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11화 (211/538)

211. 챕터32. 서쪽으로 (2)

백호장군 연오랑.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소문인지 모르겠지만, 연오랑의 별칭은 조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 다 퍼졌다.

민감하게 소문을 수집하던 일본은 물론이고, 남일 보듯 중국을 지켜보던 저 먼 동남아시아의 소국까지.

“혼자서 수백명을 죽였네”, “호랑이 수백마리를 잡았네.” “고함 한 번에 거용관이 무너졌네.” 등등 살이 덕지덕지 붙어 퍼져나갔지.

물론 진실을 아는 이들 또한 부지기수였고, 가장 가까이에 붙어 있는 산동상인들은 그 진실에 가장 접근한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두렵고 놀랍다.

수천년 동안 중국의 지붕 역할을 하며, 유목민족을 막아주던 방패를 부셔버린 장본인이니까.

세력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모르는 여진을 조선이 정복한 것보다, 거용관이 무너진 게 중국인들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다.

안 그래도 쪼개졌던 중화질서의 틈을, 더욱더 벌려버린 사건이었으니까.

그런 연오랑이 자신들의 터전인 산동으로 온다는 말에, 긴장을 안 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가 오는 게 좋은 건가, 안 좋은 건가.’

공표는 한편으론 안도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두려움이 밀려와, 안 그래도 주름진 얼굴이 더욱 찌그러졌다.

“대감. 이제 곧 산동입니다.”

“어. 저기 보이네.”

연오랑은 심드렁하게 답을 했고, 항해사는 재깍 고개를 숙이고선 자리를 비켜줬다.

‘흐음...’

저 멀리 보이는 육지를 가리는 돛을 피해,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을 살폈다.

범선의 선수루엔 기병창마냥 뾰족한 기둥이 뻗어 있었고, 기둥에 나무덩굴처럼 엮인 삼각돛과 밧줄은 바람을 받아 시끄럽게 펄럭였다.

‘생각보다 잘 나왔어. 이 정도면 유럽에서 만들고 있을 카락보다 나을 거 같은데?’

연오랑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선원들과 거목처럼 솟아 있는 중앙돛대, 저 선미에 솟아 있는 함교를 번갈아보며 자화자찬을 늘어놨다.

그의 말대로, 조선이 만든 범선은 카락보다는 갤리온에 더 가까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거의 동시대에 사용되던 물건이지만, 아무래도 개량형인 갤리온이 선형이나 무게중심 등이 더 나은 편이었지.

원래 역사와 다른 점이라면 크기가 훨씬 작다는 점.

‘아닌가? 이 정도면 대충 300톤 정도 되지 않나?’

이 시대에 정확한 배수량을 측정할 수가 없어서 확신은 못하겠는데, 대충 그 정도 될 거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300톤이면 엄청 큰 거 아닌가...?’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며, 지금껏 굴려왔던 배들을 떠올려봤다.

원래 역사에서 세조 대에 경국대전을 통해 소,중,대맹선이라는 정식 명칭이 붙지만, 이 시기에도 중선, 대선이라는 명칭과 함께 전선을 뜻하는 맹선이라는 명칭도 함께 쓰였다.

크기는 당연히 대선, 대맹선이 가장 크지만, 가장 큰 배는 초마선哨馬船이라 불리는 조운선.

초마선은 1000석을 싣고 움직일 수 있는데, 미래의 배수량으로 바꿔보면 대략 100~150톤 사이였다.

그 후에 만들어진 판옥선의 경우, 대맹선보다 배는 컸으니 배수량 또한 100~300톤 사이로 만들어졌지.

결론은 신형전함이 초마선보다 2배 넘게 크다는 뜻이니, 조선은 물론이고 중국에도 이와 비슷한 크기의 선박을 찾는 건 쉽지 않을 거다.

‘그러니 지금까지 고작 20척 밖에 못 만들었지.’

연오랑은 지난날의 고단함이 절로 떠올라서, 절로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20척이 많은 것 같아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아니다.

1척은 임무활동, 1척은 임무구역으로 이동, 1척은 수리 및 예비로 남겨둬서, 3척을 한 세트로 묶어서 운용하는 게 보통이니까.

20척이라고 해도, 사실상 7~8척만 돌아다닐 수 있다.

‘미래를 생각하면 한참 부족하단 말이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설주에서 마구 베어서 옮겨온 목재가 말라가고 있다는 점.

올해만 지나면, 선소에서 쉬지 않고 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만삭을 닮아 크게 부푼 돛은 배를 항구로 이끌었다.

멀리 보이던 육지는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왔고, 포구라고 하기에는 뭔가 정돈되지 않은 해안가와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기가 청도란 말이지.”

연오랑은 미래에는 맥주로 유명해질 청도를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히죽 입가가 들렸다.

훗날에는 청도가 훨씬 유명해지지만 지금은 그저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고, 지금은 바로 맞은편에 있는 즉묵포구가 번영을 누리고 있는 상황.

‘일이 잘 풀린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저 멀리 청도포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이들과 같은 심정인 걸까? 연오랑은 과거를 더듬으며,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조선이 자주화의 길을 걸어온 지 벌써 20년을 훌쩍 넘었다.

