 얻은 세수는 또 어떠한가.”
중앙집권이라는 게. 단순히 관리가 충원되고, 명령체계가 단일화되고, 관직과 행정조직만 합쳐졌겠는가.
예산 또한 하나로 통일 중이다.
이제 지방관아는 지방예산을 직접 조달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더 이상 공채를 발행할 이유도, 지주들과 함께 돈놀이를 할 이유도 없어진 거지.
“여기에 의창을 대체할 기관을 신설하여 대출업무만 담당하게 되면, 지방관아에서 예산을 신경 쓸 이유가 없고 민간사채 또한 필요가 없지 않나.”
세종은 터럭 같은 의심조차 품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
‘이미 하동에서 보지 않았는가.’
오래전에 연오랑은 하동에서 이와 같은 작업을 시행했고.
태종은 보고를 받고 유심히 지켜봤으며, 세종 또한 왕위에 오른 후에 하동의 사정을 알게 됐다.
연1할의 이자만 붙인 초저이자 대출을 실시하여, 하동 지주집안의 돈놀이를 어떻게 개박살 냈는지 알고 있었던 것.
“헙!”
“...!”
이미 논의되고 있는 사안이지만, 모두는 또 다른 새로운 조직이 창설된다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들렸다.
안 그래도 육조체제가 개편되면서 온갖 부서가 새로 생기는 중인데, 또 추가되려는 모양이다.
“조정이 나서서 관리임용을 차별 없이 쉽게 해주고, 가세를 보존하고 부흥할 방법을 일러주는데도! 어찌 사족과 호족이라는 자들이 이를 거부하고 역행한단 말인가.”
대신들은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말에, 그저 몸을 움츠릴 따름.
“돈을 벌고 싶으면 기업을 일궈라. 같잖지도 않은 돈놀이 따위는 그만하고.”
“...”
“신설될 율법부에는 사헌부 장령들도 포함될 터, 관리들의 비위를 감찰하는 이들이 민간 또한 감찰하게 될 것이다. 이번 기회에 백성들을 피눈물나게 하는 돈놀이를, 반드시 뿌리 뽑아 응징해 주겠다.”
“...”
쾅! 탁자를 후려치며 외치는 세종을 보며, 모두는 앞으로의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세종이 이럴 정도면 태종의 반응은 또 어떻겠는가.
착호군을 이끌고 있는 태종은 말이 아니라 칼로서, 민간사채를 작살내 놓을 게 분명했다.
*****
조선 34년. 세종 7년
푸쉬쉬... 흡사 아궁이처럼 생긴 가마터 수십 곳에서, 후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저쪽 한편에선 사람들이 모여 흙장난을 하고 있었는데, 흡사 반죽을 하듯 거무튀튀한 무언가를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만든 새카만 덩어리를 틀에 찍어, 길쭉하고 얄팍하게 모양을 잡았는데 꼭 젓가락을 닮아 있었다.
여러 형태로 만들어진 검은 젓가락들은 이내 식어서 굳어졌고, 크기별로 구별해 한곳으로 뭉쳐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
“어르신. 완성됐습니다.”
“그래? 어디 볼까나.”
남부에선 이미 여름이 찾아왔지만, 북방은 마지막 기운을 담아 찬바람을 쏟아내며 여름을 밀어내고 있었다.
언제나 함께 했던 호피장옷을 대충 걸쳐 입은 연오랑.
그는 손에 쥔 검은 젓가락을 나무를 묶어 만든 붓 비슷한 물건에 끼워 넣었다.
쏙하고 들어가서, 검은 젓가락의 끝부분만 나무틀 끝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이빨처럼 벌어져 있던 나무틀 끝을 끈으로 동여매자, 안에 들어 있던 심은 쭉쭉 눌러 써도 밀려나지 않게 고정됐다.
“잘 만들었군.”
“흐흐.”
“헤헤.”
드디어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와서 일까?
