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챕터31. 머무르다 (9)
“그래서 아국에는 이런 이들이 필요한 겁니다.”
“...?”
세자는 무슨 뜻인지 몰라 눈동자에 물음표를 그렸고.
“다홍. 고준.”
“옙!” “넵!”
연오랑이 호명하기 무섭게, 두 사내가 냉큼 앞으로 나와 세자에게 깊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세자와 바로 마주하게 된 게 영광이라도 되는 모양인지, 잔뜩 긴장해선 자기도 모르게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으음...?”
조선옷을 입고 있긴 한데... 뭔가 생김새가 묘하게 다른 두 사람을 보며, 세자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월과 유구 출신입니다.”
“아!”
“공다홍이라 합니다. 세자 저하.”
“오보준이라 합니다. 세자 저하.”
연오랑의 소개가 있기 무섭게, 둘은 다시금 허리가 꺾여 머리가 땅에 닿았다.
“대월과 유구라고요?”
“예.”
“와아...!”
세자는 믿기지가 않아 되물으며,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조선내지에 많이 퍼진 중국,여진,몽골출신을 봤어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대월과 유구출신을 본 적이 있겠나.
귀화인임에도 조선말이 능숙해서 더욱 신기한 모습이다.
“이들이 아국의 백성이 된 게...?”
세자는 ‘근데 그거랑 이거랑 뭔 상관이냐?’라는 표정으로 말을 흐렸고, 연오랑은 속뜻을 읽고 냉큼 입을 열었다.
“대월과 유구인들의 항해술과 조선술이 아국보다 나은 점이 많기 때문이지요.”
“오호...?”
“크흠.”
“허험.”
세자는 몰랐던 이야기에 눈을 반짝였고, 몇몇 신료들은 마음이 상해 헛기침만 내뱉었다.
굳이 소중화 같은 걸 말하지 않아도, 중국이 없어졌으니 조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신료가 적지 않다.
헌데 연오랑은 한수 아래로 보던 나라를 치켜 올리고, 조선을 낮춰 보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현실은 현실.
연오랑은 괜히 씁쓸해 하는 이들을 매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잡학근본, 개화자강이라고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국보다 낫든 못 낫든. 분명 아국이 부족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받아들여서, 아국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세자는 다른 이들의 속도 모르고 냉큼 답을 했고, 자신들에게 하는 말인 걸 알아차린 노신들은 연오랑의 눈빛을 피해 땅만 바라봤다.
지금 역사에서의 대월은 원래 역사와 판이하게 달라졌다.
미래의 베트남. 지금은 대월이라 부르는 나라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것처럼, 진 왕조에서 호 왕조로 넘어가게 된다.
이에 영락제는 진 왕조의 후손을 내세워 대월을 침공하더니, 아예 명나라에 편입시키고 중국화하면서 악랄하게 수탈했지.
결국 독립운동이 일어나서, 명나라를 밀어내고 여 왕조가 등장하게 된다.
허나 지금 역사에선 영락제가 등장하기도 전에 명나라가 망해버렸으니, 여전히 호 왕조로 남아 있는 상태.
호 왕조는 중앙집권 및 조세개혁, 화폐개혁 등을 하면서 국력을 키워나갔는데, 아직도 끝나지 않아서 시끌시끌했다.
어떻게 보면 조선초기와 흡사한 상태라고 볼 수 있었지.
유구는 원래 역사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이 시기의 유구는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애당초 유구 자체가 하나로 통일된 상태도 아니었다.
남산, 중산, 북산의 세 왕조가 등장해 삼산시대가 시작됐고, 얼마 전에 중산은 북산을 무너뜨리고, 지금은 남산을 열심히 공격 중이지.
원래 역사에선 중산왕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게 되는데, 지금 역사에선 이미 명나라가 망한 상태.
