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챕터32. 서쪽으로 (3)
“음...”
진강은 조선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몸으로 느껴서 그런 걸까?
모멸과 멸시가 담겨 있는 말투를 숨기지 않았다. 그가 북평부 출신이라서 더욱 심하게 느껴져서 일지도 모르고.
명이 망한 후로. 행정, 사법, 군사로 나눠진 지방권력의 행방은 호족과 상인의 손으로 들어갔다.
명나라 때 임명한 관리는 시간이 흘러 다 죽거나 지방호족으로 변모한 상황이고, 과거를 치러서 관리를 뽑을 수도 없으니 어떻게 되겠나.
중앙조정에서 내려 보낸 공권력이 흐릿해지자, 암묵적으로 지방을 주무르던 지방호족들이 껍질을 찢고 날개를 폈다.
새롭게 치고 올라오거나, 원래 있던 기존 파벌끼리 한자리씩 해먹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변해갔고, 20여년이 지난 지금에는 이런 행태가 고착화 되는 중이지.
문제라면 역시나 지주들.
홍무제가 아무리 때려잡았어도 중국에는 사족, 호족이 넘쳐났다.
목줄을 잡고 있던 중앙조정이 없어지자, 고삐가 풀린 지주호족은 대토지겸병을 시작했다.
방식이야 뭐, 원래 역사의 조선과 크게 다를 게 있을까.
소작인 착취하고, 고리대금을 이용해서 땅을 빼앗고, 빚을 못 갚으면 인신매매를 일삼고... 뭐 그런 거지.
이걸 단속하고 경계할 관원들도 결국 호족, 상인집안 사람이니, 사정이 나아질 수 있나.
이렇게 땅을 잃어버린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 도시로 흘러들어왔고, 이들이 향한 곳은 그나마 기회가 있는 해안가 도시들.
이곳은 땅이 아닌 돈이 지배하고, 해상무역을 통해 유지되는 곳이니, 그만큼 일거리도 많았다.
적어도 항구노동자가 되어 날품을 팔면, 하루 일당 정도는 어떻게든 벌 수 있었지. 구걸을 해도 부자동네에 가서 구걸을 해야 하는 법이니까.
산동에도 이런 유민 아닌 유민이 바글바글했고, 청도포구를 새롭게 건설한다는 소문이 흐르기 무섭게 산동포구에서 날품 팔던 이들이 몰려들었다.
“음... 그렇고만.”
사정을 들은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그런데 희한하게 민란은 또 크게 안 난단 말이지?”
“한편으론 안정되어 있으니까요.”
북직례에 있을 때 익히 겪어봐서 일까? 진강은 다시금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명나라는 체제의 수명이 다해 망한 게 아니라, 멀쩡한 나라가 한순간에 머리가 날아간 거다.
홍무제는 상인을 억제하고 강력한 구속력을 가진 농업중심의 향촌사회를 추구한 탓에, 호족을 억제했음에도 또 다른 작은 호족을 양산한 꼴이 됐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지들끼리 얽히고설켜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복잡해졌고... 반대로 말하면 서로 눈치와 사정을 봐야했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백성들 입장에선 중앙조정으로 올라가는 세금이 없는 탓에, 호족들이 부를 축적한들 예전과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고,
호족들은 그야말로 작은 왕처럼 군림하니, 옆동네 호족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눈치를 은근히 봐야 했다.
땅을 빼앗고 거둬드릴지언정, 막무가내로 죽을 때까지 쥐어짜는 착취는 하지 않았지.
더불어 지배방식 또한 천차만별이라서, 온 사방에서 동시에 “더 이상은 못살겠다. 뒤집어엎자!”라는 반란은 터지지 않았고, 자잘한 반란은 사방에서 몰려온 호족사병에 의해 진압 당했다.
이걸 그냥 놔두면, 자기 집까지 죄다 불태워버릴 테니까.
