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챕터31. 머무르다 (4)
이러한 관습을 무시하고, 나라에서 그냥 법정 성인나이를 정해버리는 건 유학적 관습을 깨버리는 처사지만... 운석핵꿀밤이 있지 않나.
안 그래도 이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몰라 해결책이 없어서 그냥 놔뒀던 건데... 연오랑은 무식하고 간단한 방법을 제시한 거지.
그것도 유학적 명분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근거를 내밀었다.
“조혼을 하면 아직 다 크지 못한 미성년이 태아를 몸에 키우는 건데, 자신이 먹고 커야할 영양분을 태아가 먹고 크는 것 아닌가. 이는 결국 태아와 미성년 모두를 미성숙하게 만들어서, 병치례를 달고 살게 만드는 악습이다.”
라는, 이 시대 사람들이 떠올리기 힘든 주장을 들이밀었다.
조혼이 성행한 건, 의술이 미비한 시대상 워낙 평균수명이 짧다보니 어떻게든 자식을 보려는 이유 때문인데... 오히려 조혼 때문에 골골거리다가 더 일찍 죽는다고?
모순된 상황이 펼쳐지니 당황할 수밖에.
헌데 연오랑은 외과술을 전파하면서 의학 분야에 있어서도, 남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명성 높은 인물 아닌가.
그가 지겹도록 노래 부르는 “청결” 덕택에 풍토가 다른 지역을 싸돌아다녔음에도, 놀랍게도 착호군은 지금껏 흔한 돌림병조차 걸리지 않은 경력이 있다.
그의 주장을 마냥 무시하기도 애매하고, 골똘히 생각해보면 충분히 일리 있는 발언인 거지.
세종과 태종도 이에 동조했는데, 이는 양반사대부, 지방호족 가문을 견제하기 위함.
흡사 합종연횡하듯 물밑에서 혼약을 맺고 결합하는 걸 깨버리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성인이 된 녀석들을 일시에 혼인시장에 풀어서 미래를 도모할 시간을 줄이려는 의도였다.
적어도 성년이 되어 머리가 커진 녀석들의 의사가 강력하게 반영될 테니... 무조건적으로 가문 간의 결합으로 흘러갈 가능성을 그나마 줄이려 한 거지.
이러한 변혁은 왕실이 모범을 보이고 적용해야, 민간에서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테니... 결국 문종도 15세가 되면, 자기 이성관에 맞는 부인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질 거다.
‘그럼 이제 너도 네 짝을, 네가 직접 선택해 봐야 하지 않겠냐?’
연오랑은 점점 다가와 형태가 보이기 시작하는 문종을 보며, 히죽 웃었다.
이렇게 문종을 귀찮게 할 작자들을 미리 치워내고, 문종 스스로의 선택지를 넓혔다면... 다음 수순은 문종의 안계를 넓히는 일.
문종의 이성관을 정립하고, 자신의 이상형을 찾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냥 녀석이 많은 여자를 만나보고 살펴보면 된다.
궁궐에 처박혀서 맨날 궁녀들만 보고 있으면, 머리가 제대로 클 리가 있나.
그것도 궁녀들은 나름 서열도 있고, 신분도 나름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라서, 문종의 선택지는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
‘그래서 형이 널 궁궐 밖으로 빼돌린 거지. 관례를 치르면 앞으로 궁에 박혀서 일 만하게 될 텐데, 미리미리 세상과 여자를 경험해 봐야 하지 않겠냐.’
“말이 되는 것 같긴 한데, 이래도 되는 건가?”라며, 어리둥절해 하던 조정신료들의 반응을 떠올리며, 연오랑은 히죽 미소를 지었다.
저런 속내를 곧장 밝히면 미친놈 소리를 들을 게 뻔하니, 다른 명분을 내세우는 게 당연.
어찌 보면 지금 시대상황상 퍽 어울리는 명분. “세자교육 및 민정안정”을 내걸었다.
