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챕터31. 머무르다 (7)
게임마냥 한 번에 싹 밀어버리고, 이앙법을 할 수 있는 땅으로 딱 리셋 해버리면 얼마나 좋겠냐만... 현실에선 불가능하지 않나.
그런 식으로 한 번에 진행하면, 농담이 아니라 나라가 망한다.
착호군은 한두해 농사를 포기해도 조선이 버틸 수 있는 최대치의 영역을 정해놓고서, 하천과 강가에 둑을 쌓고 인근에 보와 저수지를 만들고, 수로를 연결해서 기존의 땅을 완전히 갈아엎고 네모반듯한 바둑판처럼 도로와 농지를 조성했다.
이 과정에서 민가를 밀어버리는 건 예삿일이고, 심지어는 마을 하나를 통째로 이주시켜 새로 조성하고, 멀쩡한 땅을 왕창 파내서 저수지로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흔했다.
조선의 땅개발을 골치 아프게 하던 무덤과 선산을 밀어버리는 것도 당연지사. 죄다 개장改葬해서 유골을 화장한 후에, 인근 사찰의 봉안당에 안치했다.
조선불교 공의회가 이쪽으로도 영향을 줬지.
이런 식으로 매년 야금야금 땅따먹기하듯 진행했으니, 양전사업이 진행된 곳과 진행되지 않은 곳은 천지차이.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전국토의 계획도시, 계획농지화 작업이었으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당연한 말이다.
여기에 연오랑은 수세기 후에 등장했어야할 선진농법과 농기구를 끌어왔다.
결국 똑같은 크기의 토지라고 해도, 생산량에 있어서는 몇 배나 차이가 날 수밖에.
“그리고 이젠 백성들의 식문화도 바뀌었지.”
“...”
더불어 곡물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고대로 갈수록 밥그릇이 커지는 건 유명한 이야기잖아?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의 영양소를 오롯이 곡물로만 흡수해야 했기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밥을 많이 먹을 수밖에 없던 것.
연오랑이 그저 맛있는 거 먹으려고 식문화를 개선하고, 온갖 것을 죄다 반찬으로 연구해서 널리 퍼트린 게 아니다.
육류, 가금류, 가금류 알, 야채나 산나물과 같은 상품작물, 그리고 해산물까지.
곡물로만 필수영양분을 섭취하던 식문화를 개선해서, 백성들이 소모하는 곡물의 절대량을 줄여서 농지와 초지의 균형을 맞추려 했던 것.
“아...”
“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학사들은 연오랑의 의도가 이해가 됐는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마구 끄덕여댔다.
당장 이들만 해도 한성에서 근무할 때, 매 끼니마다 수산기업에서 잡아올린 생선을 먹어댔으니까.
“설마... 자기기업에서 생산한 밥그릇의 크기가 전보다 작고 죄다 동일했던 것도... 그런 이유가 있는 겁니까?”
“맞아.”
학사 중 한명은 흡사 비밀을 알아낸 것 마냥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고, 연오랑은 정답을 맞힌 이에게 히죽 미소를 지어줬다.
“산간지역과 북방에서 시행되고 있는 4윤작법에 대해서도 들어봤지?”
“예.”
“알고 있습니다.”
유럽에선 지금쯤 삼포제에서 휴경지가 없는 4윤작법으로 전환해서 나름의 농업혁명을 이룩했을 거다.
순무, 보리, 클로버, 겨울밀을 번갈아 심어서 휴경지를 없앴는데, 구하기 힘든 클로버 대신 콩과식물로 대체.
연오랑은 진작부터 4윤작법을 끌어 적용시켰는데, 이앙법과 인분거름이 쓰이는 지금 조선에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앙법을 하기 힘든 산간지방의 밭농사에는 효과가 있었고, 이곳에도 인분거름을 뿌려 휴경지를 줄여서 효율을 극도로 끌어올렸지.
