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05화 (205/538)

205. 챕터31. 머무르다 (5)

“무기술도 마찬가지. 세자 저하께서 당장 전쟁터에 나가서 싸울 것도 아닌데, 억지로 무리할 필요 있나. 형을 잡아주고 힘을 싣는 요체만 몸에 익히면 그만. 굳이 지금부터 어른과 똑같이 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오히려 나쁜 습관만 든다.”

“알겠습니다.”

누구 말인데 감히 반문을 할까.

양원경 뿐만 아니라, 모두가 냉큼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 세자의 교육방침을 재점검하기로 마음먹었다.

“운동 끝나면 뭐하지?”

“아마 경연經筵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

연오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방에 나왔다고 해서 세자 교육을 등한시 할 수 없으니, 궁에 있을 때와 똑같은 생활을 하는 모양이다.

“뭐 배우는지 아냐?”

“정확히는 모르나, 이것저것 다 배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유학 뿐만 아니라, 잡학과 신학문도 함께 말이지요.”

“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연오랑은 절로 이해가 되어,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고려 말에 시작된 유학적 학술토론 및 교육제도인 경연은 조선에도 이어졌다.

이를 통해 국왕은 자신의 정치적 안건을 제시하기도 했고, 반대로 신료들은 국왕의 안건에 반대하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지.

이 모든 건 유학 경서를 놓고 진행됐는데, 후대에 가면 학술토론보다는 정치적 성격이 훨씬 강해지게 된다.

다만 정작 경연을 만든 태조는 경연을 얼마 하지도 않았고, 뒤를 이은 태종 또한 경연에 큰 관심이 없었고, 세종대에 이르러서야 경연이 활발하게 진행되게 되는데...

지금 역사에서는 이 또한 크게 비틀렸다.

태종은 안 그래도 경연을 별로 안 좋아했는데, 운석핵꿀밤 이후로 사상계가 분열하지 않았나.

학술토론을 하겠다고 경연을 시작하면, 각 계열별로 지들 할 말만 하면서 미친 듯이 싸워댔으니... 제대로 진행될 리가 있나.

경연은 조정에서의 싸움에 불을 붙이는 꼴이었다.

세종이 등극한 후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운석핵꿀밤 이후 시간이 꽤 흐른 터라 계파별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였지만, 여전히 첨해하게 대립하는 부분이 많았으니...

원래 역사에서처럼 경서를 절대 진리로 보고, 이걸 외우고 문답하는 형태의 경연은 애초에 진행될 수가 없는 거지.

그렇다고 실무회의를 하자니, 집현전에서 매일같이 하는데 굳이 경연을 또 할 필요가 있나.

경연의 입지와 규모는 나날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세 번 조강, 주강, 석강으로 진행됐어야할 경연은 하루에 한번 할까 말까였고, 그 또한 비정기적이 됐다.

나아가 경서의 세부부분마다 대립하는 문제가 남아 있으니, 계파별로 모두가 인정하는 공통적인 부분만 교육하고 논의할 수 있는 바.

공부해야할 유학 경서의 내용자체가 대폭 축소된 거지.

그 누구보다 경연에 앞장서야 했을 세종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니, 세자의 경연 또한 마찬가지.

작금에 이르러선 유학 경서뿐만 아니라, 산학과 율학, 심지어 재정학 같은 신학문까지 가르치고 토의하게 됐다.

더불어 이러한 경향은 민간으로도 흘러가서 기존 유학 경전을 구舊경전이라 부르고, 공통된 내용만 수록한 편집된 신新경전이 만들어져서 과거시험의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었지.

‘지금 조선은 원래 조선처럼 맹목적으로 성리학에 매몰된 나라가 되긴 힘들겠지. 잡학이 인정받아 성과를 보이면 보일수록, 성리학은 정치이념으로 발전하지 못할 거야.’

신新경전이 나왔다는 건,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걸 증명해주는 명백한 예시.

조선의 경제력이 상승하면 할수록 성리학은 교조화되는 게 아니라, 정치이념이나 지도사상이 아닌 도덕과 예의개념 수준으로 퇴화될 거다.

“시강원 관원들의 나이와 출신이 천차만별인 건, 다 이유가 있던 거네?”

“예.”

머리가 허옇게 선 노학자는 아마도 유학 경서를 가르치는 학사일 테고, 그 자신 또래로 보이는 청년학자들은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사가 아닐까.

‘세종 형이 돈맛을 보더니, 아주 그냥 확실하게 밀어주네.’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이 누구나 그렇듯, 계획한 대로 일이 술술 풀리면 자신감과 확신을 갖기 마련이다.

이러한 성과가 가시적으로 눈에 보일뿐더러, 돈까지 벌게 해주면 더욱더 확신에 차기 마련.

조선의 변화에 부정적으로 보던 대신들부터, 자주화를 꿈꾸며 조선의 변화를 반기는 젊은 운석핵꿀밤 세대의 신료들까지.

