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챕터31. 머무르다 (2)
‘역시 공돌이를 모아 놓고 굴리면 뭐든지 나온단 말이야.’
그는 저 멀리 한성에 있을 장인들을 생각하며, 속으로 웃어줬다.
연오랑이 종이 만드는 법에 대해 아는 건 아니지만, 미래의 종이가 죄다 펄프로 만들어지는 건 알고 있었다.
펄프는 나무를 잘게 파쇄한 후 화학처리 과정을 거쳐서 만드는데, 화학처리 과정은 모르잖아?
별 수 없이, 중국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차용.
온갖 나무를 죄다 맷돌에 갈아서, 흡사 죽처럼 만들어 그걸 끓이고 식히기를 반복하고, 얇게 펴 굳혀서 종이로 만드는 거지.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저 혼합지.
얼룩덜룩하고 색도 예쁘지 못해서 꼭 넝마처럼 생긴 탓에, 품격이란 전혀 보이지 않지만... 재료 수급도 쉽고 가격도 엄청나게 싸다.
관리,학자,유생들이 쓰진 않겠지만, 질 보다 양과 가격을 중시하는 군부와 민간에선 연필과 함께 세트로 잘 써먹지 않을까.
‘밖에서 막 쓰기 편하잖아? 종이색이야, 더 개발하면 하얗게 되겠지 뭐.’
개발이야 공돌이들이 할 테니, 연오랑은 그저 속 편하게 생각했다.
“일단 종류별로 다 만들어보고, 착호군에 뿌려서 의견 좀 모아봐라. 뭐가 더 쓰기 편한지 알아야 하니까.”
“흐흐. 옙! 알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년관리들은 연필을 주워들고 냉큼 발을 놀렸다.
‘저기도 잘 돌아가고 있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저편에 있는 작업장으로 다가갔다.
검은 가루가 잔뜩 흩날리는 곳이었는데, 거대한 맷돌 비슷한 물건을 이용해서 흑연을 모래알처럼 곱게 가는 중이었다.
분진이 워낙 많이 날리는 탓인지 작업장은 옆이 트여 있고, 인부들은 마스크마냥 코와 입을 가리는 두건을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분진가루를 막지 못해서, 얼굴과 옷은 새카맣게 변해 있었고.
“고생하네.”
“대감 어른!”
“내가 시킨 대로, 쉬는 시간은 주면서 일하는 거냐?”
“물론입니다. 저 짐승도 마찬가지지요.”
“흐음.”
관리관은 의심하지 말라는 듯, 파쇄기를 돌리고 있는 노새를 가리켰다.
노새도 코와 입을 가리는 두건을 걸쳐놔서 꽤 우스운 꼴을 하고 있는데, 그런 녀석조차도 흑연먼지에 익숙해졌는지 잠자코 맷돌만 돌리고 있었다.
“오늘 옮기는 날인가?”
“예. 짐수레 6개 분량. 90통입니다.”
“음.”
‘나쁘지 않네.’
“분배는?”
“30통은 한성의 화약제조청으로, 30통은 원산의 창고로, 30통은 조산포구로 갈 예정입니다.”
“좋아.”
‘내 토막지식이 이렇게나 쓸모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연오랑은 자화자찬하며, 속으로 웃었다.
이 시대의 화약은 보관기간이 매우 짧았다.
화약은 습기를 머금어 뭉쳐지고,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짓눌려진다.
가만 놔두면 화약가루가 아니라, 떡처럼 덩어리지고 딱딱해지는 거지.
화약장이나 화포병이 멀쩡한 화약통을, 괜히 시시때때로 뒤집고 흔들어서 뒤섞는 게 아니다.
만약 덩어리진 화약덩어리를 재활용하겠다고 망치로 두들기거나 집어 던져서 깨부수면? 대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무수히 있었던 사례니까.
이걸 방지하는 방편 중에 하나가 흑연코팅.
연오랑은 흑색화약이 무연화약으로 발달하는 중간과정은 몰라도, 이것만은 주워들어서 알고 있었다.