조선은 왕이 도성을 떠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런저런 이유를 붙일 수 있지만, 속을 파고들면 “돈도 없는데, 생돈 날리면서 굳이 왕이 돌아다녀야해?”라는 것.
윗사람이 돌아다니면 아랫사람이 피곤해지는 건, 지금이나 미래나 당연한 이치. 권력이 무력과 결합해 살아 숨 쉬는 지금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이러한 돈 걱정 때문에 군사훈련인 강무조차 제대로 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왕이 직접 지방을 순방하는 건 꿈에서나 볼 일이지.
하지만 지금 역사의 조선은 상황이 퍽 묘했다.
세종보다 윗줄인 태종이 착호군을 이끌고 있다.
무려 상왕이 머무는 곳인데, 허름하게 지내고 수발이나 호위할 인원이 없을까.
태종은 주도主都라 할법한 큰 도시에서 머물며, 그곳 관아를 궁궐에 버금갈 정도로 최신식 관아로 바꿔버렸으니... 세자가 순방을 다닌다고 해서 추가로 돈과 인력이 드는 상황이 아닌 거지.
또 하나의 이유는 이제 슬슬 위무를 해줘야할 때가 된 것.
착호군은 분명 조선을 발전시켰지만, 반대로 지방세력은 강력한 철퇴를 얻어맞았다.
아무리 관리임용 및 기업으로 숨통을 만들어놨어도, 그들 입장에선 손해보고 두들겨 맞은 걸로 느껴질 수밖에.
허나 감히 개길 수 없으니 속만 앓고 있었고, 그런 그들의 울분을 다독여줄 계기 및 사람이 필요했다.
실권도 없는 세자이니 딱히 뭐 해줄 순 없지만, 살아생전 한번 만나기도 힘든 세자가 직접 지방으로 내려와 자신들을 위무하는 건... 이 시대 사람들이 느끼기엔 보통 평범한 사건이 아닌 거지.
세자의 교육 측면에서도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
착호군을 비롯한 이들은 조선에서 벗어나 천하를 보며, 견문이 넓어지고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이 뜨였다.
평생을 궁과 도성 근처에서만 살아온 세자가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면 같은 효과가 나오지 않을까? 나중에 안정화되어 북방까지 갈 수 있게 되면, 세상 보는 눈이 더 뜨이게 되겠지.
‘지금은 무리지만... 혹시 알아? 세자가 순방하는 일이 관습이 될지 누가 알겠어? 결코 조선과 왕실에게 나쁜 일이 아닐 거야. 조기교육이 뭐 별거냐. 궁 밖에 나와서 진짜 세상을 구경만 해도 도움이 되겠지.’
왕실의 존재감을 백성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일 테니, 어지간해서는 민심이 이반하는 일이 쉽게 벌어지지 않을 거다.
연오랑은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세자 행렬을 보며, 생각을 슬슬 마무리 지었다.
“오는군.”
“예.”
공주는 오랜만에 만나는 세자를 생각하며, 연신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오랑 일행이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세자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둘에게 달려왔다.
“고모님!”
“세자 저하.”
세자는 환하게 웃으며 공주에게 달려왔고, 공주는 어린 동생을 보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나이차도 얼마 안 나는데, 분위기가 묘하네.’
연오랑은 예법도 잊고 손을 마주잡고 있는 둘을 보며,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공주와 거의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던 형제자매가 세종이니, 당연히 세자 또한 공주와 인연이 깊었다. 흡사 오누이처럼 함께 지내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세자는 아이처럼 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대감.”
“세자 저하.”
공주와 해후를 끝낸 세자는 연오랑에게 가볍게 인사했고, 연오랑 또한 읍을 하며 세자를 맞이했다.
‘꼬맹이라 그런가. 훌쩍훌쩍 크네.’