중국왕조에 짓눌려 있던 기억은 흐릿해졌고, 반대로 지금의 성세가 꾸준히 지속되길 바랐다.

허면 어떻게 해야할까.

중국의 정세를 면밀히 감시하며, 신왕조가 탄생할 기미를 파악하고, 능력이 된다면 신왕조가 탄생하는 걸 막는 게 최선이었다.

그 은밀한 감시망에 딱 걸린 게 바로 산동이었지.

‘어쩌면 나 때문일 수도 있고.’

조선이 성장하면 할수록,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곳이 바로 산동이니까.

이렇듯 이미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문제가 된 건, 그와 조정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산동의 균형이 깨지려 한다는 점이다.

병권을 가진 공청 파벌의 힘이 너무 세져서 산동을 일통하면, 분명 다른 지방에도 영향을 줄 거다.

중국은 지금처럼 계속 분열되어 있어야지, 어느 한곳에서 불꽃이 터져서 통일전쟁으로 번지면 절대 안 된다.

조선에겐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니까.

조선의 경제력이 성장해서, 적어도 중국의 2,3개성과 인구와 물산이 엇비슷해야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

‘조선 내부의 문제도 있지. 상인기업이 너무 빨리 불어났어.’

연오랑은 뱃전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생각을 이어갔다.

조정에서 상인기업을 인정하기 무섭게, 조선팔도가 들썩일 정도로 상인기업이 불어났다.

특히나 양전사업이 아직 진행되지 않은 지방에서 두드러졌다.

이미 수차례 증명됐지만, 양전사업은 지주집안의 모든 재산을 들춰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황무지, 습지, 산야와 해안까지. 양전사업은 조선의 모든 땅을 격자무늬로 쪼개서, 소유권을 파악하고 알맞은 용처를 만들어갔다.

지주집안이 숨겨둔 은전, 명의를 복잡하게 해서 세금을 내지 않던 전답. 든든한 자금줄이 되던 고리대금업 등.

제도권에서 벗어나 있던 은닉재산은 무조건 들킬 수밖에 없고, 걸리면 벌금이라는 명목으로 가문이 반토막 나거나 심하면 적몰되는 경우도 있었다.

목덜미를 조여 오는 마수는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시대의 흐름에 버티던 고지식한 지주집안들은 다른 기업으로 변모할 시간이 부족했다.

어쩌겠는가. 최대한 빠르게 어떻게든 은닉재산을 처분하려면, 상인기업을 설립하는 게 재격이었지.

여기서 물건을 사와서 저기에 파는 형태의 장사는 큰 기술이나 시간투자 없이, 사람과 자본만 있으면 바로 진행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이렇게 꼼수로 만들어진 상인기업 말고, 진짜로 유통과 무역을 하려는 기업도 많았다.

조선조정이 지금의 물동량을 감당 못하고 허덕이는 건, 물산을 생산하는 기업 대부분이 느끼고 있었다.

조정이 다 삼키지 못하고 뱉어내거나 흘리는 거래만 잡아채도, 큰 어려움 없이 상인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지.

이런 이유 때문에 걷잡을 수 없이 상인기업은 늘어갔고, 이는 곧 조정의 정책에도 영향을 줬다.

이젠 외부에서 오는 상인만 받아먹는 걸 넘어서, 조선이 직접 외국으로 나가 무역하는 예행연습을 할 때가 된 거다.

‘그런데 예조와 사역원 관원들이, 일을 이렇게 잘할 줄 몰랐단 말이지.’

연오랑은 조선 사신을 보고 깜짝 놀랐을 산동상인들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런 내,외부적인 사정 때문에, 조선은 의주의 예를 본받아 산동에 조선관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이나 중국이나 민간 상선이 자국의 모든 항구에 드나드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니, 외국상선이 머물 항구를 지정해서 통제하는 건 상식이자 일반적인 행태였다.

헌데 운석핵꿀밤 이후. 조선은 외국에 공식사신을 보낸 적이 없지 않나.

사역원은 잠정휴업해서 존폐 위기에 놓여 있었는데, 반대로 민간 역관과 무역전문가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조정관리가 해야 할 업무마저 민간이 잠식할 우려가 있었고, 사역원과 역관들은 이번 기회를 통해 자신의 밥그릇을 챙기고 능력을 뽐내기로 마음먹었지.

이들이 사활을 걸고 달려든 탓일까? 아니면 산동상인 파벌이 백척간두에 서서 위협당하고 있던 탓일까.

밀고 당기는 긴 줄다리기 없이, 산동은 기존 항구에 조선관을 만드는 걸 넘어서서... 제대로 이용되지 않던 촌구석 포구를, 아예 10년간 조선에게 조차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관세를 걷지 못하지만, 한정된 조선의 물량을 당겨오는 게 궁극적으론 이득이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낙점된 곳이 바로 한적한 어촌인 청도.

산동상인 파벌의 근거지는 요동과 가까운 산동반도 북부지역에 몰려 있었고, 청도는 산동반도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중요도가 낮았다.

헌데 조선 입장에선 사정이 반대다.