사실 말이 좋아 코팅이지, 그냥 화약가루와 흑연가루를 한통에 넣고 열심히 흔들어 섞으면 끝이니까.
물론 연오랑은 시키기만 하고, 화약장인들이 무한반복 노가다를 통해 최적의 비율을 찾아냈지.
이렇게 만들어진 화약은 안정성이 높아서 화력이 더 강해질뿐더러, 습기에도 강해져서 보관기간이 늘어났다.
‘포구로 나가는 것도 그래.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크게 성장하고 있단 말이지.’
연오랑은 포구로 갈 흑연을 보면서,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그의 발명품. 정확히 말하면 그가 대중화를 선도한 톱니바퀴는 무섭도록 쓰임새를 늘려갔다.
그가 만든 온갖 발명품에 톱니바퀴와 구동축을 박아 넣었더니, 공작기업에선 죄다 그걸 따라하며 특색 있는 톱니바퀴를 만들어 여기저기 끼워 넣었던 것.
나무와 쇠를 대충 덧대어 만들어서 내구성이 엉망이지만, 무려 기어박스와 유사한 물건을 만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톱니바퀴의 사용이 급증하면, 필연적으로 윤활유의 소모량도 급증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시대에 윤활유라고 해서, 특별한 게 따로 있나.
있는 기름을 닥치는 대로 가져다 썼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게 고래 기름.
동래를 비롯해 동해바다와 닿아 있는 포구에선 포경선이 등장하여, 동해바다에서 고래를 잡았고... 나머지 부산물은 알아서 챙기고, 조정에선 기름만 싹 챙겼지.
그 다음으로 쓰임이 많은 건 소, 돼지기름.
이건 먹는데도 써먹었지만, 윤활유로도 써먹었다.
물론 이 시대의 톱니바퀴가 그리 정교한 것도 아니고, 회전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어서, 윤활유가 없어도 성능을 발휘하지만... 군부의 요청은 무시할 수 없다.
착호군과 신기선군은 신형마차와 야전화포를 비롯한 온갖 기계장치를 사용 중인데,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선 윤활유가 필수였던 것.
이 문제를 해결해 줄 물건이 바로 흑연이었다.
흑연을 미치도록 곱게 갈면, 윤활유처럼 써먹을 수 있으니까.
훨씬 싸게 먹히고 깔끔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라서, 연오랑이 선보이기 무섭게 군부로 빨려 들어갔지.
'이 때문에 북방에서는 흑연광산을 찾는다고 난리를 피웠는데... 찾았나 모르겠네.'
그가 이런저런 옛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저편에서 달려온 무관이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소리부터 내질렀다.
“대감 어른!”
“왜!?”
“세자 저하께서 곧 당도하십니다!”
“오? 그래?”
뜬금없이 튀어나온 세자건만, 어째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었을까?
연오랑은 반색하고선, 관리들에게 일거리를 던져주고 냉큼 몸을 날렸다.
사박사박. 곱게 갈리는 자갈도로를 밟으며, 세자를 호종하는 행렬은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수는 대략 이백여명. 검은 두정갑을 입은 호위기병이 대략 백여명에, 점박이회색마를 탄 세자와 그 옆과 뒤에서 따라오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관원들.
그 뒤로 마차에 타서 이동 중인 나인과 내관이 줄줄이 이어졌다.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은 모습이지만... 오히려 이게 정상이다.
개판인 조선의 도로사정상,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것보다 말을 타고 다니는 게 더 편하니까.
가마? 가마는 가까운 거리를 이동할 때나 타는 거지, 외방으로 나갈 때 타는 물건이 아니지.
특이한 건 또 있다.
세자의 복장이 참으로 요망하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기병군화를 신고, 두루마기를 닮은 가죽코트를 휘날리고 있다.
물론 세자가 입는 옷이니만큼 화려하게 염색하고 금장단추를 박아 넣었어도, 그 모양새가 퍽 괴상했지.