연오랑은 이제 소년티가 나는 세자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세자를 처음 만난 건, 아직 세자가 되기도 전의 꼬맹이 시절이었다.
사실 문종도 궁금하긴 했는데, 문종의 동생인 수양이 더 궁금해서 만나봤지.
다만 그 시절 수양은 갓난아기를 갓 벗어난 때라서, 별 감흥도 없었고... 문종 또한 그저 꼬맹이에 불과.
그 후로 몇 년에 한번씩 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쑥쑥 큰 게 티가 났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자란 세자라지만,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보였으니까.
‘누가 세종 아들 아니랄까봐. 너도 이성계의 피를 물려받긴 받은 모양이구나. 나이가 차면 한 덩치 하겠네.’
연오랑은 속마음을 숨기고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
세자가 경원에 온지 보름 가까이 지났지만, 일상은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북적거리는 거야 하루이틀이고, 다들 할 일이 많지 않나.
반대로 세자 일행은 어느덧 자기집마냥 익숙해진 모양새였다.
새로 지은 지방관아는 궁궐을 본떠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죄다 똑같은 형태와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반년은 외방에서 반년은 한성궁궐에서 지냈으니, 경원에서의 생활은 다른 지방관아에서의 생활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
“하나둘셋넷!”
차가운 아침 공기를 뚫고 기운찬 구호소리가 들려왔고, 연오랑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세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관아 한쪽에 마련된 공터에선 세자와 함께 세자시강원 관원들이 몸을 비틀며 체조를 하고 있었다.
“아침체조인가?”
“충성!”
불쑥 찾아온 연오랑을 보며 시위하던 무관들이 냉큼 경례를 올렸고, 몇몇은 눈인사를 하며 아는 척을 했다.
연오랑은 이들을 모르지만, 훈련대에서 훈련받은 이들은 연오랑을 아니까.
“대감.”
그리고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가 깊게 읍을 하며 연오랑을 반겼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그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기웃거리자, 지휘관은 그 뜻을 알아차렸는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인 양원경입니다. 오래전에 하동에서 뵀지요.”
“아! 김숙자! 너구나.”
연오랑은 그제야 기억하고선 박수를 쳤다.
어사 김숙자의 호위무관으로 왔던 인물. 하동에서부터 한성으로 함께 동행 했던 인물 아닌가.
하도 오래전 일이라서 잊어먹고 있었는데, 여전히 내금위에 속해 있나 보다.
“너도 원정에 참가했었냐?”
“그렇습니다.”
“실력은 많이 늘었고?”
“살아남지 않았습니까.”
양원경은 심유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고, 연오랑은 기특하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때려줬다.
“무관들은 이리저리 보직이동이 됐는데 아직도 내금위에 있는 걸 보면, 훈련대에서 성적이 좋았나 보네?”
“흐흐. 예.”
훈련대는 내금위건 갑사, 토관이건 가릴 것 없이 죄다 섞어서 굴려댔고, 그 속에서 옥석을 가려서 내금위 무관으로 교체했다.
아직도 양원경이 내금위라는 건, 수만명의 무관이 뛰어든 바늘구멍을 통과할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는 뜻이지.
“네가 세자 저하를 가르치는 거냐?”
“제가 하기도 하는데, 저희가 다 같이 하고 있습니다.”
양원경이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자, 주위에 있던 내금위사들 모두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가 없으니, 이들은 내금위에서도 가려 뽑은 세자 호위겠지.’
연오랑은 이해가 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역사에선 세자를 호위하고 정치적으로 힘이 될 무관들을, 세자익위사라는 조직을 만들어 귀속시켰다.
다만 그 수가 채 스물을 넘지 못했으니, 실질적인 무력조직이라고 보긴 어려웠지.
허나 지금 역사에서 그런 게 왜 필요하겠나.
조정신료들은 정치관료에서 행정관료로 변모해갔고, 신권과 왕권의 대립 혹은 견제도 없어지고 있다.