유구에겐 중국왕조에게 책봉 받는 게 명분을 세우는 최고의 방법인데... 중국이 없으니 꿩 대신 닭이라고 조선으로 오게 됐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동아시아의 아버지 역할을 했고, 맏형은 언제나 한반도 왕조가 차지했다. 원-고려가 그러했고, 명-조선이 그러했지.
명이 망했으니 조선이 맏형 역할을 해야 하는데... 동아시아 전체가 운석핵꿀밤의 여파로 휘청거렸다. 자기 집 관리하기도 바쁜 처지.
더불어 조선은 괜히 중국을 대신하다가, 훗날 새로 생길 중국왕조가 시비 걸고 간섭할 걸 우려해서 맏형 역할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동아시아 국가들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며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방관하던 맏형이 대형 사고를 쳤다.
조선은 말 안 듣고 까불던 동생. 일본을 두들겨 패서 대마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후 아버지인 중국을 두들겨 패더니, 이젠 옆집 아저씨인 여진마저 패버리고 옆집을 차지했다.
여진정복의 소식을 들은 일본이 대마도를 포기하고 납작 머리를 숙인 순간부터, 대월, 유구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소국들은 앞다투어 조선으로 달려왔다.
드디어 맏형이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허나 조선은 여전히 조공책봉관계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저 제주의 무역관에 왜관과 유구관, 대월관 등을 추가하여 사무역을 받아주는 형태로 그쳤다.
“아... 그렇게 된 거군요.”
세자는 아직 이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서 경청했다.
“해금령 해체도 한몫했지요.”
“그건 들어봤습니다.”
세자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고,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부연설명을 이어갔다.
국제정세가 이렇게 흘러가는 동안, 명이 망한 후 해금령이 무용지물이 된 중국은 대무역시대를 맞이했다.
유구는 오래전부터 동남아시아-유구-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중국남부가 정식으로 추가 된 것.
대월 또한 마찬가지다.
그 전에는 조공무역에 그쳤어야 했지만, 이젠 강남상인 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직접무역 또한 전보다 확장됐지.
“이들은 전조 때부터 거칠고 넓은 남방대양南方大洋에서 배를 몰던 이들입니다. 아국보다 항해술과 조선술이 뛰어난 건,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음...”
“하긴...”
모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세자는 두 귀화인의 인사를 받으며 힐끔 뒤편을 더 살폈다.
생김새가 묘하게 다른 이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기 때문.
“저들도...?”
“섬라곡국(태국), 조와국(자바)출신입니다.”
“와아...”
조심스럽게 나와서 절을 하는 일행을 보며, 세자는 다시금 감탄하여 입을 쩍 벌렸다.
조선의 북방 끝자락에, 남방출신 외국인들이 이렇게 많이 몰려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모양이다.
“헌데, 어떻게 저들이 아국까지 올 수 있던 거죠?”
“남방대양은 해양무역의 전성기를 맞이했고, 그만큼 많은 상인과 선원이 중국남부에 머물고 있습니다. 의주의 중국상인들은 돈이면 뭐든지 구해다 주지 않습니까? 아국으로 귀화한 이들은 나름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지요.”
“음...”
더 듣지 않아도, 모두는 대충 이해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고향땅을 버리고 이 낯선 조선까지 와서 귀화할 정도면, 그 인생사가 얼마나 복잡했겠는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다만 이 일의 핵심을 찾아낸 학사 중 한명이, 자기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물음을 던졌다.
“대.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것입니까? 대감.”
“하하. 당연히 호주를 건설할 때부터지.”
“허헙!”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의문을 풀어줬고, 모두는 또 다시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렸다.
‘그래. 당연히 놀라야지. 내가 범선을 운용하겠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는 휘둥그레진 모두의 눈동자를 보며, 속으로 의기양양하게 웃어댔다.
연오랑은 하동에 있을 때부터 범선을 연구했고, 그 중간결과물이 신형어선이었다.
햇수로 따지면 거의 15년 전부터 연구를 해왔었지.