하지만 그런 모습이 익숙하고 아무렇지 않은 걸까?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 관원들마저도 책망은커녕,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연오랑이 일으킨 의복혁명은 조선을 휩쓸고 지나간 지 오래다.
그는 미래의 기억을 끌어와 온갖 옷을 만들어 입고 다녔고, 금세 착호군에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착호군이 지나가자 요상한 옷차림은 민간으로 흘러들어갔고, 이내 곧 민간의 유행이 되어 조정과 왕실로 역행했지.
이런 흐름에 조정이 불을 붙였다.
군사에 진심인 세종과 태종은, 기존 조선무관복을 폐지하고 미래의 전투복과 유사한 신군복을 채택해 군복을 교체했다.
이런 경향이 조정으로 흘러들어가자, 일반 관복 또한 개량관복으로 은근슬쩍 바뀌게 된 거지.
이미 태종대에 복제에 관한 문제가 나왔다가, 쓸데없이 돈 잡아먹는다고 나중으로 미루지 않았나.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세종 또한 태종의 전례를 따랐으니... 퍽 요상하게 생기긴 해도 나름 멋스럽고, 왕족의 품위만 지킨다면 세자가 뭘 입든 상관없었다.
“여기도 자갈도로를 깔았군요.”
“예.”
옆에 두만강을 두고 길게 이어지는 자갈도로를 걸으며, 세자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굳이 여기에 자갈도로를 깔 필요가 있었을까...”
“경원과 조산포구를 이어주는 관도니, 선박 말고도 짐수레와 마차가 많이 드나들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세자는 이해가 된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산포구는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항구고, 경원은 두만강 남쪽에서 가장 큰 도시.
둘 사이를 오가는 사람이 많은 건, 당연한 이치일 거다.
“헌데... 원행을 하면서 느끼는 건데, 어째 도성보다 지방도시와 도로가 더욱 정돈된 것 같지 않습니까?”
“...”
“...”
세자의 의문이 나름 매서웠던 걸까? 세자시강원 관원들은 할 말이 없어, 괜히 먼 산만 바라봤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간 몇 해간 원행을 하면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전부 가봤는데, 양전사업이 끝난 지방의 도시는 하나같이 비슷한 형태에, 비슷한 깔끔함을 보여줬다.
더욱이 이들은 원산을 거쳐 왔는데, 그곳은 자갈도로를 넘어서 석회도로가 깔려 있었지.
“이유가 뭔 것 같습니까?”
“도성의 인구와 지방도시의 인구를 비교하긴 힘들겠지요.”
“흐음... 그건 그렇군요.”
세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보단 돈이 없어서 그런 것 같은데요?”
“크흠.”
“흐흠.”
이번에도 꽤 매섭게 찔렀는지, 관원들은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조정이 하겠다는데 감히 백성들이 반항하겠냐만, 그래도 민심을 생각하면 최소한의 배상은 해줘야 하지 않겠나.
만약 재개발구역에 양반집이라도 껴 있으면, 문제가 더 복잡해 질 테고.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도성정리계획을 진행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대로변을 차지하고 있던 집들은 철거해 도성 밖으로 옮겼고, 그 외에 도로가 들어설 자리를 정해놓고 집을 못 짓게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입관원들이 머무는 신도시처럼 말이지요?”
“예.”
모두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만 명이 넘는 인원이 단기간에 한성으로 몰려들었으니, 그 혼잡함이 오죽하겠나.
허나 큰 문제가 없었던 건, 성저십리 외각에 무섭도록 늘어난 신도시, 신마을 때문. 이 위성도시에 관리들뿐만 아니라, 도성에 살던 기존 백성들도 꽤나 이주했다.
그 탓에 성저십리 구역이 오히려 경기도의 권역을 야금야금 집어삼키며 넓어지고 있었지.
“음. 도성에도 석회도로가 깔리면 좋겠는데 말이죠.”
“예...”
세자의 기대감 섞인 말에, 다들 그저 쓴웃음만 머금었다.
