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챕터31. 머무르다 (3)
“그래서 말이죠...”
그는 조잘조잘 서신의 내용을 풀어놓는 공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공주가 장영실과 친분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단 말이지. 뭐. 결과적으론 잘 된 일이지만.’
지금껏 그는 워낙 바쁘게 돌아다녔기도 했고, 의도적으로 조정과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장영실과 직접적으로 엮일 일이 없었다.
연오랑은 여전히 자신의 위치가 애매한 걸 잊지 않았다.
그가 다방면에 능력 있는 걸 모두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역풍이 불까봐 차마 말은 하지 않아도, 노신과 대신들 중에선 “저 어린놈은 정식 관직도 없으면서, 뭔데 저렇게 군권을 쥐고 설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했으니까.
“큰 나무는 바람 잘 날이 없다.”라는 말처럼, 특히나 군권을 한사람이 오래 쥐고 있으면 당연히 뒷소문이 나오기 마련.
아무리 세종과 태종이 연오랑을 믿고 밀어줘도, 주변에서 시끄럽게 굴면 눈치와 형평을 봐서라도 그의 말만 따를 순 없는 거니까.
그럼에도 별 탈 없이 진행될 수 있는 건.
계획대로 순환근무를 하는 것도 있지만, 군부의 핵심인사들이 죄다 세종이 믿고 키우는 인물들이지, 연오랑이 직접 키운 인사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연오랑은 조정신료들을 의도적으로 멀리하고, 인사문제에는 개입하지 않았지.
헌데 알아서 쑥쑥 크고 있는 장영실에게 관심을 주다가, 괜히 정쟁의 빌미가 되어 장영실이 곤란해지면 안 되잖아?
그저 배봉마을을 통해서, 아이디어와 토막지식을 건너건너 전해주는 정도로 그쳤었다.
그런데 공주와 장영실이 친분이 있을 줄이야.
이젠 의심받을 일 없이, 공주를 통해서 직접 알려줄 수 있게 된 거지.
“그래도 무게추를 만들어서, 초침을 옮기는 것까지는 성공했다는 거네?”
“네. 그런데 그게 들쑥날쑥하고 항상 같지 않아서 고민 중이라네요? 꼭 60초침으로 나눠야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거야... 진동수를 계산하면 그렇게 되지 않겠어?”
“그런가요?”
“그럴 거야... 아마도?”
‘내가 익숙해서 그렇지. 미래에 표준시가 그렇게 될 거고.’
공주의 까다로운 질문에, 연오랑은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공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줬다.
그도 한 시간을 왜 60분으로 1분을 왜 60초로 나눴는지 모르는데,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잘 안되면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면 그만이다.
중요한 건, 두루뭉술한 1시진이라는 시간 개념을 1시간으로 쪼개고, 그 1시간을 분과 초 단위까지 쪼개는 것에 익숙해지는 게 중요한 법.
1시간이 60분이 아니라 30분, 12분, 24분이 된다한들,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연오랑과 공주가 시계에 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관아의 문을 박차며, 완전무장한 기병이 제비처럼 몸을 날려 들어왔다.
“드디어 오시는군.”
“도착하셨나 봅니다.”
세자가 보낸 게 분명하니,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
모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오와 열을 맞춰 정렬했다.
당연히 연오랑과 공주는 가장 앞에 섰고, 연오랑은 이제 막 경원시내에 들어왔을 세자를 떠올렸다.
‘그 꼬맹이가 얼마나 컸을까나... 아닌가? 아직도 꼬맹인가?’
그는 세자의 나이를 생각하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고.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
그는 눈앞에 세자가 와있는 것 마냥 중얼거리며, 과거를 더듬었다.
세자 이향. 훗날 문종이라 불리게 될 인물.
세종에 가려져서 은근히 저평가 된 인물인데, 알고 보면 그도 꽤나 능력 있는 사람이다.
인물도 훤칠하고, 머리도 좋고, 무예도 익혔고, 세종처럼 군사에도 밝은 화력덕후.