지금의 중국 꼬락서니를 보면 뭐랄까... 멀쩡히 살아 있던 팔다리에, 작은 머리들이 솟아난 꼴이랄까?
‘어째 중앙집권에서 유사 봉건제, 자유도시 형태로 바뀐 모양새란 말이지. 앞으로 중국이 어떻게 될지 전혀 감을 못 잡겠어.’
연오랑은 그리 생각하며, 답답해서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고 말았다.
‘다만 이런 상황이 조선에 나쁠 건 없는데... 공청 이자식이 문제란 말이지.’
입 안에 공청을 넣고 혀로 굴리며, 이자를 어떻게 씹어 먹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조선에게 이로운, 이 애매한 상황을 깨부수려고 하는 인물이 공청이니까.
“공청... 너 혹시 본 적 있냐? 특별히 더 아는 것 있어?”
“저도 만나보지 못해서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자도 이제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인 아니겠습니까?”
진강이 북평부에 있을 때엔 천호장에 불과했으니, 공청을 직접 만나볼 일이 있었겠나.
다만 공청이 산동에 눌러 앉은 지 벌써 20여년이 흘렀으니, 야전군인이 아니라 정치꾼이 다 됐을 거다.
“그 노인네가 죽기 직전에, 꼬장을 부리려는 것 같아서 문제지.”
“...”
연오랑은 공청을 씹어 먹듯,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불만을 토해냈다.
“뭐... 그 노인네야 그렇다 치고, 연대병은 얼마나 넘어왔지?”
“15연대만 도착했고, 11연대가 오는 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음...”
‘생각보다 빠른 것 같기도 하기도 하고, 느린 것 같기도 하고...’
기존 중국상선인 정크선보다 몇배는 무거운 신형전함이지만, 그만큼 더 많은 돛이 달려있어서 오히려 속도는 더 빨랐다.
상선은 짐을 많이 싣기 위해서 배를 빵빵하게 불린 것 마냥 폭이 넓었고, 전함은 속도를 살리기 위해서 폭을 줄이고 길이를 늘린 매끈한 선형구조를 가지고 있으니까.
카락과 갤리온의 차이가 바로 이 차이고.
아무튼. 팽택에서 청도로 오는데 대략 4,5일 밖에 걸리지 않으니, 중국상선 보다 빨리 도착하는 편이긴 한데... 전함이다보니 크기가 몇배는 커졌어도 수송량까지 몇배로 늘어난 건 아니었다.
게다가 군마는 더럽게 커서, 아무리 큰 배라고 해도 얼마 들어가지도 않았고.
“그래도 중국상선과 비슷하게 싣고 더 빨리 올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신형수송선까지 가져와야 하나.”
“그럴 여유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잔잔한 서해라지만, 그 큰 배가 건너오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음...”
신형수송선은 판옥선을 개조해서 만든 만큼, 대양항해가 가능하다고 해도 평저선의 한계를 극복할 순 없다.
수면 위로 파닥거리는 잔잔한 파도라고 해도, 바닷물은 결국 하나로 된 거대한 흐름이다.
수면 아래에선 엄청난 밀도와 무게를 가진 바닷물이, 파도의 끝자락을 잡고 출렁이고 있다.
바닥이 평평한 배는 파도와 파도 사이에 잘 못 껴버리게 되면, 양쪽에서 올려치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뽀각. 쪼개지는 거지.
옆에서 봤을 때 범선과 신형전함의 밑바닥이, 괜히 유선형, 타원형 모양을 한 게 아니다.
배가 작으면 그나마 낫지만. 크면 클수록 파도 사이에 낄 확률이 더 높아지니, 신형수송선을 끌고 오는 건 무리가 있다.
‘게다가... 원정을 하겠다고, 조선에 영향을 주면 안 되잖아?’
빨리 옮기겠다고 배를 다 동원하면, 정작 조선의 물류이동이 저하될 거다.
“더군다나...”
‘저희 전력을 다 보여줄 순 없지 않겠습니까.’
