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챕터31. 머무르다 (6)
“보다 크게 농업을 이야기 해 볼까요?”
“...”
“농사를 제대로 하기 위해선 수로와 보를 만들 기술이 필요하고, 농기구를 만들 신기술이 필요하고, 토질과 기후에 맞는 농법이 필요하고, 이 농법을 연구할 농업학자들이 필요하고, 학자들이 알아낸 방법을 농부에게 가르칠 관리와 부서가 필요하고, 이들 관리를 감찰할 관리가 또 필요합니다.”
“으으...”
“이게 비단 농업에만 국한된 사안이겠습니까? 상업, 무역, 광업 등. 모든 사업이 전부 마찬가지이지요.”
“...”
“자본과 지식, 기술, 관리체계.”
연오랑은 땅에 쓱쓱 그림을 그리듯, 작은 원을 연거푸 그리며 말을 이어갔다.
“이 모든 게 하나가 되어야만 성장할 수 있고, 이 중 하나라도 미흡하면 제대로 크기 어려운 법입니다.”
“네...”
세자는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부족해서, 자신감 없는 말투로 말을 흐렸다.
“지금 다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잊지만 마십시오. 이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이 나라가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는 걸요.”
“예!”
세자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지만, 연오랑의 눈은 세자가 아닌 학사들에게 닿아 있었다.
그 눈빛은 꼭 “세자에게 옛 경전만 가르치지 말고, 신학문을 제대로 가르쳐라.”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날의 이야기가 꽤 감명 깊었는지, 세자는 시시때때로 연오랑을 찾아 쫓아다녔다.
세자는 지난날 황희, 태종이 이끄는 착호군에 머물렀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양전사업 및 개척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고 했다.
이곳에 와선 기업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구경, 견학하고 다니는 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함길도는 아무래도 농사가 쉽지 않은 땅이라서 상대적으로 기업이 많았기 때문.
광산법이 제정된 후로 광산기업은 우후죽순 생겨났고, 당연한 말이지만 함길도 북부에 특히 많이 생겼다.
이쪽에는 탄광과 광산이 많아서, 이곳에서 생산된 광괴들은 죄다 농기구와 선박부품, 마차부품으로 변해서 북방으로 뻗어갔다.
석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만주신도시에서 찾은 각종 광산이 수십개지만, 그곳을 일시에 개발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나.
진작 개발된 경흥탄광을 비롯한 탄광에서 채굴한 석탄은 조선전역으로 퍼지면서, 연해주 일대에 살던 귀화한 야인여진인들을 함길도 북부로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 외에 유독 많이 생겨난 기업은 역시나 목장 및 피혁, 모직기업이지.
“와... 엄청 넓군요”
“강원도에서도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그런데, 왠지 이곳이 더 커 보이는 군요.”
연오랑과 세자 일행은 산세를 따라 뒤섞인 푸른 목초지를 보며 감탄을 늘어놨다.
개마고원은 말 그대로 고원인터라 지대가 높긴 하지만, 평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넓고 완만한 지형이 여러 곳 있었다.
기업규제법이 시행되어 목마장 또한 크기의 제한을 받지만... 이곳은 여러개의 기업이 한곳에 뭉쳐서 거대한 초지 전체를 목마장을 만들어 놨지.
“이곳에 있는 말만 오천필에, 양도 이천두나 된다고 하던데요?”
“그 정도 될 겁니다.”
세자는 신이 나는지, 흥을 감추지 못하고 목청을 높였다.
태조 이후로 동북면에 왕족이 찾아온 적이 없다.
헌데 무려 세자가 동북면을 방문했고, 관아에 앉아 인사만 까닥까닥 받은 것도 아니다.
제 발로 직접 사업체를 찾아다녔으니, 여진인들 입장에선 가문의 영광도 이런 영광이 없지.
삼남지방보다도 훨씬, 부담스러울 정도로 극진한 대접을 받은 탓에... 세자는 애써 억누르려 해도 참지 못하고, 마음이 둥둥 뜬 모습을 보였다.
“헌데 대감.”
“뭐냐?”
“알기로 조선내지에는 꾸준히 목마장이 건설되고 있고, 제주 또한 목마장이 완성되어 양마를 키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더불어 올량합 3위를 통해서도 여전히 말을 수입하고 있는데... 이렇게나 많이 말을 키워도 문제가 없겠습니까?”
“...”
이런 이야기가 은근히 떠도는 모양인지, 학사 중 한명이 의문을 던지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긴 많아졌지?”
“그러합니다. 지난날 기업의 공인이 있기 전과 비교하면, 양마사업은 아무리 못해도 5배 이상 증가했을 겁니다. 정확히 추산할 순 없으나... 조선내지에만 이십만필이 넘는 말이 있을 것이고, 여진의 가축을 흡수해서 우후죽순 생겨난 북방의 목마장까지 합치면 삼십만필이 넘어가겠지요.”
“흐음.”
‘확실히 많긴 많아졌지.’