이 문제는 잠깐 조정을 흔들었다가, 결국 예산문제로 뒤로 미뤄졌으니까.
깔면 당연히 좋긴 한데, 지금 당장 꼭 해야 할 일은 아니다.
“기대됩니다. 과연 용연군 대감이 경원을 어떻게 바꿔놨을까요?”
“글쎄요...”
“원산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이들이라고 동북면 최북단에 위치한 경원을 가봤겠는가.
세자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기대감을 품고 저 먼 곳에 있을 경원을 그려봤다.
미리 따로 연락을 받은 걸까? 원산과 마찬가지로 거창하게 새로 지은 경원 관아에는, 인근 현의 고위관리들과 착호군, 신기선군의 지휘관들이 모여 있었다.
이 변방 촌구석에 무려 세자가 행차하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나.
죄다 몰려와서 눈도장을 찍는 건 당연한 절차다.
“오셨습니까. 대감!”
“충성!”
“쉬어라.”
“옙!”
연오랑과 함께 한 세월이 얼마인가.
무관들은 그저 히죽 웃으며 냉큼 자기자리로 돌아갔고,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던 관리들은 어색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렇게나 허물없이 예법을 따지지 않는 연오랑의 모습은, 언제 봐도 어색하니까.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연오랑은 냉큼 걸음을 옮겨 대청마루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어. 별일 없고?”
“별 일이 있겠습니까.”
이젠 앳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단아해진 정선공주.
그녀는 연오랑과 함께 지내면서 그의 어투와 별난 행각에도 익숙해졌는지, 그저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오늘도 작업실에 갔다 왔나 보지?”
“예.”
연오랑은 정선공주의 손에 묻은 톱밥먼지를 가볍게 털어줬고, 공주는 슬그머니 볼이 붉어졌다.
사실 연오랑은 나름 걱정했었다.
자신이야 조선팔도를 싸돌아다니는 게 아무렇지 않지만, 평생을 궁궐에서 살던 공주가 용연, 원산, 경원으로 이사를 다니는 건 퍽 힘겨운 일이니까.
허나 괜한 걱정이었다.
그녀는 눈치 볼 사람이 없는 게 그렇게 좋은지, 볼 때마다 새로운 이 낯선 조선땅을 여행하는 게 퍽 재밌던 모양이었다.
우울해지기는커녕, 더욱 활발하게 활개치고 다녔으니까.
더욱이 연오랑은 그녀가 하는 일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줬으니, 그녀는 머무는 곳곳마다 장인들과 함께 공작실을 마련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아마 공방에서 설계도와 도면을 보다가 나왔을 거다.
“뭐 했어?”
“오랜만에 장 좌랑에게서 서신이 와서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오? 뭐래? 잘 만들고 있데?”
“그리 쉽게 되진 않는 모양입니다.”
“하긴.”
연오랑은 괜히 풀죽은 모습을 보이는 공주를 다독여주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장영실이라고 해도, 기계식 시계를 만드는 건 쉽지 않겠지.’
이 생각이 머릿속에 먼저 떠올랐으니까.
오래전 그가 의뢰하고 포상금을 내건 프로젝트는 유럽에서 슬슬 만들어지고 있을 종탑이나 탑시계와 같은 기계식 추시계였다.
추시계의 구조가 비교적 간단하더라도, 기반지식 없이 곧장 만들 순 없는 노릇이니... 근 2년에 걸쳐 연구소와 공야사에선 밤낮을 잊어가며 연구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불가능하진 않을 거야.’
이내 곧 의구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밀려왔다.
지금 시대의 조선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기술력이 현격히 떨어지는 편이 아니다.
그가 개입하면서부턴 오히려 앞지르는 분야도 생겨났지.
설령 익숙하지 않은 톱니바퀴와 같은 기계장치라고 해도... 이게 돈이 된다는 걸, 이걸로 관리가 되고 승진할 수 있다는 걸 모두가 인지하자.
연오랑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무섭도록 발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