이런 일에 젬병이면서도, 연오랑의 비서라는 이유만으로 이리저리 불려 다녔던 연전위와 연조운이 히죽히죽 웃어댔다.
드디어 이 지랄 맞은 반복 작업이 끝날 것 같으니까.
“이게 뭔 줄 아냐?”
“잘 모르겠습니다.”
“봐라.”
연오랑은 피식 웃고선 손짓했다.
역시나 이런 시험 또한 한두번이 아닌지, 저편에 있던 청년관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다양한 색상과 질감의 종이들을 들이밀었다.
“이게 흔히 쓰는 저지고, 이건 상지, 마골지, 노화지다.”
“음...”
하나씩 보면 그냥 종이구나 하겠지만, 한곳에 모아놓고 만져보고 살펴보면 확연히 차이 났다.
물론 수작업품이니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두께와 질감, 무게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어느 종이에 잘 써지는지 한번 볼까?”
쓱쓱 손을 놀리자, 정체모를 물건은 검은 선을 토해냈고, 과연 종이에 따라 차이가 나는지 어떤 건 선이 그려지고, 어떤 건 미끄러져서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오...!”
“과연 차이가 나는군요?”
“그리고. 이거.”
끝으로 연오랑은 누런색과 흰색, 고동색이 죄다 섞인 종이를 꺼내들었다.
쓱쓱 손을 놀리자, 어째 선이 죽죽 그어지면서 글자가 완성되는 게 아닌가.
“오...! 새로 만든 혼합지에 가장 잘 써지는 군요!”
“연필鉛筆이라고 하셨습니까? 과연 대단하십니다.”
새로운 종이와 새로운 필기구의 조합이 꽤 마음에 든 걸까?
“신기하긴 한데, 이게 뭐가 그렇게 대단해?”라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는 연전위와 연조운을 뒤로하고, 청년관리들은 흡사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마냥 눈빛을 번뜩였다.
“붓 대용으로 충분히 쓸 수 있겠습니다!”
“아무렴요! 이제 먹물통과 세필을 안 들고 다녀도 되겠습니다.”
“으... 빨래하는 것도 이제 끝이다!”
“그야 그렇게 써먹으려고 만든 거니 당연한 건데... 종이를 원체 가려서 말이지.”
청년관리들은 뭔가 맺힌 게 많았는지, 연오랑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어째 자기들끼리 떠들기 바빴다.
‘저렇게 좋아할 일인가 싶기도 한데... 그럴 만 하기도 하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피식피식 웃어댔다.
생각해보니 그를 따라다닌다고, 먹물을 줄줄 흘려대며 소매와 허리춤을 검게 물들이곤 했으니... 충분히 저럴 만도 하다.
3년 전에 끝난 여진정벌. 아니 여진흡수작전은 확실하다 못해 완벽한 성과를 거뒀고, 북방은 조선의 강역이 되어 곳곳에 신도시가 건설됐다.
약조대로 송주(길림)을 중심으로 창주(송원)으로 이어지는 수로가 열렸고, 복여위는 물론이고 우량카이 3위와 전부 무역을 시작했지.
요동 입장에선 나름 충격이었을 거다.
자기가 못 먹는 떡을 넘겨준 건데... 조선은 그걸 죄다 꿀꺽 삼켜버렸고, 한 해가 지나기도 전에 정벌을 넘어 정복을 해버렸다.
이젠 남,서,북으로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압박을 받는 처지에 놓였으니, 그 심기가 좋을 리가 있나.
조선이 무서우니 뭐라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었을 거다.
그렇다고 “요동과 조선의 관계가 악화됐나?”라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애초에 조선과 요동은 체급이 차이나서 함부로 건들지 못했는데, 북방을 먹으면서 체급차이가 더 커졌다.
거기에 요동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심양파와 요양파가 권력다툼을 하고 있는 상황.