진강은 말끝을 흐리며, 눈빛으로 뒷말을 이어 붙였다.
연오랑은 용케도 속내를 읽고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직 건물 한 채도 제대로 못 올렸는데, 굳이 급할 필요는 없지. 느긋하게 하는 게 더 낫겠네. 지금도 열심히 배를 만들고 있으니까.”
“예.”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저편에서 인부들을 요리조리 피하는 묘기를 부리며 기병이 달려왔다.
“충성!”
“뭐냐.”
“공가와 이가, 유가의 상인들이 찾아왔습니다.”
“또 왔냐?”
심드렁한 연오랑의 반응에, 기병은 힐끔 진강의 눈치를 보고선 조심스럽게 말을 흐렸다.
“... 예.”
“어디 있냐?”
“임시 관아에 있습니다.”
“알았다. 가봐.”
“충성!”
이 자리가 꽤나 곤욕스러웠는지, 기병은 흡사 지옥구덩이에서 빠져나온 것 마냥 목청 높여 답하고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관리하고 있어라.”
“옙!”
진강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연오랑은 코트를 닮은 가죽 겉옷을 휘적휘적 휘날리며 걸음을 옮겼다.
일전에 있던 어촌마을은 싹 쓸려 없어졌고, 집은 건축자재가 되어 사라졌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마른 땅에 사람들이 달라붙어 짐을 옮기고 있었고, 연대병들의 지휘와 명령 하에 설탕을 문 개미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다들 집 짓는 건 이골이 났네.’
착호군 출신인 걸 티내기라도 하듯, 만주에서 집 짓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대로로 삼기 위해 비워둔 흙땅을 걸으며, 포구에서 이어지는 공사터를 지나치자, 저편에서 막사와 좌판을 깔아놓고 장사하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두정갑과 모피갑옷을 입은 이들이 심심치 않게 돌아다니는 건 물론, 연대병은 조선상인 옆에 딱 붙어서 물건 파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괴이한 모습도 이제 익숙해진 건지, 짐꾼들을 데려온 산동상인들은 연대병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며 연신 흥정을 이어갔다.
그런 이들을 쓱 훑고 지나가자, 연오랑과 마주친 이들이 하나같이 넙죽넙죽 고개를 숙여댔다.
조선상인들 뿐만 아니라, 산동상인들조차도 허둥지둥 따라했다.
‘저치들은 별 문제가 없을 것 같고...’
연오랑은 산동상인이 아닌 조선상인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선조정은 여전히 상인기업이 대외무역을 하는 걸, 우려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정이 급해졌으니 어쩌겠나.
어차피 마주할 미래라면, 예방주사를 맞듯 조금씩 시도해봐야지.
저들은 조선에서 심사를 거쳐 허가장을 받고, 관세도 미리 내고, 민간상선이 아닌 신형전함을 타고 온 이들.
돈냄새는 물론이고 눈치도 빠른 이들이니, 조정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귀찮게 일을 진행하는지 알아차렸을 터... 돈을 조금 더 벌겠다고, 꼼수를 쓰는 위험을 감수하진 않을 거다.
계속 걸음을 옮기자, 대로 저편에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여긴 중국 땅이건만, 어째 눈에 익숙한 형상으로 골조가 올라가고 있다.
“대감! 관아를 보러 오셨습니까?”
“아니. 산동상인들이 왔다고 해서.”
인부를 지휘하던 대대장 중 한명이 냉큼 달려와 말을 건넸고, 연오랑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3층으로 올리는 건 어때? 가능하겠냐?”
“예. 목조건물이지만 산동은 조선만큼 기후가 혹독하지 않아서, 올려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상인들이 붙여준 목수들의 실력이 나쁘지 않더군요.”
중국도 목조건물이 발달해 있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난방을 걱정하지 않아도 돼서, 3층이 넘는 고층누각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산동도 강남지방만큼은 아니어도, 고층누각을 지을 수 있는 여건과 기술은 가지고 있었지.