속마음이 어떻든 간에 이젠 신학문의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고, 세종 또한 그러한 마음을 품고서 일찍부터 세자를 교육시키려는 게 분명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봐선, 경연이 왕을 괴롭히는 수단이 되진 못하겠는데? 정치적으로 활용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 걸.’

원래 역사에선 후대에 가면 경연이 왕을 압박하고 길들이는 수단으로 전락하곤 하는데, 경연의 입지자체가 퇴색하고 무시되고 있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아마도 잡학을 중심으로 한, 진짜 교육제도로만 활용되지 않을까.

‘세자교육도 마찬가지야. 굳이 내가 끼어들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알아서 잘 가르치는 것 같으니까 운동하는 것만 점검해주고... 견문을 넓히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겠어.’

연오랑은 그리 생각을 하고선, 무관들에게 고생하라 일러주고선 걸음을 옮겼다.

오후가 되자, 세자는 학사와 호위를 모두 이끌고 연오랑을 찾아왔다.

세자가 원래 하는 일이 이렇다.

아침, 저녁에는 개인 일과를 진행하고, 오후에는 연오랑을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

구경이라 생각하면 구경이 될 뿐이지만, 이 또한 경험이라 생각하면 머리를 무겁게 해줄 지식이 되는 법이지.

“저거 보시죠. 대감. 신기하게 생겼군요.”

“새로 만든 쟁기입니다. 특이하게 생겼지요?”

“예. 전라도에서도 못 보던 물건입니다.”

“이번에 만들어서 실험 중입니다.”

“와...”

연오랑과 함께 밭 귀퉁이에 위치한 정자에 앉아 있던 세자.

세자는 눈을 반짝이며, 특이하게 생긴 쟁기를 보며 입을 놀려댔다.

“가까이 가서 보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세자는 훌쩍 몸을 날렸고, 연오랑은 가볍게 웃으며 뒤를 쫓았다.

“...”

연오랑은 혹시나 싶어서 힐끔 뒤를 돌아봤는데, 시강원 학사들은 “갑자기 왜 그렇게 보냐?”라는 눈빛을 숨기며 애써 세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꼰대 같은 사람이 없네. 세종 형이 알아서 인선을 잘 한 걸까. 아니면 요새 관리들 분위기가 다 이런 걸까?’

연오랑은 답을 알지 못해 알쏭달쏭했다.

세상이 변한지 오래건만, 오히려 연오랑이 그걸 못 쫓아가서 이따금씩 의아함과 의심이 들곤 했다.

근본유학자와 사학계열의 씨를 말려버리긴 했으나, 분명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며 조정 내에서도 영향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 자신만의 헛발질로 느껴졌기 때문.

그의 미래 기억 속 조선과 지금의 조선이 비교되며 낯선 느낌이 매일 같이 밀려오는데, 이들은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긴 이들은 미래의 조선을 모르니까.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사림세력은 등장하지도 않았고, 당파싸움, 세조가 등장하지도 않았으니... 조선이 건국될 당시의 그 열정과 신념이 아직 살아 숨 쉬는 모양이다.

운석핵꿀밤이 유학자들의 정신세계를 바꿔버린 것도 있을 테고.

“자네들은 세자 저하께서 저렇게 흙장난을 하는 게 괜찮은가 보군?”

“...!”

뜬금없는 물음에 모두는 눈을 크게 뜨고, 황망하게 표정을 지었다.

당최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모두가 당황했지만... 이내 곧 입이 열렸다.

“상왕 전하께서 직접 활을 들고 맹수를 사냥하시고, 전하께서도 직접 철공鐵工일을 하시는데, 세자 저하께서 농사에 관심을 가지시는 게 무에 대수겠습니까.”

“맞습니다. 농사는 나라의 근본이니, 세자 저하께서도 능히 아셔야할 일입니다.”

“그런가...”

“그러합니다. 대감.”

그들은 흡사 이게 시험이라고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답을 이어갔다.

‘표정을 보니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세자가 농사를 배워야 한다고 해서, 뙤약볕에서 직접 땅을 헤집고 다녀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 않나.

헌데 이들 표정을 보면, “설령 그렇게 한들 뭐 어때서?”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삼남에서도 이런 적이 있나 보군?”

“...”

모두는 답을 못하고 눈치를 보다가, 가장 막내로 보이는 이가 입을 열었다.

“그... 상왕전하께서 양전사업을 하시는 곳에서, 수로를 만드는 일을 함께 하셨습니다.”

‘저 꼬맹이가 무슨 삽질을 했다고, 물장구나 치고 놀았겠지.’

연오랑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그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상왕전하와 함께 수로 건설을 꾸준히 지켜봤습니다. 이것저것 배운 게 많으셨고, 산학의 수준이 눈에 띌 정도로 오르셨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런가.”

“예. 대감.”

‘하긴 세종 형이 뜬금없이 장영실과 머리를 맞대고 대장간에서 살 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세종조차 그러하니, 이들도 할 말이 없어졌겠지.’