굳이 내금위, 겸사복등을 비롯한 중앙군의 확대 개편을 놓고, 조정신료들이 자신들의 입지가 줄어들 게 두려워서 반대하거나 끼어들 이유가 없지.
신료들의 반응이 이러하니, 굳이 세자의 힘을 키워줄 세자익위사도 필요가 없어진 거고.
하여 이백여명에 불과하던 내금위는 겸사복을 비롯한 각종 친위부대를 흡수해 내금위 하나만 남았고, 그 숫자 또한 천여명에 육박했다.
더불어 군제개혁이 진행되면서, 착호군 체제가 위로 올라가 중앙군 체제를 집어삼키지 않았나.
그 결과. 처지 또한 거꾸로 됐다.
기병사단, 기사대, 훈련대, 특전대 소속 무관이 도성의 내금위로 파견나온 거지, 내금위 소속이 착호군으로 파견나온 게 아닌 셈이지.
나중에 군부가 완성되면 소속이 고정되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운영되고 있었다.
“세자 저하의 운동은 어떻게 하고 있냐?”
“그게...”
연오랑은 대청마루에 앉아 세자 일행이 몸을 흔드는 걸 지켜봤고, 양원경은 조용히 설명을 이어갔다.
‘잘 하고 있네.’
설명을 듣다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애초에 이 모든 커리큘럼과 운동방식을 연오랑이 만들었는데, 어색한 게 있을 리가. 무관들이 하는 운동을 나이에 맞게 살짝 낮춘 수준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탁탁탁. 설명을 듣는 동안에도, 세자는 새끼줄을 꼬아 만든 줄로 줄넘기를 하고선 스트레칭을 끝내고, 이내 목검을 들고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또래에 비해 덩치가 커봐야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세자다.
애들 장난마냥 목검을 휘두르지만, 그래도 딴에는 생사대적을 상대하는 것 마냥 표정이 잔뜩 긴장해 있었다.
“세자 저하가 저렇게 칼질하는 것에 대해서 조정대신들이 별 말 없었냐?”
“음...”
왠지 모르게 껄끄러운 질문인 걸까?
양원경은 슬쩍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멀리 있는 법보다 가까이 있는 주먹이 더 무서운 법이니까.
“몇몇 대신들이 탐탁지 않아했지만, 전하께서 모범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전하의 옥체가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 걸 모두가 알고 있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지요. 너무 군무軍武에 빠진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공부도 하고 있으니 다들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지금 조선은 예전 조선이 아니고, 문치주의에서 문과 무가 반반씩 섞인 경향으로 이미 흘러가고 있지 않나.
무력과 군사가 없으면 예전보다 배는 넓어진 조선강역을 감당할 수 없으니, 아무리 내치를 중시하는 노신, 대신들이라고 해도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왕과 세자가 무예를 익히는 건. 이 기조의 증명이라 할 수 있으니, 쉽게 반대할 수 없었을 거다.
“맞는 말이야. 몸이 튼튼해야 마음도 튼튼해지고, 머리도 잘 굴러가는 법이지.”
“예.”
“다만 너무 힘을 키우려고 무리하진 마라.”
“...?”
무슨 뜻인지 몰라 양원경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연오랑은 세자가 끙끙거리면서 들어 올리려 하는 모래주머니를 가리켰다.
“아...!”
“내가 집필한 무예도감은 읽어봤지?”
“물론입니다.”
훈련대는 무예도감을 교과서로 활용하여 개인 무기술을 가르쳤으니, 이들이 그걸 필독하는 건 당연한 말.
“어릴 때부터 힘을 키우려고 하면, 근골이 어긋나거나 오히려 약해질 수 있다. 성장이 다 끝난 후에 근력운동을 해도 늦지 않으니까, 지금은 유연성을 기르고 몸의 균형을 맞추는 일에만 집중해도 충분하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