다만 왕 생활을 오래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지만... 건강이 악화된 세종 말년에 대리청정을 오랫동안 해왔으니, 따지고 보면 집권을 적게 한 것도 아니지.
그런 그에게 약점. 혹은 불운한 점이 있다면.
부부생활이 완만하지 못해 자식을 늦게 봤다는 것과 연이은 3년상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지고, 종기가 크게 나서 그걸 치료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는 점이다.
문제점을 알았으면 당연히 해결책이 나와야 하는 법.
‘형이 너 건강하게 키우려고, 별 짓을 다 한 걸 알기나 하냐?’
연오랑은 옛기억을 더듬으며, 다시금 속으로 중얼거렸다.
3년상 문제는 진작 해결했다.
기간이 훨씬 짧은 49일상으로 바뀌었고, 그 절차조차 간편해져서 초막을 짓고 곡을 하며 지내는 것도 없어졌다.
더불어 세종 또한 건강해지고 있으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원래 역사처럼 고생하다가 죽는 일도 없겠지.
다음은 건강문제.
종기도 어찌 보면 피부병이고, 깨끗하게 씻지 못하거나 면역력이 약해져서 생기는 병이다.
해결 방법은 두 가지로, 그냥 몸이 튼튼해지든가 아니면 외과시술을 통해 종기를 제거하는 거다.
몸을 깨끗이 하고 튼튼해지게 만드는 건, 진행 중인 상황.
몸 쓰기 귀찮아하던 책벌레 세종조차 칼질을 익히게 만들었는데, 세종을 보고 배운 문종이 어려서부터 책만 읽었을 리가 있나.
녀석은 세자가 되었을 때부터 공부와 함께 칼질도 익혔고, 연오랑이 선보인 온갖 미래 음식을 통해 고른 영양소를 섭취해왔다.
고기덕후인 세종조차 당뇨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음으로 양으로 별짓을 다했는데... 한창 클 나이인 문종이 문제가 생기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깨끗이 씻는 것도 해결된 상황이다.
착호군을 통해서 목욕탕과 한증막은 민간에 강력한 영향을 주며 깔려갔고, 신입관리를 위한 관사에 부속 건물로 지어놓은 목욕탕과 한증막 또한 절찬리에 운영되고 있다.
민간과 조정관리 모두가 옷 입고 씻는 유학식 목욕문화가 아니라 홀딱 벗고 씻는 목욕 문화에 익숙해졌고, 석탄이 본격적으로 채굴되면서 연료문제도 해결됐으니...
목욕탕과 한증막은 조선만의 특별한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됐지.
이러한 경향은 당연히 왕실에 흘러들어갔고, 태종과 세종은 이미 오래전에 전용 욕탕을 설치해 사용 중이다.
세자인 문종 또한 동궁에 자신만의 욕탕을 만들었으니, 어지간히 잘못하지 않는 한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일은 없을 거다.
다음으로 할 일은. 만약 원래 역사처럼 종기가 생겼을 경우, 이를 해결할 의술을 발전시키는 것.
‘의외로 이건 큰 반발이 없었던 말이지. 역시 운석핵꿀밤의 여파일까? 아니면 고려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조선초기라서 그런 걸까?’
연오랑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금 자신의 업적을 되짚어갔다.
의학과 약학을 연구하는 건, 그가 출사하기 전에 하동에서부터 집중했던 일이다.
항상 노래 부르는 “청결”개념을 주입시키기 위해선 그 근거가 필요했고, 축산기업과 약초기업을 제대로 굴려 돈벌이를 하기 위해서도 의학,수의학,약학을 알아야 했으니까.
출사 후엔 배봉마을 통해서 조정과 직접적으로 연계했고, 조정의 힘을 빌려 전국을 뒤져 옛 의학서를 찾고 의원들을 모아 교육시켰지.
곁다리지만, 이 작업을 통해서 중국은 물론이고 조선에서도 흔히 쓰는 주사朱砂를 약재에서 빼버렸다.