“이 또한 초지로 사용될 땅을 어떻게든 농지 비슷하게 활용하려고 했던 거지.”
“음...”
학사들은 물론이고 세자마저도 얼이 빠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이렇게 연결되는 건지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곡물 소모량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가축을 키우면 어찌됐건 곡물이 소모되니까.”
말과 소는 사람에 비해 무지하게 많이 먹지 않나. 다만 알갱이뿐만 아니라 줄기까지 다 먹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농사를 짓지 못하는 몽골과 여진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말과 가축을 키울 수 있던 걸까?”
“...!”
“억...!”
모두는 정곡을 찔린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들이 생각지 못한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봤기 때문.
이유야 간단했다. 그들은 그만큼 넓은 초지를 가지고 있고, 그들이 키우는 가축은 건초나 양초가 아니라 그냥 초지에서 자라는 생초를 먹었기 때문.
허면, 조선이 이걸 못 따라할 이유가 있을까?
“중국이나 전조, 조선의 방식이 무조건 옳고 좋은 건 아니지. 개화자강을 잊지 마라. 필요하다면 타국의 것이라도 거침없이 받아들여서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법.”
“...!”
“내가 쓸데없이 북원과 북직례의 양초, 생초와 종자씨, 식물들을 가져왔겠냐? 그치들이 먹이는 걸 우리도 먹여야 곡물 소모량을 줄일 수 있지.”
“아...!”
“그런....”
이들은 집현전 학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이렇게 깊숙한 내용까지는 모르고 있던 모양이다.
“의주와 호주의 농업연구소에서 종자개량을 하고 있는 건, 북방기후에 맞는 작물을 연구하는 것도 있지만, 초지에 쓰기 적합한 양초를 개량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예.”
“오...”
물론 영양분 적은 생초를 먹이는 건 아무래도 가축생장에 있어서 효율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농사를 짓기 힘든 땅에는 이런 생초라도 심어야 하지 않겠나.
문제는 이렇게 할 경우. 온 산이 죄다 초지로 변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
허나 말이 쉽지... 사람도 돌아다니기 힘든 험준한 산을 어떻게 초지로 만들겠는가. 어차피 밭으로도 쓰지 못할 땅을 초지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가 있었다.
이렇게 평소에는 그냥 값싸고 흔한 생초를 먹이고, 간식이나 별식 느낌으로 고영양분의 곡물알갱이 혹은 단백질인 고기를 직접 먹이면 가축생장에도 큰 지장이 없을 터... 초식동물이라고 해서 마냥 풀만 먹는 게 아니고, 영양분이 부족하면 고기나 곤충, 벌레를 집어먹기도 하니까.
이런 방법을 통해서 가축이 소모하는 사료양을 감소시킬 수 있는 거지.
또한 전마의 경우에도 이렇게 키우는 방법이 도움 됐다.
전쟁터에서 말먹이를 운반하는 건 엄청나게 힘든데, 녀석들이 생초에 익숙하면 그만큼 말먹이를 덜 보급해도 되니까.
이게 엄청난 기동력을 자랑했던 몽골군 방식이기도 하고.
“목마장도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가금류를 키우는 농장과 토끼, 사슴, 양, 염소목장이 겁이 날 정도로 무섭게 늘어난 이유 또한 같은 이치다.”
“아...”
“사료값이 싸게 먹히기 때문이군요!”
“그 녀석들은 잡풀을 먹어도 잘 크니까...!”
“그래.”
세자는 아직 이해가 잘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관원들 모두는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칠 정도로 깨달음을 얻은 모습이었다.
“또한 이를 통해 계획조림造林정책도 덩달아 진행할 수 있지.”
“아...!”
“그렇겠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도 나무가 중요한 걸 알고 있고, 정확한 원리는 모르더라도 산을 민둥산으로 만들면 홍수나 가뭄에 극심한 피해를 입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 시대는 민둥산은커녕, 산과 숲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해가 되는 상황.