원래 역사를 아는 연오랑 입장에서도 눈이 휘둥그레질 성과이고, 지금 역사를 사는 조선인 입장에서는 지레 겁먹을 만큼 많은 숫자다.
아마도 한반도 역사상 가장 많지 않을까?
“여진을 굴복시켰으니, 굳이 군비를 더 쓰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을 테고?”
“...”
이 민감한 문제에서 대해선 입을 다무는 게 최선.
군제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연오랑 앞에서 다들 벙어리로 변신했다.
연오랑은 그런 그들을 보면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직 모자라다.”
“예?”
“아니...?”
“음...”
그의 단호한 대답에 다들 눈에 물음표를 그렸고, 세자 또한 똘망똘망한 눈을 크게 뜨며 바라봤다.
“앞으로 중국에 양마 수출을 할 수 있는 나라는 아국밖에 없다. 절대 놓칠 수 없는 사업이지.”
여진이 없어진 이상, 그 대체안은 조선밖에 없다.
요동도 나름 말을 키우지만, 안 그래도 영역이 확 줄어든 탓에 예전처럼 말 수출이 쉽진 않을 거다.
북원은 여전히 중국과 적대적이고, 섬서를 집어삼킨 이상 중국에 끌려 다닐 이유가 없어졌다.
이젠 가축이나 파는 거지가 아니라, 오래전 찬란했던 실크로드를 어느 정도 복구해서 서역 물산을 중국에 팔아넘길 수 있게 됐으니... 중국의 군사력을 키워 줄 말을 굳이 팔 이유가 없지.
“올량합 3위 또한 그렇다.”
조선은 이렇게나 많이 목마장을 만들면서도, 여전히 우량카이 3위로부터 말과 양을 비롯한 가축을 사들이고 있다.
“이유가 뭐겠어?”
“조선과 올량합 3위는 사무역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들의 빈약한 물산으론 조선에 팔 수 있는 상품이 가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맞아.”
조선이 가축을 사주지 않으면 그들은 요동에게 팔수밖에 없다.
이는 우량카이 3위의 전마 숫자를 줄이려는 효과와 요동의 전마 숫자를 줄이고, 중국에 판매할 수출량을 줄이려는 의도가 함께 맞물려 있다.
그 뿐일까. 올량합 3위의 모든 생필품이 조선제로 대체되는 순간, 그들은 경제적으로 조선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종이에 물이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조선에 의지하게 될 거다. 안 그래도 북원을 상대해야할 올량합3위로서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미래를 걱정하기에는 당장 살길이 요원하니까.”
“음...”
“그러합니다.”
“다른 이유도 있다. 아국의 도로사정은 여전히 답답하다.”
“끄응...”
“휴우...”
세자와 함께 전국을 싸돌아다닌 이들답게,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의 땅과 기후는 도로를 만들기에 최악의 환경이고, 오히려 조선내지보다 북방일대가 도로를 만들기에 더 편할 지경.
돌이 미치도록 많은 땅만 문제일까.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산이 많아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뚫는 대로를 건설하는 건... 말 그대로 미친 짓이다.
그 결과. 조선이 자랑하는 자갈도로조차도, 도시 인근에만 깔렸고 그 외의 지역은 여전히 흙길이었지.
이는 양전사업이 진행된 곳 또한 마찬가지라서, 대로에 버금가는 넓은 도로구역을 설정해놨어도 정작 자갈도로는 만들지 못했다.
“아국에서 제일 잘 정리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의주대로조차, 평양을 비롯한 주도 인근만 자갈도로가 깔렸잖아?”
“예...”
“산을 넘어가는 산길을 제외하고, 평지에 도로를 건설하는 것만으로도 수십년이 넘게 걸릴 대사업이다.”
“...”
“허나 지금의 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선 물류의 빠른 이동은 필수적인 사안인데... 수로는 겨울에 사용할 수 없고, 배를 통해 대량으로 옮기기엔 애매한 상품이 부지기수고, 수로가 모든 내지와 연결된 것도 아니지.”
“그러합니다.”
지금 조선은 겉으로 보기엔 평안해 보이지만, 속을 들어다보면 전혀 아니다.
연오랑은 억지로 땅을 넓히고 수십만명의 포로를 쑤셔 넣어서, 조선을 망하기 직전의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천지개벽 수준의 개혁조치가 연이어 이어지는데도 반발이 크지 않은 건... 민관군 모두가 “여기서 삐끗하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위기감을 몸으로 느끼고, 좋든 싫든 앞만 보고 달리고 있기 때문.
안정권에 오르기 전까지는 성장세를 유지하면서 계속 달려갈 수밖에 없는데... 돈은 곧 산업발전의 피요. 도로는 혈관이라 하지 않았나.
살과 뼈는 쑥쑥 커 가는데, 정작 피가 제대로 안돌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억지로라도 이 피를 순환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결국 육로수송을 할 수밖에 없는데, 도로 사정이 또 엉망이네?”
“끄응...”
“그럼 어쩌겠어? 마차를 사용하기에 힘든 도로라면, 결국 말 그자체로 해결해야 되는 거지.”