이건 수은이나 마찬가지인데, 미쳤다고 이걸 약재로 쓰고 있냐.
아무튼. 이 작업은 세종과 태종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는데, 바로 두창을 해결할 수 있는 종두법 때문.
종두법을 제대로 시행하고, 각종 전염병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모든 사전작업이 필요했던 거지.
의학이 발전하는 걸, 두 왕이 거부할 이유도 없고.
이 과정 속에서, 연오랑은 조선의 의학역사를 뒤집어 버릴 폭탄을 선사했다.
바로 외과술을 본격적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원래 역사에서 의학. 흔히들 한의학이라 부르는 의학은 침,뜸,탕재를 이용해서 상처나 병을 직접적으로 치료하는 게 아니라, 환자의 몸 상태를 본래대로 회복시키는데 주력했다.
단기간에 효과를 보는 시술이 아니라, 크고 길게 보면서 부작용과 신체훼손을 최소화 시키는 방법이지.
헌데 지금 역사, 지금 시대에선 이게 조금 미묘했다.
원말명초, 여말선초 시절에 미친 듯이 싸워댔는데, 전투로 인한 부상자들을 그냥 내버려뒀겠는가.
유학적 이념이고 외과술이고 나발이고, 어떻게든 부상을 치료하는 데 전념했다. 그 시절엔 숙련된 정예병 하나가 아까운 시절이었으니까.
더불어 고려는 원나라와 이어져 있었고, 몽골제국이 망했어도 원나라는 저 먼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칸 국과 연결되어 있었다.
온갖 문화와 문물이 유럽-중앙아시아-동아시아를 오갔는데, 그 중에서 외과술만 발달된 서양의 의학서가 없었겠는가.
연오랑은 원래 역사에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온갖 고서를 살려냈고, 그 중에선 서역에서 전래한 의학서도 있었던 거지.
이게 끝이 아니다.
그는 의사가 아니니 제대로 된 의학지식은 없지만, 토막지식으로 의료용 기구 정도는 알고 있었다.
값싼 곡물로 만든 수술용 증류주, 수술용 칼인 메스, 수술용 가위나 집게,톱,끌, 수술용 실이나 붕대 등을 고스란히 풀어내어 제공했다.
의원들은 이 생경한 물건의 쓰임새를 알기 위해서라도, 도축된 가축과 병든 가축을 실험체 삼아서 열심히 의술을 익혀나갔지.
‘그리고 이 외과술 발전을 견인할 거대한 실험체가 있었단 말이지.’
연오랑은 왠지 모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기억을 더듬어갔다.
이렇게 발전하고 연구시킨 외과술은, 실전에서 써먹어봐야 그 효용성이 드러나는 법.
착호군은 이에 딱 맞는 실험체였다.
이런저런 배경이 있지만, 착호군은 실제로 산을 타넘으며 맹수를 사냥했다.
수만명이 몰려다니면서 실전훈련과 사냥을 하는데, 부상자가 안 나왔겠나. 비록 도검에 입은 상처는 아니지만,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문제는 이들 대다수가 양반사대부, 지방호족의 자제라는 점.
유학적 신념에 따라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했다! 어디서 그런 삿된 짓을 하는가!”라고 외쳐댈지 몰라도, 그건 남 일 일때나 속편하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다.
제 아무리 유학자라고 해도, 자기 자식이 불구가 되고 절름발이가 되는 꼴을 그냥 지켜볼 부모는 없지.
더불어 운석핵꿀밤 때문에, 민간으로 유학이념이 전파되지 못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몸에 칼을 대는 걸 두려워한 건, 이념과 관념의 문제보다는 외과술의 효용성을 의심했기 때문.
결국 이들은 물에 빠져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외과술을 익힌 군의관에게 매달렸고, 군의관들은 열심히 치료를 이어가며 외과술에 대한 인식을 바꿔나갔다.
여기에 폭탄이 하나 더 떨어진다.