초지를 만들면서 산과 숲을 재정비하고, 돈벌이가 되는 나무를 계획적으로 새로 심을 기회를 얻은 거지.
이에 조정보다도 더 열심히 앞장선 기업이 있으니 바로 제재기업이다.
태조는 산과 들, 바다를 공공재처럼 취급해서, 그곳에서 채취한 물산에 대해선 소유권을 인정해줬다.
당연한 말이지만, 조선중후기로 가면 이런 산이나 임,수산물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 송사가 빈번해지지.
허나 세종은 기업규제법과 토지제한법을 실시하면서, 전국토의 임야와 강, 해안의 소유권을 조정으로 돌려놓고 각 집안, 기업에게 분할하여 판매했다.
제재기업은 산 하나를 통째로 사서 자기 것으로 삼았고, 그곳 나무를 다 베어다가 팔았다고 한들, 쉽사리 나무가 울창한 옆 산을 구입할 수 있는 게 아니었지.
결국 집안사업인 제재기업이 망하지 않고 꾸준한 수익을 얻기 위해선, 나무를 베어낸 곳에 돈이 될법한 묘목을 새로 심어서 가꿔야 했으니... 조정이 의도한 조림사업을 알아서 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게 또 이렇게 연결되는 군요.”
이번엔 이해했는지, 세자는 입을 쩍 벌리고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저하. 말씀드렸지요? 모든 건 연결되어 있고, 단편만 보고서 정책을 진행하면 어딘가에서선 분명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지요. 이렇게 시야를 넓고 크게 보고서 정책을 진행해야 합니다.”
“옙!”
세자는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가적인 나날은 꾸준히 이어졌지만... 조선은 흡사 물 위에 뜬 오리마냥,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여도 수면 아래에선 열심히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분야는 역시나 수산업과 조선업.
조선의 모든 포구와 항구가 재정비 되는 동시에, 수도 없이 많은 선박이 제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두만강 건너 평주(훈춘)에 가서 여진인들의 환호와 칭송을 듬뿍 받고 돌아온 세자 일행은, 또 다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연오랑을 찾아 나섰다.
“대감이 어디 있다고요?”
“조산의 선소에 계신답니다.”
“가죠!”
“예.”
세자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일행은 곧장 말머리를 돌려 조산포구로 나아갔다.
조산은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포구로, 바로 옆에 경흥을 끼고 있는 곳이었다.
원래 역사에서 이순신장군이 잠깐 근무했던 녹둔도가 바로 여기에 붙어 있지.
미래에는 퇴적작용으로 인해 녹둔도가 육지에 붙어버렸지만, 지금은 여전히 섬으로 남아 있는 상태.
아무튼. 원래 역사에서 이곳은 여진과 조선의 국경지대로서, 항상 티격태격한 터라 제대로 발전하기 힘든 곳이지만...
지금 역사에선 연오랑이 진출하면서 엄청난 인적, 물적지원을 받아, 동해안 항구도시 중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거대한 항구로 변모했다.
경상도와 강원도의 물산은 뱃길을 타고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 북방으로 넘어갔고, 반대로 설주(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의 물산은 두만강을 타고 내려와 경상도와 강원도로 흘러갔다.
이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는 곳이 두만강 입구이자 출구라 할 수 있는 조산포구였으니, 그 번성함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녹둔도 마저도 개발되어, 북방에 어울리지 않게 죄다 밭으로 변해 있었지.
세자 일행이 왔는데 누가 감히 앞을 막을까.
관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들은 곧장 연오랑에게 안내됐다.
연오랑은 포구의 등대이자 망루처럼 보이는 곳에 머물며, 포구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와...”
“오...!”
모두는 작은 언덕에 오르기 무섭게 하나같이 감탄을 내뱉었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동해바다가 눈을 부시게 하고, 살짝 시선을 내리자 항구에 바글바글하게 몰려 있는 선박이 눈을 어지럽힌다.