연오랑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미봉책으로, 단순 무식한 해답을 꺼냈다.
바로 물량으로 대체하는 것.
짐마차를 끌고 다니기 힘들다면, 그냥 수십필 역용마의 등에 직접 짐을 싣고 돌아다니는 거지.
“허헙...”
“이미 행상에서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보부상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대로가 연결되는 역참과 수참에 괜히 목마장이 만들어져서, 말을 대여해주는 기업이 생겨난 게 아니지.”
“아하! 그래서 그랬던 거군요.”
세자는 한성에서 원산으로 넘어올 때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운송을 위해 말을 많이 키우는 건, 개별기업 입장에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꼴.
행상들은 이 문제에 집중하고, 강원도 등의 산맥을 넘는 고개에서 말 및 마차 대여사업을 시작했다.
기업들은 짐마차를 끌고 와서 산 어귀에 있는 목마장에 마차를 맡기고, 대신 말을 빌려서 산을 타넘는다. 산을 넘어와선 말을 반납하고 마차를 대여하는 거지.
더불어 상인기업, 유통기업이 등장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더 커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건 모두 미봉책에 불과하니, 계속해서 말을 키우는 수밖에 없잖아? 아니면 나라의 예산을 전부 쏟아 부어서 단기간에 도로를 만들까? 그건 불가능하지.”
“음...”
연오랑은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을 말박이의 나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고, 미래의 캐치프레이즈 마냥 “일가구 일인마!”를 주장하고 있지 않나.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군사에 관해서도 말은 필수다. 조선의 강역은 너무 넓어졌고, 북방의 위협은 없어졌지만 대신 더 크고 위협적인 위험이 생겨났지.”
“요동...!”
“맞아.”
연오랑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히죽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군제개혁은 둘째 치고, 안 그래도 예산이 빠듯한 조선은 군병의 수를 마음껏 늘릴 수 없다.
사람은 비슷한데 땅은 대폭 넓어졌으니, 해결책은 기동력과 개별부대의 전투력을 높이는 수밖에 없다.
결론은 기병의 증가뿐.
기병을 유지하는 게 돈이 많이 들지만, 나라 전체로 봤을 땐 군병을 더 늘리고 외각에 주둔시켜 보급하는 것보다 싸게 먹히는 거지.
게다가 연오랑이 상정한 군제개혁은 보병이 거의 없다시피 한, 모든 병종의 기병화를 꿈꾸고 있지 않나.
이 또한 무지막지한 군비가 소모되겠지만, 연오랑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근본자체. 농업국가에서 거의 반농반목, 상공업국가로 바꿀 생각이었기에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걸 위해서라도 말이 넘쳐나서, 말값이 똥값이 되어야 하지.
‘조선은 절대 예전으로 못 돌아가니까. 충분히 가능해졌다.’
만주 북부는 도시도 건설하지 못한 공백지이자 거대한 낚시터가 되었으니... 원래 역사에 있던 평화시대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거다.
군비 감축이나 군대 해체 따위는, 조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불가능해진 거지.
“아...!”
“그렇군요.”
세자는 전부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얼추 개요는 머리에 그릴 수 있었는지 오뚝이마냥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아셨습니까. 세자 저하?”
“예?”
“국정에 관한 일은 이렇듯,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크게 보면 군사, 내치, 외교, 상업과 사업이 모두 하나로 섞여 있는 것이지요.”
“아!”
세자는 연오랑이 전에 말해줬던 동그라미가 기억나는 듯, 허공에 손으로 그림을 그리며 웃어댔다.
“예. 맞습니다. 모든 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거고, 하나라도 미흡하면?”
“문제가 생기죠!”
세자는 연오랑의 말을 받으며 정답을 맞췄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허나 관원 중 한명이, 조용히 반문을 던졌다.
“하오나... 목마장을 비롯한 가축농장을 늘리는 건 좋으나, 사료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좋은 지적이다.”
연오랑이 말박이의 나라를 꿈꿀 때. 가장 우려됐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초지와 농지는 공존할 수 없으니, 목장은 무조건 농사가 힘든 산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
원래 역사의 조선은 농사에 진심이라서, 어지간한 산중턱까지도 죄다 화전이나 계단식 밭을 만들어서 농사를 지었지.
한편으론 그럴 수밖에 없다.
인구는 미친 듯이 불어나는데 산업생태계는 농업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든 땅을 농지로 만들어 인구를 부양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묘했다.
지금 조선의 인구수는 대략 600만명.
조선중후기에 1200만명까지 늘어난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적은 수다.
이미 개간 된 땅만으로도 이 정도의 인구를 감당할 수 있었고, 반대로 그만큼 미개척된 숲과 산이 많이 남아 있다는 뜻.
착호군이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룩할 수 있던 건, 다 이유가 있던 거지.
“양전사업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양전사업이 진행된 지 벌써 7년째지만, 전라도와 경상도의 절반 밖에 진행하지 못했다.
까닭은 다른 게 아니라, 한 평의 땅조차 낭비하지 않고 어떻게든 최고의 토지효율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