착호군이 중국원정을 떠나면서, 부상자라 쓰고 실험체라 읽을 환자들이 미친 듯이 밀려온 것.
군의관들은 조선군뿐만 아니라 몽골,여진,중국인 가릴 것 없이 죄다 치료하면서 외과술의 역사를 하루하루 새롭게 써갔고... 여진정벌까지 이룩하면서 경험치를 계속 축적해 나갔다.
‘이젠 몸에 칼을 대는 걸 거부할 양반이 아무도 없단 말이지.’
연오랑은 과거에 전투보고서를 보고서 기겁했을 조정신료들을 떠올리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흘렸다.
그들도 외과술이 이렇게나 효과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텐데, 이젠 쌀이 밥이 된 걸 넘어서 누룽지가 된 판국.
민간에서도 인정하는 외과술을 밀어내는 건 불가능해졌고, 지금도 북방에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여진복속작업 때문에 외과술은 계속해서 발전해 나갈 거다.
‘그러니 만약 역사대로 문종이 종기에 걸린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잖아? 칼로 쓱싹 해버리면 되고, 고약도 나름 만들고 있으니까...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더 제대로 된 물건이 나오겠지.’
연오랑은 그리 생각했다.
‘그렇게 약점 하나는 날렸고... 다른 약점 하나도 날리긴 날렸는데, 역사가 제대로 비틀렸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연오랑은 이제 서서히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세자 행렬을 보며, 생각을 계속 이어갔다.
‘네가 알까 모르겠다만... 형이 네 결혼생활까지 챙겨주고 있다. 나중에 잘해라.’
세자가 들었다면 “뭔 개소리냐?”할 소리를, 그는 머릿속에 떠올렸다.
다음으로 치워야할 문제는 문종의 사생활이다.
문종의 부부생활은 결코 평탄치 못했고, 결국 서른에 가까워져서야 자식인 단종을 낳았다.
이 시대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늦게 자식을 본 거지.
만약 정상적으로 자식을 일찍 낳았다면, 세조가 등장할 일이 없었을 거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니까.
아무튼. 첫째 부인 휘빈은 문종의 관심을 받지 못하자 사특한 민간 술법을 쓰다가 쫓겨났고. 둘째 부인 순빈은 도리에 맞지 않는 요상한 짓을 많이 하고, 심지어 궁녀와 동침했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결국 세 번째 부인을 통해 단종을 낳은 거니, 문종의 결혼생활은 꽤나 복잡하게 꼬이게 된 거지.
이를 해결할 방법은, 문종을 보다 일찍 결혼시켜서 자식 또한 일찍 보게 하는 것.
또한 간택할 때조차도 문종이 자신만의 여성상을 찾아, 강력한 의견을 피력하게 만들어주는 거다.
문제는... 세자빈을 간택하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다는 점과, 연오랑이 쫓겨난 휘빈과 순빈이 누군지 모른다는 점이다.
더불어 역사가 한참 뒤틀린 터라... 세자빈 집안이 지금 역사에서도 멀쩡히 있는지, 지금 역사에서도 세자빈으로 뽑힐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상황.
별 수 있나.
방향을 선회해서 간택을 기다리지 않고, 문종을 직접 자극시키고 발품 파는 방향으로 바꿨다.
일단. 먼저 한 일은 조혼풍습을 바꾸는 일.
지금 시대에는 나라를 불문하고 조혼이 성행했는데, 이는 결혼이 당사자만의 결합이 아니라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기 때문이었다.
연오랑은 이 고리를 끊어버리고, 아예 법적으로 15세가 되면 무조건 관례를 치르고 성인으로 취급하여, 그 전에는 결혼할 수 없게 압박을 넣었다.
본래 관례는 유학식 관습으로,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유학적으로 어느 정도 완성에 이르렀고 스스로 자리를 잡아 “자字”를 받는 걸 의미했다.
다만 시간이 흘러 보다 간단해지고 변화하면서, 자의 의미도 퇴색되어 지금은 그냥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는 별칭 비슷한 것으로 변해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