그가 출사한 후에는 조정의 힘을 등에 업고, 용연,원산,조산의 연구소와 선소에서 신형선박을 꾸준히 설계하고 제조해왔다.
헌데 문제는 선박이 아니라, 이 선박을 운용할 수 있는 항해술과 조종술.
특히나 노를 젓는 방식이 아닌 돛을 이용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하면서, 숙련된 항해사와 선원이 필요해졌다.
이에 조정의 힘을 빌려서, 고려 말에 서해를 넘나들며 배를 몰았던 노인 선원들을 긁어모았다. 그가 야금야금 모아온 항왜나 중국인 선원도 도움이 됐고.
허나 이거로는 부족했고, 연오랑은 냉큼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남아시아-중국남부-유구-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는 해가 갈수록 번창해갔고, 그에 맞춰 각국 출신의 선원들 또한 쑥쑥 늘어갔다.
운석핵꿀밤은 그나마 견고했던 조선마저 휘청거리게 만들어 반란이 터졌는데, 조선보다 중앙의 힘이 약한 동남아시아의 소국은 어떻겠는가.
온 사방에서 서로 왕이 되겠다고 난장판이 벌어지고, 그에 대항해 중앙집권을 이루겠다고 시끌시끌하게 내부정리에 들어갔다.
파워게임에서 밀려 쫓겨나거나, 전쟁을 피해 피난가거나, 더 큰 부를 찾아 떠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지.
단적인 예로. 유구인 오보준은 중산에게 망한 북산출신 유랑민이고, 대월인 공다홍은 호 왕조의 중앙집권화에 찍혀 박살나서 도피한 호족출신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을 통해 밀려난 이들은 바다를 건너 중국남부로 퍼져나갔고, 연오랑은 강남상인을 통해 이들을 긁어모았다.
강남상인들 입장에선 고향을 어지럽히는 거지떼들을 어차피 처리해야하는데, 이들을 돈 받고 조선에 넘길 수 있다고? 이보다 더 좋은 사업이 또 어디 있겠나.
유랑민, 피난민 입장에선 중국이나 조선이나 낯선 땅인 건 마찬가지인데, 조선으로 가면 노예가 되지 않고 먹고살 걱정을 안 해도 된다고? 당연히 조선으로 가는 게 낫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자. 강남상인들은 노예무역이 아니라 이주사무소 비슷한 역할을 자처해서, 항해술과 조선술을 가진 이들을 조선에 팔아넘기게 된 거지.
이들을 조선에 흡수하면서, 선박 개발은 날개를 달았다.
이 시기에 대월과 유구는 중국식 정크선과 다른, 서양식 카락과 비슷한 방식으로 배를 만들었는데, 그 기술을 조선이 개발 중인 선박제조기술과 결합.
고작 십여년 만에, 그럴 듯한 신형범선을 만들어낸 건 이유가 있었지.
“아... 그렇군요!”
“호주의 귀화교육당 소속 역관이 그렇게나 많이 늘어난 것도 이유가 있었군요.”
“맞아.”
‘어찌 보면 운이 좋은 건데... 그 운을 잡은 것도 실력 아니겠어? 오래전부터 의주에서 사무역을 진행한 게 밑바탕이 됐지. 호주에서 다양한 출신의 귀화인을 받아들인 것도 그렇고.’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진, 몽골, 중국인을 워낙 많이 흡수한 탓에, 조정신료들 뿐만 아니라 조선백성들마저도 외국인에게 익숙해지지 않았나.
과장을 조금 보태면, 양전사업을 진행한 모든 마을에는 귀화인들이 대여섯 가호씩 섞여 있을 정도다.
남방인이 추가된다고 한들, 바다에 소금 한바가지 털어 넣은 것 마냥 티도 안 났다.
“허면 그렇게 이주한 남방인들이 몇이나 됩니까?”