연오랑은 서신으로 들려왔던 소식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전례 없던 시계프로젝트가 꽤나 흥미로웠던 걸까?

안 그래도 조선법을 만드느라 바쁜 세종은, 짬짬이 시간을 내서 장영실과 함께 기계식 시계를 연구하고 있었다.

직접 톱니바퀴를 설계하여 장인들을 지도감독 한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의 천재성이 이런 쪽으로도 발휘될지 은근히 기대 중이다.

‘그러고 보니까 문종도 이것저것 만들었지 않았나? 어려서 경험을 많이 하면, 녀석도 꽤 쓸만한 발명품을 만들 수도 있겠지.’

연오랑은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며, 세자에게 다가가 쟁기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입을 놀렸다.

“쟁기날이 기존에 보던 것과 다르지요?”

“그러합니다. 전에 보던 건, 이렇게 크고 길쭉하지 않았습니다.”

새로 만든 쟁기는 묘했다.

쟁기 날을 크고 날렵하게 만들어서 땅을 더 깊게 파게 만들었고, 사선으로 고정되게 만들어 한번에 더 많은 땅을 파게 했고, 쟁기틀 양끝에는 작은 나무바퀴를 달아 흔들리지 않고 편하게 끌게 만들었다.

“이 바퀴가 그런 용도군요?”

“예. 저하. 사선으로 고정하면 쟁기가 흔들 일이 줄어들뿐더러, 땅에 더 잘 고정되지요.”

“오... 사소해 보이는데도 특별함이 있군요.”

“본래 세상 일이 사소해 보이는 것에서부터 차이가 시작되는 겁니다. 귀찮다고, 지금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안주하는 순간 남들보다 뒤쳐지게 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

“더불어 바꾸기 위해 뭔가 거대한 걸 하려하기 보다는, 이런 사소한 것부터 바꿔나가는 게 종국에는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법이지요.”

“음...”

왠지 모를 현기어린 말에, 세자는 물론이고 뒤에 시립해 있던 학사들 모두 연오랑의 말을 곱씹었다.

“실험한 바로는 신형쟁기가 기존의 것보다 두배 가까운 효율이 나오더군요.”

“와!”

세자는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말았다.

쟁기 하나 바꿨다고, 한사람이 두사람분의 일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

“진작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합니다. 저하. 왜 지금까지 이런 쟁기를 만들지 못했을까요?”

연오랑이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자, 가볍게 감탄을 늘어놨던 세자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가득 찼다.

이내 곧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을 거듭하더니, 그럴싸한 답을 내놨다.

“음... 기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돈과 기술, 지식이 없어서지요.”

“돈과 지식...”

세자는 물론이고, 뒤에서 지켜보던 학사들마저도 표정이 오묘해졌다.

꼭 지난날의 자신들을 까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도검에나 쓰일법한 강철로 만든 쟁기날과 못, 금속부품은 어떻습니까. 이 쟁기 하나에 들어갈 철이면 도검을 서너자루는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오...”

“매끈하고 올곧은 쟁기틀은 어떻습니까? 이건 가구로 만들어도 아깝지 않은 질 좋은 목재이지요.”

“그러합니다.”

세자가 보기에도 그래보여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는 물론이고 학자들마저도. 쟁기는 각 가호에서 알아서 대충 만드는 물건이지, 이렇게 세련된 공산품으로 만들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이게 곧 돈입니다. 광산기업에서 채굴한 광석, 제련기업에서 제련한 강철, 제재기업에서 다듬은 목재가 대량으로 생산되지 않았으면, 이 쟁기가 얼마나 비싸질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음...”

세자는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해서, 다시금 머리를 갸웃거렸다.

“또한 다양한 부품을 정확히 끼워맞추기 위해선 설계도가 필요한데, 이러한 설계도를 만들기 위해선 산학과 공학이 필수 아니겠습니까?”

“그렇겠네요?”

“예. 필요한 게 비단 산학뿐이겠습니까? 싸고 많이 채광할 수 있는 채광기술, 보다 나은 강철을 만들기 위한 제련술, 목재를 다듬기 위한 목공술, 이 재료를 운반할 수 있는 수송체계, 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옮길 수 있게 도로와 수로 또한 정비되어야 하겠지요.”

“으음...”

어째 쟁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듣다 보니 일이 너무 커졌다.

“아시겠습니까? 이 간단한 쟁기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기술만 수십개요, 이런 기술을 가진 기업을 관리하기 위한 법률이 수십개요. 이를 통합관리할 관리가 또 수십입니다.”

“...”

“농사일이라고 해서 간단하게 생각하고 단편적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땅과 사람, 농우만 던져 놨다고 해서, 농사가 알아서 잘 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지요. 그건 다 옛날이야기지요.”

“예...”

“크음...”

또 다시 자신들을 까는 것처럼 들려서인지, 학사들은 괜히 헛기침하며 신음을 흘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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