요동반도를 쥐어튼 요양파는 산동에서 넘어오는 물산을 쥐고서 심양파를 압박해 왔었는데, 조선이 바로 옆에 진출하면서 심양파에게도 선택지가 생겼다.
창주에서 우량카이 3위와의 무역이 진행됐다면, 송주와 심양파의 무역거점인 개원에선 조선과의 무역이 성행하게 된 거지.
세종과 연오랑이 그려놓은 계획대로, 요동을 분열시키고 그들을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는 작업이 아무도 모르게 물밑에서부터 시작된 거다.
그렇게 재작년 겨울동안 송주에서 머물며 뒤처리를 한 연오랑.
그는 해가 지나자, 이곳 두만강 하류이자 동북면 물류의 중심지인 경원으로 내려왔다.
북방을 정리했으니 이제 눈을 돌려 남방으로 나갈 차례가 됐고, 그에 따른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
하여 그간 벌여놨던 일을 재정비하고, 함길도 북부에 널려 있는 광산과 탄광을 조사하고 개발하는 일을 진두지휘 해왔는데... 뜬금없는 대박이 터졌다.
광산장인들은 이제 어지간한 광석을 구별할 줄 아는데, 석탄도 아니고 그렇다고 토탄도 아닌 요상한 광석을 찾아낸 것.
바로 흑연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흑연을 석묵이라 부르며, 본격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그냥 돌이나 나무에 표시를 하는 용도로 써왔었다.
연오랑은 그걸 알아보고선, 연필을 만들기로 했는데... 미래의 연필처럼 만드는 건 손이 너무 많이 갔다.
한두개 만들 것도 아닌데... 언제 나무를 죄다 깎고, 흑연을 작은 심 형태로 만들고, 그 둘을 아교로 발라 붙이겠나.
‘어떻게 하면 싸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나무심통을 만들고, 연필심만 갈아 끼우는 방법으로 선회했다.
그 결과. 어째 연필이 아니라 미래의 샤프펜슬과 색연필을 섞어 놓은 것처럼 생긴 물건이 탄생했지.
‘크기도 연필보다 커져서, 꼭 크레파스나 색연필을 쓰는 것 같단 말이지.’
연오랑은 손에 쥔 연필을 주물럭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 그래도 군부에서는 꽤 좋아할 테니까.’
더 말해서 뭐할까.
무관들은 안 그래도 보고서를 쓰느라 죽어나가는데, 야지를 돌아다니는 이들이 언제 먹을 갈고 언제 정자세로 앉아서 보고서를 쓰고 있겠는가.
청년관리들처럼 먹물통과 세필을 가지고 다니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연필은 그 문제를 한방에 해소할 물건이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이제 슬슬 효과가 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내가 주도하지 않아도 잘 굴러간단 말이지.’
열심히 뿌린 기술발전이라는 씨가 드디어 싹이 올라왔으니, 만족스런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이걸 팔아먹으면 좋겠지만... 연필을 팔려면 종이까지 세트로 팔아야 되는데, 저렇게 후줄근한 종이를 누가 사겠어.’
연오랑은 혼합지와 연필을 들고서 방방 뛰고 있는 청년관리들을 바라봤다.
사실 연필은 조선에서 흔히 쓰는 저지에 사용하기 힘든 물건이니, 당연히 중국이나 일본에 팔아먹기도 힘들다.
연필은 흑연이 갈리면서 그 분말이 표면에 달라붙는 방식으로 써지는 물건인데, 먹물이 잘 스며들도록 개량된 종이에 잘 써지겠는가.
물기가 없는 뻑뻑한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 마냥, 저지에는 글씨가 잘 써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연필에 적합한 종이는 표면이 거친 마골지나 노화지에 가까웠는데... 연오랑이 손을 쓰지 않아도 조정에서 알아서 온갖 종이를 만들어낸 것.
여기에 배봉연구소의 종이기술자들은 드디어 값싸게 만들 수 있는 혼합지까지 만들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