“글쎄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만 명은 가뿐히 넘을 걸? 요새도 계속 오고 있으니까, 이만 명 가까이 늘어났을지도 모르고.”
“와...!”
“흐응.”
누군가는 “많다!”는 생각에 감탄을, 누군가는 “생각보다 적은데?”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술을 가진 이들은 선박연구소로 흡수했지만, 유랑민 중에선 별다른 기술 없이 그냥 농사를 짓거나 다른 일에 종사하던 이들도 적지 않았지요.”
“그런 귀화인들은 어떻게 됐죠?”
“귀화교육을 끝난 여진인과 함께 섞여서 조선내지로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새롭게 조성한 철원평야나 김포평야로 가서 농사를 짓고 있지 않겠습니까?”
“오... 철원! 거기서 잠깐 머물면서 살펴봤죠.”
세자는 원산으로 오면서 새로 개간된 철원평야를 지나쳐서 그런지, 어쭙잖게 아는 척을 하며 자랑을 늘어놨다.
모두는 세자가 종알거리는 걸 귀엽게 바라보다가... “빨리 저 신형전함이 돌아다니는 걸 보고 싶네요.”라는 마무리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신형전함이 돌아다니는 건, 전쟁을 하겠다는 말과 똑같은데... 저게 세자가 할 소리인가.
하지만 세자의 바람은 생각보다 빠르게 이뤄지고 있었다.
*****
“합!”
“찔러!”
“반전! 다시 찔러!”
“마무리!”
우렁찬 함성소리가 연병장을 뒤흔들며 땅을 울렸다.
먼지구름이 절로 피어날 정도로 땅이 흔들리고, 저편 모래사장에서 피어오른 열기는 아지랑이로 변해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다.
만여명의 인원이 한자리에 모여, 죄다 웃통을 벗고 몸을 날리고 칼과 창을 들고 가상의 적을 후려치고 찔러대고 있는데, 그냥 보고만 있어도 왠지 모를 웅심이 피어오른다.
“호오...”
“음...”
포구에 붙어 있는 낮은 언덕에서 연병장을 살피던 두 사람.
최윤덕과 박홍신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흘리며, 연병장 맞은 편을 바라봤다.
조선의 발전을 상징하는 3층 신형관아가 차곡차곡 올라가고 있고, 그 옆에는 흡사 거대한 애벌레처럼 생긴 건물이 셀 수 없이 박혀 있었다.
궁궐의 전각보다 더 길고 큰 2층 건물은 그 칸이 10개를 넘고, 방만 30개를 넘어갈 정도로 길었는데, 그러한 건물이 20동 이상.
“정말 만들었군.”
“정말 만들었지요.”
둘은 다시금 뜻 모를 소리를 하며, 감탄을 흘리고 말았다.
저 거대한 숙소에 설치된 욕탕과 한증막만 40여개이니... 거의 만여명을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주둔지이자 도시가 만들어져 있었으니까.
‘군제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나라를 바꿔야 한다더니... 정말로 해내고 말았구나.’
최윤덕은 오래전 대마도에서 연오랑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 당시 녀석은 철없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내뱉었고, 최윤덕은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그게 되겠냐?’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허나 말도 안 되는 업적을 계속 갱신하더니, 기어코 꿈을 현실로 실현시켰다. 저 거대한 군숙소가 군제개혁의 첫걸음이자 핵심이니까.
바로 옆에서 따라가며 지켜본 최윤덕이지만, 그럼에도 놀람을 감출수가 없다.
‘장사를 한다더니... 나라를 사고파는 장사를 할 줄이야.’
박홍신 또한 연오랑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 당시 녀석은 장사를 하겠다고 하면서 왜인포로와 왜선을 받아갔다.
그는 그저 ‘의주의 사무역에 끼어들려는 건가? 그거 안 될 텐데?’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이게 웬 일. 연오랑이 그 밑천을 바탕으로 북방과 여진을 집어삼켜 버릴 줄이야.
거상도 이런 거상이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