조선의 용연이나 평택에서 출발한 상선은 산동반도 북부로 가는 것보다, 산동반도 남부로 가는 게 훨씬 가까웠지.

여러모로 서로의 입맛에 딱 걸맞은 입지를 갖춘 곳이었다.

문제는... 산동상인 파벌이 조선을 환영한다고 한들, 공청 파벌이 반대하면 말짱 도루묵 아닌가.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조선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던졌다.

산동은 물론이고 중국 모든 곳에서 원하는 상품. 바로 전마를 꺼내든 것.

인삼 및 특산물은 산동상인에게 넘기고, 병권을 쥐고 있는 공청 파벌에겐 전마를 팔기로 결정한 거지.

‘과연 이게 독이 든 사과인 걸, 알까 모를까?’

연오랑은 방파제처럼 포구를 막고 있는 섬을 지나서, 공사판으로 변한 청도포구를 보며 히죽 웃었다.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절로 기대가 됐다.

*****

“옮겨!”

“이쪽이다.”

“거기 말고 여기! 당기라고!”

개미떼처럼 해안가 인근에 달라붙어 있는 인부들. 그들은 낯설면서도 어설픈 한어를 들으며 바쁘게 손을 놀렸다.

신발도 없고, 옷은 다 헤지고, 모자도 없어 뙤약볕을 그대로 받고 있지만, 하나같이 멈추지 않고 손과 발을 놀려댔다.

조선은 꽤나 후한 고용주였고, 이 일자리마저도 놓치면 앞길이 막막해지니까.

천만다행인 점은, 반쯤 거지인 막일꾼을 전부 수용할 정도로 일거리가 많다는 점이다.

청도는 애초에 별 볼일 없던 촌구석 어촌 아닌가.

이곳에 신형전함이 접안할 수 있는 거대한 부두를 만들고, 물산을 보관할 창고와 중국상인과 조선상인이 거래할 상관을 건설하고, 포구 외곽에는 임시로 말을 풀어놓을 목마장을 만들어야했다.

조선내지 만큼이나 정신없는 공사판이 펼쳐진 거지.

새의 날갯짓마냥 요란하게 펄럭거리는 천막 아래에 서서, 공사현장을 지켜보던 연오랑은 15연대장 진강의 보고를 받았다.

“자재는 바로바로 들어 오냐?”

“물론입니다. 상관이 빨리 만들어지는 건, 저희가 아니라 저들이 더 바라고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아직 상관이 만들어지지도 않아서 맨땅에 좌판을 깔고 물건을 풀었는데, 그래도 좋다고 산동상인들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순식간에 다 털어갔다.

다른 특산품들도 돈이 많이 되지만, 인삼과 녹용을 가져왔으니 다들 눈이 뒤집혔지.

그 약발이 아직도 먹혀들어갔는지, 산동전역에서 긁어모은 건축자재가 공사판 저편에 수북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인부들은 어때? 말은 잘 듣냐?”

“자잘한 문제가 있지만 저들끼리의 문제일 뿐, 저희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었습니다.”

“경계 서는 병사들에게 시비 거는 이들도 없고?”

“이치들이 그럴 깜냥이나 있겠습니까. 산동이 북평부와 맞대고 있다고는 하나, 그 허술함은 제가 더 잘 압니다. 저희와 비교하면 민망할 정도지요.”

진강은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라고 묻듯, 히죽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산동인들이 이렇게 통일된 기병대를 언제 봤겠는가.

낯선 검은두정갑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맹수로 만든 모피갑옷을 입은 이들이 북적거린다.

생전 처음 보는 기괴함과 야성에, 겁을 안 먹는 게 더 이상하다. 별말 안하고 그냥 매서운 눈빛을 뿌리기만 해도, 손과 발을 빛살처럼 움직였다.

“넌 어떠냐?”

“예?”

진강은 무슨 말인지 몰라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고, 연오랑은 피식 웃으며 친절하게 되물었다.

“산동에 다시 오게 됐는데, 기분이 어떠냐고.”

“뭐... 오래 되서 그런지 특별한 감흥도 없습니다. 절 알아보는 사람도 없더군요.”

“그건 다행이군.”

“예...”

진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지난날 북평부 기병장군으로 활동하면서 산동군병과 싸우지 않았나.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이들이 많이 필요해서, 귀화한 요동인 및 중국인 출신들을 대거 데려올 수밖에 없었고 그 지휘관은 중국 출신인 진강이 맡는 게 효과적이었다.

다만 혹시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나 싶어서 물어봤는데, 천만다행이도 별 탈 없는 모양이다.

‘하긴 오래되긴 했지.’

그와 그의 부하들이 귀화한지 벌써 5년이 넘었고, 중국물이 쫙 빠져서 말투나 옷도 죄다 조선화됐으니... 먼저 말하지 않으면 알아보기도 힘들지 않을까.

“그런데 어디서 저런 거지떼들이 몰려온 거냐? 아무리 봐도 인부라기보다 죄다 빈민 같은데?”

“다 마찬가지 상황 아니겠습니까. 산동은 무역에 치중해서 사정이 조금 낫지만, 하남만 가도 난장판이라고 하더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