수십척의 신형어선이 부둣가에 몰려 있었고, 반대쪽 부두엔 삼남에서 올라온 물산을 하역하는 수송선과 인부가 개미떼처럼 몰려 있었다.
다른 쪽 포구에선 어선을 아이처럼 만들어버릴 거대한 함선이 돛을 내리고 우두커니 있었는데, 크기가 커도 너무 커서 흡사 산이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오셨습니까. 저하.”
“옙! 저 사람들은 대체 다 어디서 온 거죠?”
세자는 연오랑이 인사를 하기 무섭게 옆에 가서 엉덩이를 붙이고 앉더니, 저 밑에 보이는 포구를 가리키며 목청을 높였다.
“어디서 왔겠습니까? 고민해 보시죠.”
“으음...”
분위기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강연을 하는 것 마냥 바뀌었다.
연오랑에게 보고를 하러 왔던 이들도, 세자를 따라다니는 학사들 모두 뒤에 시립하고선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여진인이겠죠?”
“여진인이 대다수지만, 함길도 출신도 적지 않지요. 허면 어디 출신이겠습니까?”
“으으... 아무래도 설주 출신이 많겠죠?”
“그렇습니다.”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세자에게 간단히 설명을 늘어놨다.
과거 연오랑이 조선군을 이끌고 해서여진을 박살내고 만주일대를 집어삼키는 동안, 동쪽으로 진출한 조선군 또한 연해주 일대를 집어삼켰다.
끝내 연오랑이 그렇게 찾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항구를 세웠고, 설주라 명명했지.
다른 점이라면 만주 일대에선 한바탕 대전쟁이 벌어졌지만, 이곳에선 산발적인 소규모 교전이 있었을 따름.
신료들, 장군들의 예측대로, 연해주 일대에 살던 야인여진들은 별 다른 큰 저항없이 조선에 굴복해 귀화해 왔다.
야인여진 중에서도 연해주 일대는 특히나 문명수준이 떨어지는데, 조선군에게 감히 상대나 될까.
화살이 제대로 통하지도 않는 검은두정갑을 입은 이들이, 거대한 전마를 타고 달려와 밟아대고,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굉음을 뿌려대는 화포를 쏴재끼는데... 무슨 수로 저항을 하겠어.
과장 조금 보태서. 화포한방 쏴대면 하늘이 무너진 줄 알고, 전의를 상실해 뿔뿔이 흩어질 정도였다.
이렇게 쭉쭉 밀어내고 나선. 경상,강원도의 이주민, 만주의 해서여진인, 호주의 건주 출신 여진인, 복속한 야인여진인을 긁어모아서 설주를 차지하고 앉아 항구를 건설했다.
이러는 와중에도 특전대로 구성된 무장행상은 북쪽을 들쑤시며 돌아다니기 시작.
공포와 경외심은 순식간에 전염되어 연해주 일대로 퍼져나갔고, 이내 곧 무수한 귀화세례로 이어졌다.
과거 발해 때에는 솔빈부, 미래에는 우수리스크라 불릴 지역에 살던 여진일파. 솔빈족이라 부르는 이들조차 살던 터전을 버리고 죄다 설주로 빨려 들어왔지.
이렇게 귀화인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지금껏 이들이 보지 못했던 거대 건축물이 하나둘씩 세워질수록,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고...
지금에 이르러선 조선의 영향력이 미래의 한카호수. 과거엔 발해 동평부. 미타호수라 불리는 지역까지 뻗어나간 상태였다.
“옛 발해 땅이라... 거기도 가보고 싶네요.”
“저하!”
세자가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리자, 학사들이 화들짝 놀라 세자를 찾았다.
설주는 경원처럼 안정화된 곳이 아닌 터라, 무려 1개 여단이 주둔하면서 야인여진을 복속시키는 중인데... 세자가 가긴 어딜 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