“잘됐네. 돈을 따로 먹여서라도, 기술은 뽑아 먹어라.”
“흐흐. 안 그래도 조선장인들이 옆에 붙어서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대대장도 이심전심인걸까? 저편에서 설계도면을 놓고 머리를 맞대고 있는 이들을 가리켰다.
옷차림만으로도 구별이 가능했는데, 조선장인들은 역관이 통역한 설명을 누런 종이 위에 연필로 받아 적고 있었다.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민간에 퍼진지 벌써 2년 가까이 지난 터라, 다들 능숙하게 써먹고 있는 모양이다.
종이와 연필은 만들어진지 얼마 안 돼서 군부에서만 쓰고 있었는데, 이곳에선 특별히 빌려줬지.
“상인들은?”
“매번 오던 곳에 있습니다.”
“오냐. 일해라. 혼자 가마.”
“충성!”
매번 오던 곳이라고 해봐야 별 것 없었다.
제대로 벽면을 올리지도 못한 건물과 천막. 그 중간쯤에 위치한 건물이랄까.
지붕은 올렸는데 옆면은 바람에 따라 펄럭이는 장막에 가려 있어서, 꼭 꼬리를 흔드는 것 같아서 괜히 웃기게 보였다.
칼에 맞아 찢어진 상처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장막을 젖히고 들어가자, 안에 앉아 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대인!”
“오셨습니까. 대인.”
청년으로 보이는 이들은 연오랑의 덩치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누가 볼세라 얼른 시선을 돌렸다.
몇 번 봤음에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한 모양이다.
“...”
연오랑이 말없이 걸음을 옮겨 의자에 앉는 동안에도, 모두는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땅에 닿을 정도로 극공의 예를 다했다.
사신단, 상단, 조선군의 총책임자인 걸 넘어서, 연오랑은 조선상왕의 부마다.
중국의 황족과 왕족이 없어진지 오래인데, 조선 왕족을 대하는 예법을 이들이 알 리가 있나. 처음에는 맨바닥에서 절하고 난리도 아니었고, 지금은 그나마 나아진 거지.
“앉아라.”
“예.”
황급히 고개를 든 이들은, ‘마주보고 앉아도 되나 말아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묵언의 눈빛을 받고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였다.
“거래는 문제없을 텐데 무슨 일이냐?”
살짝 어색한 발음이지만 알아듣는 건 문제없었고, 서로 눈빛을 빠르게 교환하더니 이가의 후계자가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조선식 관아와 건물을 짓는 것에 대해, 말이 나왔습니다.”
“공청 파벌에서?”
“예...”
연오랑의 살짝 날선 발언에, 다들 다시금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리 조차를 받았다지만 고작해야 10년이고, 여긴 엄연히 중국땅이다.
오래전 왜관의 경우에는 조선이 그냥 왜인들 몰아넣고 “너희들끼리 알아서 살아라.”라고 열어둔 곳이라서, 일본식 건물을 짓든 말든 신경도 안 썼다.
물론 지금은 다 없어졌지.
허나 중국상인이 오가는 의주와 새롭게 만든 제주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그곳은 조선식 건물과, 조선인 인부들, 조선 관리의 통제와 조선법이 철저히 적용되는 곳이었다.
외국상인이 땅을 구입하거나 건물을 세울 수도 없고, 말 그대로 숙박과 거래를 위해서 잠깐 머물거나 빌리는 형태였지.
당연히 청도포구 역시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청도를 꼭 조선땅으로 보이게끔 만들고 있지 않나.
불평등한 거래이니, 말이 안 나오면 더 이상한데...
“그건 너희가 처리할 일 아닌가? 조선식 건물을 세우지 않는다면, 대체 무슨 명분으로 조선인을 데려올 수 있지? 그것도 수천명씩 말이야.”
“끄응...”
“크흠.”
연오랑의 말에, 다들 할 말이 없어서 끙끙 앓기만 했다.